['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된다'는 환상]
[대통령이 "추가 탕감" 말하면 누가 빚 갚겠나]
'가난해도 노력만 하면 된다'는 환상
형편이 어려운 가정에서 자란 아이가 생활의 무게를 이겨내며 공부 끝에 고시에 합격하거나 대기업에 입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사람들은 환호한다. "봐, 노력하면 되잖아." 그러나 박수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이런 사례는 예외적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강지나 교사가 쓴 '가난한 아이들은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는 "결국 아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되더라"는 단순한 사실을 조용히 전한다. 학교를 자퇴했든, 양육자 보호 없이 컸든, 보호 시설을 드나들었든. 시간은 흐르고 이들은 결국 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이 된다. 중요한 건, 그들이 어떻게 그 자리에 이르렀는가이다. 학교와 어른들을 포함한 공동체가 함께 걸으며 응원했는가. 아니면 멀찍이 서서 눈길도 주지 않다가 기적이 벌어질 때만 돌아본 건 아닌가.
책 속 한 사례. 지현(가명)이라는 청소년이 있었다. 어머니는 정신과 질환을 앓았고, 아버지는 술에 의존해 폭력을 일삼았다. 가족 생계는 공공복지에 기댔고, 학습은 지역 아동 센터에 의지했다. 노력 끝에 결국 대학에 입학했고, 장학금으로 4년을 버티며 학업을 마쳤다. 치열한 경쟁을 뚫고 공립학교 교사가 되었고, 배우자도 만났다. 그는 학창 시절, 장학금 신청을 위해 자주 자신의 삶을 글로 풀어내야 했고, 덕분에 글쓰기 능력이 크게 늘었다고 회상했다. "왜 이렇게 글을 잘 쓰냐는 얘기를 듣고, 그 과목에서 A를 받았어요(웃음)." 이런 마음가짐은 외적 조건을 바꾸지는 못했지만, 내면을 떠받치는 힘이 됐다.
불우한 환경 속에서 계층 상승을 이뤄낸 사람들의 이야기는 흔치 않은 희망 서사다. 소위 '개천에서 난 용' 이야기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용'을 보며 흐뭇해하는 동안, 현실의 개천에선 여전히 수많은 아이가 주목받지 못한 채 흘러내려 간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빈곤이 구조화되는 징후가 뚜렷하다. 부모 수입이 높을수록 자녀 대학 진학률이 상승한다(한국직업능력연구원). 일반대 기준으로 약 1.7배 차이가 나며, 명문대 입학률의 75%는 부모의 자산 수준으로 설명된다(한국은행). '흙수저'로 태어난 이들이 자녀에게 '금수저'를 물려줄 가능성은 갈수록 희박해지고 있다. 한국은행 보고서에는 '잃어버린 천재(Lost-Einsteins)'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불우한 환경 때문에 잠재력을 펼치지 못하고 사장된 인재들을 일컫는 말이다.
불우한 환경은 단순히 돈이 부족한 상태가 아니다.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 아마르티아 센은 "빈곤이란 단지 재화의 결핍이 아니라 자유와 역량의 상실"이라 정의했다. 저소득층 아이들은 진학 및 취업 지도를 받거나 도움이 되는 경험을 쌓을 기회도 적다. 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설계할 자유와 역량을 갖추려면 사회의 도움이 필요하다.
내년부터 전국 학교에서는 '학생 맞춤형 통합 지원 사업', 이른바 '학맞통'이 전면 도입된다. 개별 학생을 중심에 두고 학교 생활, 건강, 가정환경, 또래 관계 등 모든 요인을 교사와 학교 내 전문가들이 함께 고민하며 지원 방안을 마련하는 제도다. 가정에서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아동에게 특히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강지나 교사는 "아이들에게 정말로 필요한 건 돈보다는 '곁에서 지켜봐 주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른'"이라고 말했다. 경제적 지원을 넘어, 아이들을 정서적으로 지지해 줄 울타리가 절실하다는 뜻이다. '학맞통' 정책이 그런 울타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한다.
가능성을 믿고 실패했을 때 다시 일으켜 주는 사회. "살아갈 수 있겠구나"라는 믿음을 심어주는 공동체. 그런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라면, 현실의 벽 앞에서 일시적으로 주저앉더라도 완전히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이위재 기획부장, 조선일보(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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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추가 탕감" 말하면 누가 빚 갚겠나
이재명 대통령이 4일 대전 유성구 대전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충청에서 듣다, 충청 타운홀 미팅’에서 발언을 하고 있다./대통령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 4일 충청 지역민과의 소통 행사에서 “정상적으로 (빚을) 갚는 분들도 많이 깎아줄 생각이고, 앞으로도 (채무 탕감을) 추가할 생각”이라고 했다. 이 대통령은 추경예산에 포함된 정부의 채무 탕감 조치가 “형평성에 맞다”며 이렇게 말했다. 정부는 7년 이상 연체된 5000만원 이하 개인 113만명의 채무 16조원을 탕감하고, 코로나 피해 소상공인 10만명의 대출 원금을 90%까지 깎아주기로 했는데, 앞으로 대상과 규모를 더 확대할 수 있다는 뜻을 대통령이 직접 밝힌 것이다.
채무를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면 은행 거래를 할 수 없고 일자리를 얻는 데도 제한을 받는다. 내수 침체 장기화 속에서 취약 계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는 것은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역대 정부도 해왔다. 윤석열 정부는 코로나 사태 후 3개월 이상 연체한 소상공인 7만명의 빚을 최대 15억원까지 조정·감면했고, 문재인 정부는 1000만원 미만의 10년 이상 장기 연체자 159만명의 연체 채권을 소각했다.
하지만 채무 탕감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빚을 안 갚으면 언젠가는 정부가 갚아주겠지”라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가 확산되고 “돈을 빌리면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신용사회의 기본 원칙이 무너질 수 있다. 성실 상환자와의 형평성도 문제다. 이번 채무 탕감과 같은 조건인 ‘7년 이상 연체, 5000만원 이하 채무’를 모두 상환한 채무자가 지난 5년간 361만명에 달한다. 어려운 형편에도 꾸준하게 빚을 갚아온 이들은 정부의 채무 탕감 조치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수 있다. 역대 정부가 채무 탕감을 남발하지 않고 최소한으로 억제한 것은 이런 부작용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신용 불량으로 고통받는 서민들의 채무를 탕감해 민생 경제를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대통령이 “추가 탕감”을 공언하는 것은 부작용을 더 심각하게 만들고 자칫 신용 시스템을 흔들 수 있다. 앞으로도 채무 탕감이 있다면 누가 성실하게 빚을 갚으려 하겠나. ‘추가 탕감’이 실언(失言)이라면 이 대통령은 잘못임을 인정하고 발언을 철회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부는 이번 채무 탕감이 예외적인 조치이며, 앞으로도 절제한다는 방침을 분명히 해야 한다.
-조선일보(25-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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