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國史-文化]

[사관과 사초(史草)] [정도전과 하륜] [조선왕조실록]

뚝섬 2025. 6. 20. 05:28

[사관과 사초(史草)] 

[정도전과 하륜] 

[조선왕조실록]

 

 

 

사관과 사초(史草)

 

왕도 손댈 수 없는 기록… '쓰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태조부터 철종 때까지 472년간(1392∼1863)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같은 내용의 책을 여러 권 만들어 전국에 나눠 보관했는데, 사진 속 실록은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史庫)에 보관돼 있었어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12·3 비상계엄’ 관련 수사를 맡게 되는 조은석 특별검사가 지난 13일 “사초(史草)를 쓰는 자세로 세심하게 살펴가겠다”는 말을 했어요. ‘사초’라는 것은 조선 시대에 역사 편찬을 담당하던 사관(史官)이 기록한 역사서의 초고를 말하는 것입니다.

 

특별검사가 이런 말을 한 것은, 수사를 통해 밝혀낸 사실이 훗날 역사를 이루는 초고 역할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실 규명’에 집중하겠다는 말로 해석될 수 있어요. 정말 그렇게 사초가 될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의 사관과 사초는 도대체 어떤 역할을 했던 걸까요? 이것은 임금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무척 엄중한 의미였습니다.

 

말에서 떨어진 태종 “사관이 모르게 하라!”

 

조선 개국 초인 1404년(태종 4년) 2월 8일의 일이었어요. 사냥에 나선 태종 임금이 말을 달리며 화살로 노루를 쏘다가 그만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놀라 달려가서 괜찮으냐고 물어보는 상황에서 임금은 아프다는 말도 없이 좌우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답니다.

 

“(내 창피해 죽겠으니 절대로) 사관이 알게 하지 말라!”

 

그런데 이 일과 태종의 말은 태종실록에 모두 고스란히 기록됐습니다. 귀신같이 정보를 입수하고, 왕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도 아랑곳없이 사초에 버젓이 쓰는 사람이 바로 사관이었던 것이죠.

 

당시 민인생이라는 사관은 임금이 사냥을 갔을 때 복면을 쓰고 몰래 뒤따라가기도 했답니다. 심지어 왕이 하는 말을 듣기 위해 병풍 뒤에 숨거나 초대받지도 않은 연회장에 불쑥 붓과 종이를 들고 나타났다고 해요. 태종이 ‘이건 너무 지나치지 않으냐’고 야단을 치자 민인생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신이 곧게 쓰지 않는다면, 신의 위에는 하늘이 있습니다.” 사관 위에서 하늘이 지켜보고 있으니, 바르게 쓸 수밖에 없다는 항변이었습니다.

 

임금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던 ‘사초’

 

표준국어대사전이 설명하는 ‘사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역사의 편찬을 맡아 초고를 쓰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또는 그런 벼슬아치. 예문관 검열 또는 승정원의 주서(注書)를 이른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을 기록하는 일을 맡던 관청이고, 승정원은 오늘날의 대통령비서실과 비슷한 곳입니다. 사관은 대략 이런 기관에 소속돼 있었는데, 특히 예문관과 춘추관을 겸직하는 관리 8명이 매일 주요 사건과 왕명 등을 기록해 사초를 만들던 사관이었다고 합니다. 승정원 주서는 실록과 달리 ‘승정원일기’를 기록했죠.

 

드라마에는 주로 병풍처럼 멀찌감치 뒤편에 앉아 한마디 말도 없이 줄곧 붓글씨를 쓰는 역할로 나오지만, 현실에서 사관의 중요성은 무척 컸습니다. 실력과 가문이 모두 좋은 인재들이 뽑혔고, 자부심과 사명감도 대단했다고 해요. 

 

중종실록의 일부. 곳곳에 붉은색 한자가 보여요. 이는 실록을 인쇄하기 전 틀린 글자를 수정한 ‘교정본’이랍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빨간펜’으로 수정 사항을 표시해놓은 거예요.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바로 이런 사관들이 기록한 실록의 초고가 사초였습니다. 그런데 사초는 분량이 어마어마했어요. 사초를 토대로 편찬한 조선왕조실록의 분량이 1893권 4965만 자(字)에 이르니, 사초는 얼마나 양이 많았겠어요? 그래서 물자를 아끼기 위해 실록을 편찬한 뒤에는 세초(洗草)라는 것을 했습니다. 자하문 밖에서 사초를 물에 씻어 없애고, 그 종이를 제지 원료로 재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초는 실록 편찬 전까지 대단히 큰 무게를 지닌 존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록을 편찬하는 사람들 말고는 그 누구도 미리 보거나 내용을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임금이라 해도 말입니다. 이를 어긴 왕이 조선 왕조에 단 한 명 있었는데, 그가 바로 폭군으로 평가되는 10대 임금 연산군이었습니다.

 

성종실록의 사초에 문신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이 실려 있었고, 이 글이 조카인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차지한 세조 임금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해석됐습니다. 이 정보가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의 귀에 들어가 1498년 숱한 선비들이 희생당한 무오사화의 단초가 됐습니다. 하지만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이후엔 ‘사초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은 연산군 같은 폭군이나 하는 짓’으로 여겨져 어느 임금이라도 꿈도 꾸지 못하는 일이 됐다고 합니다.

 

의심스러운 기록에 대한 의심도 기록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한 가지 들 만도 합니다. ‘과연 실록의 사초를 쓴 모든 사관이 준엄하게 사실만을 기록했을까?’ 사실을 불완전하게 기록하거나, 편견이 개입됐거나, 악의를 지니고 의도적으로 ‘가짜 뉴스’를 기록한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았으리라는 의문입니다.

 

조선왕조실록에선 그런 문제의식이 드러나는 지점도 볼 수 있습니다. 6대 임금 단종이 즉위한 직후인 1452년 7월 4일 세종실록 편찬과 관련한 긴급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로부터 24년 전인 1428년(세종 10년), 당시 좌의정이 말 한 필을 뇌물로 받았다는 소문으로 인해 사직했는데, 사관이 그 좌의정을 아주 나쁘게 비난하는 평을 사초에 적었던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 좌의정은 회의가 열리기 다섯달 전 89세로 별세한 인물,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황희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한 강원도 평창 오대산 사고. 6·25전쟁 때 불탄 건물을 1992년에 복원했습니다. /국가유산청·국립고궁박물관

 

여러 사람이 논의한 끝에 ‘내가 아는 황희 정승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는 판단에 이르렀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적은 이호문이란 사관이 여러 부정부패를 저지른 인물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회의는 ‘사초의 이 부분은 가짜 뉴스니 삭제하자’는 결론에 가까워지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현재 세종실록에는 황희에 대한 이호문의 악평이 그대로 실려 있습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아무리 미심쩍다 하더라도 사초의 기록을 함부로 없앨 수는 없다는 최종 판단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단종실록에는 그 기록을 의심하는 회의에 대한 기록 역시 남아 있습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는 “역사를 편찬한 사람들이 후대를 향해 ‘둘 다 보아라, 그리고 판단하라’는 말을 걸고 있는 것이며, 이것이 조선 시대 기록 정신의 냉혹함”이라고 평가합니다.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6-19)-

______________

 

 

정도전과 하륜

 

조선 초 임금을 도운 경세가를 꼽자면 정도전과 하륜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자기 임금을 대하는 태도는 크게 달랐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은 개국할 즈음에 종종 취기를 빌려 말했다. 한 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마침내 한 고조를 쓴 것이다.” 그러면서 실록은 정도전에 대해 “임금을 도울 만한 것은 모의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큰 공업을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그런 정도전을 태조 아들 이방원은 다른 시각으로 보았다. 정도전과 함께 태조를 보필했던 남은은 아버지의 충신이라고 보았지만 정도전은 자기 아버지를 가지고 논 사람 정도로 폄하했다. 강명함이라는 임금 자질이 충만했던 태종에게는 어쩌면 처음부터 정도전 유형의 재상은 필요 없었을지 모른다. 그 자신이 상당한 정도 미래를 기획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륜 또한 천도 논쟁 때 보면 정도전 못지않게 자기 구상이 강했던 인물이다. 태조와 의견을 달리하며 무악 천도설을 고수했다. 아마 이성계 총애를 받았더라면 하륜도 정도전과 비슷한 유형으로 보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태종을 잘 아는 하륜은 자신을 낮췄다. 뇌물을 좋아했고 약간의 인사 전횡은 있었지만 태종의 역린(逆鱗)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랬기에 끝까지 권력과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으리라.

 

얼마 전 김종인씨의 “후보는 연기만 하면 된다”는 발언을 보면서 떠올린 인물이 정도전이다. 당연히 태종 같은 인물이라면 이를 용인하지 않겠지만 태조 같은 인물이라면 받아들였을 것이다.

 

윤석열 후보는 김종인을 베었다. 남은 것은 윤 후보 리더십 유형이 태조와 태종 중 어느 쪽에 가까울 것이냐 하는 문제다. 그동안 보여준 모습은 솔직히 태조에 가깝다. 그런데 정도전형의 보좌를 쳐내버리면 미래는 어둡다. 이제 남은 것은 태종형 리더로 전환하는 것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앞으로 한 달 안이면 판가름 날 것이다.

 

-이한우 경제사회연구원 사회문화센터장, 조선일보(22-01-06)-

_______________

 

 

조선왕조실록

 

왕이 "사관이 모르게 하라"고 하자 그 말까지 기록했죠

 

최근 한국고전번역원이 조선왕조실록 일부의 새 번역본을 출간했습니다. '태조실록' '정종실록' '태종실록' '정조실록' 부분이에요. 조선왕조실록은 한문으로 기록돼 읽기 어려웠는데, 1993년 우리말로 모두 번역됐어요. 하지만 여전히 어렵고 잘못 옮긴 곳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훨씬 읽기 좋은 번역본을 냈다는 거예요. 우리나라 국보이자 19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이 어떤 책인지 알아볼까요?

임금도 볼 수 없었던 역사 기록이었어요

"이제 태종실록 편찬을 마쳤으니 내가 옛 임금들처럼 이를 한번 보려고 하는데 어떻겠는가?"

1431년 3월 20일, 조선 4대 왕 세종은 신하들 앞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군주이자 태종의 아들인 내가 한 번쯤 실록을 열람할 수도 있지 않느냐'는 의미로 슬쩍 말을 꺼낸 거예요. 그러자 신하들은 펄쩍 뜁니다. 우의정 맹사성 등은 이렇게 말해요. "전하께서 만일 이를 보신다면 후세의 임금이 반드시 이를 본받아서 고칠 것이며, 사관(史官) 또한 군왕이 볼 것을 의심해 그 사실을 반드시 기록하지 않을 것이니 어찌 후세에 그 진실함을 전할 수 있겠습니까." 이에 머쓱해진 임금은 "그럴 것이다(연·然)"라고 딱 한마디 말한 뒤 결국 실록을 보지 않았어요.

역사책인 실록을 쓰는 원자료인 사초(史草)는 물론, 사초를 바탕으로 쓴 각 임금의 실록 역시 임금이라 해도 볼 수 없게 했던 것이죠. 폭군으로 알려진 10대 왕 연산군이 사초 일부를 열람한 것을 제외하면 이 원칙은 조선 왕조 500년 내내 이어졌습니다. 역사를 눈치 보지 않고 있는 그대로 기록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한 것이죠.

조선의 사관들은 대단히 강직했습니다. 3대 왕 태종이 1404년(태종 4년) 2월 8일 사냥 중 노루를 쏘다가 말에서 떨어진 일이 있었습니다. "사관이 모르게 하라." 땅바닥에서 일어난 임금의 첫마디였죠. 창피하니 기록을 남기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런데 사관은 말에서 떨어진 사실은 물론 이런 말을 한 것까지 실록에 적었습니다. 당시 사관은 왕의 발언을 들으려고 병풍 뒤에 숨거나 초대받지 않은 연회장에 불쑥 나타나기도 했대요.

다방면 자료 수집한 종합 사료

이렇게 기록한 조선왕조실록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유산이 됐습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代) 472년 동안의 역사를 날짜별로 기록한 역사서로, 분량이 1893권 4965만 자(字)에 이릅니다. 중국 명나라 실록의 3배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죠.

이토록 치밀하고 정확하게 기록된 역사서가 세계적으로 흔치 않습니다. 유네스코도 인정한 사실이죠. 정치·경제·사회·문화·천재지변과 인물 정보를 비롯한 다방면의 자료를 수록한 종합 사료인 데다,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왜곡과 고의적인 탈락이 없어 신뢰성이 높다는 겁니다. 중국·일본·베트남과 달리 당시 만들어진 원본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점도 가치를 인정받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얼마나 자세한 역사서인지 보여주는 기록을 보죠. 1423년(세종 5년) 7월 21일에는 시골 강아지가 주인과 함께 벼락을 맞은 사건까지 기록했습니다. 1604년(선조 37년) 9월부터 1년 간 객성(客星·손님별)을 관측해 기록했는데, 이것은 독일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가 관측해 '케플러 초신성(진화 마지막 단계에서 폭발하며 매우 밝아지는 별)'이라고 불리는 별 SN1604였습니다. 첫 기록은 케플러보다 4일 앞섰다고 합니다.

전국 네 곳에 실록 복사본 보관

이런 방대한 기록이 지금까지 잘 보존될 수 있었던 데는 기록의 '백업'(여분으로 복사하는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실록을 4부 인쇄해 서울 춘추관에 1부를 두고 전주·충주·성주 세 곳에 실록 보관소인 사고(史庫)를 만들어 1부씩 보관했죠. 전란·사고가 일어나 화재로 타버리는 것을 막으려던 거예요.

그러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춘추관과 충주·성주 사고에 있던 실록이 모두 불타고 전주사고만 남았어요. 손홍록과 안의라는 두 선비가 전주사고 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지켜냈죠. 이후 춘추관 외의 사고는 오대산·태백산·정족산·적상산 등 네 곳 산으로 옮겨 보관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왕조실록에는 안타깝게도 약간 빠진 부분이 있어요. 전주사고에 있던 12권 분량의 문종실록 중 9권 내용의 책에 누군가 11권 표지를 잘못 붙인 거예요. 11권인 줄 알았던 책은 9권의 내용이었죠. 그래서 9권만 두 권이 된 겁니다. 11권이 담고 있던, 1451년(문종 1년) 12월과 1452년 1월에 해당하는 두 달간의 기록은 영영 사라져버리게 된 거죠.

조선왕조실록은 훌륭한 기록이지만, 단점이 없는 건 아닙니다. 임금 중심으로 기록돼 지방에서 일어난 일을 제대로 알기 힘들고, 사관이 '사신왈(史臣曰)'로 운을 떼고 논평한 부분은 때로 지나치게 주관적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앞뒤 흐름을 보지 않고 실록 일부를 인용하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고 보고 있어요.

 

[고종실록과 순종실록]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이상하지 않나요? 조선의 임금은 모두 27명이었어요. 철종 뒤로 26대 고종(재위 1863~1907)과 27대 순종(재위 1907~1910)이 있었어요. 실제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은 모두 존재합니다. 하지만 국보에서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서도 빠져 있죠.

이 두 실록은 조선시대 사관이 아니라, 조선왕조가 망한 뒤 일제 총독부 아래 있던 이왕직(옛 조선 왕실 관련 사무 담당 기구)의 주관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에 포함시키지 않는 거죠. 두 실록은 일제 침략과 항일운동에 관련된 사실을 의도적으로 누락시켰을 뿐 아니라, 마치 대한제국이 스스로 국권을 일본에 넘긴 것처럼 잘못 읽을 수 있게끔 서술돼 있습니다. 이 때문에 국사편찬위원회는 고종시대사를 다시 편찬하고 있답니다.

 

-유석재 기자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