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바이산 아닌 '백두산'을 마주하다] [백두산 최고봉의 이름] ....
[창바이산 아닌 '백두산'을 마주하다]
[백두산 최고봉의 이름]
['썩은 유학자'들이 백두산에 종속시킨 한라산의 복권]
창바이산 아닌 '백두산'을 마주하다
지난 13일 상공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의 모습. /박성원 기자
지난 13일 하늘에서 백두산 천지를 마주하게 됐다. 웅장한 풍경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맑은 백두산 천지를 만날 확률은 1년에 100일도 안 된다고 하는데 운 좋게 천지를 만나볼 수 있었다. 이날 본 천지는 물이 얼어 있는 부분과 녹아 있는 부분이 공존해 아름다움을 자아냈다. 보통 천지의 얼음은 11월쯤부터 얼어붙어 이듬해 6월쯤 녹기 시작한다.
백두산은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북한 량강도 삼지연시에 걸쳐있다. 높이는 2744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이 솟은 산이다. 백두산 천지는 백두산 정상에 위치한 화산호로 면적은 9.165㎢, 최대 수심은 384m다.
지난 12일 백두산 정상(서파)에 오른 수많은 관광객들이 백두산 천지를 구경하는 모습. (좌)/지난 12일 백두산 서파산문에서 천지를 향해 올라가는 계단길. 백두산 서파 코스는 144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가마꾼들이 승객을 싣고 나르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가마꾼들은 2인 1조로 움직이며, 가격은 150~400위안 정도 된다. /박성원 기자
백두산 천지는 동서남북에서 조망할 수 있지만, 동파(東坡) 코스는 북한 땅이라 한국인 관광객은 출입할 수 없다. 관광객들은 보통 천지 조망을 위해 북파 코스와 서파 코스를 이용하는데, 북파 코스는 차를 타고 정상까지 오를 수 있고, 서파 코스는 계단을 통해 정상까지 가야 한다.
지난해 6월 11일 백두산(2,744m) 북파지역 천문봉에서 바라본 관일봉에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남아있는 모습. /신현종 기자
북파에서 바라본 천지는 암벽이 살짝 가리고 있어 약간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천지를 볼 수 있다. 셔틀버스를 이용해 정상까지 오를 수 있어 편리하다는 장점도 있다.
지난 12일 백두산 정상(서파)에서 바라본 백두산 천지의 모습. 6월에도 산에 눈이 덮여 있다. /박성원 기자
서파에서 바라본 천지는 탁 트여 있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다만 천지와의 거리가 있어 자세하게 보지 못한다. 서파산문에서 천지를 오르려면 1442개의 계단을 타거나 가마꾼에게 150~400위안 정도를 지불하고 가마를 이용할 수도 있다.
현지 가이드에 따르면 남파 코스는 중국 공안의 지시에 따라 여권을 든 채 카메라를 응시하며 사진 촬영하는 등의 과정을 거쳐야 입장할 수 있고, 이동 거리도 긴 편이라 관광 상품으로는 인기가 없다.
12일 백두산 서파산문에서 천지를 향해 올라가는 계단길. 백두산 서파 코스는 144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가마꾼들이 승객을 싣고 나르는 모습을 쉽게 목격할 수 있다. 가마꾼들은 2인 1조로 움직이며, 가격은 150~400위안 정도 된다. (좌)/백두산 정상(서파)에 도착하려면 1442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사진은 880번째의 계단이라는 표시. 2025.6.12 /박성원 기자
백두산의 날씨는 시시각각 변한다. 지난 11일 북파 코스를 통해 백두산 천지를 조망하려 했지만 악천후 때문에 실패했다. 정상까지 셔틀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두세 시간을 달려갔지만, 천지는 안개와 비바람에 가려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현지 가이드는 “백두산 천지는 못 봤지만, 사람 천지는 보지 않았느냐”며 너스레를 떨었고 “다음날을 기약해 보자”며 위로했다.
이날 백두산의 기온은 섭씨 영상 7도 정도를 기록했지만, 강한 비바람으로 체감온도는 영하권에 가까웠다. 대다수의 관광객들은 추위와 비를 피하기 위해 두꺼운 패딩과 우비를 입었다.
지난 11일 백두산 정상(북파)은 비바람과 안개로 천지를 목격할 수 없었다. 이날 기온은 7도 정도였지만, 강하게 부는 비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권에 가까울 정도였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었다. 사진은 북파 정상에 올랐지만, 안개 등으로 천지를 보지 못한 관광객들이 실망한 채 하산하는 모습.(좌)/지난 11일 백두산 정상(북파)에서 관광객들이 우비를 입고 지나는 모습. /박성원 기자
지난 11일 백두산 정상(북파)은 비바람과 안개로 천지를 목격할 수 없었다. 이날 기온은 7도 정도였지만, 강하게 부는 비바람에 체감온도는 영하권에 가까울 정도였다. 대부분의 관광객들은 두꺼운 패딩을 입었다. 사진은 북파 정상에 올랐지만, 안개 등으로 천지를 보지 못한 관광객들이 실망한 채 하산하는 모습. 사진 중간에는 해가 뜬 백두산의 사진이 걸려있다. /박성원 기자
지난해 3월, 아름다운 우리 강산인 백두산은 중국 명칭인 ‘창바이산(长白山·장백산)’이란 이름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됐다. 또 중국 정부는 백두산을 ‘화산 폭발 전 꼭 가봐야 할 중화 10대 명산’으로 홍보하고 있어 서양인들이 백두산을 중국의 산으로 인식할 가능성이 높다. 백두산은 중국과 북한에 걸쳐 있고, 백두산 천지는 55% 정도가 북한에 속해 있어, ‘창바이산’으로만 불리는 것은 맞지 않다.
지난 12일 백두산 천지 모습. 유네스코에 등재됐다는 표시석이 있다. /박성원 기자
지난 12일 백두산 천지 모습. /박성원 기자
오래전부터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성산(聖山)이었고, 백두산에서 시작해 지리산까지 이르는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산줄기로 ‘한반도의 척추’로 불린다. 따라서 우리의 성산을 ‘창바이산’이 아닌 ‘백두산’으로 불리도록 하는 데 힘써야 할 때다.
-박성원 기자, 조선닷컴(25-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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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최고봉의 이름
북한 최창호 작가의 ‘백두산 장군봉과 비루봉’.
1900년대 이후 일본 학생들은 일본에서 가장 높은 산이 후지산(해발 3776m)이 아니라 ‘니이타카야마’(新高山·해발 3952m)라고 배웠다. 나라의 최고봉이 갑자기 바뀐 사연에는 일본의 제국주의 팽창이 있었다. 니이타카야마는 일본이 아니라 대만에 소재한 산이다. 대만을 병합한 일본은 1897년 본래 옥산(玉山)으로 불리던 산의 이름을 니이타카야마로 바꾸고는 일본 최고봉의 타이틀을 부여했다. 메이지 천황의 명명이라는 선전이 곁들여졌다.
1941년 12월 8일은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한 날이다. 6일 전인 12월 2일 해군 후나바시 무선송신소는 연합 함대 사령부 앞으로 한 통의 암호 전문을 타전한다. “니이타카야마 올라라 하나둘공팔(ニイタカヤマ ノボレ ヒトフタマルハチ)”. 12월 8일을 기해 공격을 개시하라는 의미였다. 전보에서 언급된 니이타카야마가 바로 옥산이다. 니이타카야마는 ‘도라 도라 도라’와 함께 태평양전쟁 개전을 상징하는 문구로 역사에 남았다. 대만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이름과 사유로 자국의 명산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셈이다.
2018년 9월 남북 정상이 백두산에 함께 오르는 일이 있었다. 한국 언론들은 방문지인 백두산 최고봉을 ‘장군봉’으로 보도하였다. 정부 해외홍보원 영문 사이트에도 ‘Janggun Peak’로 소개되었다. 백두산 정상은 ‘병사봉(兵使峰)’이 본래의 이름이다. 장군봉은 60년대에 병사를 병사(兵士)로 착각한 김정일이 김일성 탄생지 위상에 걸맞지 않다며 백두혈통 신격화 차원에서 바꾼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병사봉은 일제 때 천황 연호를 따 ‘대정(大正)봉’으로 불리다가 해방과 함께 되찾은 이름이다. 최고봉은 나라마다 상징적 의미가 있기 마련이고 정치적 조작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한국 대통령이 장군봉에 올랐다는 문구가 한국에서 거리낌 없이 통용되는 것은 그만큼 김씨 세습 체제의 정치 프로파간다가 성공하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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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은 유학자'들이 백두산에 종속시킨 한라산의 복권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는 진실로 때가 있으며, 산천 또한 땅기운을 모으는 때가 있다."('의룡경')
땅에도 흥망성쇠가 있다는 주장이다. 땅이 절로 때를 만나는 것이 아니고 몇 가지 요인에 의해서다. 첫째, 급격한 인구 증감이다. 둘째, 사회경제 체제의 변화이다. 셋째, 문명(과학)의 발전이다. 척박한 땅이라 농사가 힘들어 겨우 바다에 의존하던 제주가 그랬다. 교통의 발달로 지금은 세계적 관광지가 되고, 서울의 '자본'이 제주도 땅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지만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외로운 섬'이었다. 신선이 산다는 동해의 신비한 섬 '영주산'으로도 알려졌다. 진시황의 명을 받아 불로초를 구하러 서복이 다녀간 곳이기도 하다.
한라산은 바다에서 홀로 솟아올라[海中突出] 제주를 만들고 제주인을 수호해 온 진산이다. 그 산 모양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의 "무지개처럼 높고 길게 굽었으되 둥글어서(穹窿而圓) 원산(圓山)"이란 표현이 절묘하다. 산의 중앙이 제일 높아 무지개처럼 둥글고 아래로 차차 낮아져 사방의 바닷가에 마지막 발을 담근다. 따라서 제주도 사람들은 한라산의 한결같은 모습을 보며 살아간다. 한라산이 제주인들에게 끼치는 심리적·생리적 영향은 절대적이다.
유아독존 한라산이 백두산의 말단에 편입된 것은 조선 후기 "썩은 유학자[腐儒]"들의 풍수관 때문이었다(1908년 황성신문). '육지'와 아무 관련이 없는 한라산을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은 '백두산→백두대간→호남정맥→무등산→월출산→해남→남해→한라산'이라는 '산의 족보'에 편입해버린다.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백두산 주산론'도 문제가 있다. 조선 초 백두산은 우리 영토가 아니었다. 15·16세기에 만든 조선 지도에는 백두산이 포함되지 않으나, 18세기 이후 지도에 백두산이 표기된다. 이중환은 백두산을 조선 산맥의 머리로 보았는데, 그의 재종조부 이익이 조선 산줄기의 근원이 백두산이라고 한 주장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모든 것을 신분제화하려는 유가의 종법(宗法)적 관념이다. 그런데 백두산은 후기 조선의 주산이자 청나라의 영산이었다. 후기 조선과 청나라가 백두산을 공동 주산으로 삼은 셈인데, 지금도 백두산을 북한과 중국이 균분하고 있음에서 그 흔적이 드러난다. 백두산이 성지가 된 것은 김일성가의 '백두 혈통'론에 따라서이다. 그럼에도 남한의 많은 사람은 중국을 거쳐 백두산을 어렵게 올라가 우리 민족의 영산에 감격한다.
최근 한라산의 '존엄'함을 인식한 이는 이번에 방문 공연한 삼지연관현악단의 현송월 단장이다. 그녀는 '백두와 한나(한라)는 내 조국'을 열창하였다. 백두산과 한라산을 동격으로 보았다. 지난 10일 북측 고위급 대표단을 맞는 청와대 오찬에서 '한라산' 소주가 건배주로 등장하였다. 현 단장이나 청와대 모두 한라산의 본래적 존재를 알았던 것일까? 아니면 제주가 김정은 위원장의 생모 고영희의 고향임을 염두에 두어서일까? 제주 조천읍 북촌마을은 고영희 부친 고경택이 태어나 자랐던 곳이며, 거기서 그리 멀지 않은 열안지오름 자락에 고경택 형제와 윗대 조상을 모신 가족묘가 조성되어 있다. 주변의 모든 묘가 가까운 산(오름)에 기대어 조성된 것과 달리 이 가족묘는 저 멀리 한라산에 머리를 대고 있다. 뭇 신하의 조례를 받는 군신봉조(群臣奉朝) 형국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의 조기 개최에 대해서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이라 하였지만, 언젠가 정상회담이 제주에서 열린다면 한라산은 진정 '복권'될 것이다. 또 김정은이 외가 고향과 선영을 한번 둘러볼 수도 있지 않은가.
눈 덮인 한라산./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가족 묘지.(좌)/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외증조부 고영옥의 묘./연합뉴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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