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앞에서 둘이 된 미국] [링컨과 오바마의 타협 정치]
[‘이민’ 앞에서 둘이 된 미국]
[링컨과 오바마의 타협 정치]
‘이민’ 앞에서 둘이 된 미국
외출할 때 자주 타는 지하철에 한 엄마가 있다. 작은 체구의 중남미 출신인 그는 하루 종일 지하철을 탔다 내렸다 하며 “초콜라떼(초콜릿의 스페인어 발음)”를 외친다. 그가 들고 있는 종이 상자 안에는 껌과 초콜릿, 젤리 등이 들어있다. 그리고 그의 등에는 언제나 그 상자보다 훨씬 큰 돌쟁이 아기가 업혀 있다. 힘겨워 보이지만 그 엄마가 아기를 떼어두고 있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엄마의 무게를 덜어주고자 초콜릿을 달라고 하면 그는 해맑게 웃으며 “2달러”라고 답한다.
‘시위’와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다른 목소리
하지만 모두가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건 아니다. 언젠가 정장을 차려입은 한 중년의 백인 여성이 그 엄마를 내내 매섭게 노려보는 걸 봤다. 그 엄마가 초콜릿을 권하기 위해 그쪽 자리로 다가가자 그 여성은 차가운 표정으로 “꺼져”라고 말했다. 당시 뉴욕은 남미에서 온 한 불법 이민자가 지하철에서 잠자던 여성에게 불을 지른 사건으로 떠들썩했다. 불법 이민자들이 길거리에 의자를 놓고 이발을 하는 등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을 해 ‘뉴욕이 제3세계가 돼 버렸다’는 비판도 나오던 때다. 백인 중년 여성이 그 엄마에게 한 말이 지하철에서 꺼지라는 건지, 이 나라에서 꺼지라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 불법 이민자, 나아가 이민자를 바라보는 미국의 시선은 크게 두 가지다. 먼저 보이는 것은 여러 시위에서 들리는 ‘그들을 지켜주자’는 목소리다. 옹호자들은 “미국은 애초에 이민자들로 이뤄진 나라이며, 이 땅에서 인디언처럼 생기지 않은 이상에야 모두가 이민자”라며 인류애를 강조한다. 설령 불법으로 미국에 왔다 해도 이들이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이른바 ‘3D 업종’에 대거 종사하며 미국 사회가 돌아가게 해 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박애주의적 목소리는 시위의 형태로 눈에 드러나고 이른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PC)주의’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언론에 더 많이 노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게 지금의 미국 사회를 다 보여준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 반대편에는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이민자들을 혐오하고 증오하는 시선이 있다. 이들은 “불법은 불법”이라며 “내 나라에 몰래 들어온 이민자들이 세금을 축내고 범죄를 저지른다”고 말한다. 이들의 목소리는 반대편의 그것처럼 시위로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익명의 여론조사에서는 잘 드러난다. 최근까지 거의 모든 조사에서 미국인들은 일관되게 절반 이상이 불법 이민자에 대해 반감을 표했다. 최근 논란이 된 로스앤젤레스 이민자 단속 과정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온갖 비판에도 불구하고 영장 없이, 급습의 방식으로, 나아가 군대까지 동원해 적극적인 체포와 구금에 나설 수 있었던 건 이 같은 여론이 든든한 뒷배가 돼 줬기 때문이다.
한국도 정교한 정책 세워야
‘법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이민 옹호자들의 입장도, ‘아무리 그래도 법은 지켜야 한다’는 비판자들의 지적도 일리가 있기에 불법 이민자 추방 이슈는 그 어떤 이슈보다 어려운 미국의 난제가 되고 있다.
미국의 이민자 논쟁이 지구 반대편 남의 나라 일로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최악의 저출산 상황을 겪고 있는 한국 역시도 머지않은 미래에 이민자 수용이라는 이슈를 정면으로 마주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한국의 앞에는 ‘소멸국가’ 아니면 ‘이민사회 건설’이라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고 말한다. 이미 많은 면에서 두 개의 나라가 돼 버린 한국이 더 멀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국익과 사회 통합에 도움이 될 정교하고 합리적인 이민 정책이 준비돼야 할 것이다.
-임우선 뉴욕 특파원, 동아일보(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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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컨과 오바마의 타협 정치
[특파원 리포트]
이재명 대통령(왼쪽)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뉴스1
지난해 미국 대선과 올해 한국 대선을 지켜보며 느낀 것은 때론 지도자의 도덕성이 후순위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이재명 신임 대통령 모두 적지 않은 사법 리스크와 신상을 둘러싼 논란이 있었지만 막상 캠페인 과정에선 그게 큰 얘깃거리가 되지는 못했다. 모름지기 한 나라의 지도자라면 교과서에 실릴 만한 정도는 아니라도 도덕적 표상(表象)이어야 한다고 봤지만 틀린 생각이었다. 거기에 담긴 민의(民意)를 존중한다. 도덕과 유능의 균형점에 관해 우리가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트럼프 자신과 그 주변 사람들이 요즘도 종종 하는 말이 있다. “굳이 출마할 생각이 없었다. 바이든만 아니었으면 플로리다로 내려가 골프를 치며 남은 인생을 즐겼을 것이다.” 바이든 정부 출범 후 계속된 수사·재판 정국이 트럼프로 하여금 대선에 재출마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막다른 코너에 내몰았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대선에 패배하고도 곧바로 당대표에 출마하고, 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이 되는, 기성 정치 문법과는 다른 행보의 연속이었다. 여기엔 정치를 그만두는 순간 바로 낭떠러지라는 공포가 있었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이 말한다.
지금은 이재명 정부의 시간이다. 전국 검사의 약 5%가 투입된다는 3대 특검(내란·김건희·채상병)을 필두로 지지자들의 ‘효능감’을 자극하는 조치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선 과정에서 이 대통령을 지지한 일개 유튜버나 인플루언서까지 나서서 “쇠뿔도 단김에 빼야 한다” “공무원들에게 휘둘리면 안 된다”며 훈수를 두고 각자의 청구서를 들이밀고 있다. ‘정당 해산’을 운운하는 180석 여당의 완력에 대꾸도 못하고 집안싸움에만 삼매경인 야당의 신세가 바람 앞의 등불 같다. 가공할 만한 복수심 속에서 집권한 트럼프도 그랬다. 첫날부터 관세, 이민자 추방, 연방 정부 구조조정 등에 드라이브를 걸며 폭주했다. 그러다 법원 판결과 전국으로 퍼지는 반(反)트럼프 시위에 일단 제동이 걸린 모습이다.
이 대통령은 그간 루스벨트, 버니 샌더스부터 트럼프까지 좌우 가리지 않고 넓은 스펙트럼의 미국 정치인에게 자신을 빗대왔다. 하지만 경선 경쟁자나 상대 당 인사도 내각에 발탁한 링컨, 눈엣가시 같았던 야당 하원의장과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격의 없이 소통했던 오바마를 떠올려보자. 민주주의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드는 이 시기에 석학들은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법대로 하자’는 말이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건 타협하지 말자는 일방통행과 진배없다는 것이다. 점령군 행세하며 칼을 휘두르면 부메랑이 돼 돌아온다는 게 동서고금의 진리고 우리 현대사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됐던 장면이다. 칼은 칼집에 있을 때 가장 강하다는 격언도 있지 않은가. 이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않은 유권자가 과반이었다. 이재명 정부의 성공을 기원한다.
-워싱턴=김은중 특파원, 조선일보(25-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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