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관광 먹여 살리는 한국인, 도쿄 맛집도 서울서 예약하고 간다]
일본 관광 먹여 살리는 한국인, 도쿄 맛집도 서울서 예약하고 간다
訪日 한국인 역대 최다
별별 서비스 등장해
이달 초, 돌쟁이 자녀와 부모님을 모시고 일본 도쿄 가족여행을 떠난 회사원 최동준씨는 일본인들도 줄 서기로 유명한 맛집을 모두 섭렵하고 돌아왔다. 가게가 문을 여는 시간부터 국적 불문의 손님들이 만들어 낸 긴 줄을 건너뛰고 매장에 입성했다. 그가 줄을 서지 않은 비법, 바로 예약 대행 서비스였다.
인파로 붐비는 일본 도쿄 도심의 풍경. 올해 1~5월 일본을 방문한 한국 관광객 수가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돈 되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일본어 몰라도 줄 서지 않고 맛집을 섭렵할 수 있다”는 ‘맛집 예약 대행 서비스’도 등장했다. /재팬4K 캡처
어떻게 한 걸까. 우선 최씨가 온라인 예약 사이트에서 이종격투기 선수 추성훈이 추천해 유명해졌다는 ‘이마카츠 롯폰기 본점’을 검색하자 “추성훈 선수 소개 이후로 사람이 너무 몰려 가게가 예약석을 줄이고 웨이팅 비율을 늘렸습니다. 2주 이내 예약은 거의 불가능한 편입니다”라는 공지가 한글로 떴다.
그리고 “예약 실패 시 절반 금액을 환불해 주는 서비스는 8900원, 예약에 실패할 경우 전액을 환급해 주는 상품은 1만900원”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가족들이 겨우 시간을 맞춰 간 여행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기는 게 가장 큰 공포. 전액 환급 상품을 결제하자 예약이 완료됐다는 문자와 함께 “가게에 가서 ‘로쿠지카라 고닌 요야쿠시타 체 데스(6시부터 5명 예약한 최입니다)’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라는 안내 문구가 함께 전송됐다.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이 예약자명을 이야기할 수 있도록 일본어 발음까지 한글로 적어 보낸 것이다.
직장인 최씨가 일본 여행에 앞서 이용한 맛집 예약 대행 서비스. 식당에 가서 예약자명을 말할 수 있도록 일본어 발음을 한글로 써서 보내주기까지 한다. /독자제공
상황이 반전됐다. 2019년만 해도 ‘노노재팬’을 외치며 일본 상품과 여행을 불매하던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달려간다. 한일 노선이 증편되고, 엔화 약세가 지속되면서 올해 1~5월 일본을 방문한 사람은 역대 최다를 기록했다. 일본 관광청(JTA)이 2030년까지 국제 관광객 6000만명 달성을 목표로 내세운 가운데 한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서비스도 등장하고 있다. 일본 관광 대폭발의 시대다.
◇한국인이 지탱하는 일본 관광
한국인은 일본 관광의 핵심 축으로 떠올랐다. 작년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 중 한국인은 883만명. 압도적 1위다. 올해 1~5월 한일 노선을 이용한 승객 수도 역대 최다인 1124만6131명으로 작년 같은 기간(1015만6796명)보다 10.7% 증가했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1~5월·938만6783명)과 비교하면 19.8% 늘어난 수치다.
한국인의 씀씀이도 커지고 있다. 일본 관광 전문 매체 호니치라보에 따르면, 2024년 일본을 찾은 한국 관광객이 소비한 금액은 9632억엔으로 전년 대비 30.3% 증가했다. 1인당 소비액은 10만9441엔으로 전년 대비 2.9%, 2019년과 비교하면 43.7% 증가했다.
‘돈 되는 한국인’은 귀한 손님이 됐다. 한국인의 관광 편의를 위한 신사업이 생기기 시작했다. 영어를 하는 사람이 많지 않고, 아직도 온라인 예약보다 전화로 직접 예약하는 게 익숙한 일본에서 맛집과 렌터카, 열차 예약을 대신 해주는 서비스가 대표적이다. 일본에 있는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이 알음알음 하던 아르바이트가 본격적으로 사업화한 것이다.
포털 사이트에 ‘일본 예약 대행’이라고 검색하면 나오는 맛집 예약 대행 서비스의 수수료는 2900원에서 1만900원, 골프장이나 신칸센(열차) 예약 수수료는 7000원에서 2만원대 초·중반 수준. 야구팬들을 위한 야구장 티켓 예약(3만원)이나 맥주 공장·지브리 애니메이션 박물관 입장권 등은 1만~3만원대로 좀 더 비싸다.
이들은 ‘365일 연중무휴’ ‘믿고 맡길 수 있는 업체’를 내세운다. 하늘길 건너간 외국에서 예약이 되지 않아 황당한 일을 겪지 않도록 보장해 주겠다는 것. 오픈런 하는 맛집이나 인기 많은 자리는 현지인도 쉽지 않은 경쟁이다. 이들은 “미리 대행금을 결제해 주면 빠른 상담이 가능하다” “예약이 안 될 경우 100% 환불해 주겠다”며 고객을 안심시킨다. “창가 쪽 좋은 자리로 예약해 줬다” “현지 시스템을 몰라 당황할 뻔했는데 자세히 안내해 줬다”는 고객 리뷰를 내세우는 것도 일본어 못 하는 한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마케팅 기법이다. 온라인·애플리케이션을 통한 예약에 익숙한 한국인과 전화 같은 전통 방식을 고수하는 일본의 간극을 이용한 돈벌이인 셈이다.
일본 맛집과 야구장 등을 대신 예약해주는 서비스 상품들. /온라인캡처
얇은 지갑에 예약 대행 서비스에 쓰는 돈이 아까운 소비자들은 예약 꿀팁을 공유한다. 구글 맵에서 가게 이름을 검색해 예약하는 것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메일로 온 예약 확인증을 해석하지 못하거나 현지 연락처가 없으면 예약이 취소될 수 있다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고급 레스토랑이나 미쉐린 1~3스타에 선정된 맛집은 공식 홈페이지나 별도의 예약 사이트를 이용해야 해 난도가 높다는 평가다. 번역 앱을 사용하는 법까지 알려주는 친절한 설명 글에 ‘덕분에 예약했다’는 감사 인사가 줄줄이 붙는다. 이마저도 어렵다는 여행객들은 ‘한국어 주문이 가능한 일본 맛집’ ‘한글 메뉴판이 있는 이자카야’ 같은 정보를 검색한다. 역시 여행은 먹는 게 남는다는 진리.
◇돈도, 시간도 아끼는 여행
역사적 갈등과 적대감은 시간과 비용 절감이라는 효율성 앞에 힘을 못 쓴다. 금요일 퇴근 후 주말을 이용해 짧게 떠나는 밤도깨비 여행객이나 주말에 하루이틀 연차를 붙이는 직장인이 고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선택지 중 편도 1~2시간의 짧은 비행 거리를 자랑하는 일본은 단연 매력적이다.
라멘 먹으러 일본 간다는 말은 더 이상 허세만은 아니다. 지난 3~4월 원·엔 환율이 100엔당 1000원을 넘기며 출렁거렸지만 지난달에는 960원, 지난 18일 기준 947원 수준을 기록했다. 한국의 외식 물가 급등과 엔저 현상이 겹쳐지면서 “라멘 한 그릇도 일본이 더 싸다”는 말까지 나온다. 후쿠오카 이치란라멘 본점의 돈코츠 라멘은 1080엔. 18일 기준 환율로 약 1만220원 수준이다. 서울 합정동 오레노라멘(토리빠이탄라멘·1만2000원), 역삼동 멘츠루(쇼유라멘·1만1000원)보다 현지 라멘 가격이 저렴한 셈이다. 항공사들이 경쟁적으로 일본 노선을 증편하면서 늘어난 ‘특가 항공권’으로 5만원 수준에 항공권을 구매할 수도 있다. “제주도 가서 고기국수 먹고 오는 것보다 일본 가서 라멘 먹고 오는 게 더 싸다”는 말이 현실이 된 것이다.
비싼 물건을 저렴하게 구매해 ‘현명한 소비’를 하고 있다는 기쁨도 누릴 수 있다. 엔저 영향으로 같은 브랜드 물건도 훨씬 저렴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패션 쇼핑족은 꼼데가르송이나 단톤 같은 의류 매장을 싹쓸이한다. 일본의 중고 명품 매장을 찾는 한국인이 늘어난 것도 최근 몇 년 사이의 일. 한국보다 가격이 저렴하면서 면세 적용을 받을 수 있다는 이점을 노린다. 돈키호테 같은 할인 매장에서 의약품이나 과자, 식료품을 구매하던 한국인의 씀씀이가 커진 것도 구매하는 상품의 단가가 높아진 탓이다.
한국관광공사는 “일본의 경우 도시뿐 아니라 지방으로 이동하는 항공 노선과 교통 인프라가 잘 구축돼 있어 외국인들도 다양한 지역을 여행하는 경향이 높다”며 “외국인 관광객 편의를 확대한 것이 관광 수요 증가의 이유”라고 말했다.
◇과잉 관광에 반감도 커
한국인을 주축으로 작년 역대 최다(3687만명) 관광객이 일본을 찾았다. 하지만 반감도 크다. 과잉 관광을 뜻하는 오버투어리즘(overtourism) 문제가 심각하기 때문이다. 전통 사찰과 아기자기한 상점이 많은 기온 거리로 유명한 교토의 경우 관광객이 몰리면서 외국인 관광객은 늘었지만 내국인 관광객은 줄어드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후지산 인근의 연못 명소 오시노핫카이 역시 외국인 관광객을 피해 국내 관광객이 줄어든 장소로 꼽힌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자국민 보호’를 내세워 외국인 관광객에 대한 차별 정책을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오는 22일 도쿄도 의회 선거와 내달 20일 참의원(상원 의원) 선거를 앞두고 외국인 관광객 대상 소비세 면세 제도 폐지와 출국세 인상 등을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벌써부터 ‘관광객 불편하게 만들기’ 정책이 예고돼 있다. 물건을 5000엔 이상 구매할 경우 현장에서 적용해 주는 소비세(10%) 면세 혜택을 11월부터는 공항에서 물품 확인 후 적용해 줄 예정이다. 관광객이 면세품을 국내에서 되파는 경우를 막겠단 것이다. 오사카와 교토시는 9월과 내년 3월부터 숙박세 기준을 변경한다. 입장료를 인상하는 관광지도 늘고 있다.
한 여행 업체 관계자는 “면세 혜택 폐지와 출국세 인상 등이 이뤄지더라도 지리적 근접성, 엔저 기조 등으로 한동안 일본 여행의 인기는 지속될 것”이라면서도 “중국의 비자 폐지 등으로 일본의 관광 수요가 분산될 확률도 높다”고 말했다. 여름휴가 철이 다가오고 있지만 라멘 먹으러 일본 가는 사람이 늘어나는 현실에 국내 여행 업계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이미지 기자, 조선일보(25-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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