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대전 승리 비결은 총이 아니라 '美 공장'이었다] [히로시마]
[2차 대전 승리 비결은 총이 아니라 '美 공장'이었다]
[히로시마]
2차 대전 승리 비결은 총이 아니라 '美 공장'이었다
[민태기의 사이언스토리]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하늘에서 내려다본 미국 보유 항공기들. 압도적 군수 생산력의 증거였다(왼쪽 사진). 오른쪽 사진은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의 미군 병사들과 전차. /연합뉴스
1940년 한 해 동안 미국은 470만대에 가까운 자동차를 생산했다. 곧이어 1941년에는 포드사 한 회사에서만 69만1455대를 만들었다. 하지만 1942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미국 전역에서 생산된 자동차는 단 139대에 불과하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 때문이다. 이후 미국은 전쟁에 소극적이던 태도를 바꾸어 모든 역량을 제2차 세계대전에 쏟아붓는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유럽 전선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연합군은 전세를 역전하게 된다. 그 중심에는 미국의 제조업이 있었다.
인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대영제국은 제2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세계 인구, 자원, 산업 생산의 25%를 지배하던 거대한 연방이었다. 당시 미 육군의 군사력은 세계 39위로, 1940년 독일은 1450대, 영국은 1400대의 탱크를 생산했지만, 미국은 331대였다. 그러나 전쟁은 강대국 서열을 바꾸었다. 일본의 진주만 공격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의회와 국민에게 압도적인 물량으로 무기를 생산하자고 호소했다. 산업을 재배치하며 전쟁 물자 생산에 총력을 기울인다. 이 과정에서 미국 제조업의 효율성이 드러났다. 독일이나 다른 국가들이 숙련된 장인에게 의존하고 있을 때, 미국은 노동자 누구라도 대량 생산이 가능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1942년 미국이 매년 항공기를 6만대 생산하겠다고 발표하자, 히틀러는 비웃었다. 1940년 한 해 동안 미국의 항공기 생산은 고작 6019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식간에 생산 라인을 만든 미국은 1940년부터 1945년 8월까지 무려 30만1584대를 생산한다. 이는 독일과 일본 등 추축국이 생산한 항공기를 모두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을 뿐 아니라, 연합군 항공기 생산의 절반에 해당한다. 1944년 한 해 동안 미국이 쏟아낸 비행기는 전쟁 기간을 통틀어 일본이 생산한 항공기보다 많았다. 미국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진 항공기와 엔진은 영국과 소련 등 동맹국에도 제공되어, 연합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배경에는 ‘포디즘’이라 불리는 양산 체제가 미국 제조업에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 포드의 아들 에드셀 포드는 포드 시스템을 전략폭격기 생산에 적용한다. 전문가들은 항공기를 자동차처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봤다. 자동차는 1만5000개의 부품으로 조립되지만, 당시 최신 폭격기 B-24는 무려 155만개의 부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세계 최대의 공장을 지어 기존의 통념을 완전히 뒤집었다. 포드가 만든 생산 공정은 27톤의 무기를 탑재할 수 있는 B-24 폭격기를 63분마다 한 대씩 만들어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이에 질세라 또 다른 자동차 생산자 크라이슬러도 나섰다. 그들은 탱크 양산 시스템을 만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무기가 셔먼 전차. 크라이슬러 공장 하나에서만 전쟁 동안 독일이 생산한 전차보다 많은 전차를 만들었다. 당황한 독일은 고성능 전차들을 잇달아 내놓았지만, 생산량에서 밀리며 전쟁 양상이 바뀌었다. 독일이 티거 전차 1대를 만드는 시간에 미국은 셔먼 전차 37대를 생산했다. 크라이슬러 공장은 원자폭탄 제조에도 투입되었다. 제너럴모터스(GM)도 마찬가지였다. 수륙양용 트럭 수만 대를 만들어 노르망디를 비롯한 세계 곳곳의 연합군 상륙작전이 성공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미국에서 대량으로 생산된 전쟁 물자가 유럽 동맹국들에 수송되기 시작하자, 독일의 잠수함 U보트는 대서양에서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다. 이에 미국은 무려 2700척의 수송함을 생산하며 맞섰다. 만 톤급 수송선인 리버티호를 건조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24일이었고, 어떤 경우는 4일 만에 제작되기도 했다. 미국은 배를 만드는 능력도 세계 최강이었다. 심지어 항공모함을 1주일에 1척씩 진수하면서, 이들을 수송 선단 호위에 사용해 U보트 공격을 막아낸다. 미국은 전쟁 동안 무려 141척의 항공모함을 새로 제작했다. 같은 시기 일본이 보유했던 항공모함은 고작 16척이었다. 미국은 압도적인 생산력으로 하늘과 땅, 바다를 완전히 장악했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세계 산업 생산의 절반이 미국에서 이루어졌다. 1940년대까지 독일은 노벨상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였다. 하지만 아무리 뛰어난 과학이라도 제조 역량이 받쳐주지 못하자, 결국 모든 전선에서 밀렸다. 궁지에 몰린 독일과 일본은 점령지에서 착취한 노동력으로 총력전을 펼쳤지만, 미국은 현대화된 생산 체계로 이를 압도했다. 모두가 숙련공일 수 없는 현대 산업에서는 노동자를 갈아 넣는 방식으로는 절대로 시스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제2차 세계대전은 보여주었다. 이 시점부터 미국은 군사력뿐 아니라 세계 경제를 지배하는 절대 강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의 제조업은 경쟁력을 잃어갔다. 1985년 플라자 협정 당시 일본 제조업은 세계 시장의 10%를 넘는 수준이었지만, 현재 중국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30%가 넘는다. 중국의 제조업 생산량은 미국, 독일, 일본, 한국, 영국을 합친 것보다 많다. 전 세계 제조업이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고 해도 놀랄 일이 아니다. 여기에 미국의 고민이 있다. 자신들이 어떻게 세계 최강대국이 되었는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현재의 미국은 군함 한 척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 제조업이 국가 경제의 25%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 역시 여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새롭게 출범한 정부의 비전과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민태기 '판타레이' 저자·공학박사, 조선일보(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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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시마
Gary Moore 'Hiroshima'(1984)
태평양 전쟁 종전 80주년을 맞아 일왕 나루히토는 희생자를 기리고 전쟁의 폭력을 상기시키는 위령 여행을 진행 중이다. 6월 19일 일왕은 마사코 왕비와 함께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피해자를 추도했다. 지난 4월 화산섬 이오지마를 시작으로 오키나와에 이은 세 번째 순회이며 9월에는 또 다른 원폭 투하지인 나가사키를 방문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루히토는 지난 2월 자신의 65세 생일을 맞아 종전 80주년 메시지를 발표했다.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지는 오늘날 전쟁을 모르는 세대에게 비참한 체험과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1945년 8월 9일 오전 8시 16분, 한 번도 공습을 받지 않았던 히로시마시의 평화롭고 분주한 아침은 한 개의 폭탄으로 박살났다. 특히 폭심지 근처의 온도는 열복사로 인해 3000~4000도에 이르렀기에 사람들은 시신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증발해버렸다.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에 가면 ‘인영(人影)의 돌’이라는 제목이 붙은 돌계단이 있다. ‘사람의 그림자’라는 말인데 폭발 당시 스미토모 은행 앞 돌계단에 앉아 기다리던 희생자가 폭발과 함께 돌에 검은 흔적만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Still Got the Blues’로 7080 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던 영국 북아일랜드 출신의 하드록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는 비극적인 사건에 대한 곡을 종종 발표했는데 이 노래도 그런 궤적 중에 탄생했다. (그는 직전 앨범에서는 소련의 한국 KAL 민항기 격추를 규탄하는 ‘Murder in the Skies’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 노래의 후반부는 히로시마를 다룬 수많은 노래 중에서 가장 압축적인 진실을 제시한다. “히로시마/순수함이 불타버린 그곳/히로시마/사람들이 서 있던 자리에서 순식간에 그림자로 변해버린 그 곳/히로시마/이 악의 씨앗은 선을 가져오지 않는다(Hiroshima/The place where innocence was burned/Hiroshima/Men came to shadows where they stood/Hiroshima/This grain of evil brings no good).”
-강헌 음악평론가, 조선일보(2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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