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S를 삭제하자 불행하다는.. ] [베란다 식물을 키우다보니… ]
[SNS를 삭제하자 불행하다는 감정이 사라졌다]
[베란다 식물을 키우다보니… 조용히 나도 성장하는 이 기분]
SNS를 삭제하자 불행하다는 감정이 사라졌다
소셜미디어(SNS)는 사회악으로 자주 지목당한다. 실제 개인이나 사회에 끼치는 부작용이 크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광장의 풍경은 말처럼 아름답지 않다. 흐름은 너무나 빠르고 헛소리가 난무하며 나쁜 감정이 화장실 안 곰팡이처럼 퍼져나간다. 그 해악을 알면서도 SNS를 좀처럼 놓지 못했다. 어느덧 일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글로 먹고살게 해준 계기라는 점도 작용했다.
나는 SNS에 쓴 글로 시작해 정식 매체의 기고 제안을 받아 작가 생활을 시작했다. 예전처럼 특정 매체가 정제한 발언만 전파력을 가졌다면 이런 기회를 잡지 못했으리라. 귀중한 만남 기회도 많이 얻었다. 여러 사람과 실제로 마주하는 동안, 내가 타인에게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무슨 인간상을 선호하거나 불호하는지 알게 됐다. 만남을 지속하고픈 사람과 자연스레 친해지는 법, 끊어내야 할 사람과 무례하지 않게 멀어지는 법을 배웠다. 성인 이후 내 삶의 전부였던 공장과 집 혹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선 얻을 수 없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친구한테 한 소리 들었다. “폰에서 SNS 잠깐 지워.”
여름에 바깥 현장 노동은 그 강도가 매우 살벌하다. 나만 힘들면 차라리 낫다. 진짜 문제는 일 대부분이 협업이란 점이고, 타인의 짜증 빈도가 급격히 올라간다는 점. 자연히 육체와 더불어 정신까지 극도로 피로해진다. 아홉 시간 일하고 귀가하면 씻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토록 고된 노동을 주6일 한들 통장에 꽂히는 돈이라곤 고작 250만원 언저리. 이 불합리한 상황에 몇 주 맞닥뜨리고 나니 신세 한탄이 부쩍 늘었다. 돌이켜보니 전부 SNS에서 본 소식 때문이었다. 친구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단톡에 내가 한 말만 싹 정리해 봤다. 부끄러워 죽는 줄 알았다. “남들은 저렇게 잘나가는데 난 이게 뭐람” “대체 뭘 얻기 위해 이토록 힘겹게 일해야 하는 거지?”를 반복하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드나들던 SNS가 나를 대단히 불행하게 만든 셈이었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행동경제학자 리처드 세일러는 ‘너지’에서 자신이 겪은 일을 썼다. 대학원생 시절 친구들을 식사 자리에 초대하면 식전 간식으로 캐슈넛을 낙낙히 접시에 담아주곤 했다. 친구들은 무의식적으로 캐슈넛에 자꾸 손을 댔고 그 결과 언제나 접시는 비었다. 덕분에 정작 본요리는 전혀 즐기지 못했다. 세일러는 고민 끝에 캐슈넛 접시를 중간에 치우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달걀 얘기만큼 단순하지만 효과는 확실한 방식이었다. 불만 가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메인 디시만큼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고맙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이 이야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분명하다. 의식하지 않은 습관이 나쁜 결과로 이어진다면 과감히 끊어내야 한다는 것.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않는 마음은 단단하다. 다만 모두가 콘크리트 심장을 가질 순 없다. 마른 가지보다 간단히 마음이 꺾이는 사람들도 있다. 남과 자꾸 비교하며 불행해지고 자기 연민의 함정에 쉽게 빠진다. 정신이 한계까지 몰린 시기의 SNS는 맹독이다. 못난 마음을 그대로 전시하고 싶은 충동이 들곤 한다. 그때가 진짜 위기다. 내 지질한 모습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나 잠깐 드러내고 말아야 한다. 그 외 사람들에겐 아무리 힘들어도 늘 올바른 척을 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가식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들 어떠하리. 가식은 겉옷이 아니라 속옷이다. 눈에 훤히 뵈는 가식은 매우 얇은 속옷이다. 보기 썩 좋진 않더라도 어쨌든 입는 쪽이 훨씬 낫다. 물론 SNS에 가식을 벗어던진 내 모습을 드러낸다 한들 공연 음란죄로 처벌받진 않는다. 다만 색안경 끼고 보는 사람이 늘어나고 그로 인한 불이익 또한 감수해야만 한다. 굳이 날 안 좋게 볼 사람을 늘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 글을 읽어주시는 고마운 독자 중 힘겨운 시기를 지나는 분, 남보다 삶이 고통스럽다고 여기는 분이 있다면 SNS부터 삭제하길 권하고 싶다. 주변 상황에 관심 끄고 내 앞에 놓인 과제부터 집중해 보자. 약이나 주사처럼 확실한 변화를 느낄 순 없어도 마음 피로가 좀 덜어지는 체감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래도 여전히 힘들다면, 믿어보자. 지금의 시련 끝엔 반드시 달콤한 과실을 베어 물 수 있으리라고.
-천현우 용접공·작가, 조선일보(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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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 식물을 키우다보니… 조용히 나도 성장하는 이 기분
매일 아침 눈을 제대로 뜨기도 전에 베란다로 향한다. 밀짚모자를 푹 눌러쓰고 물뿌리개를 챙겨, 3평 남짓한 나의 작은 정원 앞에 선다. 줄지어 선 화분들은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겨울을 무사히 버텨낸 식물들이 봄기운을 맞아 새잎을 틔워내고 나면, 본격적인 물 주기 전쟁이 시작된다. 뜨거운 여름 볕에 식물들은 물을 쭉쭉 들이킨다. 흙은 금세 마른다. 나는 화분마다 손가락을 꽂아 흙의 상태를 느낀다. 잎의 표정도 살피며 물을 준다. 그렇게 30분쯤 분주히 움직이고 나면 하루가 시작된다. 고요하지만 분주한 시간, 식물과 함께하는 아침은 늘 그런 식이다. 말은 없지만 분명한 신호가 있고, 그 신호에 귀 기울이는 내가 있다.
식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지 어느덧 5년이 흘렀다. 지인에게 선물 받은 몬스테라 화분이 시작이었다. 몬스테라는 ‘몬스터’라는 어원 그대로 괴물같이 자라났다. 빛도 크게 들지 않는 거실에서 영양제 하나 없이 물만 먹고도 멈출 줄 모르고 자라났다. 원래 담겨있던 화분이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을 만큼 자랐을 때 인터넷에서 가지를 치는 법을 배웠다. 가지를 잘라 새로운 화분에 심기를 몇 번 반복하니, 화분이 하나둘 늘어 결국 지금의 작은 정원이 되었다.
지금에야 주변에서 ‘식물 박사’로 통하지만, 처음부터 식물을 잘 키운 것은 아니다. 물을 어떻게 줘야 하는지도 몰랐다. 인터넷에 나와 있는 ‘일주일에 한 번’이라는 말만 믿고 무턱대고 흠뻑 줬다가 뿌리를 썩히기도 했다. 반대로 바쁜 일상에 방치해 말려 죽인 적도 있었다. 아마 내 주변에서 식물을 가장 많이 죽여본 사람은 다름 아닌 나일 것이다. 사실 매일 들여다봐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게 성가시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럼에도 내가 식물을 계속 돌보는 이유는 단순하다. 흙을 만지고 물을 붓는 그 짧은 순간만큼은 머릿속이 고요해지기 때문이다. 언제나 불필요한 정보로 가득한 머릿속이 그 30분 동안만큼은 빈칸이 된다. 몸을 움직이면서 하는 명상 같기도 하다.
그래, 나에게는 명상이 필요했다. 식물은 나를 잠시나마 현실과 떨어트려 다른 세계로 데려가 주고 있었다. 여유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질 만큼 틈 없이 흘러가던 하루 속에 식물은 의도적으로 멈춰야만 하는 순간을 만들어주었다. 물을 주기 위해, 흙을 만지기 위해, 잎을 보기 위해 나는 반드시 속도를 늦춰야 했다. 그 잠깐의 멈춤으로 비워낸 시간 덕분에 하루가 조금 덜 거칠어진다. 여전히 해내야 하는 일은 많고, 걱정도 끝이 없다. 하지만 아침에 식물과 나눈 침묵 덕분에 마음속 중심을 되찾는 느낌이 든다. 세상에 쫓기기보다는 내가 내 삶을 주도하고 있다는 감각, 그 미세한 차이가 하루를 다르게 만든다.
식물은 오늘 물을 줬다고 내일 새잎이 돋지 않는다. 가지치기를 했다고 당장 싱그러워지지도 않는다. 겉으론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뿌리 아래에선 조용한 성장이 시작되고 있다. 식물 앞에서는 속도가 무력해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지만 보챈다고 서둘러 자라지 않는다. 손에 쥔 스마트폰은 쉴 새 없이 울리고, 알고리즘은 내게 스스로 생각할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흙을 만지고 물을 붓는 일은 나름의 저항이 된다. 침묵과 느림을 통해 잃어버린 시간감각을 조금씩 되찾는다. 덕분에 내 삶에도 조금씩 여백이 생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그 시간 속에서 나도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눈에 잘 띄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성장을, 식물은 날마다 말없이 가르쳐 준다. 그 믿음 하나로 오늘도 나는 하루를 시작한다.
-강민지 ‘따님이 기가 세요’ 저자, 조선일보(25-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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