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명(明)나라]
[明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명(明)나라]
明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
부지런했으나 의심 많고 조급해 명나라 망쳐
중국에서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1611~1644)를 다룬 한 역사서가 지난달 중순 갑자기 회수 조치되는 일이 일어났어요. 명나라 역사 전문가 천우퉁이 쓴 '숭정: 부지런히 정사를 돌본 망국 군주'라는 제목의 책인데 9월 출간 이후 한 달여 만에 중국 서점에서는 물론, 인터넷 전자책까지 모조리 사라졌다고 해요. 이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나오고 있어요. 그중에는 이 책이 숭정제에 빗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풍자했다고 판단한 중국 당국이 책을 회수한 것이라는 분석이 많아요. 숭정제가 어떤 황제였기에 이런 해석까지 나오는 걸까요?
소실 소생이었으나 이복형 요절로 즉위
명나라 마지막 16대 황제 숭정제의 본명은 주유검으로, 태창제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났어요. 태창제는 숭정제의 어머니를 총애하지 않았고, 숭정제는 소실 소생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복형 천계제가 22세 나이로 요절하고 천계제의 아들들마저 모두 일찍 죽자, 그는 1627년 16세 나이로 황제 자리에 올랐습니다.
당시 명나라는 환관의 지나친 정치 개입으로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어요. 특히 천계제 때 환관 위충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위충현은 천계제 즉위 전부터 그의 시중을 들며 황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천계제가 즉위하자 엄청난 권세를 누렸어요. 천계제는 그에게 모든 일을 일임했고, 환관 세력은 내각과 행정 기관 6부뿐 아니라 비밀 정보기관인 동창과 서창, 황실 호위를 맡는 금의위 등을 모두 장악했어요. 그의 국정 농단이 심해지자 위충현을 파면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
숭정제도 그의 위세를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즉위 직후부터 밤잠을 이루지 못하며 환관이 진상(進上)하는 음식도 먹지 못할 정도로 고민했답니다. 하지만 섣불리 그를 건드렸다가는 큰코다칠 수 있다는 생각에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전략을 택했어요.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을 섬겨왔던 환관과 측근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신변을 보호하고자 했죠. 시간이 흐르며 점차 위충현을 탄핵하라는 상소가 연이어 올라왔어요. 위기에 몰린 위충현은 자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해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후 약 2년간 그와 관련된 관리 260여 명이 사형이나 파직을 당했습니다.
의심 많은 성격, 독이 되다
숭정제는 환관 세력 때문에 붕괴 지경에 이르렀던 국가조직을 정비하고, 민생 안정에 노력을 기울였어요. 그는 경전을 읽으며 역대 성군과 어진 신하들의 정치와 가르침을 배우고자 했고, 조정에 나가 대신들과 국사를 의논했어요. 집권 초부터 모든 관리에게 '벼슬에 기대어 금전을 탐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강조했어요. 자신도 재위 17년 동안 근검절약했고 황궁에서 어떠한 대규모 토목공사도 벌이지 않았어요. 백성의 부역을 덜어주고 재화 낭비를 막기 위해서였죠.
하지만 그에게는 의심이 많다는 결점이 있었습니다. 성격이 조급하고 눈앞의 성과에만 집착해 조금만 문제가 생겨도 신하들을 내치거나 처단했어요. 농민반란을 진압할 때에도 국방 최고 책임자인 병부상서가 수시로 바뀌었고, 전장에 파견한 장수도 조금만 의심이 들면 파면했어요. 또 일이 잘못되면 신하들에게 책임을 미뤘어요. 죽기 직전 작성한 유서에도 '나라가 혼란해진 것은 모두 신하들 탓'이라는 내용이 쓰여 있었죠. 그렇게 그의 재위 기간 무려 40여 명의 각료가 파면되거나 사형당했어요. 그러다 보니 모두가 책임을 피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일하지 않게 됐습니다.
그의 가장 큰 실수도 이 의심에서 비롯됐어요. 17세기 북쪽에서는 만주족이 후금(후일 청나라)을 세우고 명을 위협하고 있었어요. 그들은 산해관 이남으로 진출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죠. 하지만 당시 국방 수비를 맡은 병부상서 원숭환이 방어선을 탄탄히 구축하며 맞섰죠. 청은 의심 많은 숭정제의 성격을 이용하기로 합니다. 원숭환이 청과 내통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고, 원숭환을 시기하던 무리가 이를 틈타 '원숭환이 무리하게 청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으려 한다'고 숭정제에게 고했죠. 결국 황제는 그를 불러들여 능지처참에 처하게 했습니다. 명나라 역사서에는 '원숭환이 누명을 쓰고 죽은 뒤로, 명에서는 더는 변방의 일을 맡을 인재가 없었다. 이때부터 명나라는 사실상 패망의 길을 걷게 됐다'고 기록돼 있어요. 실제로 명나라 군대는 청의 공격에 속수무책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농민반란으로 무너지다
하지만 명을 무너뜨린 것은 청이 아닌 내부 농민반란이었어요. 당시 자연재해가 끊이지 않았는데, 특히 산시성 일대에서는 거의 해마다 자연재해가 발생했어요. 상소문에는 백성이 나무껍질을 먹고, 이마저도 없으면 돌을 캐어 먹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급기야 어떤 지방에서는 사람을 잡아먹는 극단적인 일까지 벌어졌어요. 17세기 중반엔 전염병까지 퍼져 시신이 들판을 가득 채웠죠. 하지만 숭정제는 청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징수했어요. 결국 생활이 어려워진 농민들은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각지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대표적 인물이 이자성이에요. 그는 산시성 일대에서 세력을 확장했고, 가는 곳마다 부잣집 창고를 열어 가난한 사람에게 곡식과 재물을 나눠 주며 절대적 지지를 얻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1644년 시안에서 국가 이름을 '대순'으로 정하고 스스로 황제가 됐습니다. 이자성은 군사를 일으킨 지 두 달 만에 파죽지세로 베이징을 함락했어요. 당시 명은 농민반란을 쉽게 진압할 수 있다고 보고 주력부대를 산해관에 배치했는데, 이것이 큰 패착이었죠.
다급해진 숭정제는 대신들을 찾았으나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고, 오직 태감 왕승은만 그의 곁에 남아있었어요. 숭정제는 황후와 비빈들에게 자결을 명했고, 자식들은 피신하게 하거나 자기 손으로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왕승은과 함께 황궁 뒤 산으로 올라가 극단적 선택을 했습니다. 그의 나이 33세, 매우 쓸쓸하고 이른 죽음이었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조선일보(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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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明)나라
홍무제-주원장(洪武帝-朱元璋)
대명(大明), 또는 명나라(明朝)는 1368년부터 1644년까지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로, 중국 역사상 최후의 한족 통일왕조이다. 모두 16명의 황제가 있었고 277년간 존속했다. 홍무제와 영락제의 재위 시기에 거대한 운하와 수로가 건설되어 농업 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고, 군사력도 증대되어 주변 국가들을 정벌하는 등 전성기를 맞았으나, 이후 만력제와 천계제와 같은 암군들이 나오며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청나라의 거듭되는 침략과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명나라의 황족과 유신들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남명 정권을 세웠으나, 고질적인 내분과 무능함으로 결국 1662년 경에 청나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홍무제는 당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었던 농촌 지역들을 발달시켜 엄격한 사회 제도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통하여 군사력 증강을 꾀하였던 것이다. 이같은 정책은 큰 성공을 거두었고, 명나라는 백만 명에 달하는 상비군을 소유하고 난징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군항을 짓는 등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게 되었다. 홍무제는 원나라를 교훈삼아 환관들, 그리고 재력가들의 영향력을 최대한 줄이고자 하였고, 장자 계승 원칙을 확립함과 동시에 후대의 황제들을 위하여 황명조훈을 집필하여 절대적인 황권을 구축하려 노력하였다. 허나 그의 뒤를 이어 즉위한 건문제가 정난의 변으로 인하여 쫒겨나고 연왕 주체가 영락제로 즉위하며 점차 이같은 장자 계승 원칙은 점차 무너지게 되었다. 영락제는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하였고, 자금성을 지었으며 대운하를 정비하였고 과거제를 재시행하였다. 그는 환관들을 주로 등용하여 신권을 잡고 있던 유교 사대부들을 견제하려 들었고, 결과적으로 환관들의 권력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 이 환관들 중에서는 정화의 원정으로 유명한 환관 정화도 있었다. 정화는 인도양을 건너 아라비아와 동아프리카까지 다녀오며 명나라의 권위를 해외에 과시한 업적을 남겼다.
명나라는 영락제 사후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정통제가 토목의 변으로 오이라트족에게 잡히면서 명나라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고, 해군력은 정부의 무관심 속에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명나라는 대신 노동력을 징발하여 유조변과 만리장성 등을 개축하였고 북방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큰 성과는 내지 못했다. 명나라는 세제를 개혁하고 정치제도를 개편하는 등 일련의 개혁조치들을 취했으나 세금을 회피하려는 사람들과 고착화된 관료제 등으로 인하여 큰 성과를 보지 못했다. 명나라 후기에는 인구가 거의 1억 6천만 명에서 2억 명에 달하였으나, 수탈을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면세 혜택이 있는 환관들이나 사찰들로 대거 자발적으로 들어가면서 정작 중앙 정부의 세입은 갈수록 줄어들었다. 또한 이 때에 명나라 조정은 왜구들과 해적들의 약탈을 피하기 위하여 해안 지방에 해금령(海禁令)을 내려 해외 무역을 엄격히 관리하였다.
16세기에는 점차 유럽의 팽창적인 해외 무역 정책이 중국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하였다. 명나라는 마카오와 같은 항구들에서만 이들과의 교역을 제한적으로 허가하였는데, 이 항구들을 통하여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수많은 작물들이 국내로 유입되었다. 이 때 고추가 들어와 쓰촨 요리에 큰 영향을 주었고, 생산성이 매우 높은 고구마와 감자 등이 새롭게 경작되기 시작하였다. 이로 인하여 기근과 가뭄의 영향이 크게 줄어들었고 인구가 크게 늘어났다. 네덜란드, 스페인, 포르투갈 상인들은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중국제 상품들을 사가기 위하여 아메리카 대륙, 일본 등에서 들여온 은을 명나라에게 대금으로 지불하였다. 이렇게 유입된 은은 명나라의 경제를 대대적으로 촉진하였으며 나중에는 세금을 은으로 걷을 정도로 사회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다만 초기에 유교 정통론자들은 상업이 발달하여 사회에서 농업을 밀어내고 주요 산업으로 떠오르는 것에 반대하였으나, 왕양명 등의 개혁가들이 더 관용적인 양명학 등을 개창하며 점차 반발이 줄어들었다. 이후 소빙하기로 인하여 농업 생산이 줄어들고 유럽 세력들이 중국에 지나친 양의 은이 유입되는 것을 막는 정책을 펴며 명나라의 경제에도 어느 정도 타격이 있었으나, 재상 장거정이 일부 성공적인 개혁 조치를 펼치며 진정되었다. 하지만 장거정이 세상을 떠나자 명나라는 전염병, 가뭄,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들에 시달리며 사회가 급격히 불안정해졌고,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결국 농민 출신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하여 순 왕조를 세웠고,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자금성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고야 만다. 이후 이자성의 반란군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게 무너졌고, 청나라가 새로운 중화 대륙의 통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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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
원나라 말기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는 14세기에 들어와, 점차 그 병폐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원나라는 법에 한족 차별을 공공연하게 명시하고 있었고, 몽골족이 아닌 민족들은 혹독하게 차별하였기에, 원나라가 흔들리기 시작하자 그동안 쌓여왔던 한족들의 불만은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원나라 조정의 경제적인 실정이 겹치며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나고, 황허가 범람하며 수많은 토지들이 버려지며 생산량이 크게 줄어들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 지자 1351년에는 홍건적의 난이 일어났다. 홍건적은 불교 비밀결사단체인 백련교가 주도하였다. 이때 무일푼인 농부이자 승려였던 주원장이 1352년에 홍건족 군대에 합류하였고, 그는 반란군 지도자의 딸과 결혼하며 명성을 쌓아나가기 시작하였다. 1356년에는 주원장이 이끄는 반군이 난징을 점령했다. 후에 주원장은 이 곳에 명 황조를 건국하게 된다.
원나라가 흔들리자, 나라 곳곳에서는 수많은 반란군들이 일어났으며 자기들끼리도 새 왕조의 주도권을 잡기 위하여 끊임없이 대립하였다. 1363년, 주원장은 파양호 대전에서 그의 라이벌이었던 진우량을 꺾은 후 한족 반란군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얻어냈다. 파양호 대전은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해전으로 여겨진다. 주원장은 2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65만 명에 달하는 진우량의 군세를 꺾는 데 성공했고, 이 역사적인 승리는 결국 주원장을 압도적인 지도자로 만들었다. 주원장은 양쯔강 이남에서 가장 강력한 반군 세력으로 떠올랐으며, 이후에도 영향력을 끊임없이 굳혀나갔다. 1367년에는 홍건적의 지도자들이 주원장이 초대한 연회에서 알수 없는 이유로 죽었고, 이들마저 없어지자 더이상 중국에는 주원장의 새 왕조 건국에 반대할 세력들이 남아있지 않았다. 세를 다잡은 주원장은 1368년에 원나라의 수도였던 대도에 군사를 보냈고, 이미 망해가던 원나라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원 순제(토곤 티무르)는 수도를 버리고 상도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주원장은 대도에 있는 원나라 궁전을 불태워버린 후, 새 왕조인 명나라의 건국을 선포하였다. 그 직후 대도는 '베이핑'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주원장은 '홍무'를 자신의 연호로 삼았다.
홍무제의 통치
홍무제-건문제-영락제
홍무제는 원나라의 실정을 극복하기 위해 즉위하자 마자 국가 기반시설을 다지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그는 48km에 달하는 벽을 난징에 쌓았고, 그와 함께 새 관청들과 황궁도 지었다. 명사에는 1364년부터 이미 주원장이 유교에 기반한 새로운 법전인 대명률을 만들고 있었다고 적혀있다. 대명률은 1397년에 편찬이 끝났으며, 653년에 만들어진 당나라 시절의 법전을 참고하여 만들어졌다. 홍무제는 위소제라는 이름의 군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위소제는 당나라의 부병제와 비슷한 제도였다. 또한 이갑제를 실시하여 지방과 국민들에 대한 통제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하였다.
1380년, 홍무제는 명나라 건국의 공신이자 당시 재상이었던 호유용에게 역모 혐의를 씌워 처형해버렸다. 이후 그는 재상이 있던 중서성을 대폭 축소, 폐지하였고 6부의 직속 상관을 황제로 지정하여 이 권한들을 대거 황제의 것으로 가져왔다. 홍무제는 점점 더 공신들과 대신들에게 의심을 키워갔고, 결국에는 비밀경찰 조직인 금의위를 창설하여 신하들을 끊임없이 감시하며 의심가는 자는 누구든지 숙청했다. 대략 10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홍무제는 재위 내내 원나라의 풍습을 금지하는 칙령을 여러 차례 내렸고, 이민 왕조의 통치로 '더렵혀진' 한족들의 문화를 정화하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다만 원나라의 정책들 중 쓸모 있다고 여겨진 것은 그대로 시행했다. 예를 들어 한반도의 고려에게 끊임없이 환관과 궁녀를 그대로 바치라고 요구한 것이다. 또한 몽골식의 군사 훈련법, 몽골의 영향을 받은 의복과 모자들, 몽골식 궁술과 승마술은 그대로 유지하였다. 명나라는 초기를 제외하고는 몽골 출신 신료들도 그대로 임용하여서, 16세기 말에는 몽골인들이 금의위에도 진출했을 정도였다. 홍무제는 몽골, 일본, 고려, 여진, 티베트의 왕들에게 일종의 '조언' 내지 명령을 여러차례 써 보내어 그들이 명나라의 수도를 방문하여 경의를 표할 것을 종용하였다. 그는 10만 명에 달하는 몽골인들을 쫒아내지 않고 중국 내부에 그대로 남겨두었다.
발전과 번영
영락제의 통치
1398년 홍무제가 죽자, 의문태자 주표의 아들인 황태손 건문제가 새 황제로 즉위했다. 허나 건문제와 홍무제의 가장 강력한 아들이었던 연왕 주체 사이에서 불화가 일어나, 결국 베이징을 중심으로 북방의 방비를 맡았던 주체가 반란(정난의 변)을 일으켰다. 주체는 노회한 대신들에게서 어린 건문제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변을 일으켰으나, 실제로는 난징에 있는 황궁과 함께 건문제, 그의 아내와 어머니, 신하들까지도 모두 죽여 태워버렸다. 1402년 주체는 수도 남경을 점령하고, 건문제에게서 '제위를 찬탈'하고서 스스로 황제로 즉위했다. 그가 바로 제3대 황제 성조 영락제이다. 영락제는 매우 유능한 황제였고, 학자들은 보통 그가 '두 번째 건국'을 이루었다고 평할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다만 영락제는 홍무제의 정책 대다수를 뒤집으며 명나라를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바꾸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천도와 정벌 사업
영락제는 즉위한 직후, 원래 수도였던 난징을 버리고 1403년에 자신의 힘이 강했던 베이징으로 수도를 천도했다. 새로운 수도의 건설은 1407년에서 1420년까지 지속되었다. 수 백만 명의 일꾼들이 동원되었다. 이 때 베이징 내성이 건설되었고, 특히 이 때 자금성이 건설되는 등 많은 토목사업들이 진행되었다. 1553년에는 외성이 베이징 남쪽에 추가적으로 건설되었고, 베이징 성내의 넓이를 거의 2배 넘게 넓혔다.
1405년부터 영락제는 그가 총애하던 환관 정화에게 거대한 해상 함대를 맡겨 해외 원정을 떠나게 했고, 이를 정화의 원정이라고 한다. 중국인들은 한나라 이래로 끊임없이 해외로 사절들을 보내고 국제 무역을 하기는 하였으나, 정화의 원정은 규모와 동원된 선박 수 면에서 이같은 선례들을 훨씬 초월했다. 총 7번의 원정이 있었으며, 난징 조선소는 1403년부터 1419년까지 2천 척에 달하는 배들을 건조했다. 어떤 배들은 길이가 112m에서 134m까지 이르렀으며, 너비는 45m에서 54m였을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배였다.
영락제는 중국의 앞선 인쇄술 기술을 이용하여 중화 문명을 퍼뜨리기 위해 전세계에 책을 전파했다. 이뿐만 아니라 몽골, 베트남 등의 지역들에 군사 원정도 수없이 실시하여 명나라의 국경도 크게 넓혔다. 이때 베트남이 한시나마 중국의 통치하에 들어갔으며, 1406년에 시작된 이 식민 통치기는 1427년에 베트남의 국민 영웅 레 러이가 게릴라 전투를 통해 명나라를 쫒아내고 레 왕조를 세우며 끝나게 된다.
토목의 변
한편 몽골 고원에서 서 몽골의 오이라트가 힘을 얻어 몽골을 제압하고 명나라에 침공을 가했다. 그러자 1449년, 영종은 측근인 환관 왕진의 부추김으로 오이라트 원정에 나섰다. 황제는 그의 이복형제인 주기옥을 수도에서 내정을 섭정으로 관리하도록 맡겼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오이라트 국경으로 향했다. 허나 9월 8일, 에센 오이라트 군대는 정통제의 군대를 박살냈고 정통제는 산채로 포로로 잡히는 대치욕을 당했다. 이를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허나 정통제가 잡혔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수도의 섭정 주기옥이 새로운 황제인 경태제로 즉위하였고, 경태제의 유능한 대신인 우겸이 오이라트 족에게 매우 강경하게 대응하여 이들을 쫒아내는 데에 성공하자 오이라트 군대는 더이상 정통제를 인질로 잡고 있어보았자 별다른 이익이 없을 것이라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들은 정통제를 죽이는 대신 명나라로 살려 보냈고, 정통제는 수도에 도착하자 마자 선황이라는 허울좋은 칭호를 가지고 가택연금되었다. 하지만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정통제가 1457년에 경태제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켜 다시 황위를 되찾게 된다. 이때부터 정통제는 새로운 연호를 쓰기 시작하였고, 이 시기부터는 천순제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즉 정통제와 천순제는 동일 인물인 것이다. 천순제는 돌아온 이후에도 몽골과의 전투에서 별다른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며 명나라의 국력을 조금씩 깎아먹었다. 1461년 8월 7일, 장군 조흠과 그를 따르는 병사들이 황제의 숙청 작업에 말려들까봐 염려하여 미리 천순제를 상대로 난을 일으켰다. 조흠 장군의 군대는 황성의 서쪽과 동쪽 문에 불을 지르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비가 내리며 불이 꺼졌고, 수도 외곽에서 황제의 친위군이 몰려오면서 결국 자결하며 난에 실패했다. 이를 조흠의 변이라고 한다.
한편 영락제가 이전에 5번이나 대대적인 군사적 원정을 실시하여 몽골족들을 만리장성 너머로 쫒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오이라트 족과 몽골인들은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까지 끊임없이 명나라의 부를 노려 국경 내부로 침입하였다. 이런 일에도 불구하고 영락제 이후 암군들이 연이어 등장한 명나라는 딱히 이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으며, 할 의도도, 힘도 없었기에 백성들의 고통은 늘어만 갔다. 게다가 만리장성은 이때 딱히 방어적인 용도로는 쓰이지 못했고, 기껏해야 야만족들의 침입을 수도에 알리기 위해 봉화를 올리는 용도로 가장 많이 쓰였다.
16세기에 들어서 왜구가 중국인 밀교역상인과 연대하여 활동을 시작해 해안 지역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당시 왜구는 한 번에 200여 척이 넘는 함대를 이끌고 오는 등 이미 단순한 해적에서 벗어나 국제적인 골칫거리가 되어 있었으며, 그 무장도 상당하여 중국 해안 지방들에게는 크나큰 위협이었다. 게다가 몽골에서는 쿠빌라이 칸의 자손이라고 칭한 다얀 칸이 즉위하여 오이라트에 대항해 몽골의 재통일을 이룩하며 명나라 북부의 안정을 위협했다. 오르도스 지방에 분봉된 다얀 칸의 손자 알탄 칸은 16세기 중기부터 빈번하게 중국에 침입하여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 시대 명나라를 괴롭히던 왜구(무로마치 막부 시대)와 몽골을 가리켜 북로남왜(北虜南倭)라고 불렀다.
명의 쇠락기
만력제-태창제-천계제-숭정제
만력제의 통치
조선에서 일어난 임진왜란에 지원군을 보낸 명나라는 이때문에 엄청난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게다가 이때 명나라의 황제는 역사상 최악의 암군으로 평가받는 만력제였는데, 만력제의 무능과 정치 방기가 계속되며 명나라는 갈수록 수렁에 빠져들어갔다. 만력제는 초기에는 유능한 조언자들과 실무진들을 거느리며 열정적으로 국사에 임하려 하였다. 그의 스승이자 재상이었던 장거정은 효과적인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국정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하지만 장거정이 죽자 그만한 능력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지 않았고, 관료들은 서로 뭉쳐 소모적인 논쟁이나 일삼기 시작했다. 게다가 장거정이 죽은 이후 만력제는 정치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리고 관료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에 지쳐 아예 국정을 방치하는 수준으로 내버려두었다. 그는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금성의 벽 뒤에 갇혀 살았으며, 거의 신하들을 만나지 않으며 태업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관리들은 정국 주도권을 잃어갔고, 그나마 황제의 얼굴이나마 볼 수 있었던 환관들이 점차 정국을 좌지우지하기 시작했다. 국사를 논하고 싶어하는 모든 고관들은 환관을 통하여 황제의 뜻을 전해들어야 했으며, 그마저도 제대로 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에 명나라는 점차 파탄으로 치달았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에는 유교 학자 집단인 동림당의 당쟁, 국본쟁과 만력태정 등의 문제가 발생했으며 대외적으로는 만력삼대정과 만주지역에서 후금이 흥기하는 등의 대대적인 문제가 터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만력제 시기에 명나라가 완전한 쇠락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간주된다.
태창제, 천계제의 통치
1620년 만력제 사후 그의 장자 주상락(朱常洛)이 등극하여 광종 태창제가 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망하고 그의 아들 희종 천계제가 즉위하였다. 천계제는 즉위 초기 유교 학자 출신의 동림당 인사를 대거 등용하였으나 당쟁이 격렬해지자 천계제 역시 정사에 뜻을 잃었다. 그 기회를 틈타 총애받는 환관 위충현이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동림당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위충현을 중심으로 결집하였고, 이들은 정적으로부터 엄당(閹黨)이라고 불렸다. 1624년 엄당이 내각을 차지하였고, 위충현은 정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위충현은 동림당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여 1625년 전국의 서원을 철폐하고 수많은 동림당 인사가 투옥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의 행정 기능이 약화되었고 각지에서 민변이 발생하였으며, 후금과 몽골이 변경을 위협하였다. 위충현은 황제의 무덤을 지을 돈을 빼돌려 그를 기리기 위한 사원을 짓는 등의 패악을 부렸으며, 그의 가족들은 온갖 관직들을 독점하며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결국 1627년 천계제가 중병이 들자 그의 동생 주유검이 뒤를 이었는데 그가 마지막 황제 숭정제이다.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
숭정제의 통치
숭정제가 즉위한 이후, 숭정제는 곧바로 위충현의 세력을 제거하고 조정 내외의 폐단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숭정제가 의도한 개혁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1629년, 만주에서 세력을 키운 만주족의 지도자 홍타이지가 장성을 돌파하여 북경까지 이르게 되자, 숭정제는 방어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나마 명나라에 남아있던 마지막 명장 원숭환을 사형에 처하였다. 이는 결국 명나라의 몇 남지 않는 군력마저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홍타이지는 그 이후에도 6차례에 걸쳐 장성을 돌파하였으며 직예와 산동 지역을 유린하였다. 때문에 당시 직예 지역은 전란이 그치지 않고 전염병이 횡행하였기 때문에 민심이 흉흉하였다. 동북지역의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었고 청나라의 군대가 장성을 압박하였다. 마침내 1640년 청나라가 금주(錦州) 등 지역을 점령하고 명나라의 주력 군대를 격파하였다. 홍타이지는 명나라의 주요 장수인 홍승주(洪承疇) 등을 포로로 잡았으며 이에 명나라의 전선은 산해관(山海關)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산해관을 지키던 장수가 바로 오삼계였다. 이 시기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발생하였는데 그 중에서 이자성이 가장 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이자성은 서안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하고 북경으로 진격하였다. 1644년 이자성의 군대가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경산에서 목을 매 자살하였고, 이를 공식적으로 명나라의 멸망으로 본다. 한편 산해관의 오삼계는 수도가 반란군에게 포위되었고 황제가 위험하다는 소식을 듣고 수도로 진군하였는데, 진군 도중 이미 숭정제가 자살했다는 소식을 접한 뒤 결국 청나라와 힘을 합쳐 명나라 멸망에 앞장서게 된다. 남아있는 명나라의 황족과 관료들이 남경에서 남명을 세우고 청나라에 계속 저항하였다.
디아스포라
명말청초의 변혁기 속에서 일부 한족들은 앞서 언급한 바 정씨 왕국이 지배하는 대만으로 가기도 하고, 다른 부류는 조선으로, 또 다른 부류는 일본의 나가사키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에도 막부가 지정해주는 장소에 모여 살았는데, 이것이 오늘날 나가사키 차이나타운의 기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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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의 관계
조선 시대의 전통적인 외교정책의 하나로는 중국의 왕조에 대해서 사대정책을 취하는 것이었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 이전부터 친명정책(親命策)을 표방하였으며, 개국하게 되어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새 왕조의 승인을 청하고 국호도 화령(和寧)·조선의 둘을 지어 보내서, 조선이란 국호를 선택받아 사용할 정도였다. 그러나 명나라에 대해서는 여전히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란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朝鮮國王)”의 금인(金印)을 받아 정식으로 왕(王)에 책봉된 것은 1401년(태종 1)에 이르러서였다. 그 뒤로 국왕의 즉위에는 반드시 명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죽었을 때에는 이를 알려서 시호를 받았으며, 또 종속(從屬)의 상징으로 명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한편 성절사(聖節使)·천추사(千秋使)·정조사(正祖使)·동지사(冬至使) 등 정기적인 사행(使行) 및 그때그때의 필요에 따라 사신을 명나라에 보내어 형식적으로 정치적인 종속관계를 맺게 되었지만 직접적으로 정치의 간섭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와 실질적으로 유대를 맺게 되는 것은 조공과 회사(回賜)의 형식을 통한 양국 간의 접촉에서였다. 파견하던 사행(使行)에는 일정한 액수의 공물을 바쳐야 되었는데, 그 중요한 것으로는 금은(金銀)·마필(馬匹)·인삼·저포(苧布)·마포(麻布)·석자류(席子類)·호피(虎皮)·나전(螺銓) 등이었으며 때에 따라 처녀와 환관(宦官)의 요구도 있었다. 이 중에서 국내 생산이 부족한 금은의 세공은 커다란 부담이 되어 국내에서는 함경도 단천(端川)의 금광을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채광(採鑛)을 장려하며 민간의 사용을 제안하였으나 여전히 부족하였다. 때문에 금은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대신 다른 토산물을 바칠 것을 청하여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마필(馬匹)·포자(布子)로써 대납할 수 있게 되었다. 조공에 대한 명나라에 회사품(回賜品)으로는 각종의 견직물(絹織物)·약재·서적·문방구 등이 있었다. 조공과 회사는 일종의 관무역(官貿易)으로서 그 경제적인 의의도 컸다.
이와 같은 관무역 외에 사신이 서로 내왕할 때마다 북경(北京)에서는 회동관, 서울에서는 태평관에서 두 나라 사이의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명나라에 조공을 하기 위하여 국내의 물산을 거둬들이며, 아울러 명나라의 우수한 물산이 국내에 들어오게 됨에 따라 국내 산업은 위축되고, 금은·인삼 등을 비롯한 각종 무역의 통제는 일반적으로 상업 활동을 침체케 하는 결점도 있었으나, 선진국인 명나라와의 교섭은 귀족의 생활 향상과 문화의 발전에 이바지한 바도 많았다. 명나라와 조선 정부는 국초부터 오랜 숙제였던 종계변무문제(宗系辨誣問題)도 선조 때에는 해결됨으로써 두 나라 사이의 친선관계는 더욱더 두터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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