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송 논쟁(禮訟論爭)] [붕당정치(朋黨政治)]
[예송 논쟁(禮訟論爭)]
[붕당정치(朋黨政治)]
예송 논쟁(禮訟論爭)
상복 두고 싸운 '소모적 정쟁'일까…
조선 정치철학 논쟁이기도
정치권에서 국정과 별 상관없는 문제를 둘러싸고 치고받는 싸움을 할 때마다 언론에서 나오곤 하는 말이 있죠. “21세기판 ‘예송(禮訟) 논쟁’이다!”
국민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한가하게 예송 논쟁이나 하고 있느냐는 말부터, 사실 예송 논쟁은 예법 문제를 빌미로 벌인 당파 간의 지배권 싸움이라는 해석까지 여러 말들이 나옵니다. 모두 예송 논쟁이 ‘민생과 무관하게 쓸데없는 걸 가지고 벌였던 정쟁’이란 인식을 가지고 있어요. 정말 그랬을까요? 아니, 예송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조선의 예법을 상징하는 건물인 서울 종로구 종묘 정전(正殿) 전경. 종묘는 왕·왕비의 신주(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국가 사당이에요. 조선 건국(1392년) 직후인 1395년에 세워졌답니다. /국가유산청
조선 18대 임금이 누군지 아세요?
잠깐 퀴즈 하나 내 볼게요. 조선 왕조엔 초대 태조부터 마지막 순종까지 모두 27명의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들 중에서 드라마에 가장 적게 등장한 임금은 누구일까요? 아마도 18대 왕 현종(재위 1659~1674)일 겁니다. 효종의 아들이자 숙종의 아버지로, 재위 기간이 그렇게 짧지도 않은데 인지도 자체가 낮습니다. 오히려 거란의 침략을 막아낸 고려 현종, 양귀비의 남편이었던 당나라 현종이 더 유명하죠. 조승우가 수의사 역으로 주연을 맡았던 ‘마의’가 현종 시대를 다룬 매우 예외적인 드라마입니다.
도대체 왜 그럴까요? 추측건대 현종 때 일어난 두 가지 큰 사건이 모두 극으로 만들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겁니다. 하나는 ‘경신 대기근’입니다. 경술년인 1670년에서 신해년인 1671년까지 이어진 이 대기근은 세계적인 ‘소(小)빙하기’라 불리는 시기에 발생했어요. 이상 기후의 여파로 전염병이 돌고 식량난이 발생하며 조선 전역에서 약 1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대참사였어요.
그리고 또 하나가 바로 예송 논쟁이었습니다. ‘예송’의 ‘송(訟)’ 자엔 ‘다투다’ ‘논쟁하다’란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실 ‘예송 논쟁’은 동어반복이 됩니다. 하도 복잡하고 골치 아픈 내용이라 드라마에서 제대로 다룬다면 시청률이 뚝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도 있어요.
둘째 아들인 임금이 승하하면 무슨 상복을 입나?
예송의 시작은 1659년 효종이 승하하면서였어요. 효종의 아버지 인조는 왕비 인열왕후가 죽자 장렬왕후를 계비로 삼았는데, 열네 살 어린 나이에 시집간 장렬왕후는 의붓아들인 효종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습니다. 인조의 장남은 인열왕후가 낳은 소현세자였으나 일찍 죽었기 때문에 인열왕후의 차남인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죠. 그런데 효종이 죽자 문제가 생겼던 겁니다.
‘효종의 계모 장렬왕후는 과연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 건가?’
아뿔싸, 이게 논쟁거리가 됐던 건, 조선 성종 때 마련된 공식 예법서 ‘국조오례의’에 이 경우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허목 등 남인은 장남에 대한 예로서 3년 기간의 ‘참최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송시열·송준길 등 서인은 중자(衆子·장남이 아닌 아들)에 대한 예로서 1년 기간의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반박했습니다.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니 국통을 이은 장남이 된 것”이라 해석했으나, 서인은 “왕이 됐어도 차남은 차남”이라고 맞섰습니다. 이것이 제1차 예송 또는 기해예송이라 하는 논쟁으로 일단 서인 측의 승리로 끝났죠. 그런데 사실 서인의 주장에는 ‘현 임금인 현종은 인조의 차남인 효종의 아들이므로 정통 혈통이 아니다’라는 위험한 논리가 숨어 있었던 셈이고, 이 점을 건드린 사람이 남인이자 ‘어부사시사’의 작가로 유명한 윤선도였으나 서인의 역공으로 귀양을 갔습니다.
조선 시대 문인 윤선도(1587~1671) 초상. 대군 시절 효종의 스승이었어요.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집권 세력인 서인과 맞서다가 20년 넘게 유배 생활을 합니다. '어부사시사'같은 문학 작품도 남겼어요. /고산윤선도박물관
시간이 한참 흐른 1674년(현종 15년) 갑인예송이라 불리는 제2차 예송이 일어납니다. 효종의 왕비(현 임금의 어머니)인 인선왕후가 승하했는데 그 시어머니(현 임금의 할머니) 장렬왕후는 여전히 생존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시열 등 서인은 “‘주자가례’에 따라 차남인 효종의 왕비이므로 대왕대비(장렬왕후)는 9개월 입는 상복인 ‘대공복’을 입어야 한다”고 했고, 남인과 일부 서인 세력은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장자부(큰며느리)든 차자부(둘째 며느리)든 모두 1년 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번 논쟁은 남인의 승리로 기울었고, 남인은 숙종 초까지 권력을 잡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불필요하고 공허한 논쟁이었을까
지금까지 예송의 전개 과정을 보면 민생과는 별 관련이 없어 보이는 허망한 명분 싸움이었던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심지어 ‘고작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는 걸로 물고 뜯으며 허송세월하니 조선이 망했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하지만 조선 왕조 멸망은 제2차 예송 236년 뒤의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어떤 옷을 입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국가와 왕위 계승의 정통성, 그리고 예법의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해야 하느냐에 초점을 둔 논쟁이었습니다. ‘나라와 사회에서 어떤 가치관을 우위에 놓아야 하는가’ ‘왕가의 예법이 일반 사대부와 같은가 다른가’ ‘예법이 같다면 조선은 왕과 신하가 같이 다스리는 나라인가’란 무거운 주제를 두고 벌인 철학적·정치학적 논쟁이기도 했습니다.
임금인 현종은 자신의 정통성 부족을 암시한 주장을 펼치는 신하들 앞에서 끝까지 인내심을 발휘했고, 결국 이 논쟁으로 인해 죽은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평화적으로 해결된 정쟁이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18세기 유럽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숱한 인명이 살상된 것과 비교되는 부분입니다.
당시의 ‘예법’은 오늘날의 ‘민주주의’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로 중차대한 가치였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고(故) 홍일식 전 고려대 총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예송이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국가의 존폐와 직결되는 중대사였고, 생명을 걸고라도 싸울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겨졌다.” 미래 후손들이 ‘그깟 민주주의가 뭐라고 20세기 조상들은 그렇게 애써 투쟁을 했을까’ 한다면 어떻겠느냐는 말도 했습니다. 최소한 예송이라는 정쟁은 그래도 정치인들의 진심이 담겨 있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유석재 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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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당정치(朋黨政治)
관직 놓고 동·서로 갈라서다
선조 때 정권 장악한 사림파… 김효원 지지파 동인, 심의겸의 서인
두 파로 갈려 이조전랑직 놓고 대립, 붕당정치로 서로 견제·협력 효과도
4월에 벌어질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야에서 정치인들의 대립이 이어지고 있어요. 특히 야당에선 새정치민주연합이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으로 나누어지면서 어떤 당이 세력을 많이 끌어모을지 화제가 되고 있어요. 당(黨)이란 정치적 주의나 주장이 같은 사람들이 정권을 잡고자 조직한 단체를 말해요. 오늘날 여러 정당이 서로 비판하고 견제하듯, 조선시대에도 붕당(朋黨·학맥과 사상, 정치적 견해차에 따라 뜻이 맞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선조 임금 시절, 사림파(士林派)가 '어떤 사건'으로 동인·서인 두 갈래로 갈라져 다투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됐답니다. 과연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왕에게 선택받은 지방 선비들, 사림파
사림파가 어떤 사람들인지 설명하려면 그 전까지 관직을 독차지하던 훈구파(勳舊派)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어요. 훈구파는 왕을 도와주고 그 대가로 높은 벼슬에 올랐던 신하들인 공신을 일컫는 말이에요.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는 데 공을 세운 개국 공신과, 세조가 조카 단종의 자리를 빼앗기 위해 일으킨 계유정난에서 공을 세운 신하들을 통틀어 말하지요. 세조·예종 다음으로 성종이 즉위했을 땐, 주로 세조 때 공을 세운 훈구파의 힘이 너무 셌다고 해요.
성종은 왕의 권력이 약해질까 염려했고, 새로운 인물들을 관직에 불러들이기 시작했어요. 바로 성리학을 열심히 따르는 선비들 모임인 사림파였어요. 이들은 주로 고려 말의 유학자인 길재·이색이나 조선 건국에 동참하지 않았던 정몽주 등의 학통을 이어받았지요. 사림파는 벼슬을 하지 않는 대신 지방 서원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한편,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는 일종의 마을 약속인 향약을 운영하며 그들 나름대로 힘을 키우고 있었어요. 그러다 왕의 부름을 받자 관직에 나서, 훈구파에 버금가는 정치 세력을 키웠지요. 성종 때에는 경상도 지역에서 김종직을 따르는 선비들이 사림파의 중심 세력을 이루었고, 중종 때에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경기·충청도 지역 출신 선비들이 사림파에 포함됐어요. 조선 조정에서 훈구파와 사림파의 세력 다툼이 벌어진 건 당연한 흐름이었죠. 이 과정에서 사림파 선비들이 큰 화를 당해 죽거나 내쫓기는 사화라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답니다.
그 뒤 약 100년이 지났을 때 사림파·훈구파 둘 중 어느 편이 살아남았을까요? 지방 서원에서 인재를 차근차근 축적해 한양에서 아무리 화를 많이 입어도 즉각 부활하던 사림파의 승리였지요. 훈구파를 밀어낸 사림파는 선조 임금 때 크게 세력을 키우는 시기를 맞아요.
◇사림파가 두 편으로 나뉘다
선조는 대학자인 이황과 이이의 학문과 인품을 존경하여 스승처럼 여겼던 왕이에요. 그래서 왕위에 오르자 이황과 이이처럼 성리학을 열심히 공부한 사림파를 곁에 두고자 했지요. 그런데 사림파 출신 관리들이 다시 두 편으로 나뉘게 돼요. 한편은 김효원이란 새로운 인물을 중심으로 우르르, 다른 한편은 심의겸이란 사림파의 오랜 거장을 중심으로 우르르 모여들었지요. 분열은 이조전랑이라는 중요한 관직 때문이었어요. 이조전랑은 이조에 속한 벼슬로, 비록 그 직위는 낮지만 엄청난 요직이었거든요. 관리를 뽑거나, 그만두게 하거나, 맡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를 평가하는 일을 맡았고, 게다가 이조전랑을 거친 뒤에는 정승으로 승진하기도 쉬웠대요.
1572년 이조전랑 자리에 김효원이 추천되었는데, 당시 대선비로 평판이 좋던 심의겸이 이를 반대하고 나섰어요. 심의겸은 '김효원이 훈구파이자 간신이었던 윤원형에게 은혜를 입은 적이 있다'고 했어요. 결국 선조는 심의겸의 상소를 받아들여 김효원을 다른 자리로 보냈고, 김효원은 2년 뒤에나 이조전랑 자리에 오르게 돼요. 김효원은 심의겸에게 독을 품으며 차근차근 세력을 키웠어요. 1575년 김효원이 이조전랑 자리를 떠난 뒤, 이번에는 심의겸의 아우인 심충겸이 이조전랑 후보로 추천되었어요. 그러자 이번에는 김효원이 '왕비 집안에서 중요한 벼슬을 하면 권력이 집중된다'며 반대하고 나섰어요. 당시 왕비가 심의겸·심충겸의 집안 출신이었거든요. 그때부터 김효원과 심의겸을 따르는 무리는 두 파로 나누어졌어요. 이게 붕당정치의 시작이랍니다.
◇엎치락뒤치락! 붕당정치가 펼쳐지다
이후 사림파는 김효원을 지지하는동인과 심의겸을 따르는 서인으로 나뉘어 세력 다툼을 벌이기 시작했어요. 이걸 동서분당(東西分黨)이라고 불러요. 김효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대개 김종직·이황·조식의 제자로 이루어진 영남학파 출신이었어요. 그들을 동인(東人)이라 부른 것은 모임 장소인 김효원의 집이 도성의 동쪽인 낙산 건천동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심의겸을 지지하는 사람은 대개 이이·성혼의 제자로 이루어진 기호학파 출신이었어요. 그들을 서인(西人)이라고 부른 것은 주로 모이던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인 정동에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 뒤 북인과 남인, 대북과 소북, 노론과 소론, 시파와 벽파 등 다툼의 중심이 되는 세력은 계속 뒤바뀌었지만, 조선에서는 당파를 중심으로 정치 대립이 계속되었어요. 붕당정치는 세력 다툼으로 번질 때도 많았지만, 서로 비판하며 의견을 모을 때도 있었답니다.
자기편이라도 의견 안 맞으면 싸우고 갈라서다
서인과 맞서던 동인 세력… 강경파 북인, 온건파 남인으로 갈려
서인도 노론과 소론, 나이로 나뉘어
궁중 의례와 반대파 처벌 문제로 당파 간 다툼 빈번, 앞날 어둡게 해
동인이 북인(北人)과 남인(南人)으로 나뉘고,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나뉘게 돼요. 붕당 사이의 비판과 견제는 공론을 형성할 때 도움이 됐지만, 지나친 당파 싸움은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어요.
◇동인, 강경파 북인과 온건파 남인으로 나뉘다
선조 때인 1589년, 정여립이라는 신하가 반란을 꾀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도망을 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벌어졌어요. 정여립은 원래 서인의 편에 있었다가 나중에 동인의 편에 서서 서인을 비판했던 인물이었지요. 정여립 역모 사건의 처리는 서인의 우두머리였던 정철이 맡았어요. 정철은 사건을 확대하여 동인들에게 큰 피해를 입혀요. 반대로 서인은 힘을 얻었고요.
그러나 1591년 서인 정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게 돼 관직에서 물러나요. 서인이 힘을 잃자 반대로 동인이 힘을 얻게 되었고, 정철의 처벌을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문제로 동인들 사이에서 의견이 갈렸어요. 이미 수차례 귀양살이하며 '사미인곡' '속미인곡'을 지었던 정철, 이번엔 처형 위기에까지 처하게 돼요.
동인 중 이산해와 이발 등은 "정철을 죽이고 서인을 완전히 몰아내야 한다"는 강경한 주장을 폈고, 한편, 유성룡과 우성전 등은 "정철은 유배 보내고 서인들 중에서도 인재는 조정에 등용해야 한다"고 상대적으로 온건한 주장을 했어요. 정철의 처벌은 유배로 결정되었고요.
이산해와 이발을 따르는 사람들을 북인이라고 불렀는데, 이산해의 집이 한강 북쪽이었고 이발의 집이 북악산 밑에 있어서였어요. 유성룡과 우성전을 따르는 사람들은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남산 밑에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북인과 남인은 학파에서도 조금 차이가 있었어요. 원래 동인은 이황과 조식,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학파 출신들인데, 북인은 그중에서도 조식과 서경덕의 제자들이 중심이었고, 남인은 이황의 제자들이었죠.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때에는 북인이 권력을 잡아요. 북인은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정철을 비판한 적 있는데, 어떻게 광해군의 신임을 받았을까요? 북인 중에는 광해군이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 소북도 있었지만,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가 소북파를 이겨요. 광해군의 실리적이고 개방적인 외교정책이 북인과 잘 맞았거든요.
1623년에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이번에는 권력이 서인들 차지가 되지요. 서인들은 광해군을 왕의 자리에서 쫓아내고는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능양군을 왕으로 세웠어요. 남인들은 이에 뜻을 함께했고요.
◇상복 입는 예절이나 반대파 처벌 두고 싸워
1659년 효종 임금이 죽어 현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1674년 효종 임금의 왕비 인선왕후가 죽었을 때 서인과 남인 사이에 두 차례 다툼이 벌어졌어요. 그 이유는 상복을 입는 문제 때문이었죠. 이렇게 궁중 의례나 예절에 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예송논쟁'이라고 해요. 첫 논쟁 때는 서인, 두 번째 논쟁 때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어요. 서인과 남인의 세력 싸움이 이어지다 숙종 때 남인이 권력에서 물러나는 사건이 벌어져요.
1680년 남인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허적이 자기 집에서 열린 잔치에 궁중에서 쓰던 천막을 왕의 허락도 없이 자기 맘대로 빌려갔다가 숙종에게 밉보이게 되거든요. 허적은 이 일로 관직에서 물러났고, 몇 달 뒤에는 허적의 아들이 역모를 꾀하였다고 서인에게 고발당해요. 이때 허적을 비롯한 많은 남인이 죽임 당하거나 귀양을 가게 되지요.
송시열 등 주로 나이 든 서인들은 남인을 강경하게 처벌하자고 했지만, 윤증을 비롯한 젊은 서인들은 남인을 너무 강력하게 몰아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어요.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였지만 송시열이 늘 자기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며 스승을 비판했지요. 결국 서인들은 송시열을 중심으로한 나이 든 신하들과, 윤증을 비롯한 젊은 신하들이 모인 두 세력으로 나누어져요. 나이 든 세력을 늙을 노(老)를 써서 '노론', 젊은 세력을 젊을 소(少)를 써서 '소론'이라고 했지요.
붕당정치는 때로는 상대방을 비판하고 인정하며 정치적인 발전을 이루기도 했지만, 너무 심하게 권력 다툼을 벌여 나라의 앞날을 어둡게 만들기도 했어요. 그래서 영조와 정조는 한쪽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탕평책을 폈지요.
-기획·구성=김지연 기자/지호진 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조선일보(16-01-25/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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