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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 가까이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음악가의 스승]

뚝섬 2025. 6. 24. 06:52

[200년 가까이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음악가의 스승]

 

 

 

200년 가까이 체르니로 피아노를 배우는 이유 

 

오스트리아 석판화가인 요제프 크리후버가 그린 카를 체르니의 초상화.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어렸을 적 피아노 학원에 다녀 본 사람이라면 ‘바이엘’, ‘하논’, ‘체르니’라는 이름을 피해 가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우선 처음 피아노를 배우면 ‘바이엘’이 등장한다. 그 책의 첫 페이지에는 커다랗게 음표가 그려져 있고 학원 선생님은 “이게 도예요”라고 말하며 건반 위에 손가락을 하나하나 짚어준다. 악보보다 손을 더 많이 보는 그 시절 바이엘은 우리에게 첫 음악 언어였다. 조금 익숙해지면 ‘하논’을 배운다. ‘손가락 체조’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같은 패턴을 다양한 속도로 반복 연습하도록 돼 있다. 손가락의 유연성과 독립성을 길러주는 순수한 테크닉 훈련이다.

그다음에는 익힌 기술을 실제 음악에 적용해 보는 단계가 필요해지는데, 이때 ‘체르니’를 배우게 된다. 본격적으로 양손이 분리되고 다양한 리듬과 셈여림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지루함이라는 감정도 함께 찾아온다. 피아노 선생님이 “내일까지 10번 연습해 와” 또는 “체르니 30번 들어가자” 같은 말을 하면 긴장이 될 정도였다. 이처럼 체르니는 연주회를 위한 곡이 아니라 공부를 위한 곡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박혀 있다.

 

여기서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게 있다. 바로 체르니가 사람의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카를 체르니(1791∼1857)는 작곡가이자 뛰어난 피아노 교육자였다.

체르니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나 음악적으로 매우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다. 어릴 적부터 놀라운 재능을 보였고 불과 열 살도 되기 전에 모차르트와 하이든의 작품을 연주했다. 10대에 들어서는 이미 자신의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고 열다섯 살엔 베토벤 앞에서 직접 연주해 그의 제자가 됐다. 청력을 잃은 베토벤은 체르니를 완전히 신뢰했고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초연할 피아니스트로 체르니를 지목했다. 그러니까 체르니는 단순히 연습곡을 쓴 사람이 아니라 베토벤의 제자로 유럽 음악사에 커다란 흔적을 남긴 인물이다.

체르니는 누구보다 교육에 헌신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평생 수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중에는 낭만주의 피아노 음악의 상징으로 불리는 프란츠 리스트도 포함돼 있다. 체르니는 어린 리스트의 비범한 재능을 알아보고 기꺼이 무보수로 음악을 가르쳤다. 리스트는 그의 가르침 아래에서 음악적 기초와 연주 기법을 탄탄히 다진 뒤 훗날 전설적인 피아니스트로 성장했다.

체르니가 남긴 수많은 연습곡들은 여전히 인기가 많다. 그의 연습곡은 체계적으로 피아노 테크닉을 습득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다. 게다가 교육 현장에서 실제로 사용된 교보재로, 직접 학생들의 손끝에서 확인하고 다듬어낸 작품들이었다.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 수많은 피아노 교사들이 체르니를 기본 교재로 삼는 이유는 그것이 단지 전통이라서가 아니라 실제로 효과가 있어서다.

안타까운 사실은 피아노 학습 여정 대부분이 체르니에서 멈춘다는 것이다. 체르니 30번 정도에 이르면 ‘이제 그만두고 싶다’는 말이 나오고 중학교 입학이나 학원 변경을 핑계로 피아노를 놓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은 자신이 체르니를 통해 배운 그 기술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알지 못한 채 끝나 버리는 것이다.

정말 조금만 더 가면 새로운 음악 세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쇼팽의 녹턴이 등장하고 슈만의 환상곡이 눈앞에 펼쳐지며 라흐마니노프의 서정적인 멜로디가 바로 그다음 페이지에 놓여 있다. 체르니는 일종의 관문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문 앞에서 멈추고 안으로 들어가 보지도 못한 채 돌아서 버린다. 마치 산 중턱까지 숨을 헐떡이며 올라가 놓고 정작 그 너머에 펼쳐질 아름다운 전망을 보기도 전에 하산해 버리는 셈이다. 조금만 더 걸었으면 구름 사이로 아름다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텐데.

그러나 멈춘 자리에서 시간이 꽤 흘렀더라도 그 문은 여전히 열려 있다. 피아노 의자에 앉아 몇 마디를 쳐보면 체르니가 만들어준 손의 근육과 뇌 속의 리듬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어릴 적 익혔던 도약의 감각, 음과 음 사이의 거리, 반주와 멜로디를 나누던 손놀림은 그 사이 몇 년의 공백이 있었다고 해도 쉽게 잊히지 않는다. 체르니는 단지 반복의 교재가 아니라 음악을 ‘생각하는 방법’을 근육과 머리에 새겨 넣은 선생님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체르니가 우리 모두의 첫 번째 선생님인 이유다.

 

-허명현 음악 칼럼니스트, 동아일보(25-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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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가의 스승

 

명음악가 뒤엔 그를 키운 스승 있어
백건우·한동일 키운 로지나 레빈… 20세기 최고 피아노 교수
정경화 스승은 스파르타式으로 유명
 

 

며칠 있으면 '스승의날'입니다. 각자 하는 일이 다르고 사는 환경도 같지 않지만, 누구나 고마운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은 마음속에 있게 마련이지요. 특히 클래식 분야는 스승과 학생이 일대일 개인 교습을 하거나 긴밀한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만드는 경우가 많아서 사제(師弟) 간 관계가 더 친근하고 특별하답니다. 스승의 성장 과정이나 개인적 경험이 학생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기도 하지요. 오늘은 다양한 삶을 통해 제자들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전달했던 스승 네 사람을 소개할게요. 

 

이탈리아 출신 명교육자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 /위키피디아 

 

클래식 역사에서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스승을 꼽는다면 안토니오 살리에리(Salieri·1750~1825)를 빼놓을 수 없을 것입니다.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에 천재 모차르트를 질투하는 범재(凡才)로 그려진 음악가이지요. 그러나 이 이야기는 세간의 풍문에 가깝다는 평이고, 실제 살리에리는 당대 유럽에서 최고의 명성을 떨치던 음악 교육가였어요. 베토벤에게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법과 대위법(작곡법 중 하나)을 가르쳤지요. 베토벤이 생전에 남긴 편지와 대화록에는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많이 엿볼 수 있습니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트도 가르쳤는데, 당시 일곱 살에 불과한 어린 제자가 뛰어난 음악성을 갖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빈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직접 주선했어요. 또 슈베르트가 성인이 된 후에도 작품을 계속 살펴보며 꾸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지요.

그뿐만 아니라 천재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 베토벤의 제자였던 카를 체르니를 직접 가르치기도 했답니다. 작곡이 작곡가 개인의 생각과 개성을 마음껏 뽐내는 영역이라는 점에서 살리에리는 제자 개개인의 잠재력을 알아보고 한껏 키워주는 데 탁월한 재주를 갖춘 스승이었다고 볼 수 있어요.

러시아에서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는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손꼽혀요. 정명훈, 손열음, 조성진 등 우리나라 출신 입상자들도 많아 친근한 대회가 되었어요.

미국과 소련이 사사건건 대결을 펼치던 냉전(冷戰) 시대인 1958년 처음 시작된 이 대회 피아노 부문 첫 우승자는 미국 텍사스 출신 젊은 연주자 밴 클라이번(Cliburn·1934~2013)이었어요. 당시 소련이 개최한 음악 경연 대회에서 미국인이 우승한 것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이변이었지요. 그래서 그런 클라이번을 가르친 스승도 큰 화제가 되었는데, 미국 줄리아드 음악 학교에서 클라이번을 지도한 러시아 출신의 로지나 레빈(Lhevinne·1880~1976)이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던 남편 요세프 레빈과 함께 1차 세계대전(1914~1918) 후 미국으로 이주했어요. 남편 요세프가 1944년 세상을 떠나자 로지나는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서던캘리포니아대(USC) 음악대 등에서 꾸준히 학생들을 가르치며 20세기 최고의 명교수 중 한 사람이 되었지요.

그는 피아니스트뿐 아니라 지휘자, 작곡가 등도 많이 길러냈는데요. 그의 문하(門下·스승의 가르침 아래)에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한동일, 백건우 등도 있답니다. 백건우는 언론 인터뷰에서 스승 로지나에 대해 "그는 나를 자식처럼 대해 주었다. 곡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사생활에 대해 자주 말했다. 내 정신 상태 등 여러 가지를 이해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내 연주와 연결시켜 나에게 맞는 연주가 나오게끔 가르친 것이다"라고 회상하기도 했어요.

줄리아드 음악 학교에서 오랫동안 바이올린 교수로 일하며 수많은 명연주자를 배출한 또 다른 스승은 이반 갈라미언(Galamian·1903~1981)입니다. 이란에서 태어난 그는 20대 초반부터 선생으로 활약했어요. 러시아를 거쳐 1937년 미국으로 자리를 옮긴 갈라미언은 줄리아드 음악 학교와 메도마운트 음악 학교 등에서 많은 학생을 가르쳤는데요. 지독하게 연습만을 강조하며 제자들을 몰아치고 독촉하는 '스파르타식 훈련'으로 유명한 스승이었답니다. 그의 가르침 아래 이츠하크 펄먼, 정경화, 강동석, 핀커스 주커만, 조슈아 벨 등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들이 탄생했지요. 정경화는 갈라미언을 떠올리며 "선생님은 내게 '네가 음악을 계속하려면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며 "내가 힘들다고 불평할 때마다 '인내하라'고 해주신 고마운 분"이라고 말했어요.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슈타커가 마스터 클래스(유명한 음악가가 재능이 뛰어난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업)에서 제자들에게 연주를 선보이고 있어요. /게티이미지코리아 

 

연주와 교육 모든 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쌓은 음악가도 있어요. 2013년 세상을 떠난 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Starker·1924~2013)가 대표적입니다. 헝가리 태생 유대인으로 여섯 살 때부터 첼로를 시작한 슈타커는 곧바로 '천재 소년'으로 알려지며 리스트 음악원에서 11세 때 독주회를 열었어요.

그러나 그의 앞날은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가로막혔는데요. 전쟁이 끝나기 직전 슈타커의 두 형이 독일 나치스에 살해당하는 불행을 겪었기 때문이지요. 종전(終戰) 후 전기공과 광부로 일했던 슈타커는 1947년 파리에서 활동을 재개했고 1년 후 미국으로 이주해 댈러스 심포니 수석단원을 거쳐 첼로 독주자로 자리매김을 했습니다.

음반 150여 개를 낸 명첼리스트 슈타커의 또 다른 면모는 선생님으로서 모습이었어요. 1958년부터 미국 인디애나대 교수로 일한 그는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빈틈없는 기교와 명확한 해석으로 이름났던 연주처럼, 슈타커는 학생들에게 매우 혹독한 훈련을 요구하는 '호랑이 선생님'이었어요.

그는 연주와 교육 활동을 병행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도 했죠. "가르칠 수 없다면 연주할 수 없고, 연주할 수 없다면 가르칠 수도 없다. 학생에게 내가 연주하는 방식을 가르치려면 나 스스로 어떤 연주를 하고 있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저마다 다른 분야에서 제자를 길러냈지만, 더 좋은 가르침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갈고닦았던 스승들의 모습이 참으로 멋집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8-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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