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의 운명] [잘못 들어선 중재자의 길] ["끼어들지 말라".. ]
[이란의 운명]
[잘못 들어선 중재자의 길]
[ "끼어들지 말라"는 北 바지춤에 언제까지 매달릴 건가]
이란의 운명
[임용한의 전쟁사]
1630년대 역졸(驛卒) 출신으로 반란군이 된 이자성은 명군의 집요한 추격을 받아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자성이 관원들을 매수하기도 하고, 이미 세력을 잃었는데 굳이 죽일 필요가 있느냐는 식의 관용에 힘입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명나라는 이 관용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청의 침공으로 명의 군대가 모두 동쪽에 집중하고 있는 사이에 이자성은 서쪽 변경에서 대군을 모았고, 무인지경의 명나라를 횡단해서 북경을 함락시켰다. 이와 반대로 끝장을 보겠다고 가혹하게 몰아붙이다가 더 큰 반발만 일으켜 해가 된 사례도 적지 않다. 한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게 좋을까? 아니면 적당히 하고 관용과 타협으로 상생을 도모하는 게 좋을까? 어느 쪽이 옳을지 정답은 없다.
이란을 향한 미국의 대공세가 어정쩡하게 끝났다. 미국은 핵시설을 파괴했지만 완벽하게 제거하지는 못했다. 농축우라늄도 일부는 옮긴 게 맞을 것이다. 애초에 완벽한 제거란 있을 수가 없다. 핵물리학자가 살해됐지만 인재는 키우면 되고 시설은 지으면 된다. 우라늄은 지구상에 계속 존재한다. 미국으로서는 전쟁을 길게 끌기보다는 일단 당장의 급한 불을 끈 상태에서 이 분쟁을 종결시키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차후의 시설 재건과 핵무기 제조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와 미국의 첩보 능력으로 탐지할 수 있다고 여겼으리라.
이란 지도층을 제거해도 이란을 직접 지배할 수는 없다. 베트남,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의 실패가 교훈이다. 핵은 제거하고 감시하되 이란에 타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고, 이란 내부의 점진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방법이 최선이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제 이란의 변화는 이란 국민에게 달렸다. 전쟁을 계기로 더 결속하고 지금의 사회와 정책을 고수할 것인지, 변화와 타협의 길을 모색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임용한 역사학자, 동아일보(2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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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들어선 중재자의 길
아라비아반도 귀퉁이에 오만이란 나라가 있다. 이 나라의 지도자 술탄 카부스가 지난 10일 별세했다. 오만은 사우디아라비아처럼 석유가 많이 나지도 않고, 두바이처럼 화려한 초고층 빌딩이 즐비한 소위 '잘나가는' 나라도 아니다.
그런데도 숙환으로 조용히 세상을 떠난 술탄 카부스의 부음(訃音)에 세계 지도자들이 앞다퉈 이 작은 반도국을 직접 찾아 조문했다. 영국 찰스 왕세자, 보리스 존슨 총리가 12일 이른 아침 수도 무스카트에 도착했다. 친이란 무장단체 후티와 내전 중인 예멘의 하디 대통령, 이란의 자리프 외무부 장관도 잠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내려놓고 빈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등 주요 국가 정상들은 성명으로 술탄 카부스를 애도했다.
미·이란 강경 대치로 더욱 어수선해진 중동 정세에서도 줄 잇는 각국 정상의 조문은 술탄 카부스의 외교적 위상을 보여준다. 전문가들은 그가 세계의 화약고라는 중동에서 오랜 기간 소리 소문 없이 중재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왔기에 존경을 받는다고 입을 모은다. 특히 그는 2015년 이란 핵협상을 타결시키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이란은 미국을 '거대한 사탄'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적대적인 두 나라가 핵협상을 타결할 수 있었던 데는 양쪽의 입장을 차분하게 전달·조율한 술탄 카부스와 오만 외교관들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주목되는 건 이렇게 큰 공을 세웠는데도 이 핵 합의 관련 공식 석상에서 술탄 카부스나 그의 외교·안보 당국자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모습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미·북 비핵화 협상의 중재자라는 우리 정부는 오만과는 정반대인 듯하다. 중재를 제대로 못 했는데도 잘했다고 성과를 부풀리거나, 협상 당사자가 중재 역할 못 맡기겠다고 대놓고 비방하는데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쩔쩔맨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가 "중뿔나게 끼어든다"며 "주제넘은 일 집어치워라"고 하는데도 "나는 중재자다"라고 되뇌며 자기암시를 하는 모양새다. 얼마 전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은 지난 10일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생일 축하 메시지를 전달해달라는 당부를 자신에게 했다고 자랑하듯 방미 결과를 밝혔다. 하지만 북한은 바로 다음 날 "이미 직접 친서를 받았다"면서 "한국은 중재자 역할에 미련을 갖지 마라"고 했다.
중재는 존경받을 때 가능하다. 내가 무시하는 사람에게 전 재산과 생명이 걸린 중대사를 맡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북핵을 인 우리는 협상의 당사자이고 그래야만 한다는 점이다. 북핵 피해자가 중재를 하려 하니 잘될 리가 없다. '핵무장' 가해자 북한이 오히려 피해자인 한국 국민에게 큰소리치고 욕설을 퍼붓는 이 어이없고 비참한 현실은, 애초 중재자가 되겠다는 잘못된 '대북 정책'이 세워질 때부터 예고된 일이었던 듯하다.
-노석조 정치부 기자, 조선일보(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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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어들지 말라"는 北 바지춤에 언제까지 매달릴 건가
북한 김계관 외무성 고문이 '트럼프 미 대통령이 김정은에게 보낸 생일 축하 메시지를 친서로 직접 받았다'면서 우리 정부를 향해 "주제넘게 끼어들지 말라"고 했다.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청와대 안보실장이 '트럼프가 부탁한 김정은 생일 축하 메시지를 북측에 전달했다'고 발표하자 바로 반박한 것이다. 김계관은 "남조선이 흥분에 겨워 온몸을 떨며 긴급통지문으로 알린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미·북 연락 통로는 따로 있다"며 "남조선은 본전도 못 챙기는 바보 신세가 되지 않으려거든 자중하라"고도 했다. 문재인 정부가 '트럼프 메시지'로 미·북 간 중재자 역할을 되찾은 것처럼 선전하려다가 북으로부터 모욕과 조롱만 당한 것이다.
이런 일이 벌써 몇 번째인지 헤아리기도 힘들다. 김정은은 작년 말 전원회의 결과 보고에서 대남 정책을 비롯해 한국에 대한 언급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문 대통령은 신년사에서 "김정은 답방과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그러자 북은 "아전인수격의 자화자찬과 과대망상" "역겹기 그지없다"고 비난했다. 지난해 문 대통령이 "남북 경협으로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겠다"고 한 다음 날 북은 "맞을 짓 하지 말라"며 미사일을 쐈다. 문 대통령이 "남북 대화가 다양한 경로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 직후에는 북 외무성 국장이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했고, 우리 정부가 북한에 쌀 5만t을 보내기로 했을 때는 북이 "시시껄렁한 물물 거래, 생색 내기"라고 퇴짜를 놓았다. 미·북 사이에 끼어들지 말라고 걷어차는 북의 바지춤을 계속 붙잡고 늘어지는 우리 정부를 지켜봐야 하는 국민도 부끄럽고 참담해진다.
김계관은 이날 "대화가 다시 이뤄지려면 미국이 북한의 요구 사항들을 전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며 "일부 제재와 핵시설을 바꾸자는 베트남에서와 같은 협상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우호적인 관계는 유지되고 있지만 더 이상 속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국제사회는 모두 김정은의 '비핵화 사기'에 또 속았다는 심정인데 북은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 식으로 큰소리를 친다. 대한민국은 미국엔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확실하다고 허위 보증을 선 죄로 신용을 잃고, 북엔 미국과 다리 놔준 것 이상으로 쓸모가 없다며 천덕꾸러기 취급만 받는다. 국민도 이런 사정을 빤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대북 정책에서 무슨 성과가 있었던 것처럼 포장해서 표를 얻어 보려는 속임수도 이제 접을 때가 됐다.
-조선일보(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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