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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천, 백서, 양요.. ] [혼숙 "혼자 숙박", 우천시 취소 "어느 도시?"]

뚝섬 2025. 2. 2. 05:40

[파천, 백서, 양요… ] 

[혼숙을 "혼자 숙박", 우천시 취소엔 "어느 도시?"... 2030 문해력 저하]

 

 

 

파천, 백서, 양요… 

 

[양해원의 말글 탐험]

 

그 길을 걷는다. 짤막한 데다 오가는 이도 드문데 중간쯤 경찰이 서 있다. 아, 바로 뒤가 미국 대사 관저(官邸)렷다. 혹시 그래서 여기 근무하느냐 물으니 그런저런 까닭인 듯하다나. 가까이 영국 대사관도 있고, 예나 지금이나 외국하고 인연이 깊은 곳이구나. 허옇게 일부만 남은 러시아 공사관이 저기서 내려다본다. 일본에 위협을 느낀 고종 임금이 그리로 거처를 옮기느라 여기를 지났다지. 아관파천(1896) 때 말이다.

 

구한말에 러시아를 일컫던 중국식 이름 ‘아라사’의 ‘아’ 자에 ‘집 관’ 자를 붙인 ‘아관(俄館)’은 러시아 공사관. ‘파천(播遷)’은 수도를 옮긴다는 뜻의 ‘천도’에서 짐작하듯, 임금이 도성을 떠나 피란하던 일을 가리킨다. 이런 식의 설명이 있다면 역사 배우기가 한결 수월하고 재미나지 않을까. 어려운 한자어가 숱하게 나오는 고교 역사 시간은 참 막막하고 낯설었다.

 

천주교 신자 황사영이 신유박해(辛酉迫害)를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자 북경의 주교한테 글을 보내려 한 ‘백서 사건’(1801)은 또 어떤가. 비단에 쓴 것이라 ‘비단 백(帛), 글 서(書)’라 함은 훗날 알았다. 1866년 프랑스, 1871년 미국 군대가 쳐들어왔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서양이라 할 때 ‘양(洋)’에 ‘소요’ ‘요란’의 ‘요(擾)’를 썼으니 ‘서양인들이 일으킨 난리’인 줄 처음 배울 때는 귀에 쏙 들어오지 않았다. 그들 배 모습이 당시는 특이한지라 ‘이양선(異樣船)’이라 했음을 그나마 어렴풋이 짐작했던가.

 

안 그래도 위정척사(衛正斥邪) 운동이 한창인 판에 이런 서양 오랑캐랑 가까이 지내고 싶었으랴. 흥선 대원군이 화친(和親)을 배척(排斥)한다는 뜻으로 곳곳에 세운 비석을 그래서 ‘척화비(斥和碑)’라 한다. ‘위정척사’의 바로 그 ‘척’을 써서….

 

어떤 과목이든 쓸모 많은 한자를 이런 식으로라도 가르치면 좋겠다. 일본에 보내던 외교 사절 ‘통신사(通信使)’를 두고, 그 시절에도 통신사(社)가 있었느냐 하지 말란 법 없잖은가.

 

-양해원 글지기 대표, 조선일보(25-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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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숙을 "혼자 숙박", 우천시 취소엔 "어느 도시?"... 2030 문해력 저하

 

경북 경주에서 펜션을 운영 중인 김모(45)씨는 지난 8월 한 고객에게서 “혼숙(混宿·남녀가 여럿이 한데 뒤섞여 잠)이 안 되는 특별한 이유가 있냐. 혼자 가고 싶었는데 아쉽다”는 예약 문의를 받고 어리둥절했다. 1분쯤 지나서야 문의자가 ‘혼숙’을 ‘혼자 숙박’이라는 뜻으로 썼음을 직감하고 “혼자서 숙박하실 수 있다”고 답변했다.

 

수년 전 일부 청소년의 문제로 지목됐던 문해력 저하 현상이 2030 성인층 전반에서 나타나면서 일상생활 소통이 어려워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일선 고교 현장에서 한자보다 영어 교육을 우선시하면서 한국어의 어휘력 기반 자체가 무너지고 있다”며 “이대로 수십 년이 지나면 서로 같은 한국어로 소통하는 일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진학사 채용 플랫폼 ‘캐치’가 7일 Z세대(1990년대 중반~2000년대 초반에 태어난 세대) 시민 1344명을 조사한 결과 무려 61%가 ‘가결(可決·회의에서 의안을 합당하다고 결정함)’의 뜻을 모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결’을 포함, ‘이지적(理智的)’ ‘북침(北侵)’ ‘무운(武運)’ ‘결재(決裁)’ ‘모집인원(募集人員): 0명’ 등 여섯 문항의 정답을 모두 맞힌 비율은 28%에 불과했다.

 

일선 어린이집 교사들은 “가정통신문을 이해하지 못하는 일은 이미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금일(今日)까지 지문 등록 동의서를 제출해 달라’고 공지하면 대부분이 금요일에 가져오고, ‘우천 시(雨天時) 행사가 취소될 수 있다’는 공지엔 “우천시(市)가 어디냐”고 묻는 식이다.

 

종교 기관에서도 한자어가 대부분인 경전과 교리를 신도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개신교회에선 고어체로 된 개역 성경 대신 ‘현대인의 성경’ ‘쉬운 성경’ 등을 도입했지만 이마저도 어렵다며 아예 영어 예배로 가는 신도들이 적잖다. 불교도 마찬가지다. 서울의 한 유명 사찰 관계자는 “법회 때마다 한글 풀이 불경을 나눠주고 진행하는데도 이마저도 이해를 못 한다”고 했다.

 

젊은 층 문해력 저하의 원인으로는 부실한 한자 교육이 꼽힌다. 내년부터 시행될 예정인 고교학점제로 한문(한자) 교육이 더 부실해질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한국어 어휘의 70%를 차지하는 한자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지며 문해력 자체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지적이 상당하다. 충남의 한 국어 교사는 “일상적인 한자어의 의미를 확인하는 시험 문제의 정답률이 25~35% 정도로 해가 갈수록 떨어진다”고 했다. 울산의 한 교등학교 교감 이모(52)씨는 “수업 시수도 적고 수능도 치지 않기 때문에 한문 수업의 중요도가 많이 떨어졌다”고 했다.

 

신종호 서울대 교육학과 교수는 “이 때문에 현 2030세대는 한자의 뜻을 배우지 않고 한글의 소리로만 낱말을 배운 세대”라며 “유사한 발음을 들으면 의미를 헷갈리고, 생소한 단어를 들으면 익숙한 소리로 의미를 대체하는 형편”이라고 했다. 그래서 대충돌(大衝突)을 대충 지은 돌[石] 이름으로, 시발점(始發點)을 욕설로, 족보(族譜)를 족발 보쌈 세트의 준말로, 두발(頭髮)을 두 다리로 착각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한자어에 익숙하지 않은 2030세대가 사회에 진출하면서 기성세대와의 마찰도 잦아지고 있다. 현역병 정모(23)씨는 “입대 초반엔 ‘점호’ ‘당직사관’ ‘행정반’ 같은 단어 자체를 이해할 수 없어서 몇 달 동안 눈치로 때웠다”고 했다. 일반 회사에서 쓰이는 구두(口頭), 반려(返戾), 품의(稟議), 송부(送付), 하기(下記) 같은 단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해 ‘성인 대상 문해력 과외’를 받는 젊은 직장인들도 있다. 이 과외를 하는 강사 이승화(36)씨는 “한자어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고 문장을 구성해도 주술 호응이 안 되며, 그나마 서너 문장을 잇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년 국민 독서 실태 조사 결과, 성인 종합 독서율은 43%였다. 10명 가운데 약 6명이 1년에 책 한 권도 읽지 않은 것으로, 10년 전(72.2%)보다 대폭 감소한 수치다. 오현석 부산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독서를 하면 정확한 한자어 뜻을 몰라도 단어 간 유추 능력으로 어휘력을 늘릴 수 있는데 현 상황은 우려스럽다”고 했다.

 

신종호 교수는 “한자 중심 문화에 속한 한국의 특성상 학술 용어 등 대다수 전문 용어는 순수 우리말이 아닌 한자어로 돼 있어 한자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개념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가 없다”고 했다. 김덕호 사단법인 국어문화원 연합회장은 “젊은 세대에게 한자어의 개념과 기원을 익히도록 해 우리말로서 한자어에 익숙해지도록 교육 체계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했다. 오현석 교수는 “청소년의 문해력 문제가 성인까지 연속적으로 이어지는데, 제도권 교육을 떠난 성인들이 어휘력·문해력을 높이기 가장 좋은 방법은 원론적이지만 꾸준한 독서”라고 했다.

 

-강지은/김도연/박정훈 기자, 조선일보(24-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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