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世界-人文地理]

[5촌부터 결혼 허용 검토, 그 근거는] [나라별 흔한 성(姓)] ....

뚝섬 2024. 2. 29. 06:32

[5촌부터 결혼 허용 검토, 그 근거는]

[나라별 흔한 성(姓)]

[우리나라 사람들의 90% 이상은 가짜 성씨(姓氏)]

[일본 여자는 팬티를 입지 않는다] 

 

 

 

5촌부터 결혼 허용 검토, 그 근거는

 

유럽에선 4촌 이내 친족 결혼이 드물지 않았다. 영국은 19세기까지 전체 혼인의 5%가 사촌간 결혼이었다. 스웨덴은 4촌일 경우에만 당국에 허락을 받아야 하는데 유전병이 있는지 확인한 뒤 허가한다.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의 장편 ‘좁은 문’도 사촌 누나와 결혼한 작가 자신의 경험을 녹인 자전 소설이다. 역사도 오래됐다. 고대 이집트 여왕 클레오파트라는 남동생 프톨레마이오스 13세와 결혼했다가 그가 죽자 다른 남동생과 결혼했다.

 

▶동양에서도 드물지 않았다. 신라 김유신 장군은 여동생을 훗날 왕이 되는 친구 김춘추에게 시집보낸 뒤 두 사람이 낳은 딸과 결혼했다. 고려 왕가의 가계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막장 수준이다. 태조 왕건의 많은 자녀가 남매이자 부부였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권력과 부를 독점하려는 목적이 컸다. 다만 그로 인해 큰 대가를 치렀다. 근친 결혼으로 태어난 아기가 저체중과 발달 장애를 앓았다. 생식력도 떨어진다. 용맹한 전사의 나라 스파르타는 무사의 혈통을 지키려고 근친혼을 고집하다가 심각한 저출생에 빠졌던 것이 멸망 이유로 꼽힌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주걱턱 장애를 앓았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근친혼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다. 배우자를 씨족 밖에서 찾은 흔적이 3만4000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나온다. 근친혼을 막기 위해 다양한 문화적 금기도 생겨났다. 모르고 어머니와 결혼했다가 파멸한 오이디푸스왕 이야기도 이런 금기의 반영이었다. 중국은 주나라 시대부터 동성동본 금혼을 시행했고, 우리도 고려 후기 성리학이 수입되면서 같은 길을 걸었다.

 

▶법무부가 친족 간 혼인 금지 범위를 4촌 이내로 축소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8촌 이내 혼인을 무효로 한다’는 민법의 개정이 필요하다고 결정한 데 따른 조치다. 법무부 연구 용역에서도 혼인 금지 범위를 4촌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여기엔 과학적 근거가 있다. 자식은 부모 양쪽에서 절반씩 DNA를 받기 때문에 부모와 자식의 혈연도는 50%이고 형제간엔 25%, 4촌은 12.5%다. 그러나 5촌은 6.25%, 6촌은 3.13%, 8촌은 0.78%다. 5촌만 돼도 사실상 남이다. 근친 간 결혼이 곧장 유전병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유럽 왕가들처럼 대를 이어 결혼을 거듭할 때 문제가 된다. 오늘날 이런 식으로 결혼하는 사람은 없다. 친족 범위를 어디까지로 할 것인지도 따져볼 일이다. 4촌만 넘어도 남으로 사는 시대에 8촌이 모여 고조부모까지 제사를 모시던 ‘4대 봉사’ 시절 가족 윤리를 고집할 수는 없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4-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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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별 흔한 성(姓)

[사소한 역사]

 

일본은 사토, 미국은 스미스, 중국은 왕·리·장이 가장 많대요. 

글로벌 금융회사 넷크레디트가 만든 지도입니다. 나라별로 가장 많은 성을 표시했어요. /넷크레디트

 

최근 중국 호적관리연구센터가 지난해 인구 통계를 발표했어요. 통계에 따르면 중국에서 가장 많은 성(姓)은 왕씨이고, 이어 리씨, 장씨, 류씨, 천씨 순서였는데요. 이들 성을 가진 사람이 전체 인구의 30%에 달했습니다. 과거 한나라에서 청나라 시대를 거치면서 서민들이 성을 갖게 될 때 이미 많이 있는 성을 고르면서 그 수가 많아졌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김씨, 이씨, 박씨가 많은데요. 김씨가 약 20%, 이씨와 박씨가 각각 약 15%, 약 8%라고 해요. 성은 어떻게 정해졌기에 이렇게 몇몇 성이 많은 걸까요?

과거 소수의 가문을 제외하면 성을 제대로 사용하지 않았어요. 우리 역사에서도 삼국시대나 후삼국시대의 기록을 보면 유력 귀족 가문을 제외하면 성이 없거나 성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들이 많아요. 예를 들어 신라 때 우산국(지금의 울릉도)을 정벌한 이사부는 김씨지만, 성과 이름을 함께 기록하지 않고 이름만 기록돼 있어요고려시대부터 평민들도 성을 갖기 시작했어요. 고려사를 보면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이 즉위한 이후 점점 성과 이름을 같이 쓰는 인물들이 많아져요. 하지만 천민들은 대부분 성이 없었어요. 조선 후기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법적으로 신분제가 완전히 없어지자 그동안 성이 없었던 천민들도 성을 가졌어요이때 성을 새로 갖게 된 천민들은 주인의 성을 따르거나 자신이 거주한 지역에 있는 유력 가문의 성을 선택했어요. 사람들이 많은 성을 따라야 자신이 본래 천민 출신임이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었죠. 조선의 천민은 전체 인구 중 약 30%를 차지하고 있었는데요. 이들이 조선시대 유력 양반 가문이었던 김씨, 이씨, 박씨 등을 선택하면서 그 수가 다른 성에 비해 많아진 거죠.

일본은 근대화 과정이었던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사람들이 성을 갖게 됐는데요대체로 지형·지명·사물 등에서 유래한 게 많아요일본은 성이 30만 개가 넘는다고 해요. 일본에서 가장 많은 성은 '사토'인데요. 전체 인구의 약 1%밖에 안 된답니다.

영미권 국가에서는 스미스(Smith)라는 성이 가장 많습니다. 스미스는 영어로 대장장이라는 뜻인데요. 서양에서는 주로 조상의 직업에서 성을 따왔어요. 아버지의 이름이나 가문이 배출한 위대한 인물의 이름을 성으로 사용하는 문화권도 있어요. 아이슬란드는 성이 없고 이름 뒤에 '누구의 아들(또는 딸)'이 붙어요. 예를 들어 아이슬란드의 대통령은 귀드니 요한네손인데요. 귀드니가 이름이고 '요한네의 아들(손·Son)'이 뒤에 붙은 겁니다. 아랍권 역시 이와 비슷한데요. 세계적인 거부인 만수르의 이름은 '셰이크 만수르 빈 자이드 빈 술탄 알 나흐얀'입니다. '술탄 알 나흐얀의 자손인 자이드의 아들 족장 만수르'라는 뜻이에요.

 

-김현철 서울 영동고 교사, 조선일보(21-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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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의 90% 이상은 가짜 성씨(姓氏)

 

김-이씨 전 인구의 36%.. 이미 있는 성씨 속에 은근슬쩍 들어가버린 것..  

 

현재 우리나라 사람들의 90% 이상은 가짜 성씨와 가짜 족보를 갖고 있다. 이는 조선시대 성씨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당시 신분 계층별 비율이 어떠했었는지를 생각해보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애초에 성씨는 임금이 관료에게 하사한 것으로, 조선 초기에는 성을 가진 사람들은 왕족과 일부 권문세가 등에 국한되어 그 수는 매우 적었다. 물론 고려시대 때 쓰던 성씨를 계속 쓰던 이들도 있었지만, 당시 조선은 고려왕조를 멸조시키는 과정에서 고려 왕족의 성씨인 왕(王)씨 일족을 비롯하여, 고려시대 득세했던 권문세족들을 대거 숙청했기 때문에, 이전 시기 득세했던 귀족들의 성씨가 상당수 사멸하게 된다. 

 

고려 왕족이 쓰던 왕(王)씨도 마찬가지였다. 획을 더 추가해서 왕씨를 옥(玉)씨, 전(全)씨로 고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예 성을 쓰지 않았던 경우가 더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조선 초기 성씨를 가진 이들은 매우 적었다. 심지어 15세기 초 태종 때는, 조정 대신들 중에서도 성이 없는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15세기 후반 성종 당시 문서에 기록된 이름들을 보면, 자질금, 말동, 합이, 자근, 철근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 한자 이름이었지만 성이 없었다. ​심지어 불과 100년 전인 1912년에도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당시 우리나라를 방문한 선교사 엘리제 셰핑 여사는 전라도 지역을 순회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 500명 중 이름이 있었던 사람은 단지 10명 뿐이었다." "여인들은 돼지 할머니, 큰 년, 작은 년 등으로 불리고 있었다."

 

다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씨를 쓰지 않았던 것은 조선시대만의 특징은 아니었으니 우리나라는 이전 시대에도 그러했었다. 참고로 고구려는 해, 을, 예, 손, 목, 우, 주, 마, 찬, 동, 연, 을지 등 성씨가 총 10여종에 불과했고, 백제는 여, 사, 연, 협, 해, 진, 국, 목 등의 8개 성씨가 주류를 이뤘다. 여기서 성씨가 적다라는 것은 그만큼 성씨를 가진 이들이 적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신라는 이, 최, 정, 손, 배, 설이 가장 대세였고, 김씨, 박씨의 왕족의 성씨가 있었지만, 김씨는 6세기 중엽 진흥왕 이후로나 쓰이기 시작했던 성씨였다. 

 

우리나라의 김씨는 진흥왕 이후부터 시작된다.

 

사실 박혁거세, 김알지로 알고 있는 이름도 수 백년 뒤 후손들이 성씨를 붙여준 것이지, 처음에는 성씨 없이 그냥 혁거세, 알지 등으로 불렸었다. 그러다가 통일신라가 되면서 고구려, 백제의 성씨는 대부분 사멸하게 되고, 또 고려시대가 되면서, 대부분 중국의 성씨를 모방하여 새 성씨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그런가 하면 고려시대에는 실제로 많은 중국인들이 귀화를 하여 성씨를 받기도 했다. 고려 전기에는 귀화 중국인들은 성씨가 있는데, 토착 고려 귀족들은 성씨가 없는 상황도 연출된다. 당시 고려 귀족 중에는 성씨가 없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고려시대의 성씨는 지배계층만의 특권이었고, 또 귀화 지식인에게 내리는 포상의 성격이 강했다. 때문에 평민들에게는 성씨는 언감생심이었다. 다만 호적대장에는 평민들의 이름 앞에 고을 이름이 붙어 다녔는데, 가령 서산의 개똥이, 충주의 돌쇠, 상주의 막봉이 이런 식으로 적혀 있었다. 물론 이런 지역명은 거주 이전의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족쇄와도 같은 것이었으니, 성씨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다.   

 

가짜 성씨는 이렇게 늘어났다

 

16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조선의 전체 인구 중 성씨를 가진 이들은 10% 남짓한 수준이었다. 10% 미만이라는 수치는, 당시 왕족과 관리들, 족보를 가진 양반들의 수를 모두 합한 것이다. 왕이 하사를 했든 어떻든 우선 관직이 있는 사람들은 성을 붙였지만, 그 숫자는 기본적으로 미미했다. 17세기 초 병자호란 직후, 왕이 내린 유공자 전지를 봐도 장군의 이름이 '막둥이'로 되어 있는 등 성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7세 이후로 갑자기 성씨를 가진 이들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이유는? 바로 공명첩 때문이다. 여기서 공명첩이란 돈을 내고 벼슬을 사는 것으로서, 광해군 때 재정확보를 위해 공공연히 공명첩을 뿌렸던 터이다. (이유야 어찌됐든 광해군은 조선을 보다 평등사회로 만든 군주인 셈) 때문에 돈만 내면 천민도 양반이 되고, 벼슬자리까지 얻게 되던 시기였다. 물론 고려시대부터 이런 매관매직은 있어왔지만, 본격적인 시기는 광해군 때 들어서였다

 

당시 상황이 이러했으니, 당연히 논 팔고 살림 팔아서 성을 얻는 자가 늘어났다. 이때 국가는 3년마다 호적을 정리했는데, 그 때마다 성을 가진 인구들이 부쩍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성을 취득한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해서, 17세기 후반에는 20%가 성씨를 가졌고, 19세기 초에는 50%를 넘고, 19세기 후반에는 70%를 넘게 된다. 즉 19세기 후반에는 전체 인구의 70%가 양반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전 국민이 성씨를 가지게 된 것은 1909년 일제가 실시한 '민적법'에 의해서였다당시 순사들은 각 집을 돌면서 원하는 대로 성씨 신청을 받았다. 이때 성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가짜 성을 만들었다. 가끔 한자의 획을 잘못 써서 희귀한 성씨가 나오는 해프닝도 있었다.   

 

왜 하필 '김씨', '이씨'만 택했는가?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토성(土姓)이라는게 있었다. '토성'이라고 함은 각 지역의 유지들의 고유한 성씨를 말한다. 가령 고려시대 인구가 5천 명이던 전주에는 토성으로 이, 최, 정, 손, 배, 설씨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토성의 흔적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져서 1454년 세종실록 지리지에 울산 언양현을 보면, 박, 김, 이, 목, 전, 오, 윤, 문, 임 등의 9개의 토성이 나와 있다. 

 

여기에 타 지역에서 들어온 외래 성씨로 황, 허, 정씨가 나중에 유입된다. 아무튼 역사적 기록을 봐도 딱히 우리나라에 김, 이씨가 유달리 많았던 적은 없었고, 그런 근거도 부족하다. 혹시 김씨, 이씨들만 유독 번식력이 왕성했던 것일까? 라고 생각하면 넌센스다. 김씨, 이씨가 많아진 진짜 원인은, 그만큼 가짜 성씨로 인기가 높았기 때문이다. 당시 조선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김씨였고, 그 다음이 이, 박, 최, 정씨의 순이었던 것이다. 최근 통계자료를 보면 이렇다. (조선 후기 성씨의 인기 순이라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 사람들 중 21%정도가 김씨인데, 총 1000만명이다. 이씨는 약 680만명 정도로 15%정도다. 이 두 성씨를 합하면 전 인구의 36%가 김씨나 이씨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걸 보고 왜 가짜라고 말하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원래 성이 없던 사람이 성을 새로 가지려면 새로운 성을 만들어야 한다. 이게 전세계 모든 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상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이미 있는 다른 사람의 성씨 속에 은근슬쩍 들어가버린 것이다. 그러니 가짜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대부분 김씨와 이씨를 선택했을까? 그것은 당시 성을 신고하던 시기와 무관하지 않다. 일단 조선은 전주 이씨가 세운 나라였다. 그리고 구한말에는 세도가 안동 김씨의 힘이 상당했다. 

 

이왕 선택하는 성씨인데, 가급적이면 괜찮은 걸 택하고 싶은건 사람들의 본능 아니겠는가! 그래도 너무 뻔히 보이는 짓이라고 생각해서 몰락한 왕가의 성씨를 택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 그래서 인기였던 성씨가 옛 가야왕의 성씨였던 김해 김씨와 신라왕의 성씨였던 밀양 박씨, 경주 김씨였다. 현재 우리나라의 본관 순위를 보면 김해 김씨가 410만명으로 1위, 밀양 박씨가 300만명으로 2위, 경주 김씨가 170만명으로 4위인데, 이런 이유와도 무관하지 않다. 

 

매우 유감스러운 말이지만 위에 나타난 상위권 본관자들의 경우 가짜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 매우 많을 것으로 사료된다. 1~3위는 아마 99%가 가짜? 우리보다 40년 먼저 전국민 성씨 갖기 운동을 추진했던 일본의 경우, 1억 3천만 인구 중 가장 많은 성씨가 사토(佐藤)씨로 총 인구는 45만명에 불과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본의 38% 수준의 인구로, 본관 순위 20위까지 40만명을 넘고 있으니, 이는 누가 봐도 수상쩍다.    

 

한 마을이 통채로, 노비들이 통채로 같은 성씨가 되기도 

 

우리나라 시골에 보면 유독 '집성촌'들이 많은데, 여기에는 이런 비밀이 있다. 가령 낙향한 가난한 양반이 한 집 있으면, 그 고을의 성씨가 없던 부락민들이 돈이나 양식을 주면서 부탁하여 같은 성씨로 입문을 하곤 했다. 심지어 마을의 의견을 모아 부락 전체가 통째로 같은 성씨가 된 경우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노비들이 통채로 주인의 성을 따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기본적으로 노비는 상전을 부모와 같이 취급해야 했기 때문에 노비들이 면천을 하면서 주인의 성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던 것. 때문에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를 폐지할 당시,안동 김씨의 한 권문세가의 노비 300여명은 일사불란하게 주인과 같은 성씨가 되기도 했다. 또 성씨가 많아진 데에는 당시 족보를 변조하던 전문 사기꾼이 특정 족보를 입수해서 판본으로 만들어서 대량 찍어냈던 탓도 있었다. 이런 판본이 있으면 사기 족보는 대단히 만들기 쉬었다. 이름 하나만 추가시키면 됐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우리나라의 성씨 

 

꼴랑 성씨 두개가 전 국민의 30%가 넘는 나라는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밖에 없다. (라고 생각했지만, 베트남은 Nguyen씨만 40%다.) 중국도 가장 많은 이씨, 왕씨, 장씨를 모두 합쳐봐야 20% 정도다. 사실 일본도 성씨 없이 살기는 우리나라와 마찬가지였다. 1868년 메이지 유신 후에 전국적으로 성씨를 만들게 하여 생겨나게 됐으니, 당시는 이런 식으로 성씨를 만들어 붙였다. 산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은 야마나카(山中), 소나무가 많은 고장에 살던 사람들은 마츠시타(松下), 들판 가운데 살던 사람들은 다나카(田中), 대밭이 있는 지역은 다케다(竹田)..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일본의 성씨는 현재 1만 여개가 넘는다. 반면에 중국의 성씨는 현재 약 2만 3천개에 달한다. 

 

미국 역시 성씨는 수만 가지다. 미국인들의 성씨는 대부분 성경이나 히브리어, 그리스어, 라틴어 등에서 따온게 특징인데, 흔히 직업을 나타내는 성씨가 많다. 가령 '베이커'는 제빵사, '스미스'는 대장장이, '부시' 나무꾼, '파머' 농사꾼, '피셔' 어부, '코핀' 장의사 등등 대략 이런 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성씨를 모두 합해봐야 현재 총 286개에 불과하다. 그마저 1960년대까지 258개였는데, 외국인 귀화로 좀 늘어난게 그 정도다. 이 모두가 우리 조상들은 성씨를 얻으면서, 새롭게 성씨를 짓기보다는, 기존의 성씨로 들어가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만 했던 것일까? 여기에는 바로 조선이라는 뿌리 깊은 '신분제 사회'라는 특수성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성씨를 쓰려는 자체가 차별받는 상민, 천민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인데, 새로운 성씨를 쓰면 곧 천한 출신이라는 증표가 되고 만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대로 성이 없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여기에 창씨 자체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이라는 사회의 폐쇄성과 권위도 크게 한 몫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대부분이 가짜

 

이런 엉터리 성씨와 함께, 조선의 폐쇄적 잔재를 입증하는 또 하나의 실체로 '족보'가 있다. 요즘 집집마다 족보가 있고, 대한민국 사람이면 누구나 왕가의 후손이요, 명문가의 잔손들일텐데.. 그러나 이중에 진짜 족보는 10%도 안되는게 현실이다족보에 나와 있는 조상들 중에 5, 6대 이상이 자신의 실제 선조일 가능성은  10%도 안 된다는 뜻이다. 

 

남의 족보를 빌려다가 위는 베끼고, 아랫부분은 현재의 자기 가족들을 집어넣는 방식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해방 직후까지 이런 가짜 족보를 만들어 주고, 한 재산 모았던 브로커들이 많았는데, 이런 것은 원본 족보와 대조해 보면 금방 밝혀지지만, 실제로 그렇게까지 하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하도 가짜가 난립하다보니, 어느게 진짜인지도 나중에는 분간이 어려워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제대로 된 족보는, 15세기 후반이나 되어야 최초로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안동권씨의 성화보) 당시까지 족보를 가진 가문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실제로 양반이면서 족보가 없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조선 후기 들어오면서부터 양반들의 허례허식이 강해져 족보를 양반의 필수품 쯤으로 여기게 되면서, 조직적으로 족보 위변조를 하는 풍토가 생겨나기 시작한다.

 

영조 때 기록을 보면 이렇다.  신하 "전하 어떤 역관 하나가 사사로이 활자를 주조한 다음...  족보를 찍어내어 양민들한테 팔고 있으니 큰일입니다."  당시 상민이나 천민이 족보를 갖게 되면 무슨 혜택이 있다고 저랬을꼬? 혜택이 있었다. 가장 큰 것은 군역의 면제였다. 당시는 양반들이나 유생들은 군역에서 제외됐다. 그런데 당시 관례로 족보를 지참하고 있으면 양반으로 인정을 했던 것이고, 이런 이유로 족보가 있으면 군역이 면제될 수 있었다. 물론 이들이 군역 면제만을 노리고 위조된 족보를 산 것은 아니었으니, 천대 받는 신분을 벗어나고 싶은 욕구가 1차적인 목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위변조가 계속되면서 나라에서도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18세기 말부터는 아예 양반들이 스스로 돈을 받고 자기 족보에 올려주는 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그 결과 오늘날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다 족보를 가진 양반가의 후예를 자처하고 있음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17세기 당시 조선의 전체 인구 중 60%가 노비였는데, 현재 어느 누가 자신의 조상을 노비라고 말할 수 있을지..   

 

소소한 얘기

 

① 이름 앞에 성이 오는 나라: 동아시아, 헝가리, 인도.

 

② 이름 뒤에 성이 오는 나라: 헝가리를 제외한 서양 모두, 터키. (터키는 원래 성이 없었지만 근대 들어 생김)

 

③ 성이 없는 나라: 아랍. (때문에 이름에는 아버지 이름, 할아버지 이름, 부족출신, 고향이름 등이 붙는다) 궁예, 왕건, 견훤도 사실 성이 없던 인물이었다. 견훤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개였다.

 

④ 결혼을 하면 여자의 성이 남편 성을 따르는 나라 : 대부분 국가, 일본.

 

⑥ 결혼을 해도 여자의 성이 남아있는 나라 : 한국, 중국. 고려시대에는 왕가의 여인들은 결혼전 어머니의 성을 따르기도

 

⑥ 부모와 자식들의 성이 다른 나라 : 아이슬란드. 아버지 성씨에 아들에게는 -sson(쏜)을 붙이고, 딸에게는 -dottir(도띠르)를 붙인다.

 

⑦ 서양에서 전치사가 붙는 성씨는 대개 귀족의 성씨다. 프랑스 de(드), 독일 von(폰), 네덜란드 van(반), 스페인 de(데) 

 

⑧ 이런 성은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뜻. -son, -sson으로 끝나거나, O' 혹은 Mc(Mac)으로 시작하는 경우, 예를 들어 Handerson, McGuire, O'brien..

 

우리나라에서 동성동본 금지는 왜 할까?  

 

우리나라는 해방 후 법을 만들면서 동성동본 혼인을 법으로 막고 있다. 본래 동성동본 금혼은 성씨가 많지 않았던, 1669년 현종 당시 송시열이 주장하여 만든 것이다. 당시로서는 아마 당연한 규제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씨가 이미 엉망이 된 마당에 동성동본 타령을 하는 것은 웃기지 않는가? 이보다 '근친혼 금지법'을 제정하는 것이 훨씬 타당할 듯 싶은데.. 

 

스공 2013.12.26. 18:17

최근 민법 개정으로 동성동본금지에서 근친혼금지로 시행되 있습니다. 

 

만쭈리 2014.01.01. 14:55

애초에 성씨는 양반들만 가질 수 있는건데, 노비들은 성씨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유언비어 때문에 그런 성씨의 도용을 꺼려했다면, 천방지추마골피 성씨들이 순수한 양반 성씨일 가능성이 높죠

 

『1910년의 호구조사에서도 확인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하다. 그 가운데 충청남도가 충남 전체 가구수의 10.3%로 가장 양반이 많고 충북(4.5%) 경북(3.8%) 서울인 한성(2.1%) 그리고 전북(1%), 여타 도는 모두 1% 미만이었다. 양반이 많았던 고을은 경북 경주군(2599호), 충남 목천군, 경북 풍기군, 충남 공주군 순 이었다. 경상북도와 충청도, 한성에 양반들이 집중되어 있고 그나마도 인구의 5%를 넘지 못했다.

 

조선왕조의 지배권이 무너진 뒤이고, 갑오농민전쟁(동학 혁명)이나 갑오개혁을 겪은 뒤 19세기보다 훨씬 후대에 와서도-양반을 사칭해도 (법적으로는)처벌받지 않을 만한 환경이 되었는데도- 양반이 겨우 1.9%에 불과했다는 것은, 흔히 알고 있는 통설과는 달리 조선의 양반 숫자는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았으며 늘어난 것은 향족(품관)보다도 낮은 유학(유생. 벼슬을 하지 않은 학생)들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위 사실에 비추어 보면 조선말에 관직양반 1.9%, 가계확인이 불가한 유생 사칭 성씨 도용 짝퉁 양반이 70%였던것으로 추정됩니다....

 

-옮긴글 : 꽃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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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여자는 팬티를 입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는 과정에서 오랜 전쟁으로 남자들이 너무 많이 전장에서 죽자 왕명으로 모든 여자들에게 외출할 때 담요 같은 걸 항상 메고, 아랫도리 속옷은 절대 입지말고 다니다가 어디에서건 남자를 만나면 그자리에서 언제든지 애기를 만들게 했다.  

 

이것이 일본 여인의 전통의상인 기모노의 유래이며, 오늘날에도 기모노를 입을 땐 팬티를 입지 않는 풍습이 전해지고 있다. 그 덕분에 운이 좋아 전장에서 살아남은 남자들은 아무 여자하고 하고싶은 마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깃발을 꽂는 행운을 얻었다. 그 결과,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는 애가 수두룩 태어났는데, 이름을 지을 때 할 수 없이 애를 만든 장소를 가지고 작명을 하였는데 그것이 족보가 되어 일본인들의 성(姓)씨가 되었다 한다. 그래서 세계에서 성씨가 가장 많은 나라는 일본이다. 한국은 약 300성씨이나, 일본은 10만개의 성씨가 넘는다 한다.

 

1.     木下(기노시다)-나무 밑에서~~

 

2.     山本(야마모토)-산 속에서 만난 남자의 씨

 

3.     竹田(다케다)-대나무 밭에서 작업을 한 아이

 

4.     大竹(오다케)-큰 대나무 밑에서~~

 

5.     太田(오타)-콩밭에서~~

 

6.     村井(무라이)-시골 동네 우물가에서~~

 

7.     山野(야마노)-산인지 들판인지 아리송~ (2명하고 연달아 해서 ㅋㅋ)

 

8.     川邊(가와베)-거시기 끝내고 고개를 들어보니 개천이 보여서~~

 

9.     森永(모리나가)-숲속에서 오래 만난 남자의 애

 

10.   麥田(무기타)-보리밭에서~~

 

11.   池尻(이케지리)-도랑옆에서

 

12.   市場(이치바)-시장(공방에서)

 

13.   犬塚(이누즈카)-개무덤에서

 

14.   田中(다나카)-밭 한가운데에서

 

15.   內海(우츠미)-가까운 바닷가에서~

 

16.   奧寺(오쿠데라)-절에서~~ (카도야) –코너에 있는 집에서

 

17.   柏木(카시와키)-측백나무 아래서~

 

18.   桐本(키리모토)-오동나무 아래서

 

19.   小島(코지마)-작은 섬에서

 

20.   小林(코바야시)-작은 숲에서

 

21.   笹林(사사모리)-조릿대(대나무와 비슷) 숲에서

 

22.   高柳(타카야기)-버드나무 아래서

 

23.   皆川(미나가와)-개천가에서

 

24.   水上(미나카미)-물위에서(온천?) 

 

그중 특히 ‘밭전(田)’ 자가 많은 것은 논에서는 그짓을 할 수 없어 주로 밭에서 했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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