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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기상] [워털루에서 운명 갈린 동갑내기 전쟁 영웅] ....

뚝섬 2024. 12. 8. 05:40

[전쟁과 기상]

[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동갑내기 두 장군의 워털루 혈전 200주년]

 

 

 

전쟁과 기상

 

거센 파도 피해 태풍 좌측으로 항해… 인천상륙작전 성공 배경이죠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요소는 무엇일까요? 첨단 장비·병력·정보 등도 중요하지만, 쉽게 간과되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날씨예요. 비가 내리면 적군이 움직이는 발소리가 잘 안 들리고, 안개가 끼면 가시거리가 짧아져 청각에 더욱 의존하게 됩니다. 미국 전 대통령이자 2차 세계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이끈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장군은 날씨를 아는 장군이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죠. 오늘은 기상이 전쟁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알아볼게요. 

 

미 해병대 장병들이 1950년 9월 15일 인천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방조제를 오르는 모습이에요. /미 해군 역사유산 사령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날씨는 ‘전선’의 영향을 크게 받았어요. 전선이란 온도와 밀도 등 성질이 다른 두 공기 덩어리가 만나는 경계면을 말해요.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장의 기상을 미리 아는 것이 중요해지면서 날씨에 관한 연구가 활발해졌고, 당시 기상학자들은 공기 덩어리가 만나는 것이 마치 전쟁에서 서로 충돌하는 군대처럼 보인다고 해서 군사 용어인 ‘전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답니다.

 

상륙 예정일이었던 1944년 6월 5일. 당시 대서양을 지나가는 저기압에 동반된 한랭전선이 폭우와 강풍을 몰고 와 작전을 펼치기 어려워졌어요. 연합군의 기상학자들은 한랭전선이 지나간 6월 6일 새벽에 일시적으로 기상 상태가 안정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결국 상륙을 다음 날로 연기하죠.

 

반면 상대편이었던 독일군은 악천후가 지속될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연합군의 상륙 가능성을 낮게 보고 방어 태세도 소홀해진 것이죠. 대망의 ‘디데이’(D-day)에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구름이 일부 걷히며 파도가 잦아들었고, 연합군은 기습 상륙에 성공했습니다. 정확한 기상 정보가 작전 성공을 이끈 것이죠.

 

우리나라에서도 날씨는 전쟁에서 아주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어요. 고려 말, 요동 지역을 정벌하라는 왕의 지시에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며 반대했어요. 그중 두 가지가 날씨와 관련된 것이었어요.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 군사를 움직이기 어렵고, 장마가 찾아오면 활에 붙어 있는 아교가 녹는다는 것이죠.

 

6·25 전쟁 당시 인천 상륙작전도 정확한 기상 예측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어요. 당시 연합군은 바람과 파고 등을 분석해서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적은 1950년 9월 15일을 작전일로 정했는데, 작전 직전에 태풍이 한반도 근처를 지나 준비에 어려움을 겪었어요.

 

이때 한 장교가 태풍의 좌측 부분에 들어가면 항해가 가능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태풍 좌측의 풍향은 태풍 진행 방향과 반대라서 바람과 파도가 약했기 때문이었죠. 그의 말을 따라 연합군은 비교적 안전하게 항해하며 작전 지역으로 접근했고, 태풍이 지나간 후 상륙을 실행했어요. 반면 북한군은 태풍 때문에 해상 작전이 어려울 거라 판단했다고 합니다. 그만큼 방어 태세도 부족했죠.

 

정확한 기상 분석은 미래에도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역할을 할 거예요.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하겠지만, 기상 상황을 알고 전쟁을 대비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에는 큰 차이가 있을 겁니다.

 

-장동언 기상청장, 조선일보(2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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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사망 200주년..

 

워털루에서 운명 갈린 동갑내기 전쟁 영웅 

 

지난 5일(현지 시간)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사망 200주년을 맞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769~1821)<왼쪽> 묘에 헌화했어요.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도 '영웅'과 '독재자'로 평가가 갈리는 인물인데요, 사망 200주년을 맞아 전 세계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고 평가하는 '나폴레옹 다시 보기'가 한창입니다.

거의 전 유럽을 석권한 나폴레옹은 '전쟁의 신'으로 기억되지만, 마지막으로 치른 1815년 워털루 전투에서는 처참하게 졌습니다. 그러곤 대서양의 외딴섬 세인트 헬레나로 귀양 가 1821년 5월 5일 세상을 떠났죠. 당시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해 나폴레옹 시대를 저물게 한 사람은 바로 영국의 웰링턴 장군(1769~1852)이에요. 나폴레옹과 같은 해 태어난 동갑내기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물리쳐 유럽 전역에서 명성을 얻었고, 이후 영국 총리까지 올랐어요. 그런데 200년이 지난 오늘날 패자인 나폴레옹이 승자인 웰링턴보다 더 큰 관심을 받고 있습니다.

시골 출신 황제 vs 귀족 출신 총리

나폴레옹과 웰링턴의 삶은 시작부터 달랐어요. 나폴레옹은 1769년 프랑스 식민지였던 지중해의 작은 섬 코르시카에서 하급 귀족 출신으로 태어났어요. 그는 열 살 때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 본토로 건너가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했고, 이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어요. 프랑스 귀족 자제가 즐비한 사관학교에서 시골 출신 나폴레옹은 코르시카 사투리를 쓰는 촌놈으로 놀림받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은 나중에 지휘관이 됐을 때 시골 섬 출신 특유의 거칠고 솔직한 태도로 농민 출신 사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해요.

반면 웰링턴은 아일랜드 귀족 출신이었죠. 본명은 아서 웰즐리인데, 1814년 영국 왕에게 공작 작위를 받아 1대 웰링턴 공작이 됐어요. 평소 사람들 앞에서 자기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을 뿐 아니라, 신분이 낮거나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겐 거들먹거렸다는 평가가 전해질 만큼 뼛속까지 귀족이었던 모양입니다. 부하들에게도 인기가 없었다고 해요. 그는 열두 살 때 명문 사립학교인 이튼칼리지에 들어갔는데, 나중에 워털루 전투에서 승리한 후 "워털루의 승리는 이튼의 교정에서 시작됐다"는 말을 하기도 했어요. 이튼칼리지는 웰링턴 장군을 포함해 영국 총리를 20여 명 배출한 학교예요. 현 보리스 존슨 총리도 이튼 출신입니다.

쿠데타로 권력 장악 후 황제 즉위

나폴레옹은 사관학교 졸업 후 장교로 활약했어요. 당시 유럽 지배층은 시민들이 절대 왕정을 무너뜨린 프랑스 혁명(1789~1794) 바람이 유럽 전역에 확산될까 봐 두려워했어요. 그래서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대(對)프랑스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싸우기 시작합니다. 나폴레옹은 대프랑스 동맹과의 전투에서 공적을 세우며 인기가 높아졌고, 1799년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했어요. 5년 뒤엔 황제에 즉위했죠. 이후 군사, 법전,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서 대변혁을 일으켰어요. 또 유럽 국가들과 전쟁을 벌여 스페인부터 프로이센, 오스트리아까지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고, 프랑스 영토를 3배로 넓혔습니다.

승승장구하던 나폴레옹은 1812년 러시아 원정으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굶주림과 추위로 많은 병사를 잃었죠. 마침내 1814년 영국 등 대프랑스 동맹군에게 파리를 함락당하고, 이탈리아 서해안 엘바섬으로 추방당했어요. 이에 프랑스 혁명으로 처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이 루이 18세로 즉위하면서 프랑스는 왕정이 복고(復古·과거로 돌아감)됐죠. 나폴레옹은 1815년 2월 동맹군의 감시를 피해 엘바섬을 탈출했어요. 그가 프랑스에 돌아왔을 때 많은 지지자가 환영했어요. 루이 18세는 벨기에로 도망갔고,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기까지 100일간 프랑스를 다시 지배했답니다.

웰링턴은 이튼칼리지에서 성적이 그다지 좋지 못하고 아버지가 사망한 뒤 가세가 기울자 1785년 프랑스 육군사관학교로 옮겼어요. 1796년부터는 식민지 인도의 총독이었던 형을 따라가 10년 동안 폭동을 진압하며 공을 세웠죠. 이후 유럽으로 돌아와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의 수많은 전투에서 활약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엘바섬으로 유배된 후 전후 질서를 논의하기 위해 유럽 각국이 참여한 '빈 회의'가 열렸는데, 웰링턴은 영국 대표로 파견될 정도로 높은 지위에 올랐습니다.

나폴레옹 시대를 끝낸 워털루 전투

1815년 나폴레옹이 다시 프랑스 권력을 잡자 영국 등 동맹국들은 그를 타도하고자 했어요. 이에 나폴레옹의 프랑스군과 웰링턴이 이끈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 지역에서 격전을 벌인 게 '워털루 전투'입니다.

나폴레옹은 먼저 프로이센군을 공격해 퇴각시킨 다음 영국군을 총공격했어요. 전투는 프랑스군의 승리로 기우는 듯했는데, 갑자기 퇴각하던 프로이센군이 돌아와 프랑스군을 기습 공격하면서 영국·프로이센 연합군이 승리합니다. 이렇게 프랑스와 유럽 국가들의 23년에 걸친 오랜 전쟁도 끝났어요. 하지만 웰링턴은 추후 동시대 가장 훌륭한 장군이 누구냐는 질문에 "현재에도, 과거에도, 미래에도 바로 나폴레옹입니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전투에선 이겼지만, 군사 전략가로서 나폴레옹 능력에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곳곳에 이름 남긴 웰링턴 장군

웰링턴 장군 이름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어요. 뉴질랜드 수도 웰링턴이 그의 이름을 딴 것이고, 많은 사람이 신는 고무 장화 '웰링턴 부츠'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어요. 웰링턴은 당시 장식품이 달린 가죽 군화가 거추장스러워 개선하라고 지시했고, 단순하고 실용적인 부츠가 탄생했어요. 이 부츠는 처음엔 '웰링턴 장군의 부츠'로 불리다가, 아예 제품명이 '웰링턴 부츠'로 굳어졌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무로 된 웰링턴 부츠를 신어요. 소고기에 푸아그라(거위 간)와 버섯 페이스트를 바르고 페이스트리 반죽으로 얇게 감싸 구워 낸 영국 음식 '비프 웰링턴'<사진>도 웰링턴 이름을 딴 것으로 전해져요. 워털루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웰링턴 장군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등 여러 설이 있어요. 

 

-윤서원·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연주 기자, 조선일보(21-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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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갑내기 두 장군의 워털루 혈전 200주년

 

200년 전 그 날 워털루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지금으로부터 꼭 200년 전인 1815년 6월17일 밤 워털루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역사는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1814년 4월4일부터 시작해보자. 이날 프랑스제국 황제 나폴레옹은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등 동맹국 군대에 항복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 남부해안에서 가까운 엘바섬에서 왕으로 격하되어 사실상 귀양살이를 한다. 수도 파리에선 대혁명 때 사형당한 루이 16세의 동생 루이 18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러나 무능한 루이 18세는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한다. 첩자들을 통해 이런 민심을 포착한 나폴레옹은 귀양살이 11개월 만인 1815년 3월1일 엘바섬을 탈출하여 프랑스 본토에 상륙, 빠리를 향해 나아간다. 루이 18세 왕은 나폴레옹의 심복이었던 네이(Ney)장군에게 나폴레옹 체포 명령을 내린다. 그러나 네이장군과 그의 병력은 나폴레옹에 의해 설득되어 다시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3월20일 다시 빠리로 돌아가 정권을 탈환한 나폴레옹은 그를 패망시키려는 영국 등 동맹국 군대와 다시 전쟁을 시작, 6월18일에는 프랑스 북쪽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우선 점령하기 위해 그 근처의 시골 마을 워털루로 7만2천 병력을 이끌고 간다. 그곳에는 영국의 웰링턴 장군(본명 아앗서 웰레슬리)이 6만8천 병력으로 방어진을 치고 있었다.
 

 

워털루전투

 

두 장군은 46세 동갑내기였다(나폴레옹이 3개월 먼저 태어남). 두 사람은 키도 거의 같은 1미터68센티미터 정도의 단구였다(푸틴 현 러시아 대통령 키 정도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185cm).

6월16일 나폴레옹은 전선 동부에서 프러시아(독일)의 블뤽허 장군 휘하 병력을 북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전선 서부에서는 영국군을 포함한 동맹국 병력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런데 17일 밤 비가 많이 내려 땅이 질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땅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 이것이 실수였다. 그가 땅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동안 블뤽허 장군의 프러시아 군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웰링턴 장군과 합세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다.

땅이 대충 마르자 나폴레옹은 18일 오후에야 웰링턴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병력 숫자상 약간 불리한 웰링턴은 프러시아 지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나폴레옹은 또 하나의 실수를 저지른다. 병력을 좌우로 갈게 한줄로 만들어 공격하지 않고, 적의 중앙을 돌파해 적의 등 뒤에서 다시 역공격해오는 방식을 선택, 짧은 줄을 겹겹이 만들어 돌격시키는 바람에 적의 대포 사격의 좋은 표적이 되게 했다. 게다가 우려하던 프로시아 지원병력이 때맞춰 나타나 웰링턴 병력과 합세했다. 전투는 저녁 7시경 나폴레옹의 참패로 끝났다. 프러시아군대가 웰링턴을 지원한 것이 나폴레옹 패배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패전한 나폴레옹의 모습

 

나폴레옹은 그날따라 지병인 치질과 방광염 때문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패전한 나폴레옹은 직속 친위병력만 데리고 남쪽으로 도주했다. 영국군과 프러시아군은 도주하는 나폴레옹을 사살할 수도 있었으나 웰링턴은 죽이지는 말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했다.

 

나폴레옹은 수도 파리로 돌아가 6월24일 왕위를 어린 아들에게 넘겨주고 자신은 미국으로 가기 위해 대서양 연안 항구로 갔다. 마땅한 배를 구하지 못했다. 그는 웰링턴의 만류에도 자기를 잡아 죽이려는 블뤽허 프러시아 장군 병력을 피해 영국 군함에 올라타 항복했다. 그리고 자기는 미국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것이 거절되자 이번엔 영국으로 건너가 조용히 살겠다고 했다, 그러나 영국 등 동맹국은 나폴레옹의 소원을 거절하고 그를 멀리 남대서양 외로운 섬 쎄인트 헬레나(영국영토)로 귀양보냈다.

나폴레옹은 거기서 부인도 자식도 없이 혼자 외롭게 6년을 살다가 1821년 51세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위암. 영국이 그의 음식에 독약을 조금씩 넣어 서서히 죽였다는 설도 있으나 확인되지는 않았다. 그의 유해는 1840년 파리로 돌아가 화려한 관 속에 모셔져 있다. 필자는 1991년 유럽 여행 중 그 관을 구경했다. 여행사 관광지 목록에는 대게 빠져 있으므로 특별히 부탁을 하거나 혼자 틈을 내 가봐야 한다.

한편 동맹국들은 나폴레옹 아들을 쫓아내고 루이 18세를 다시 데려다 프랑스 왕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대혁명은 허사로 끝난 것일까? 아니다. 나폴레옹 15년 치하에서 프랑스는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유럽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국이 되었다. 특히 나폴레옹 법전은 "범죄용의자는 유죄가 확정되기 전에는 무죄로 인정하며 재판 없이 피의자를 장기간 구속하지 못한다는"는 원칙을 처음 만든 훌륭한 법전으로 평가 받고 있다.
 

 

웰링턴 장군

 

유럽대륙을 15년간 호령하던 나폴레옹을 패망시킨 영웅 웰링턴 장군은 영국의 장관과 수상까지 지내면서 동갑내기 나폴레옹보다 20년을 더 살았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가 전해 내려온다. 웰링턴은 나폴레옹을 귀양 보내고 파리에서 나폴레옹의 애첩 두 명을 불러 동침했다고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조셉휘나 그라씨니라는 이탈리아 출신 오페라 가수로 당대 최고 미녀의 하나로 소문난 여자였다 한다. 다른 한 명은 마게릿 와이머라는 프랑스 미인인데, 와이머는 나폴레옹보다 웰링턴이 침실에서는 더 훌륭했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웰링턴은 마음에 들지 않은 여성과 결혼하여 외도를 자주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외도 상대 여성 가운데는 해리엣 윌슨이라는 런던의 고급 콜걸도 들어 있었다 한다. 웰링턴 장군과 유명한 시인 바이런 등 영국 상류사회 플레이보이 2백여 명을 상대한 윌슨 여인은 회고록을 쓰면서 자기와 동침한 남자들이 자기한테 돈을 주면 회고록에서 이름을 빼주겠다고 공개적으로 협박했다 한다. 그러나 웰링턴 장군은 Publish and be damned! (그까짓 회고록 쓸 테면 써봐라!)며 협박에 굴하지 않았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웰링턴을 협박한 콜걸 윌슨

 

워털루 결전 200주년에 워싱턴에서 조화유

 

-조화유(재미(在美) 작가, 영어교재 저술가, 경남 거창 출생. 부산고와 서울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조선일보 .. ), 조선일보(1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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