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번호] [클래식도 온라인 선점해야 산다] ....
[작품 번호]
[클래식도 온라인 선점해야 산다]
[여러 작곡가의 교향곡 5번이 겪은 ‘운명’들]
작품 번호
'Op' 'K' 'D'… 클래식 음악에 붙이는 '주민등록번호'
지난 9월 모차르트(1756~1791)의 미발표 작품이 작곡가 사후 233년 만에 공개됐지요. 모차르트가 10대 초반인 1760년대 중후반에 작곡한 것으로 보이는 12분 길이의 현악 3중주 작품이에요. 7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악보는 모차르트 전문 연구 기관인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재단이 작곡가의 작품 목록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찾아냈습니다.
지난달에는 미국 뉴욕 박물관에서 폴란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쇼팽(1810~1849)이 20대 초반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 왈츠의 악보도 발견됐습니다. 중국 피아니스트 랑랑이 이 곡을 연주한 영상도 화제를 모았죠. 작곡가들이 세상을 떠난 뒤에 발견된 미발표곡들은 과연 어떤 절차를 거쳐서 공식 작품으로 ‘인증’을 받게 되는 걸까요.
필적과 악보 재질, 편지까지 검증하죠
라파엘로나 다빈치 같은 화가들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작품이 발견되면 미술계에서 진위를 둘러싸고 치열한 검증 작업과 논쟁이 벌어집니다. 결과에 따라서 그야말로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때문이지요. 악보는 그림만큼 가격이 오르지는 않지만, 모차르트나 쇼팽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악보가 발견되면 음악계에서도 비슷한 검증 과정을 밟게 됩니다.
작곡가의 필적과 악보의 재질을 따지는 건 기본이고, 작곡가의 편지나 전기 같은 기존 사료에 작품이 언급되어 있는지 살피는 교차 검증도 필수적입니다. 최근 발견된 모차르트의 현악 3중주 악보 역시 이런 절차를 거쳐서 모차르트의 친필이 아니라 1780년대에 작성된 사본으로 추정된다고 연구진이 발표했지요. 쇼팽의 왈츠 역시 악보의 재질과 작곡가의 필적, 작곡 양식 등에 대한 검증을 거쳐서 1830~1835년에 작곡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뉴욕 박물관측은 밝혔습니다.
이런 미발표곡들은 작곡가의 작품 번호를 받을 때 ‘최종 공인’을 받게 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주민등록번호를 받는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작곡가들의 작품 번호는 라틴어로 ‘작품’을 뜻하는 ‘오푸스(Opus)’ 숫자입니다. 약자(略字)로 ‘Op.’라고 표기하지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은 ‘Op. 67′, 교향곡 6번 ‘전원’은 ‘Op. 68′, 교향곡 9번 ‘합창’은 ‘Op. 125′로 적는 방식입니다.
작품 번호로 작곡 시기 가늠할 수 있어
작품 번호와 작곡 순서가 그대로 일치하는 건 아닙니다. 작곡가마다 기악곡에는 작품 번호를 붙이지만 성악곡에는 빼놓기도 하고, 활동 초기에는 꼬박꼬박 번호를 붙이다가 나중에는 안 붙이기도 하지요. 또한 작품 출판을 미루거나 깜빡 잊는 경우도 생기고, 반대로 이미 발표한 작품을 폐기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때문에 베토벤의 경우에는 작품 번호 없는 작품들(WoO)을 별도로 모아놓기도 했습니다. ‘WoO’는 ‘작품번호가 없는 작품’이라는 뜻의 독일어 약자죠. 공식 작품 번호가 없는 베토벤의 곡 가운데 가장 유명한 피아노 소품이 바로 ‘엘리제를 위하여(WoO 59)’입니다.
작품 번호를 정리하면 작곡 시기를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실례로 작품 번호가 붙어 있는 베토벤의 ‘운명’(Op. 67)과 ‘전원’(Op. 68)은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중기 걸작으로 1808년 12월 22일 같은 날 나란히 초연됐지요. 마찬가지로 ‘합창’(Op.125)은 1824년 베토벤의 후기작이라는 걸 작품 번호만으로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작곡가 스스로 작품 번호를 붙이지 않아서 사후에 후대 학자들이 정리한 경우입니다. 우선 바흐와 헨델 같은 바로크 시대 작곡가들은 대체로 ‘바흐 작품 번호(BWV)’나 ‘헨델 작품 번호(HWV)’처럼 딱딱하고 재미없는 약칭이 붙는 경우가 많습니다. 작품 번호(Werke Verzeichnis)라는 독일어의 머리글자를 딴 이름입니다.
‘음악의 아버지’답게 바흐는 1000여 곡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는데, 작곡 순서가 아니라 장르별로 작품을 분류한 것이 특징입니다. 종교음악인 칸타타가 바흐 작품 번호(BWV) 1~224번이고, 건반 음악은 BWV 772~994번, 관현악곡은 BWV 1041~1071번으로 분류하는 방식이지요. 헨델의 작품 번호 역시 장르별로 나눈 건 같습니다.
음악학자 이름 따 작품 번호 붙이기도
다음으로는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음악학자의 이름을 따는 경우입니다. 모차르트가 대표적인 경우인데 모차르트의 작품 번호 앞에는 ‘K’라는 약자가 붙습니다. 모차르트 사후에 작품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음악학자 루트비히 리터 폰 쾨헬(1800~1877)의 이름을 딴 것이지요. 그래서 ‘쾨헬 넘버’라고도 부릅니다.
쾨헬이 세상을 떠난 뒤에도 모차르트 작품 목록을 끊임없이 정리해서 지금까지 9차 개정판이 나왔습니다. 최근 발견된 현악 3중주 역시 ‘무척 짧은 소야곡(小夜曲)’이라는 별명과 함께 ‘K.648′이라는 작품 번호를 새롭게 부여받았습니다. 모차르트의 작품으로 비로소 공인받았다는 뜻이지요. 반면 쇼팽의 짧은 왈츠는 아직 작품 번호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쾨헬처럼 대가들의 작품을 성실하게 정리한 것만으로도 이름을 남긴 음악학자들은 적지 않습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1797~1828)도 사후에 작품을 정리한 음악학자 오토 에리히 도이치(1883~1967)의 이름을 따서 작품 번호 앞에 ‘D’라는 약칭을 붙입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1732~1809)의 작품 번호 앞에도 네덜란드 음악학자 안토니 판 호보컨(1887~1983)의 이름을 따서 ‘호보컨(Hob)’이라는 약칭을 붙이지요.
네덜란드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 출신인 호보컨은 공학에서 음악으로 전공을 바꿨어요. 그 뒤 바흐부터 브람스까지 작곡가들의 악보들을 5000여 종이나 수집했는데, 그 가운데 하이든의 교향곡과 실내악, 피아노 소나타 등이 1000여 종에 이르렀지요. 결국 호보컨은 자신의 자료를 정리할 개인 사서를 고용했는데 그 사서가 바로 슈베르트의 작품을 정리한 도이치였습니다.
-김성현 문화전문기자/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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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도 온라인 선점해야 산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메트)의 홍콩 오페라 상영을 알리는 포스터.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메트)은 런던의 로열 오페라하우스, 빈의 슈타츠오퍼, 밀라노의 라 스칼라와 함께 세계 정상을 다투는 오페라 명가(名家)다. 이 극장 사무실 복도에서 1시간 넘게 우두커니 앉아 있었던 적이 있다. 인터뷰가 예정된 피터 겔브 극장 총감독의 지각 때문이었다. 담당 비서의 위로에 겉으로는 “괜찮다. 기다리는 게 우리 일이니까”라고 답했지만, 속으로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라는 말이 실감났다. 9년 전 일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겔브의 지각에는 이유가 있었다. 중국 작곡가 탄둔의 신작 오페라 ‘진시황’의 영화관 중계가 그날 잡혀 있었다. 현장 총사령탑인 겔브는 인터뷰 도중에도 촬영·송출 준비 상황을 점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2006년 그의 취임 일성이 전 세계 영화관을 통해서 오페라를 상영하겠다는 것이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전경. 뉴욕 메트
물론 반발도 있었다. 당시 보수적 평단은 “팝콘을 씹으면서 오페라를 보라는 말이냐”고 비판했다. 하지만 메트 오페라의 영화관 상영은 공연을 전달하는 정도에서 그치지 않았다. 고난도 아리아를 부르고 퇴장하는 가수들을 현장 인터뷰하고, 막간(幕間) 전환을 위해서 대형 세트를 설치하는 모습도 낱낱이 공개했다. 스포츠 중계 같은 현장감과 박진감을 오페라에 더한 셈이었다.
그해 세계 8국 관객 32만명에서 출발한 메트의 영화관 오페라는 6년 만에 54국 295만명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최근 메트 경영 보고서에 따르면 티켓 판매와 민간 후원을 빼고 미디어 수입만 2200만달러(약 260억원)에 이른다. 코로나 사태로 지난 1년 반 동안 메트는 공연장 문을 닫았다. 올가을 공연을 재개하면서 메트가 뉴욕타임스에 게재한 광고도 극장 중계였다.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
오페라만이 아니다. 빈 필의 신년 음악회와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영국 국립극장(NT)의 셰익스피어 연극도 국내 복합 상영관에서 얼마든지 관람할 수 있다. 카라얀의 악단이었던 베를린 필하모닉은 온라인으로 전 세계에 콘서트를 중계한다. 작곡가 진은숙의 피아노 협주곡을 피아니스트 김선욱의 협연으로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기념비적 공연도 안방에서 볼 수 있다.
연극 배우의 열연이든, 성악가의 절창이든 전통적으로 공연은 아날로그 영역이었다. 찰나에 타올랐다가 감동이라는 결과물만 남기고 아스라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일회성 예술이었고 노동 집약적 산업이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는 공연 교과서를 첫 줄부터 다시 써야 할 판이다. 아날로그 영역이었던 공연은 첨단 정보통신 기술의 도로망을 통해서 전 세계로 퍼져 나간다. 물론 세상에 공짜는 없다. 클래식 역시 넷플릭스처럼 영상 서비스를 통해서 팬들의 통장에서 꼬박꼬박 월정액과 관람료를 인출해간다.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
문제는 코로나 시대에 공연 분야의 디지털 양극화도 빨라진다는 점이다. 시공간의 간극이 사라지고, 먼저 과감하게 투자에 나선 선두 주자들이 성과를 독식하는 온라인의 특징 때문이다. 아날로그 공연이 전부였을 때 예술의전당과 서울시향은 ‘홈경기’의 이점을 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온라인에서는 1등과 나머지의 격차가 갈수록 커진다. 베를린 필이 온라인 중계에 뛰어든 것이 13년 전, 메트가 영화관 상영을 시작한 것이 15년 전이다.
지난해 예술의전당도 ‘연극 무대를 스크린에서 재탄생시킨다’면서 연극 ‘늙은 부부 이야기’를 극장 상영한 적이 있었다. 당시 유료 관객(영화진흥위 전산망)은 딱 432명이었다. 세계 공연계가 가상 공간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닐 때, 우리는 뒤뚱뒤뚱 걸음마를 시작한 격이다. 예술의전당이 야외 광장에 스크린을 설치했다고 자족(自足)할 때가 아니다.
-김성현 기자, 조선일보(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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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작곡가의 교향곡 5번이 겪은 ‘운명’들
스탈린 체제의 억압 속에서 내면의 굴곡을 작품으로 승화한 소련 작곡가 프로코피예프(왼쪽)와 쇼스타코비치. 동아일보DB
베토벤 교향곡 5번 C단조는 교향곡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작품의 하나다. 단순한 음형을 조합하고 변형해 거대한 건축물처럼 쌓아올렸다는 점이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힘겨운 투쟁처럼 1악장을 시작하지만 끝악장인 4악장에서는 승리의 영광을 외치듯이 끝난다. 이른바 ‘암흑에서 광명으로’의 독일 이상주의적 모델을 확립했다는 점에서도 이 곡은 특별하다.
교향곡의 이상적 모델을 확립한 베토벤이 기념비적인 5번 교향곡을 써놓았으니, 그 뒤에 오는 후배 작곡가들도 5번이라는 숫자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5번 1악장 서주 부분 선율은 ‘운명의 동기’라고 불린다. 이 동기는 네 개 악장에 걸쳐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마지막 4악장에선 운명을 극복하고 환희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달리 들어보면 어딘가 비장하고, 운명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모습을 밝게 위장한 것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베토벤이나 차이콥스키나 교향곡 5번을 쓰는 것은 개인적 문제였지만 1915년에 핀란드 작곡가 시벨리우스가 처한 문제는 달랐다. 시벨리우스는 1914년에 조국인 핀란드 정부로부터 새 교향곡 작곡자로 위촉받았다. 시벨리우스는 전 세계에 핀란드를 대표하는 이름이었고 새 교향곡은 이듬해인 1915년, 시벨리우스 자신의 탄생 50주년을 기념해 연주될 예정이었다. 베토벤 5번에 맞먹는 기념비적인 곡이 되어야 했다.
머리를 싸매고 있던 시벨리우스의 눈에 멀리 하늘에서 점들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백조 열여섯 마리였다. 시벨리우스는 ‘백조들이 햇살이 비치는 안개 속을 은색 리본처럼 사라져갔다, 그 울음소리 이미지는 금관악기 같았다’고 적었다. 이 백조들이 시벨리우스를 구했다. 시벨리우스는 백조 소리의 이미지를 E플랫장조의 도-솔-도 시-솔-시라는 단순한 음향으로 형상화했고, 5번 교향곡의 마지막 3악장에 넣었다. 새 교향곡은 성공을 거두었다.
소련 작곡가 쇼스타코비치와 프로코피예프의 경우는 문제가 더 복잡했다. 1937년 11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5번이 나왔다. 40분 이상 갈채가 이어졌고 공산당 간부들은 이 곡이 공산주의의 최종 승리를 상징하는 곡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훗날 쇼스타코비치의 지인들이 증언한 내용은 이렇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이 곡은 누가 당신을 뒤에서 몽둥이로 내리치면서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 너의 임무는 기뻐하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러면 당신은 휘청거리며 일어나 앞으로 행진하며 그 말을 중얼거린다.”
프로코피예프는 1929년에 교향곡 4번을 내놓은 뒤 15년 동안 교향곡을 쓰지 않았다. 그는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서 겪은 내면의 굴곡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마침내 교향곡 5번을 내놓은 때는 1944년이었다. 나치의 침공을 겪은 소련이 독일군을 물리치고 공세로 돌아서 승리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이때 발표한 교향곡 5번의 마지막 4악장 악상기호는 ‘알레그로 조코소’, 즐거운 알레그로다. 어렵지는 않은 일이었다. 프로코피예프 천성에 쇼스타코비치 같은 무거운 비극성은 없었다.
그러나 이 곡의 유머와 즐거움은 천진난만한 낙관주의도, 영광스러운 찬가도 아니었다. 쇼스타코비치의 5번 교향곡에 못잖은 아이러니와 풍자가 들어있는 것을 청중들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구소련을 대표한 두 음악가 중 쇼스타코비치는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에도 22년을 더 살았고 비교적 편안한 말년을 보냈다. 프로코피예프는 스탈린이 죽은 바로 그날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그것 또한 두 사람의 ‘운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올 가을 여러 작곡가들의 교향곡 5번이 국내 무대를 수놓는다. 이달 2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는 얍 판 츠베덴 지휘 KBS교향악단이 베토벤 교향곡 5번과 프로코피예프 교향곡 5번을 이어 연주한다.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은 이달 28, 29일 오스모 벤스케 예술감독 지휘로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리는 서울시립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이어 11월 19일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지휘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리는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에서 잇따라 무대에 오른다.
-유윤종 문화전문기자, 동아일보(21-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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