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우크라는 같은 나라? 푸틴의 꿈은 이미 끝났다] ....
[러·우크라는 같은 나라? 푸틴의 꿈은 이미 끝났다 ]
[“같은 뿌리” “민족·종교·언어 달라”… 러·우크라 악연의 역사]
[오만 증후군에 빠졌나… 푸틴의 우크라전 세가지 오판]
[文明의 기수, 바이킹]
러·우크라는 같은 나라? 푸틴의 꿈은 이미 끝났다
우크라이나 출신 역사학자인 저자… 키이우 루스부터 당대사까지 분석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
세르히 플로히 지음 | 이종민 옮김 | 글항아리 | 568쪽 | 3만2000원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한 러시아군이 수도 키이우로 물밀듯이 진격했을 때, 전쟁이 오래 가리라 예상한 이들은 적어도 우크라이나 밖에서는 거의 없었다. 러시아 병사들의 전투식량은 2~3일분뿐이었고, 일부는 키이우 중심가에서 승리의 행진을 벌이기 위해 열병식용 제복을 입고 있었다.
불과 닷새 전 뮌헨안보회의에 참석한 우크라이나 대통령 젤렌스키에게 일부 서방 지도자는 “돌아가지 말고 망명정부를 수립하라”고 조언했다. 젤렌스키의 대답은 이랬다. “아침을 우크라이나에서 먹고 왔으니 저녁도 우크라이나에서 먹겠다.” 며칠 만에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은 2년 반 넘게 계속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군은 유린당한 영토 상당 부분을 되찾고 일부 전선에선 러시아 영토로 진입했다.
이 책(원제 The Russo-Ukrainian War)의 저자는 우크라이나 출신 역사학자로 미국 하버드대 교수다. 전면전 발발 소식을 듣고 고통과 분노에 휩싸였던 그는 주변의 권고로 개전 이듬해까지 경과를 담은 이 당대사(當代史)를 집필해 지난해 영국에서 출간했다. 책 중간에야 2022년 2월의 상황이 등장할 정도로 ‘도대체 왜 이 전쟁이 일어났나’라는 분석을 자세히 기술했다.
지난 7월 26일 우크라이나 동부 도네츠크 전선에서 우크라이나 병사가 러시아 진영을 향해 자주포를 발사하고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의 저자는 이 전쟁이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서방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한 반면 러시아의 위상을 실추시켰고, 나아가 미·중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 방향으로 세계를 재편하고 있다고 말한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모두 서기 10~13세기의 중세 국가 ‘키이우 루스’를 역사적 원형으로 인식하고 있다. 러시아에선 러시아·우크라이나가 동슬라브족과 동방 정교 같은 공통분모를 가졌다고 강조하지만 우크라이나는 ‘키이우 루스는 다민족 국가였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언어·문화가 달랐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우크라이나에선 19세기에 독자적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우크라이나는 공화국을 세웠으며,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일원이 됐다. 1991년 우크라이나인들은 국민투표를 통해 소련에서 벗어나는 독립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소련 해체를 가속화했다. 이때 전쟁이 벌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고르바초프와 옐친을 비롯한 소련 내 정치 지도자 누구도 유혈 사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2004년의 ‘오렌지 혁명’ 등으로 민주화를 이뤄 가던 우크라이나와는 달리 러시아에선 ‘유라시아주의’나 ‘대(大)러시아’ 같은 국수주의적 사상이 횡행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는 원래 같은 민족이었으므로 재통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 주창자 중 한 명은 과거 소련의 반체제 작가였던 솔제니친이었다. 문제는 러시아 대통령 푸틴이 이 사이비 이론을 신봉했다는 데 있다.
러시아가 자신을 가만 두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했던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당시 자국 영토 안에 있던 막대한 물량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신 나토(NATO·북대서양조약기구)와 EU에 가입해 보호막을 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했다. 결정적으로 2014년 우크라이나의 권력 공백 상태에서 러시아는 신속하게 남쪽 크림 반도를 병합하고 동쪽 돈바스를 침공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사실 이때 시작된 것이었지만 서방은 마치 제2차 세계대전 직전 히틀러를 관망했던 것처럼 ‘푸틴이 저러다 말겠지’라고 심드렁하게 여겼다. 2022년 전면전은 세계를 놀라게 했지만 간과된 것이 있었다. 그 8년 동안 우크라이나는 방어력과 전술 능력을 강화하는 내실을 갖췄다는 사실이다. 젤렌스키는 의외의 리더십을 발휘했고 우크라이나 민군(民軍)은 끈질긴 저항을 벌였다.
이제 푸틴의 계획은 좌절됐다. 러시아군은 이른바 ‘동족’이라는 우크라이나인들을 곳곳에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오히려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가 강화됐으며 서방과의 관계도 밀접해졌다.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극도로 우려했던 러시아는 지난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인접한 핀란드가 나토의 일원이 되자 뒤통수를 맞는 모양새가 됐다.
전쟁이 진행 중이라선지 책의 논지는 뒤로 갈수록 모호해지지만, 저자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초강대국을 중심으로 두 진영으로 나뉘는 세계의 양극화를 초래하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예전 중국이 그랬던 것처럼 ‘더 가난하고 더 무모한 동맹의 일원’이 되는 역할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유석재 기자, 조선일보(24-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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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뿌리” “민족·종교·언어 달라”... 러·우크라 악연의 역사
800년전 갈라져나왔지만… 우크라 ‘300년 러 영향권’ 아픈 역사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 21일 대국민 연설에서 “우크라이나는 항상 러시아의 일부였다”고 했다. 1100년 전 ‘키예프루스’라는 뿌리가 같아서 자국의 일부였다는 것일까. 강인욱 경희대 사학과 교수는 “소비에트 연방적 사관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했다. 우크라이나인들은 같은 키예프루스에서 나왔지만 러시아와는 구성 민족도 달랐고, 우크라이나는 독자적 종교도 가지고 있는 독립된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올레나 쉐겔 한국외대 교수(우크라이나어과)는 “푸틴의 주장은 한국이 중국 일부라고 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다”며 “지금 우크라이나인들은 법치와 민주주의를 위해 러시아와 싸우고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 독립 영웅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군을 물리치고 1649년 키예프로 입성하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 흐멜니츠키는 17세기 우크라이나 민족의 독립국가를 수립하기 직전까지 갔다. 그러나 외교적 오판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는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는 빌미를 주고 말았다. /위키피디아
◇하나의 뿌리 ‘키예프루스’
우크라이나·러시아·벨라루스는 9세기경 지금 우크라이나 지역에 출현한 첫 국가 ‘키예프루스’를 모체로 삼는다. 지금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우크라이나어로는 키이우)가 수도라 우크라이나는 자신들이 종가(宗家)라고 여긴다. 쉐겔 교수는 “범슬라브민족 국가였지만 지금 우크라이나를 구성한 부족과 러시아를 구성한 부족이 달랐고, 당시부터 키릴 문자를 읽는 방식이 달랐다. 스페인어와 포르투갈어가 다른 것처럼 러시아어와 우크라이나어도 다르다”고 했다. 한·중·일이 한자 문화권이지만 고유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러시아와는 차별된다는 것이다.
키예프루스가 국교로 삼았던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이 많지만, 고유 종교도 있다. 정교와 가톨릭을 접목한 ‘통합교회’(우니아트)다. 소련 지배 시절 탄압받던 통합교회인들이 여전히 우크라이나에 400만명가량 된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일부’라고 주장하지만 민족·언어·종교에서 독자성이 있다는 것이다.
◇흐멜니츠키 봉기와 페레야슬라프 협정
키예프루스가 몽골 침략으로 멸망한 뒤 우크라이나 지역은 폴란드 지배를 받는다. 이 시기 군사 자치체인 ‘코사크’가 등장하면서 독립 우크라이나의 모체가 나타난다. 지금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영웅으로 꼽히는 보흐단 흐멜니츠키(1596~1657)는 그 주역이다.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코사크 부대는 폴란드에 맞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당시 코사크 지도자였던 흐멜니츠키는 한때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 턱밑까지 진군하며 승리한다. 광범위한 자치권을 보장받고 그는 개선장군이 돼 1649년 키예프로 귀환한다. 사실상 우크라이나 민족 국가를 수립한 것이다. 구자정 대전대 교수는 이 시기를 “러시아와 민족적 차별성을 주장하게 되는 우크라이나 정체성의 첫 출발”이라고 논문에서 평했다.
그러나 이는 짧았다. 약속과 달리 폴란드는 역공에 나섰다. 흐멜니츠키는 모스크바 공국(지금의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이 맺은 ‘페레야슬라프 협정’(1654년)은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원본이 분실됐기 때문이다. 소련과 러시아는 군사 원조의 대가로 ‘코사크와 우크라이나인은 차르(러시아어로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이 시기 우크라이나가 복속했다는 얘기다. 우크라이나 학계에서는 이를 부정한다. 단기적 군사 동맹이었을 뿐이라는 것이며, 원문도 남아있지 않은 협정 내용을 러시아가 ‘당시 통일됐다’며 날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글항아리)를 쓴 구로카와 유지는 이 조약을 이렇게 평가했다. “사후적 맥락에서 이 조약이 우크라이나사의 전환점이 돼 러시아에 병합되는 과정의 첫걸음이 됐다.” 러시아는 이 협정 이후 차르의 칭호를 ‘전(全) 러시아의 차르’에서 ‘모든 대러시아(러시아) 및 소러시아(우크라이나)의 차르’로 바꾼다.
그러나 러시아는 협정 2년 만에 폴란드와 평화 협정을 맺고 우크라이나를 분점했다. 흐멜니츠키는 차르에게 협정 위반을 비난했지만 아무 효과도 없었다. 수도 키예프를 따라서 흐르는 드네프르강을 기준으로 좌안은 폴란드가, 우안은 러시아가 지배하게 됐다. 이후 독립선언을 이어갔지만 실질적인 독립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가능했다. 1930년대 스탈린의 집단농장 정책 실패가 유발한 대기근의 와중에 무수한 목숨이 사라졌다. 300만명으로 추산하지만 우크라이나인들은 최대 1000만명이 숨졌다고 본다. 소련의 수탈로 대기근이 벌어졌다고 생각한 서부 지역의 반(反)러시아 정서는 강화됐다.
쉐겔 교수는 “우리는 유럽식 국가를 세우고 싶기 때문”이라며 “러시아가 상징하는 부패·전체주의와 결별하고 싶다”고 했다.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은 이번에 무너지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민들이 끝까지 버티는 것이다.”
☞페레야슬라프 협정
우크라이나 민족 지도자 흐멜니츠키가 1654년 페레야슬라프에서 폴란드와 싸우기 위해 러시아(모스크바 공국)와 동맹을 맺은 조약.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우크라이나는 단기적 군사 동맹에 대한 내용이 담겼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이 조약에 ‘우크라이나인은 차르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는 내용이 있다며 이를 빌미로 우크라이나사를 자국사에 편입시키고자 한다.
-양지호 기자, 조선일보(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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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 증후군에 빠졌나… 푸틴의 우크라전 세가지 오판
[푸틴, 우크라이나 침공]
① 우크라 얕보고
② 서방 과소평가
③ 엉터리 선동술.. 국제정세 흐름 못읽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AP 연합뉴스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군을 단숨에 제압하지 못하면서 우크라이나 전황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당초 뜻대로 굴러가지 않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셌고, 서방은 일치 단결해 러시아를 향해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고 있다.
이와 관련, 22년째 장기 집권 중인 푸틴이 최근의 국제 정세 흐름을 냉철하게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판단력이 흐려져 자충수를 두고 있고, 군사 전술 전개 과정에서 오판을 거듭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일부 서방 전문가는 푸틴에 대해 ‘정신 이상설’까지 거론하고 있다.
회담장의 러시아·우크라 대표단-러시아 대표단(왼쪽)과 우크라이나 대표단이 28일(현지 시각) 벨라루스 국경 도시 고멜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특히 이번 회담에는 다비드 하라하미야 우크라이나 집권당 대표(오른쪽 검정 모자 쓴 사람)와 레오니트 슬루츠키 러시아 하원 외교위원장(맨 왼쪽) 등 양국 의회 대표가 함께 참석했다. /타스 연합뉴스
지난 24일 러시아가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했을 때 국제사회에선 우크라이나가 며칠 못 버틸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러시아 군사력이 압도적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군은 단시간에 수도 키예프 등 주요 도시를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벌써부터 서방 언론들은 러시아군이 소모적인 장기전을 벌여야 한다면 그 자체로 푸틴이 패배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푸틴이 크게 3가지 실수를 했다고 분석했다. 먼저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얕봤다가 큰 코를 다쳤다. 오래전부터 우크라이나 정부에 대해 푸틴은 CIA(미 중앙정보국)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세운 가짜 정부라고 주장해왔다. 이런 ‘세뇌’ 작업이 장기간 지속되는 과정에서 푸틴 스스로도 우크라이나를 우습게 봤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옛 소련 정보기관인 KGB 소속 정보원이었던 푸틴은 심리전에 집착하는 편이다.
2월 27일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시민들이 러시아군에 대항하기위해 화염병을 만들고 있다./EPA 연합뉴스
둘째로 푸틴은 러시아군을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코노미스트는 푸틴의 선전 선동술에 젖어든 러시아 군인들이 목표 의식이 흐려진 채 전장(戰場)에 나섰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푸틴은 공격의 명분을 우크라이나의 탈(脫)나치화라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인들을 해방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생각해 현지에서 환영받을 것으로 착각하며 우크라이나로 갔다는 것이다. 러시아군에는 우크라이나계 혈통을 일부 이어받은 병력이 적지 않기 때문에 푸틴이 과감한 사살 명령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분석도 있다.
푸틴의 셋째 실수는 서방의 결집력을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똘똘 뭉쳐 러시아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에서 배제하기로 결정하면서 푸틴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러시아 은행들은 해외 은행들과 거래가 막히게 됐다.
-손진석 기자, 조선일보(22-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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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明의 기수, 바이킹
東으로 간 스웨덴계 바이킹, 러시아에 첫 국가를 세우다
9세기 중엽 발트해 건너 키예프·노브고로드로… 국왕·교회 체제 정착
비잔틴 심장부 콘스탄티노플도 침입… 레오 6세 황제와 조약
-"江이 풀리면 무시무시한 군상들이 온다"
루리크 왕조의 두번째 통치자 올레크
콘스탄티노플 근처 황폐화시키자 비잔틴 황제, 은화 100만개 주며 화친
-카스피海 넘어 이란, 실크로드까지 진출
볼가강 따라 내려간 바이킹 상인들
이란 공격하고 실크로드 카라반 만나 중국 비단 등 교류… 문명화의 선두로
역사의 변화와 발전이 늘 문명 중심부에서만 일어나는 건 아니다. 때론 주변부 민족들이 더 힘차게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어붙이곤 한다. 바이킹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이킹은 크게 덴마크계·노르웨이계·스웨덴계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루스(Rus', 어원은 '노 젓는 사람들') 혹은 바랑고이(Varangoï, 어원은 '선서를 한 동료')라고도 불린 스웨덴계 바이킹들은 발트해를 건너 동쪽과 남쪽으로 팽창해 나가면서 광대한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 그 첫 번째 중요한 현상이 러시아의 국가 형성이다. 바이킹이 키예프나 노브고로드와 같은 러시아 초기 국가들의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오랫동안 논란거리였다. 노브고로드 연대기는 주민들이 '우리를 다스릴 만한 주군을 찾자'고 결의한 후 루스에게 요청했더니 세 형제가 왔는데, 그 중 루리크(Rurik)가 정착하여 왕조를 개창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단순한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을 터이다. 아마도 슬라브족의 이교 신앙 중심지이자 교역 중심지였던 곳에 바이킹들이 합류해 들어오면서 그들의 충격 하에 정치·군사적 변화가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볼린, 스타라야 라도가, 프스코프, 키예프 등 여러 곳에서 유사한 방식으로 권력 중심지들이 형성되었다가 후대에 키예프 공 이고르의 주도하에 통합되고, 비잔틴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수용하였다. 이처럼 국왕 체제가 만들어지고, 교회가 통치 철학과 행정 인력을 제공하는 방식의 발전이 이루어진 데에는 동부와 북부 유럽 각지에 인력, 아이디어, 문화 등을 전파한 바이킹의 영향이 컸다.
스웨덴계 바이킹 루리크(Rurik)와 형제들이 9세기 중반 러시아 서부 라도가 호수 지역에 도착한 장면을 그린 러시아 화가 빅토르 바스네초프(1848~1926) 작품. 루리크는 이곳에 거점을 마련하고 노브고로드와 키예프 등을 건설하여 러시아 초기 국가의 기원을 마련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위키피디아
러시아에서 비잔틴 제국으로 진출
바이킹은 러시아 땅에 머물지 않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비잔틴 제국에까지 들어갔다. 비잔틴의 기록에는 강이 풀릴 때쯤 북쪽에서 떼로 몰려드는 무시무시한 인간 군상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바랑고이 지배자 올레크(Oleg)가 큰 무리를 이끌고 침입하여 콘스탄티노플 근처를 황폐화시키자 황제 레오 6세가 그들에게 은화 백만 개(!)를 주며 이런 조약을 맺었다. "누구든지 상인으로서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빵, 포도주, 고기, 생선, 과일 등 6개월치 보급을 제공하고, 목욕탕은 원하는 만큼 크게 만들어 줄 것이며, 귀향할 때에는 식량, 닻, 밧줄, 범포 등 필요한 물품들을 공급한다." 어지간히 폭력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엄청난 음주, 살벌한 전투용 도끼 등으로 유명한 이 가공할 전사들을 차라리 '바랑기안 경호대(Varangian guard)'로 고용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 황제 경호대는 여러 차례 중요한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을 위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바이킹은 늘 약탈과 전투만 한 것은 아니며 교역 활동에도 능했다. 비잔틴 제국은 비단, 포도주, 향신료, 보석류 등 여러 지역의 산물이 모여드는 교역 중심지였다. 바이킹들은 모피와 노예를 공급해 주는 대가로 이런 물품을 얻어 스칸디나비아로 가져갔고, 그중 일부는 이웃 지역으로 재수출했다. 영국에서 발견되는 비잔틴 직물은 이런 경로를 통해 들어간 것이다.
문명화의 선두였던 바이킹
바이킹의 여행은 비잔틴에서 멈추지 않았다. 일부 모험심 강한 사람들은 볼가강을 타고 불가르(오늘날의 카잔)로 직행했다. 벨로체로, 야로슬라블 등 그 도상에 있는 여러 지역에서 스칸디나비아 물품들이 출토되고, 묘지를 발굴하면 여자 시체들이 함께 나오는 것을 보면 바이킹 상인들이 가족 단위로 여행한 듯하다. 볼가강은 불가르에서 남쪽으로 크게 선회하여 카스피해로 들어가는데, 바로 이 지점이 실크로드의 서쪽 종점으로서 큰 시장이 서는 곳이다. 바이킹 상인들은 카라반 상인과 거래하여 중국 비단을 비롯한 동양 상품을 수입해 갔다. 이곳은 또한 아프가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지의 은이 들어오는 곳이기도 했다. 아바스 이슬람 왕조가 이 은으로 은화를 주조해서 인도, 스리랑카, 중국, 페르시아 등지로 대거 송출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상당량의 은화가 북유럽으로도 유입되었다. 지금까지 스칸디나비아 지역 내 1000곳 이상에서 6만 개 이상의 은화가 발견되었다. 예컨대 뤼겐(Rügen)섬에서는 9세기에 묻은 것으로 보이는 2000개 이상의 은화가 발견되었다. 현재까지 발굴된 것이 6만 개이니 실제 수입된 양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바이킹의 모험은 여기에서도 멈추지 않는다. 불가르에서 더 나아가면 하자르(Khazar)라는 유목민의 땅이 나오는데, 이곳의 수도에 해당하는 이틸(Itil)에서 배를 타고 카스피해를 넘을 수 있다. 이란의 기록을 보면 바이킹들이 910년경 이란 쪽 항구 아바스쿤(Abaskun)을 공격했고, 다시 3년 후에는 한 척마다 100명씩 탄 배 500척으로 공격해 왔다고 한다. 일부는 아제르바이잔의 바쿠 근처 섬에 정착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더 나아가서 카스피해 너머 카라반 루트를 타고 더 먼 곳까지 여행하는 것도 가능하다. 연구자들은 바이킹들이 낙타를 이용하여 바그다드까지 가고, 혹은 비단길을 따라 인도와 중국 방향으로 갔을 가능성도 제기한다.
907년 비잔틴 제국으로 군사 원정을 떠난 바이킹 후손 바랑고이 지배자인 올레크(Oleg)가 콘스탄티노플 성벽에 자신의 방패를 걸어놓고 있다. 러시아 화가 표도르 브루니(1799~1875)의 그림.
바이킹들은 실로 엄청난 거리를 여행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비롯해 중동부 유럽, 잉글랜드와 아일랜드 등지에서 중국 비단이나 향신료들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바이킹의 교역 네트워크가 얼마나 광범위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는 통상 바다를 통해 남쪽이나 서쪽으로 멀리 항해해 간 바이킹의 활동에 주목하지만 동남쪽으로 이렇게 멀리까지 갔으리라고는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바이킹에 대한 묘사를 보면 분명 '야만족' 냄새가 물씬 나지만, 사실 이들의 활동 결과, 많은 지역에서 국가가 형성되고 기독교를 수용하고 문화적 발전이 가능했으니 말하자면 문명화의 선두에 섰던 셈이다.
[바그너 상상력에 나치가 덧붙인 超人 이미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바이킹의 이미지는 18세기 이후 만들어진 것이다. 계몽주의 시대에 몽테스키외는 차가운 공기가 인체와 심성을 단단하게 만들어 용기 있는 인간을 낳는다고 말했다. 그 결과, 열대 지역에는 겁쟁이가 많고 북유럽 지역에는 용맹한 전사가 많다는 것이다. 스웨덴 문인들이 이런 주장을 이어받아 고트족이나 바이킹을 두고 거칠고 폭력적이지만 멋진 전사라는 식으로 낭만적으로 묘사했다. 과거 바이킹의 성격이 거칠고 충동적이며 음란하다는 일부 비판적 견해는 무시되었다.
작곡가 바그너의 상상력이 이런 흐름에 일조했다. 4일 밤에 걸쳐 연주하는 웅대한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는 북유럽 신화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특히 2부 발퀴레(Die Walküre, 영어로는 발키리 Valkyrie)는 신과 영웅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미화했다. 다만 여기에 묘사된 많은 요소는 그야말로 '창안된 전통'의 전형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반지'를 공연할 때 무대와 의상 디자인을 맡은 화가 되플러(Carl Emil Doepler)는 일부 캐릭터에 뿔 달린 금속 투구를 쓰게 했다. 이후 이 투구는 바이킹의 상징처럼 되었지만, 실제로는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다. 뿔 달린 투구를 사용한 사람들은 차라리 프랑스인의 조상 격인 골족 사람들이고, 정작 바이킹들은 깃털 달린 투구를 사용했다. 그나마도 이 투구가 많이 발굴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금속이 아니라 가죽으로 만들어서 장기간 보존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적 허구는 자칫 사람들을 위험한 방향으로 오도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오자 용맹한 북유럽 전사에 대한 찬미는 게르만족 혹은 아리안족의 순수성과 우수성을 강변하는 인종적 극단주의 경향을 띠게 되었다. 바이킹에게서 독일 민족 우수성의 근원을 찾고자 했던 나치 이데올로그들은 북유럽이 '초인(超人, Übermensch)'의 모태라는 과장된 이야기도 만들어냈다. 지금도 네오나치는 북유럽신화, 바이킹 문화, 룬 문자(runic alphabet, 고대 게르만족이 사용하던 문자로서 스칸디나비아 지방에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를 강조하곤 한다.
-주경철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조선일보(20-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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