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원, 美 특허청은 그를 에디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
[강대원, 美 특허청은 그를 에디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 94세로 떠나]
[반도체]
[무어의 법칙 폐기]
강대원, 美 특허청은 그를 에디슨과 함께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한국 과학의 선구자들]
모스펫 발명한 강대원
인류가 가장 많이 만들어낸 인공 구조물은 모스펫(MOSFET·금속-산화층-반도체 전계 효과 트랜지스터)이라는 반도체다. 통계에 따르면 2018년까지 1.3X10²²개의 모스펫이 만들어졌다. 스마트폰에서부터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현대 문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모스펫인데, 이를 발명한 사람은 한국인 물리학자 강대원이다. 모스펫으로 조그만 칩 하나에 수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적하며 비로소 IT 산업이 꽃피기 시작했다. 그가 아니었으면 반도체 혁명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1946년 탄생한 세계 최초의 전자식 범용 컴퓨터 에니악(ENIAC)은 진공관을 사용했다. 1만8000개의 진공관이 장착된 이 장치는 집채만 한 크기에 무게는 30톤이 넘었다. 소비 전력도 엄청나 인근 도시 전기 공급에 문제가 생길 정도였다. 이를 해결하며 등장한 반도체가 트랜지스터다. 1947년 등장한 트랜지스터는 컴퓨터 크기를 300분의 1, 소비 전력은 1500분의 1로 줄였다. 트랜지스터를 발명한 미국 벨 연구소의 윌리엄 쇼클리, 존 바딘, 월터 하우저 브래튼 세 사람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것은 이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결정적 기술이 등장한다. 1958년 미국의 잭 킬비는 여러 전자 부품을 한 칩에 넣을 수 있는 집적회로(Integrated Circuit·IC)를 개발한다. 잭 킬비 역시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캠퍼스에서 어린 딸과 나란히 손을 잡고 서 있는 강대원 박사.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강대원은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4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9년 벨 연구소에 들어간 그는 입사 1년 만인 1960년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작은 면적에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모스펫 원리를 구현하는 발표를 했다. /대한민국 과학기술 유공자 공훈록
이 무렵 미국 유학 중이던 강대원은 새롭게 떠오르는 반도체를 주목했다. 1931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중, 경기고를 월반해 가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대입 검정시험에 합격했을 때 불과 17세였다. 그의 아버지는 진주중, 진주고 교장을 거쳐 보성고 교장, 부산사범대학 초대 총장을 지낸 강정용이다. 1928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수학과를 졸업한 강정용의 동기로는 역사를 전공한 함석헌이 있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해병대에서 복무한 강대원은 1955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4년 만에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그의 선택은 당시 반도체 혁신을 이끌던 벨 연구소였다. 1959년 입사한 강대원은 1년 만인 1960년 세계를 뒤흔든 발표를 한다. 모스펫이었다.
모스펫은 반도체 소자의 집적도를 높여 더 작은 면적에 훨씬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는 기술이다. 게다가 소비 전력도 훨씬 줄일 수 있다. 오래전부터 모스펫 원리는 알려져 있었지만, 실제 구현하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반도체 회로의 소형화, 집적화가 요구되면서 모스펫 개발이 절실했다. 바로 이때 신입 연구원 강대원이 최초로 동작하는 모스펫을 세상에 보인 것이다. 오늘날 최신 반도체에는 500억개가 넘는 트랜지스터가 들어가니, 무려 500억개의 진공관을 작은 칩 하나에 넣을 수 있게 된 셈이다. 강대원의 모스펫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강대원은 한발 더 나아갔다. 벨 연구소에서 팀장이 되어 후속 연구에 박차를 가했다. 1967년 또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결과를 발표한다. 전원을 꺼도 저장된 데이터가 사라지지 않는 플로팅 게이트 기술을 개발한다. 현재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USB와 대형 저장 장치에 쓰이는 낸드 플래시 메모리는 강대원 박사의 플로팅 게이트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기술 역시 세상을 바꾸었다. 지워지지 않는 메모리는 나중에 디지털 카메라 시대를 열어 100년이 넘는 전통 필름 카메라 업체들을 사라지게 했다. MP3 플레이어의 등장은 오디오 시장을 바꾸어 카세트테이프와 CD를 대체했다.
이제 세계 전자 업계에서 강대원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1975년 강대원은 미국 프랭클린 연구소의 스튜어트 밸런틴 메달을 받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저민 프랭클린을 기념하는 이 연구소는 메달 수상자를 엄격히 선정한다. 이 메달을 받은 인물들만 보아도 강대원의 업적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수상자에는 아인슈타인과 스티븐 호킹, 그리고 반도체 개척 공로로 노벨상을 받은 윌리엄 쇼클리, 잭 킬비 등이 있다. 세계적 과학자만 받는 이 메달 수상자 중 105명이 노벨상을 받았다.
1988년 강대원이 벨 연구소를 은퇴하자, 일본 최대 IT 회사 NEC가 글로벌 연구 센터를 미국에 설치하며 그를 초빙했다. 이곳에서도 계속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던 강대원은 1992년 학회를 마치고 돌아가던 길에 대동맥류 파열로 급사한다. 향년 61세였다. 많은 이가 그가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트랜지스터와 반도체 집적회로로 노벨상을 받았으니 다음 순서가 모스펫이 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잭 킬비는 IC로 노벨상을 받으며 오늘날 반도체 산업이 이렇게나 엄청난 규모로 성장한 것은 강대원의 모스펫 덕분이라고 했다.
2009년 미국 특허청은 IC 개발 50주년을 기념해 ‘무어의 법칙’ 창시자이자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 공동 창업자인 앤드루 그로브와 함께 강대원을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앞서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인물로는 에디슨, 벨, 라이트 형제, 노벨 등이 있는데, 강대원 박사가 이들과 나란히 자리한 것이다. 2014년 서울대학교 반도체공동연구소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고, 2017년 한국반도체학술대회는 ‘강대원상’을 제정했다. 그는 오늘날 세계 반도체 산업을 가능하게 만든 선구자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시작
강대원 박사가 모스펫과 플로팅 게이트를 발명하던 무렵, 우리나라 현실은 첨단 산업과 거리가 멀었다.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색하던 강대원 박사는 한국을 방문하곤 했지만, 국내 반도체 기반은 허약했다. 반면 일본에서 강 박사는 반도체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일본 학자 에사키 레오나 박사와 동급 대접을 받았다. 그만큼 당시 한국과 일본의 격차는 컸다. 하지만 그의 영향을 받은 후배들이 결국 한국에 반도체 산업을 일으킨다. 그중에는 강대원 박사의 3년 후배인 강기동 박사가 있다.
1959년 강기동 박사 결혼식. 왼쪽이 강기동 박사 부부, 오른쪽이 강대원 박사 부부. 강대원 박사 부부는 신부의 웨딩드레스를 장만해 주고, 피로연 식사도 준비해 주었다. 강대원의 경기고, 서울대 후배인 강기동은 1974년 경기 부천에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설립해 한국 반도체의 선구자로 불린다. /강기동 박사 자서전
1958년 강대원이 박사과정으로 있던 오하이오 주립대에 경기고, 서울대 후배 강기동이 도착했다. 이휘소와 경기고 동기였던 강기동은 강대원과 마찬가지로 반도체 산업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1962년 박사 학위를 받은 강기동은 이미 벨 랩에서 명성을 떨치던 선배 강대원과 진로를 상담했다. 강기동 박사가 결혼할 때 강대원 박사의 아내가 신부 들러리로 나설 정도로 가까운 사이. 반도체 공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강기동은 생산 현장을 배울 수 있는 모토롤라에 입사한다.
1974년 강기동 박사는 모험을 감행한다. 강대원은 시기상조라고 우려했지만, 강기동은 직접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한다. 반도체 생산 기술을 한국에 이식하기 위해 강기동은 최신 3인치 웨이퍼로 반도체 칩을 양산하는 공장을 세운 것이다. 이렇게 자본금을 무려 100만달러 들여 부천에 세운 회사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다. 하지만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반도체 사업은 쉽지 않았다. 결국 삼성이 1977년 이 공장을 인수한다. 1983년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세계 세 번째로 64K D램을 만든 것이 바로 이 부천 공장이다. 한국의 반도체 신화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민태기 에스앤에이치연구소장·공학박사, 조선일보(24-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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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 94세로 떠나
6조원 이상 사회 환원하고... ‘무어의 법칙’ 만든 반도체 전설 별세
‘반도체 제국’ 인텔을 공동 창업하고, ‘무어의 법칙’으로 정보기술(IT) 혁명의 이정표를 제시한 고든 무어가 24일(현지 시각) 별세했다. 인텔은 무어가 하와이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고 발표했다. 사진은 지난 2005년 9월 무어가 미국 인텔 본사 내 ‘무어의 법칙’ 설명이 적혀 있는 벽 앞에서 웃고 있는 모습. /AP연합뉴스
‘반도체 제국’ 인텔을 창업하고, ‘무어의 법칙’으로 정보 기술(IT) 혁명의 이정표를 제시한 고든 무어가 24일(현지 시각) 별세했다. 향년 94세. 인텔은 무어가 하와이에 있는 자택에서 가족들이 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1929년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난 무어는 캘리포니아공과대(칼텍)에서 화학 박사 학위를 받은 뒤 1956년 ‘쇼클리 반도체 연구소’에 입사했다. 하지만 노벨상 수상자이자 트랜지스터 발명자였던 윌리엄 쇼클리의 권위적이고 강압적인 운영 방식에 불만을 품고 동료들과 사표를 냈다. 이른바 ‘8명의 배신자(the Traitorous Eight)’ 사건이다. 이들이 항공 재벌 셔먼 페어차일드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회사가 ‘페어차일드 반도체’이다. 무어와 동료들은 이 회사에서 당시 반도체 제작에 사용되던 저마늄(게르마늄) 대신 실리콘(규소) 트랜지스터를 상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실리콘밸리라는 이름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이들의 배신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겠다는 야망과 추진력을 가진 젊은 창업자 세대의 탄생이자 모범이 됐다”고 했다.
무어는 1965년 잡지 ‘일렉트로닉스’에 게재한 글에서 “반도체 회로의 집적도가 매년 2배로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1975년에는 2년마다 집적도가 2배씩 증가한다고 예측을 수정했는데, 무어의 친구였던 칼텍의 카버 미드 교수가 이를 ‘무어의 법칙’이라고 이름 붙였다. 무어의 법칙은 수십 년간 지켜졌고 전 세계 반도체 업체들이 반드시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됐다. 무어의 법칙이 처음 나왔을 당시 실리콘 반도체 트랜지스터 1개의 가격은 150달러 정도였는데 이제는 10달러짜리 반도체칩에 트랜지스터 1억개 이상이 들어간다. 그만큼 폭발적인 성장이 이어졌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자동차가 반도체와 같은 속도로 발전했다면, 휘발유 1갤런(3.78ℓ)으로 16만㎞를 갈 수 있게 됐을 것”이라고 했다.
고든 무어(맨 왼쪽)와 로버트 노이스(가운데)가 웃고 있다. 이들은 1968년 실리콘밸리에 반도체 회사 인텔을 창업했다. /인텔
무어는 1968년 로버트 노이스와 함께 인텔을 창업했다. 실리콘으로 흥미로운 제품을 만들겠다는 포부였다. 3년 만인 1971년 인텔은 세계 첫 상용 중앙처리장치(CPU) 칩 ‘인텔 4004′를 출시했고 후속 제품 ‘인텔 8088′이 IBM PC에 장착되면서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가 됐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와 ‘윈텔(윈도+인텔) 동맹’을 맺고 ‘인텔 인사이드’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PC와 인터넷 혁명을 주도했다. 영국 BBC는 “무어의 공헌이 PC와 애플, 페이스북, 구글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다”고 평가했다. 무어는 1979년 최고경영자(CEO)에 올라 1997년 명예회장으로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는 “PC 사업에 직접 진출해야 한다”는 인텔 직원들의 조언을 듣지 않은 것을 CEO 재임 시절 가장 아쉬운 일로 꼽았다. “집에 도대체 컴퓨터가 왜 필요하냐”는 것이 무어의 논리였다.
포브스는 2014년 그의 순자산이 72억달러(약 9조36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했다. 은퇴 이후에는 자선 활동에 집중했다. 2000년 아내와 함께 인텔 주식 1억7500만주를 기부해 ‘고든 앤드 베티 무어 재단’을 만들고 과학 발전과 환경 운동을 지원했다. 인텔은 재단이 사회에 환원한 돈만 51억달러 이상이라고 밝혔다. 뉴욕타임스는 “무어는 맞춤 양복보다 헐렁한 셔츠를 입었고, 코스트코에서 쇼핑하며 소유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이해인 기자, 조선일보(23-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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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3… 작게 만드는 게 핵심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앞에서 삼성전자가 최첨단 '3나노 반도체' 제품을 선보였어요. 나노미터(nm)는 길이를 나타내는 단위인데요. 1nm는 10억분의 1m로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 1 수준이에요. 3나노 반도체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작은 크기입니다. 반도체(半導體)는 컴퓨터와 가정용 전자제품은 물론 인공지능(AI)과 로봇, 자율주행자동차 등 쓰이지 않는 곳이 없어 '산업의 쌀'로 불립니다. 반도체는 첨단 산업의 필수 부품이자 미래 기술 경쟁력을 좌우하는 핵심 요소여서 주요국이 반도체 산업 주도권을 쥐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요.
도체와 부도체
우리는 흔히 '전기가 통한다'(전류가 흐른다) 또는 '전기가 안 통한다'(전류가 흐르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곤 해요. 금·은·동·철과 같이 전기가 잘 통하는 금속을 도체(導體)라 하고, 유리·고무·플라스틱처럼 전기가 통하지 않는 물질은 부도체(不導體)라고 해요. 반도체는 도체와 부도체의 중간 정도 되는 '전기 전도도'(전기가 흐르는 정도)를 갖는 물질이에요.
반도체의 주원료는 '실리콘'(규소)이에요. 실리콘은 보통 모래에서 추출하지요. 그런데 실리콘은 원래 전기가 통하지 않아요. 여기에 열이나 빛을 가하거나 인(P), 비소(As), 붕소(B), 갈륨(Ga) 같은 특정 불순물을 주입하면 도체처럼 전기가 흐르게 되죠. 첨단 IT 기업이 몰린 미국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는 반도체 원료인 '실리콘'과 미 샌프란시스코만 동남쪽 산타클라라 '계곡(Valley)'을 조합해 만든 지명이랍니다.
반도체는 작을수록 좋아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반도체는 칩 안에 여러 개의 소자(일종의 전자 신호 부품)가 집적된 회로(IC·집적회로)를 의미해요. 반도체를 만들 땐 먼저 실리콘을 녹여서 둥근 기둥(잉곳)을 만들어요. 이것을 아주 얇은 두께로 마치 CD처럼 자른 실리콘 판을 '웨이퍼(Wafer)'라고 해요. 이 웨이퍼에 전류나 전압의 흐름을 조절하는 소자 '트랜지스터(Transistor)'를 집어넣고 작게 자르면 반도체 칩이 되는 거예요. 트랜지스터는 쉽게 말해 켰다(On), 껐다(Off) 할 수 있는 스위치예요. 전류와 전압의 흐름을 스위치처럼 조절하는 기능을 합니다.
하나의 웨이퍼로 반도체 칩을 최소 100개 이상, 많게는 500개 이상 만들 수 있어요. 그리고 손톱보다 작은 크기의 반도체 칩 하나에는 현재 10억개 이상의 트랜지스터가 들어가요. 반도체 칩 생산이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어려운 기술인지 알 수 있겠죠?
반도체의 성능은 웨이퍼 하나에 얼마나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느냐에 따라 달라져요. 따라서 반도체 기술은 이 트랜지스터를 최대한 작게 만드는 것이 핵심이지요. 연구자들은 지난 50년간 반도체를 더 작게 만들려고 노력해 왔어요. 보다 작은 칩 면적에 작은 소자(트랜지스터)들이 빽빽이 들어가면, 전기신호가 전달되는 속도가 빨라지고 전력 소모도 줄어들기 때문이에요. 그러면 정보처리 속도(성능)가 빨라지고, 반도체 칩의 생산성도 높아져요.
3나노 반도체는 반도체 칩 안에 있는 회로의 선폭(線幅)이 3나노인 것을 의미해요. 3나노 반도체 전에 5나노 반도체를 썼는데요, 미세 공정이 5㎚에서 3㎚로 변화된다는 건 트랜지스터의 폭도 줄어든다는 것이고, 폭이 줄어든다는 건 하나의 반도체 칩 안에 더 많은 트랜지스터를 넣을 수 있다는 의미예요. 3나노 반도체는 5나노에 비해 칩 면적을 약 35% 이상 줄일 수 있어요. 또 소비 전력을 50% 감소시키며 성능(정보처리 속도)은 약 30% 향상시킬 수 있어요. 이 때문에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미세 공정 개발에 몰입하는 것이랍니다.
무어의 법칙은 진화 중
3나노 반도체의 개발은 '무어의 법칙(Moore's Law)'을 보여주는 사례로도 꼽혀요. IT 기업인 인텔의 창립자 고든 무어는 1965년 앞으로 10년간의 기술 발전 속도를 예상하며 "반도체 칩 안에 집적되는 트랜지스터 수가 2년마다 2배씩 증가한다"고 했어요. 이는 기술이 꾸준히 발달하며 50년 넘게 업계의 법칙처럼 자리매김해 왔어요.
그런데 최근에는 무어의 법칙을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요. 반도체 칩이 잘 작동하려면 모든 웨이퍼에 들어간 트랜지스터가 균일하게 동작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정된 크기의 웨이퍼에 고밀도의 트랜지스터를 넣을수록 발열 문제 등으로 인해 반도체 칩 성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해요. 고밀도 트랜지스터를 만들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는 얘기죠.
트랜지스터는 미국 벨 연구소의 물리학자인 윌리엄 쇼클리와 존 바딘, 월터 브래튼 세 사람이 발명했어요. 하지만 세 사람이 동시에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것은 아니에요. 1947년 브래튼과 바딘은 게르마늄에 2개의 철선을 연결해 전기 신호를 출력하는 장치를 고안하는 데 성공했어요. 쇼클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1951년 '접합형 트랜지스터'라는 것을 개발했죠. 이 공로로 세 사람은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답니다.
[한국의 세계적 반도체 물리학자]
우리나라의 물리학자인 강대원 박사는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반도체 물리학자예요. 그는 1960년 미국 벨 연구소에서 반도체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되는 기술인 '모스펫(MOSFET·전기로 작동하는 스위치)'과 1967년 '플로팅 게이트' 기술을 개발했는데요.
플로팅 게이트는 메모리칩에 정보를 저장하거나 삭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해요. 스마트폰이나 디지털 카메라 등에 정보를 저장하고 삭제할 수 있는 것도 다 이 기술 덕분이죠.
-김형자 과학칼럼니스트/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조선일보(22-0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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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의 법칙 폐기
① 반도체 패러다임 대전환… IT융합 칩수요 다변화 시대
지난 50년간 반도체 산업을 이끌었던 ‘무어의 법칙(Moore’s Law)’이 폐기됐다. 무어의 법칙은 1년6개월마다 반도체의 집적도가 두배로 늘어난다는 내용으로 반도체 기술개발의 표준이었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을 주도했던 인텔이 공정 전환 주기를 2년에서 3년으로 바꾼다고 발표하면서 무어의 법칙은 사실상 종말을 맞았다. 무어의 법칙이 더이상 반도체 기술개발의 표준이 아님을 선언한 것이다. IT융합 시대를 맞아 반도체 산업이 집적도 제일주의에서 벗어나 칩수요 다변화라는 패러다임의 대전환기에 놓였다. [편집자주]
경기도 부천시 원미구 도당동 동부하이텍 제1공장. 진한 노란빛을 띠는 특수 조명을 따라 반도체 생산 설비들이 줄지어 있다. 설비에 달린 신호등은 '가동 중'이라는 뜻의 파란 빛을 내뿜고 있다. 천장에 달린 웨이퍼(반도체 원판) 이동장치는 '지이잉' 기계음을 내며 축구장만한 팹 구석구석을 누볐다.
동부하이텍 1공장은 완전(Full) 가동 중이었다. 2014년 초 까지만해도 60~70%에 그쳤던 가동률은 2015년 3월부터 90%를 넘어섰다. 동부하이텍 공장 관계자는 "주문이 많아 공장을 완전 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동부하이텍은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파운드리(위탁생산) 회사다. 스마트폰에 쓰이는 전력반도체나 터치칩 등을 주문받아 생산한다. 그러나 동부하이텍은 이 분야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는 않다. 대만 TSMC 등은 나노미터(10억분의 1미터) 선폭(線幅)의 공정 기술을 갖췄지만 동부하이텍은 여전히 미크론(100만분의 1미터)급 공정에 머물러 있다.
동부하이텍 부천 팹. /동부하이텍 제공
그런데도 동부하이텍에 위탁생산 주문이 밀려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사물인터넷(IoT) 등 다양한 IT융합 분야가 등장하면서 반도체 수요도 다양해졌다"며 “그동안 반도체 시장에서는 무조건 최고 성능의 제품이 살아남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저성능에서 고성능까지 다양한 수요처가 생겼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안 상무는 “굳이 최고성능, 최고집적도의 반도체가 아니어도 되는 분야가 늘어나면서 최고 수준의 공정을 갖고 있지 않은 동부하이텍 공장도 풀가동되고 있다”며 “반도체의 수요가 성능보다 적용처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무어의 법칙'이 종말을 맞았다고 해석한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이론으로 반도체 집적도는 1년 6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내용이다. 반도체의 집적은 한정된 면적에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 넣는 작업이다. 집으로 비유하면 동일한 면적에 보다 많은 방을 짓는 것이다.
한정된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많이 담으면 성능이 좋아질 뿐 아니라 수익성도 높아진다. 반도체 업체들이 무어의 법칙을 정설로 받아들이며 죽기살자식으로 집적도를 높여온 배경이다. 선두 자리에는 인텔과 삼성전자가 있었다. 그러나 인텔이 무어의 법칙 폐기를 선언하면서 반도체산업의 패러다임은 대전환기를 맞았다.
◆ 삼성·인텔 “무어 법칙과 다른 길 간다”
2016년 2월 12일. 세계 종합 반도체 1위 기업인 인텔이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에 올린 공시에 반도체 업계는 들썩였다. 인텔은 “기존 틱-톡(tick tock) 2단계 개발 사이클에서 ‘최적화(optimization)’ 단계를 추가한 3단계 사이클로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인텔의 기술 개발 로드맵은 기존 ‘틱-톡’ 2단계에서 ‘최적화(optimization)’ 단계를 추가한 3단계로 바뀌었다. /인텔 제공
틱톡 사이클은 무어의 법칙을 토대로 한 인텔의 신제품 출시 전략이다. '틱' 단계에서 기존의 설계를 바탕으로 미세 공정을 개선해 성능을 높이고, '톡' 단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설계를 기반으로 칩을 개발했다. 이런 틱과 톡 단계를 거치면서 반도체 집적도는 1년6개월 마다 2배로 높아지는 과정을 밟아왔다. 인텔이 여기에 최적화 단계를 새로 넣은 모델을 도입하면서 사이클의 기간도 2년에서 3년으로 늘었다. 무어의 법칙을 따르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인텔의 발표는 "반도체 업계가 무어의 법칙을 공식 폐기할 것"이라고 한 과학저널 네이처의 보도에 뒤이은 것이었다. 네이처는 지난 2월 "반도체 업계가 '무어의 법칙을 넘어서(more than Moore's law)'라는 이름의 새 기술 로드맵을 공개할 것"이라고 전했다.
삼성전자 128기가비트 3차원 V낸드플래시/삼성전자 제공
세계 메모리 반도체 1위 기업인 삼성전자는 인텔보다 앞서 무어의 법칙에서 벗어났다. 2008년 경쟁업체들과의 치킨게임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3차원 수직구조 낸드플래시(V낸드)를 내놓으면서부터다. V낸드는 반도체 크기를 줄이는 대신 소자를 아파트 짓듯 수직으로 쌓는 기술을 적용한 것인데, 생산성을 30%씩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무어의 법칙을 따르지 않고도 수익을 내는 방안을 마련한 셈이다.
◆ 미세공정 투자 대비 수익 내기 점점 어려워…공정 기술도 한계
세계 반도체 업계의 쌍두마차인 인텔과 삼성전자가 무어의 법칙 폐기 결정을 내린 것은 원가 절감과 공정 기술의 한계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컨설팅 업체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에 따르면 10년 전 65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600만달러 정도였다. 반면 최신 14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억3200만달러다. 개발비에 걸맞은 수익을 내려면 7.5배인 9억87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 이런 추세라면 5나노 공정에서 개발비를 회수하려면 매출 규모가 60억달러에 달해야 한다
이제는 집적도를 높이는데 드는 비용을 감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몇 종류의 제품을 제외하면 무어의 법칙을 따르는 게 '사업적'으로 의미가 없어졌다.
기술 개발도 한계에 도달했다. 우선 데이터 간섭이 발생할 정도로 회로 간격이 좁아져 오작동 위험이 있다. 이를 상호간섭(cross-talk)이라고 부른다. 현재 선폭은 14나노까지 줄었는데, 7나노 이하부터는 이런 기술적인 장벽에 부딪힐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발열도 큰 문제다. 집적도가 높아지면 열이 흩어지지 않을 뿐 아니라 개개의 트랜지스터에서 나오는 열도 증가한다. 10나노대 공정을 쓴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들이 발열 잡기에 전력투구를 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8개월마다 트랜지스터 개수가 2배 집적되고 컴퓨터 성능도 개선된다는 무어의 법칙. 수십 년 동안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산업의 표준 ‘로드맵’이었다./네이처 제공
◆ 무어의 법칙 빈자리 메울 차세대 주자는…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무어의 법칙이 깨지고 빈 자리를 소프트웨어, 클라우드, 맞춤형 반도체가 채울 것"이라며 "알파고가 '딥러닝'이라는 학습프로그램으로 성능을 개선했듯이 소프트웨어가 하드웨어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온라인 저장장치인 클라우드의 등장도 고성능에 대한 집착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왔다. 클라우드는 인터넷으로 연결된 초대형 컴퓨터(데이터센터)에 소프트웨어와 콘텐츠를 저장해 두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수 있는 서비스다. PC나 스마트폰에 프로그램을 저장해둘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IOT, 바이오 등 IT융합이 전 산업 분야에서 일어나면서 고성능 범용 반도체 보다 각종 센서에 필요한 맞춤형 반도체 수요가 늘고 있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그동안 반도체업계의 목표가 물리적인 소자의 크기를 줄이는 것이었다면, 앞으로는 전력 소비를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한다. 저전력이 핵심인 IoT 반도체 시장은 2020년 2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시장조사업체 VLSI리서치는 클라우드 방식의 데이터센터에 필요한 반도체 시장 규모가 5년내 200억~300억달러 더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전자와 인텔도 새로운 메모리칩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인텔은 마이크론과 손잡고 낸드플래시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가 빠른 D램 메모리의 장점을 결합해 속도를 높이고 수명을 크게 늘린 '3D크로스포인트'(3D Xpoint)를 2017년에 내놓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저항성 램(ReRAM), 자기저항성 램(M램) 등의 차세대 메모리 제품을 개발 중이다. 삼성전자는 2011년 M램의 원천특허를 가진 미국 반도체 회사 '그랜디스'를 인수했고, SK하이닉스는 미국 IBM, 일본 도시바 등과 협력해 차세대 반도체 개발에 나선 상태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 공학과 교수는 "집적도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만큼, P램, M램 등이 조만간 상용화되는 시나리오로 봐야 한다"며 "올해 하반기쯤에 가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업들의 발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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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연결 시대' 패러다임 바뀌는 반도체산업…"집적도가 전부는 아니다"
“애플 아이폰S6에 들어가는 지문인식 반도체의 평면 크기는 엄지손가락 첫 마디 만합니다. 반도체 센서의 크기가 엄지손가락 첫 마디 만해야 사람마다 독특한 지문을 정확히 구별할 수 있으니까요. 연간 아이폰 생산량은 2억대 가량입니다. 아이폰 지문인식 반도체의 연간 수요를 맞추기 위해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라인 하나가 통째로 필요한데, 초미세 공정(집적도) 생산라인이 아니어도 됩니다"
“스마트폰에서도 음향의 질을 따지는 소비자들의 요구가 늘어나고 있어요. 음향의 질을 좌지우지하는 건 오디오 코덱 칩입니다. 이 칩 역시도 무어의 법칙을 따르지 않습니다. 아날로그 반도체의 특성상 크기나 선폭(線幅)을 줄이면 오히려 성능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반도체 산업의 생존 공식이 바뀌고 있다.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에 넣기 위한 초미세 공정(工程) 경쟁 시대가 변곡점을 만났다. 인텔의 ‘무어의 법칙’ 폐기 선언이 이런 분위기를 상징한다.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집적도가 1년6개월마다 두배씩 증가한다는 것으로 반도체 산업 발전의 공식이었다.
인텔의 공동 설립자 고든 무어는 1965년 4월 19일 일렉트로닉스 잡지에 ‘집적회로 상에 더 많은 소자를 주입하는 공식’이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이후 이 공식은 ‘무어의 법칙’으로 불리게 됐다. (왼쪽부터) 무어의 법칙 공식과 고든 무어 사진 /인텔 홈페이지 캡처
그렇다면 내로라하는 반도체 업체들이 더이상 집적도만으로 경쟁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배경은 무엇일까. 크게 두가지다.
첫번째, 사람과 사람은 물론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 등으로 기기와 기기가 연결되면서 다양한 반도체 신규 수요처가 빠른 속도로 생겨나고 있다. 이런 수요는 집적도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특정 수요를 맞춤형으로 충족하는 설계 및 생산 능력 등 차별화가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과거 반도체의 수요처는 컴퓨터와 휴대폰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물인터넷(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 다양한 기술이나 제품이 등장하면서 반도체의 사용처는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들 기기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비롯해 카메라이미지센터(CIS), 통신칩, 근거리무선통신(NFC)칩, 위성항법장치(GPS)칩, 전력관리칩 등 다양한 반도체들이 들어있다. 심지어 우리가 매일 사용하는 비데에도 반도체가 사용된다.
과거 반도체의 수요는 PC와 스마트폰에 국한됐지만 스마트카, 사물인터넷(IoT) 등 신기술의 등장에 따라 사용처가 점차 다변화되고 있다. /일렉트로닉스마커닷컴 캡처
스마트카의 예를 들어보자. 미국의 IT 전문 시장조사업체인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에 따르면 올해 자동차 1대당 투입되는 반도체 비용은 333달러(약 38만원) 수준이다. 이는 2009년 250달러(약 28만5250원)에 비해 17% 증가한 것이다. 2020년에는 자동차 원가에서 전장 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절반을 넘어서고 차량용 반도체 수요도 급증할 것으로 예상된다.
두번째, 초미세 공정이 발열 등 기술뿐 아니라 경제성 측면에서도 한계에 직면했다. 컨설팅 업체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에 따르면 10년 전 65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600만달러 정도였다. 반면 최신 14나노 반도체 개발 비용은 1억3200만달러다. 개발비에 걸맞은 수익을 내려면 7.5배인 9억87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야 한다. 이런 추세라면 5나노 공정에서 개발비를 회수하려면 매출 규모가 60억달러에 달해야 한다.
/조선DB
이제는 집적도를 높이는데 드는 비용을 감수하기 어려운 상황이 된 것이다. 비싸게 팔 수 있는 몇 종류의 제품을 제외하면 무어의 법칙을 따르는 게 '사업적'으로 의미가 없어졌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는 “과거 PC, 휴대폰 등이 반도체의 최대 수요처였지만, 최근에는 여러 분야에서 반도체가 소비되면서 다양한 신규 시장이 창출되고 있다”며 “지난 30여년 간 반도체 산업을 지배해온 ‘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대규모 투자→집적도 향상→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이라는 공식이 폐기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태희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 공학과 교수는 “다양한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들어가면서 반도체 기업들의 전략이 소품종 대량생산에서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바뀌고 있다”며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대량생산에 집중하는 국내 기업들은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최적화된 반도체를 탄력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새로운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고 말했다.
◆ 흔들리는 반도체 공식…“집적도가 전부는 아니다”
반도체의 집적도는 하나의 실리콘 칩 위에 심어진 트랜지스터, 다이오드 등 소자의 수를 말하는 단위다. 집적도는 칩의 회로를 얼마나 얇게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전자가 오가는 회로선폭을 좁게 만들수록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소자를 심을 수 있다. 회로가 미세해지면 전자가 이동하는 거리가 짧아져 처리 속도가 좋아진다.
그동안 반도체 산업은 ‘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대규모 투자→집적도 향상→대규모 신규 수요 발생'이라는 선순환 구도 속에서 움직였다. 인텔이 1972년 선보인 첫 컴퓨터 마이크로프로세서 ‘4004’에는 트랜지스터가 2300개 들어갔다. 4004 프로세서는 10µm(마이크로미터) 공정으로 설계됐다. 10µm는 0.01mm다.
반도체 집적도 역사. 시간이 흐를수록 반도체 한 개당 들어가는 트랜지스터의 개수가 늘어가고 있다.
이후 고성능 개인용 컴퓨터(PC)에 대한 수요가 늘면서 반도체의 집적도도 빠르게 높아졌다. 1985년 인텔이 개발한 80386 중앙처리장치(CPU)는 1µm 공정으로 생산됐다. 4년 뒤인 1989년에는 486 CPU가 처음으로 800 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공정으로 생산되면서 나노 시대가 열렸다.
집적도 개선에 가속도가 붙으면서 36년이 지난 현재 14나노 공정 기술이 개발됐다. 36년 만에 집적도가 57배 늘어난 것으로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무어의 법칙이 실현되어 온 것이다.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안에 넣는 집적도 경쟁은 반도체 산업의 원동력이었다.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20년 넘게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것도 앞선 초미세 집적도 기술을 내세워 메모리 반도체 트렌드를 주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도체 시장의 환경은 조금씩 변해가고 있다. PC 시대의 퇴조(退潮)와 반도체 수요처의 다변화, 기술적 한계 등으로 집적도 제일주의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그렇다고 집적도가 반도체 경쟁력의 원천이 더이상 아니라는 얘긴 아니다. 집적도만으로 경쟁력을 유지하는 시대는 가고 있다는 의미다.
◆ 맞춤형 차별화가 경쟁력인 시대가 왔다
‘스냅드래곤 820A(자동차), 스냅드래곤 웨어 2100(웨어러블), 스냅드래곤X5 LTE(사물인터넷), 스냅드래곤 플라이트(드론)...’
미국 반도체 기업 퀄컴이 올해 발표한 다양한 제품군이다. 지난해만 해도 퀄컴의 브랜드는 스마트폰용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 한가지뿐이었다. 그러나 기기들끼리 연결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퀄컴은 전략을 바꿨다. 반도체를 탑재하는 기기들이 대폭 늘어나 다양한 반도체의 수요가 발생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기기에 탑재되는 반도체 수 자체도 증가하고 있다. 반도체는 연산과 데이터 저장의 핵심 품목이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스냅드래곤 웨어 2100(웨어러블), 스냅드래곤 820A(자동차), 스냅드래곤X5 LTE(사물인터넷), 스냅드래곤 플라이트(드론) /퀄컴 홈페이지 캡처
이처럼 반도체 수요처가 다변화하면서 다양한 수요자의 요구를 충족하는 맞춤형 제품을 얼마나 빠르게 만들어 내느냐가 경쟁력으로 떠올랐다. 생산기지조차 없는 미국 퀄컴이 글로벌 반도체 시장을 호령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도체는 용도에 따라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로 나뉜다. 메모리 반도체는 메모리를 저장하는 역할을 하고, 시스템 반도체는 연산·제어 등의 정보처리 기능을 한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앞선 초미세 공정 기술을 바탕으로 한 대량생산 체제 구축이 경쟁력의 원천이다. 이에 반해 시스템 반도체의 경우 다양한 수요에 대한 맞춤형 설계 및 생산 능력 등 차별화 경쟁력이 필요하다.
반도체 수요가 다변화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75%를 점유하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더욱 빠르게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4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2719억1700만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825억2600만 달러)의 3배였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규모가 2017년까지 30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스마트폰에서 사람의 두뇌와 눈의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와 카메라이미지센서(CIS)가 대표적인 시스템 반도체다. 이 밖에도 TV, 냉장고, 세탁기 등 가전제품의 온도 조절·전원 장치에 쓰이고 자동차의 시동, 전·후방 센서, 계기판에도 사용된다. 전자장치로 작동되는 대부분 분야에 시스템 반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부동의 1위와 2위 업체다. 두 회사의 점유율을 합치면 70%가 넘는다.
조선DB
그러나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국내 기업들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2015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 등 국내 기업들의 점유율은 5%에 불과했다. 그나마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가 개발한 AP 엑시노스7가 갤럭시S6와 갤럭시노트5에 탑재되면서 점유율이 상승해서 이 정도다. 시스템 반도체 시장의 경우 PC 분야는 인텔(CPU), 모바일 분야에서는 퀄컴(AP)이 각각 주도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崛起·우뚝 섬)와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국내 기업들이 변신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한태희 성균관대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는 국내 기업들이 집적도 향상을 무기로 시장을 이끄는 메모리 반도체 시장보다 3~4배 더 큰 시장”이라며 “소비자가 원하는 차별화된 반도체 제품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투입하기 위해서는 선행투자와 연구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박성우 기자/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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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패러다임 변화에 대응 못하는 韓반도체…"팹리스 생태계 취약"
'부우웅, 부우웅'
올해 1월 세계 최대 전자전시회 CES 2016이 열린 미국 라스베이거스. 세계적인 반도체 회사 퀄컴과 인텔의 전시관에는 공기를 가르는 프로펠러 소리가 가득했다. 소리의 주인공은 거대한 곤충 모양을 한 드론(drone·무인기)이었다. 새 반도체 칩이나 소프트웨어 기술을 전시하던 이전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퀄컴과 인텔은 지난해 하반기 드론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공식적으로 알렸다. 인텔은 중국 드론업체 유닉인터내셔널(6000만달러)를 비롯해 에어웨어, 프레시전호크 등에 투자했다. 퀄컴은 드론 전용 플랫폼인 '스냅드래곤 플라이트'를 내놓기까지 했다.
드론 반도체 시장은 3년 후 현재보다 10배 이상 커진 10억달러 규모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스마트폰과 PC 시장의 정체로 공급 과잉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가운데 드론, 웨어러블, 사물인터넷(IoT) 등 다양한 시스템반도체(비메모리) 시장이 부상하고 있다. 1년 6개월 주기에 맞춰 반도체의 집적도가 2배씩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Moore's law)'의 의미가 퇴색하고, 집적도 경쟁보다는 다양한 기능의 제품 수요에 반도체 시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도체 수요가 다변화하면서 반도체 시장의 75%인 시스템 반도체 시장은 더욱 빠르게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4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2719억1700만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825억2600만 달러)의 3배였다. 전문가들은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가 2017년까지 301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예측한다.
많은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탑재되면서 신규 수요에 대한 발 빠른 대응력이 갈수록 중요해지고 있다. 퀄컴과 인텔이 드론용 반도체 시장 진출을 결정하고 실제 제품을 내놓기까지 1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런 속도전이 가능했던 비결은 세가지다. 첫번째, 이들 기업은 새로운 수요에 발맞춰 반도체를 설계하는 탁월한 기술력을 갖고 있다. 두번째, 설계한 반도체를 빠르게 생산할 수 있는 자체 생산라인이나 파운드리(위탁생산) 체제를 갖추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대만의 대형 파운드리에 물량을 맡긴다. 한국과 대만 파운드리는 인텔과 퀄컴 처럼 대형 거래선 위주로 수탁 생산하고 있다.
세번째, 미국 정부 주도의 생태계가 조성돼 있다. 인텔과 퀄컴은 창업 초기에 미국 정부의 벤처 펀드로부터 자금을 조달했고, 이들이 개발한 원천 기술은 연구조합(SEMATECH)을 통해 국제 표준이 됐다. 인텔의 PC 프로세서 표준과 퀄컴의 롱텀에볼루션(LTE) 모뎀 칩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반도체와 같은 지식기반산업에서는 초기에 산업의 표준이 되는 원천기술(특허)을 장악해 시장을 선점해야 장기간 고이윤을 향유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무어의 법칙 폐기'로 상징되는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를 바라보고만 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세계적인 회사가 있지만, 급성장할 것으로 예상되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참 뒤처져 있다. 한국의 팹리스(생산 설비가 없는 반도체 설계회사)들은 대부분 삼성전자와 LG전자 등 대기업 협력업체로 묶여 있어 새로운 수요처 발굴과 투자 능력이 떨어진다.
중소 규모인 한국의 팹리스들이 설계한 반도체를 위탁생산할 파운드리도 동부하이텍 단 한 곳 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팹리스들이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중국 파운드리에 제품 생산을 위탁하고 있는데, 기술 유출의 위험이 있을 뿐 아니라 생산기간이 길고 비용도 많이 드는 문제점이 있다. 또 대기업들이 중소 팹리스에 맞는 제품 영역까지 침투해 생태계를 위협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퀄컴의 드론 플랫폼 ‘플라이트’./조선비즈DB
◆ 무어의 법칙 이후 준비하지 못하는 한국
시장조사업체 IC인사이츠에 따르면 한국의 팹리스 기업의 세계 시스템반도체 시장점유율은 1% 미만이다. 코아로직 등 10년 전 연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주목을 받았던 유망 팹리스들의 매출 성적표는 매년 뒷걸음치고 있다. 이 기간에 한국의 매출 상위 팹리스 16개 업체 중 9곳의 매출액과 이익이 30% 이상 급감했다. 왜일까.
한국의 팹리스 기업 대부분은 TV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력관리 반도체(PMIC)나 터치칩, 센서 등을 설계한다. 미국이나 대만에 비해 한발 늦게 시스템반도체 시장에 진출하면서 안정적인 매출을 낼 수 있는 대기업 납품업체로 시작했다. 팹리스들은 2000년대 초반 삼성 LG 등 대기업 수주 물량으로 순탄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연 매출 1000억원을 내는 회사들도 몇개 나왔다.
그러나 한국의 팹리스들은 대기업 납품업체로 안주하다 보니 제품 포트폴리오 확대를 등한시해 기술 트렌드와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다. 또 고객사인 대기업이 어려워지거나 계약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직격탄을 맞는 취약한 구조에 놓여있다. 예컨대 LG디스플레이를 주요 고객사로 둔 실리콘웍스의 2013년 영업이익은 디스플레이의 수요 부진으로 전년보다 30% 가량 줄었다
한국 팹리스는 대부분 중소 규모라 파운드리와 위탁생산 계약을 할 때 협상력에도 한계가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연 매출 3000억원 이상을 낼 정도의 궤도에 오르면 파운드리와 대등하게 협상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한국 팹리스의 매출액은 1000억원에 못미친다.
전문인력 확보가 어려운 것도 팹리스 발전을 저해하는 핵심 요인이다. 대기업을 선호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팹리스 기업들이 우수한 반도체 설계 인력을 확보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지난해 한국에서 배출된 석·박사급 반도체 설계 인력은 200여명에 그쳤다.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세계적인 팹리스들과 견줄만한 기술 개발은 꿈도 꾸지 못하는 것이다.
스마트폰 제조사에 카메라 관련 시스템 반도체를 공급하는 한 팹리스 업체 대표는 "국제적인 경쟁력이 뒤처지다보니 중국을 비롯한 시스템 반도체 강국이 뛰어들지 않는 1000억~2000억원 규모의 작은 시장들만 골라 공략한다"며 "만약 중국이 이 시장까지 넘보기 시작하면 버텨낼 국내 업체들이 몇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리콘아트의 윤형민 대표는 "미세공정 개발로 가면 자본 싸움이어서 팹리스가 뛰어들 엄두를 못 냈지만, 많은 기기에 다양한 반도체가 들어가면서 새로운 시장이 열렸다"면서도 "그러나 한국의 경우 작은 업체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정부 지원이나 업체간 협력이 부족해 대응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비메모리 반도체 공장. /삼성전자 제공
대기업이 중소 팹리스들의 사업 영역에 손을 뻗치면서 생태계가 훼손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미지센서 업체인 픽셀플러스는 최대 고객사 삼성전자에 '호되게 당한' 업체 중 하나로 꼽힌다. 픽셀플러스는 삼성전자를 등에 업고 2005년 미국 나스닥 상장에 성공하는 등 승승장구했지만 삼성전자가 자체적으로 이미지센서 사업에 뛰어들면서 실적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그 결과 나스닥 상장 3년 만에 퇴출당하는 쓰라림을 겪었다. 이후 보안카메라 센서로 재기에 성공해 2015년 코스닥에 상장했다.
픽셀플러스 이서규 대표는 코스닥 상장 기념 기자회견 당시 "국내 대기업에 매여있으면 성장할 수 없다"며 "(삼성전자가 진출한)스마트폰과 태블릿PC용 이미지센서 시장에는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의 한 팹리스 대표는 "삼성전자의 기술력은 상상 이상"이라며 "아무리 차별화된 기술이라도 삼성전자가 자체 사업 확대를 결정하면 금방 도태된다"고 말했다. 반도체업계 한 전문가는 "대기업이 갈 길이 있고 중소기업이 가야 할 길이 있다"며 "뒤에서 든든하게 뒷받침을 해줄 중소업체들과 같이 가야지 이들을 위기로 몰아넣어선 곤란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삼성전자가 중소기업이 할 수 없는 새로운 단계로 도약하는 기술 개발에 앞장서야 한다"며 “중국이 반도체 굴기에 나선 현 시점에서 국내 생태계까지 흔들리면 결국 손해를 보는 건 삼성전자”라고 강조했다.
장비 업체들의 상황은 더욱 심각하다. ‘1년6개월마다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무어의 법칙이 폐기되면서 반도체 제조사들의 장비 발주 주기가 과거 보다 길어졌기 때문이다. 반도체 소재 전문기업 PKL의 여운석 전무는 "시스템 반도체 14나노 공정 전환 때까지만 해도 공격적인 투자가 이어졌는데, 10나노부터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며 "공정 장비업체의 경우 지난해 하반기부터 대기업의 투자 보류 여파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 위기의 한국 반도체 대응책은…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 지난해 150개 국내 팹리스 회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정부 지원 정책이 미흡하다고 지적했다. 시스템 반도체 산업에는 수준 높은 기술력과 우수한 인력, 장기간의 개발 기간이 필요하다.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 없이 영세 기업이 홀로 성공할 수 없는 영역인 셈이다.
세계적인 시스템 반도체 회사인 대만 미디어텍은 체계적인 성장 단계를 잘 밟은 사례로 꼽힌다. 미디어텍의 성장에 크게 기여한 모뎀 칩은 대만 국책 연구기관인 산업기술연구원(ITRI)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오지 못했다. 모뎀이 유망한 분야가 될 것이라는 전망에 따라 ITRI는 10년 이상 모뎀 설계 인력을 육성해 미디어텍에 합류시켰다.
함께 커갈 수 있는 파운드리를 만난 것도 주효했다. 미디어텍은 일본에 위탁생산을 맡기다가 대만의 파운드리 회사 TSMC를 만나면서 부흥기를 맞았다.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로 걸음마를 뗄 때 대만은 파운드리에 집중하며 해외 IT기업의 생산기지로 자리매김했다.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대만내 팹리스와 파운드리가 함께 성장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한국에는 동부하이텍 정도만이 순수 파운드리로 꼽힌다. 많은 팹리스는 중국 대만 등의 파운드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해외 파운드리를 이용하면 기술 유출에 대한 위험이 존재하는 데다 국내 파운드리를 이용할 때 보다 생산기간이 길어지고 비용도 많이 든다.
미디어텍은 또 M&A(인수합병)를 통해 디지털TV 칩세트와 휴대폰용 프로세서 등 새로운 기술을 확보하고, 그 기술을 바탕으로 신규 사업을 벌였다. 넥서스칩스의 이덕명 대표는 "세계 2위 팹리스인 대만 미디어텍이 선제적인 M&A를 통해 경쟁력을 키운 대표적인 사례"라며 “대만 반도체업체들은 서로 투자를 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하는데, 공식적으로 다른 회사지만 실제로는 한 기업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고 말했다.
산업연구원은 한국 팹리스 업체들이 중국과의 '긴밀한 협력체제'로 난관을 돌파해야한다고 밝혔다. 주대영 산업연구원 성장동력산업 연구위원은 “중국에 자리잡은 각종 연구소나 현지기업을 활용해 연구개발, 소프트웨어 외주개발, 마케팅 자원 등에 투자하면 중국 시장에 효과적으로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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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날개 단' 중국 반도체 굴기 '전방위 공습'
"중국이 정부의 지원과 거대 자본을 앞세워 반도체 산업에 진출하고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향배는 앞으로 5년을 어떻게 준비하느냐에 달렸습니다."
2015년 11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신성장포럼. 세계 2위 종합 반도체 회사인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을 총괄하는 김기남 사장이 반도체 위기론을 들고나오자 순간 정적이 흘렀다. 김 사장은 “중국의 반도체 시장 진출은 한국 반도체 산업에 큰 위협으로 다가올 것이다"고 우려했다. 그 자리에 모인 반도체 전문가들은 김 사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거대 자본과 시장을 앞세운 중국의 반도체 굴기(우뚝 섬)가 시작됐다. 그 힘은 ‘무어의 법칙(Moore's law) 폐기’로 상징되는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 변화와 맞물려 더 세지고 있다.
지난 30년간 세계 반도체 산업은 삼성전자와 인텔이 최첨단 미세 공정을 이용해 반도체의 집적도를 높이며 치고 나가면, 후발주자들이 뒤쫓는 구도였다. 그러나 무어의 법칙 폐기로 치열했던 집적도 경쟁이 퇴조하면서 선두주자들과 중국과의 기술 격차도 좁혀지고 있다. 또 기기끼리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등의 활성화로 반도체 수요처가 다변화하면서 ‘자본, 인적 자원, 시장’이라는 3박자를 갖춘 중국이 부상하고 있다.
인텔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주창한 무어의 법칙은 1년6개월마다 반도체 집적도가 2배로 늘어난다는 것으로 반도체 기술 개발을 이끈 표준 로드맵이었다. 반도체의 집적은 한정된 면적에 보다 많은 트랜지스터를 집어넣는 작업이다. 집으로 비유하면 동일한 면적에 보다 많은 방을 짓는 것으로 더 많은 기능을 더 작은 칩에 넣는 경쟁이었다. 하지만 PC 시대의 퇴조(退潮)와 반도체 수요처의 다변화, 기술적 한계 등으로 집적도 제일주의가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18개월마다 트랜지스터 개수가 2배 집적되고 컴퓨터 성능도 개선된다는 무어의 법칙. 수십 년 동안 무어의 법칙은 반도체 산업의 표준 ‘로드맵’이었다. / 네이처 제공
◆ 中 반도체 ‘중궈멍(중국의 꿈)’은 ‘자급자족’
중국은 세계에서 생산되는 반도체의 절반 이상을 쓰는 세계 최대 반도체 소비국이다. 컨설팅회사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2014년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56.6%였다. 반도체는 2013년에 원유를 제치고 중국의 제1수입품이 됐다. 중국 정부가 반도체 국산화를 숙원 사업으로 삼은 배경이다.
중국은 1990년대 국가 주도로 반도체 국산화 작업에 착수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자급률은 한자릿수에 그치는 수준이었다. 분위기는 2012년 5월부터 급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전략적 7대 신성장 산업’을 발표했다.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육성하기 위해 2020년까지 연간 총 9000억위안(약 166조원) 이상을 연구개발에 투자한다는 게 골자였다.
연구 개발의 방향은 한국이 시장을 석권하다시피 한 메모리 반도체가 아닌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였다. 공장없이 반도체 설계만 하는 다양한 팹리스 업체들은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핵심이다. 중국 정부는 위탁생산(파운드리) 계약부터 설계 도구, 인력 확보 등 반도체 생태계 대부분을 지원했다. 중국 정부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기기에는 모두 중국산 반도체만 쓰도록 자국 산업 보호 정책도 펼쳤다. 시장조사업체 디지타임스에 따르면 중국의 반도체 자급률은 2014년 20% 수준에서 2025년 70%대로 급등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정부의 뒷받침으로 중국 팹리스 업체와 파운드리는 급속히 성장했다. 시장조사기관 아이서플라이는 올해 중국 팹리스 시장 규모는 2010년보다 2배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2013년 세계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중국 팹리스가 차지하는 비중은 7%로 3위에 올랐다. 중국 하이스와 스프레드트럼은 각각 세계 팹리스 12위와 16위에 이름을 올렸다. 상위 20위권 안에 한국 회사는 단 한 곳도 없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중국 SMIC가 삼성전자에 이어 5위였다.
반도체 전문가들은 중국의 신성장 산업 발표 시점이 무어의 법칙 효력이 떨어지는 시기와 맞물리면서 효과를 봤다고 분석했다. 미세 공정 기술 발전 만을 쫓는 무어의 법칙 시대에서 벗어나면서 후발주자들의 뒤처진 공정에 대한 쓰임새가 늘었기 때문이다. TV에 쓰이는 전력반도체,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터치칩 등은 굳이 최첨단 미세 공정라인에서 생산할 필요가 없는 제품들이다. 낮은 수준의 기술부터 차근차근 섭렵한 중국 팹리스와 파운드리들은 현재 시스템 반도체의 꽃이자, 모바일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만드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베이징대, 칭화대 등 중국 일류 대학에서 매년 배출하는 대규모의 연구 인력은 중국 반도체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이다. 중국의 과학기술 인력은 우리나라 전체 인구에 육박하는 4200만명 수준이다. 전문 연구·개발 인력만 190만명에 달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시스템 반도체는 적합한 인력만 있으면 금방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인데, 인력은 자본이 있으면 쉽게 끌어들일 수 있다"며 "자본이 있는 중국이 돈으로 기술과 인력을 사들이고 있기 때문에 빠르게 따라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中 자국 기업 밀어주기 심해… 중국·대만·일본 연합도 나와
‘앞에서 끌고 뒤에 밀어주는’ 중국 업체들 사이의 밀접한 관계도 중국 반도체 산업의 빠른 성장을 이끄는 요인 중 하나다. 화웨이는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기자간담회에서 "삼성전자의 14나노 공정보다 TSMC의 16나노 공정으로 만든 칩의 성능이 더 뛰어나다"며 대놓고 중화권 기업을 밀어줬다. 팹리스들도 마찬가지다. 대만 팹리스 미디어텍(MediaTek)과 중국 팹리스 하이실리콘, 스프레드트럼은 10나노 공정을 활용한 AP의 위탁생산을 TSMC에 맡겼다.
중국과 일본, 대만 3국이 손잡고 한국에 맞서는 경우도 있다. 일본 반도체 설계업체 시노킹테크놀로지는 지난 3월 중국 안후이성 허페이시 정부와 메모리 반도체 공장을 짓기로 합의했다. 시노킹은 한때 삼성전자와 어깨를 견줬던 일본 메모리반도체 제조사 엘피다의 사카모토 유키오 전 사장이 설립한 회사다. 이 회사의 핵심 인력 대부분은 대만 국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본, 중국, 대만이 합쳐 D램 강국 한국에 도전장을 내민 것이다.
이러한 연합군 작전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메모리반도체 점유율에 당장 악영향을 주진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삼성전자는 그나마 앞선 편인 일본과도 D램과 낸드플래시 공정 기술상 1년 이상의 격차를 벌려놓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세계 D램 시장에서 지난해 4분기 기준 합산 점유율 74.3%를 기록했다.
그러나 연합군이 노리는 분야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차세대 먹을거리인 사물인터넷(IoT)용 반도체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연합군이 저전력이 필수인 IoT용 반도체를 저가로 공급하면 이 시장을 선점할 수도 있다.
◆ 韓 텃밭 메모리도 노리는 中
중국 정부는 한국 기업들의 텃밭인 메모리 반도체 육성에도 팔을 걷고 나섰다. 후베이성 정부가 설립한 XMC는 우한에 3D(3차원) 낸드플래시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투자금액은 240억달러(27조4300억원)다. 칭화유니그룹도 광둥성 선전에 D램과 낸드플래시 공장을 세우기로 했다.
D램은 칩 설계, 소재, 공정 전반에 걸쳐 기술 난이도가 상당히 높다. 하지만 대량 생산 체제를 갖추면 대규모의 매출과 이익을 낼 수 있다. 중국이 현재 수입에만 의존하는 D램을 자급자족하게 되면 막대한 수입 대체 효과를 거두게 된다.
중국이 D램보다 낸드플래시에 초점을 더 맞추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이 낸드플래시에 주목하는 이유는 장기적으로 D램보다 낸드플래시 수요가 빨리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낸드플래시는 D램과 달리 전원이 꺼져도 저장된 정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게 장점이다. 시장조사기관 IHS에 따르면 세계 낸드플래시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은 2019년까지 2%대를 유지할 것으로 추산됐다. D램의 2배 수준이다.
또 D램은 이미 3개 업체의 과점 체제가 굳어져 있는 상태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마이크론이 90% 이상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반면 낸드플래시는 이보다 많은 6개 업체가 경쟁하기 때문에 후발 주자가 뛰어들 여지가 더 많다. 낸드플래시는 스마트폰뿐 아니라 컴퓨터 저장장치로 쓰이는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수요가 있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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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韓반도체 메모리·대기업 종속 생태계 손질해야
지난 3월 3일 서울 코엑스 인터컨티넨탈호텔. 제10대 한국반도체산업협회장으로 취임한 박성욱 SK하이닉스 대표(사장)는 "반도체가 한국 대표산업이라곤 하나 그것은 메모리에 국한된 얘기"라며 "국제 경쟁 관계로 보면 한국 반도체 생태계는 아직 강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중국의 거센 추격과 신흥 업체·선두 기업을 가리지 않는 공격적 인수합병(M&A), 급변하는 기술과 시장환경 등 새로운 도전과 위기에 직면해 있다"고 했다.
박 사장이 지적한 생태계의 문제는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시스템(비메모리) 반도체 산업과 반도체 관련 중소기업들의 경쟁력이 취약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도체산업 분야의 신규사업 확대와 창업을 지원하고 희망펀드를 조성해 기술을 보유한 기업과 기술자들이 투자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겠다"면서 "한국 반도체 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R&D(연구개발)를 통해 (중국 등의) 후발 업체와의 격차를 벌리고, 새로운 시장으로 떠오른 사물인터넷(IoT)·웨어러블·바이오 헬스케어·센서 등 미래 분야를 개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은 박 사장의 지적처럼 D램이나 플래시와 같은 정보를 기억하는 장치인 메모리 분야에 편중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를 점유하고 있다.
반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3배 크기인 시스템 반도체(전자신호를 제어하고 계산을 하는 반도체) 분야에서는 한국 업체들의 존재감은 미약하다. 삼성전자가 명함을 내밀 정도에 불과하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2014년 시스템 반도체 시장 규모는 2719억1700만 달러로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825억2600만 달러)의 3배였다.
시스템 반도체는 스마트폰과 태블릿PC, 스마트TV, 자율주행자동차 등 IT 융합 기기에서 필수적인 초고속 통신 처리기능을 담당하고 있어 앞으로 그 수요가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한국 반도체 산업이 중국의 공세에 대응해 메모리 분야의 최고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취약점인 시스템 반도체 분야의 생태계를 활성화 해야하는 이유다.
◆ "대기업 종속 해소하고 인재 유인책 마련해야"
① 대기업 종속 매듭 풀어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한국을 독보적인 메모리 반도체 강국으로 올려놨다. 그러나 이들 기업이 반도체 장비·소재 업체나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들을 종속 관계인 협력 업체로 줄세우면서 한국의 반도체 생태계가 대기업에 의존적인 허약한 구조를 갖게 됐다. 이는 중소업체들은 안정적인 매출을 내기 위해 대기업에 발맞춘 제품에 집중했고, 대기업은 경쟁사로 영업 비밀이 새나가지 않도록 하는 한편, 협력사 관리를 통해 원가를 절감하고 공급망을 두텁게 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중소업체들의 가격과 생산 능력은 대기업이 바라는 대로, 하라는 대로 결정됐다. 제2의 삼성이나 SK가 나올 수 없는 구조가 고착화된 것이다. 서울 소재 전자공학과 교수는 "대기업에 의존하는 기형적인 구조를 고치기 위해서는 중소 협력업체들의 수출 길을 열어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출을 통해 공급처를 다각화하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전기가 마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반도체산업협회나 기관들이 중소기업들의 해외 진출을 지원해주면 대기업들의 눈치를 덜 봐도 될 것"이라고 했다.
휴대폰 카메라 내부에 장착되는 '자동초점 구동칩(Auto Focus Driver IC)'을 설계하는 동운아나텍은 일본과 중국 진출에 ‘올인'하면서 대기업 종속에서 벗어난 사례로 꼽힌다. 동운아나텍의 AF 세계 시장 점유율은 36%이다. 특히 중국에선 50%를 점유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② 인력 확보 시급
중소업체에 가장 시급한 건 우수한 인력 확보다. 그러나 대기업 취업을 선호하는 대학생들로부터 외면받으면서, 국내 중소 반도체 업체는 매년 필요한 인력의 절반 정도밖에 채우지 못하는 실정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경우 입사지원자가 넘쳐나지만 중소반도체 업체의 인력 가뭄은 해소되지 않고 있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시스템 반도체 업계는 4000명의 인력을 고용하려고 했으나 관련 공급 인력은 2000명 수준에 그쳤다. 서울대에서 배출하는 반도체 분야 석·박사 인력은 2005년 약 100명에서 10년 만에 40명으로 절반 이상 줄었다. 대만의 경우 중소 업체들이 스톡옵션 등 유인책을 통해 고급 인력을 확보하지만 국내 반도체 업체는 대부분 영세해 별다른 유인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예산이 줄어드는 점도 한몫한다. 지난해 12월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가 확정한 올해 정부 예산에 따르면 ‘전자정보디바이스 산업원천기술개발 사업’ 예산은 540억원에 그쳤다. 전자정보디바이스 산업원천기술 개발 사업은 2009년부터 반도체·디스플레이·LED 분야의 국가 핵심기술 개발 계속사업으로 추진돼왔다.
이 분야의 R&D 예산은 2011년 1312억원에서 2016년 549억원으로 불과 5년 사이에 60%가량 삭감됐다. 이 예산에는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LED 등 3가지 분야의 원천기술 개발이 포함되기 때문에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반도체 분야 정부 R&D 예산은 200억원도 안되는 셈이다.
미국과 중국, 대만 기업들이 한국의 은퇴자 등 고급 인력을 영입해가는 점도 인력 가뭄을 부채질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은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기술에 어마어마한 투자를 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거꾸로 가고 있다”며 “장기적으로 차세대 반도체 기술 개발 뿐아니라 인력 양성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삼성전자가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20년 이상 1위를 지키고 있다 보니 반도체 산업에 대한 정부의 지원이 오히려 소홀해지는 것 같다”며 “이는 일종의 삼성전자 착시 현상으로 무엇보다 인력 육성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라고 밝혔다.
③ “창업·연구 지원할 인프라 마련해야”
전문가들은 우수 인력을 양성하려면 대학생들이 마음껏 쓸 수 있는 시설 등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도체산업협회는 시스템 반도체 창업부터 실제 제품을 양산하기까지 필요한 과정을 지원하기 위해 반도체창조경제혁신센터 설립을 추진 중이다. 아직 초기 구상 단계이긴 하지만 사무공간은 물론, 실험 장비, 투자 유치 등 전반에 걸쳐 지원체계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 관계자는 "중소기업이 겪는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산학연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말했다.
연구개발 프로젝트도 더 늘어나야 한다. 미국 반도체 기업과 정부가 함께 만든 펀드인 SRC(Semiconductor Research Corporation)는 매년 1000억원의 자금을 출자해 대학에서 원천 기술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인력과 산업 생태계를 육성하는 차원에서다. 미래 반도체소자 원천기술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돈이 모이는 곳에 학생들도 모이기 마련"이라며 "미국 SRC 모델은 과제에 참가한 대학생을 바로 실무에 투입할 수 있는 효과도 낸다"고 말했다.
◆ 반도체 신소재 연구로 장기적인 돌파구 찾아야
반도체 연구자들은 ‘무어의 법칙 폐기’ 이후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신소재 발굴에 매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리콘의 경우 전자의 이동시간이 빠른 데다 가격이 저렴한 특성 때문에 오랫동안 반도체 물질로 애용됐다. 하지만 반도체 공정이 10나노미터(nm, 10억분의 1미터) 이하로 미세해지면서 트랜지스터를 작게 구현하는 게 점차 한계에 다다랐다. 전자 이동속도도 더 빨라져야 하는 문제가 있다.
신소재 개발은 장기적으로 반도체 시장의 주도권을 유지하고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발판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실리콘 반도체를 대체할 신소재로는 그래핀이나 탄소나노튜브, 이황화몰리브덴 등이 거론된다. 이들은 물리적·화학적 안정성이 높아 실리콘에 버금가는 반도체 성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전자는 2014년 그래핀의 분자구조를 규명하고 웨이퍼 크기의 대면적 단결정 그래핀을 만들 방법을 개발했다. 그래핀의 분자 구조는 반도체 공정의 1단계인 대면적 웨이퍼를 만들기 어려운 다결정 특성을 갖고 있다. 분자 구조가 균일하지 못해 반도체 집적회로를 만드는 웨이퍼를 생산하는 데 부적합했다. 삼성전자는 성균관대 신소재공학부와 공동 연구를 통해 그래핀을 반도체 웨이퍼로 활용할 수 있는 분자 구조 합성법을 개발했다.
그래핀은 구리보다 전류가 150배 더 잘 흐르고 강철보다 200배 강해 ‘꿈의 신소재’로 불린다./포토핀 제공
국내 과학자들도 차세대 신소재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이영희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구조물리연구단장 연구팀은 올해 초 이황화몰리브덴의 구조와 전기적 특성을 규명하는 데 성공했다. 이황화몰리브덴은 몰리브덴(Mo) 원자 1개에 황(S) 원자 2개가 결합한 물질로 극히 얇은 차세대 반도체 회로 제작에 활용될 수 있다.
실리콘 기판 위에 전기적 특성이 좋고 가격이 싼 화합물반도체를 올리는 기술도 개발되고 있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의 차세대반도체연구소는 그래핀 등 신소재 기반의 반도체가 상용화하는 데는 아직 시일이 오래 걸릴 것으로 예상하기 때문에 실리콘과 화합물반도체를 결합하는 방식의 차세대 반도체 소자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민수 기자/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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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전문가가 보는 ‘무어의 법칙’ 폐기와 韓 반도체 산업의 미래
'무어의 법칙'은 종말을 맞았다. 무어의 법칙은 인텔 창업자 고든 무어가 제시한 이론으로 반도체 집적도는 1년 6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것이다. 한정된 면적에 트랜지스터를 많이 담으면(집적도를 높이면) 성능 뿐 아니라 수익성도 좋아진다는 믿음은 깨지지 않았다. 반도체 업체들이 무어의 법칙을 정설로 받아들이며 죽기살자식으로 집적도를 높여온 배경이다. 선두 자리에는 인텔과 삼성전자가 있었다. 그러나 인텔이 무어의 법칙 폐기를 선언하면서 반도체 산업의 패러다임은 대전환기를 맞았다.
그동안 반도체 시장에서 무조건 최고 성능의 제품이 살아남는 구조였다면 이제는 저성능에서 고성능까지 다양한 수요처가 생겼다. 사물인터넷(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의 등장으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는 시스템 반도체가 그 예다. 이들 기기에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비롯해 카메라이미지센서(CIS), 통신칩, 근거리무선통신(NFC)칩, 위성항법장치(GPS)칩, 전력관리칩 등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들이 들어있다.
조선, 해운, 건설 등 한국의 전통 산업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반도체 산업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7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약 20년간 미국·유럽·일본의 메모리 반도체 업계와 처절한 '치킨게임'(죽기살기식 경쟁)을 벌여 살아남은 결과다. D램 등 반도체 가격의 지속적인 하락으로 수익성은 나빠졌지만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입지는 굳건하다.
그러나 반도체 전문가들은 “한국 반도체 산업이 메모리 반도체에 안주해선 안된다”고 경고한다. 메모리 반도체 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공고히 하면서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 등 다양한 수요처가 발생하면서 급성장 중인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 시장으로 세력을 확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그 이유는 두가지다. 하나는 중국이다. 거대 자본과 시장을 앞세운 중국의 반도체 굴기(우뚝 섬)에 대비하기 위해선 메모리 반도체와 비메모리 반도체의 균형적인 발전이 필요하다. 또다른 이유는 전세계 반도체 시장의 75%를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성장 속도가 더 빨라질 것이라는 전망에 근거한다.
한국의 시스템 반도체산업은 반도체 후발주자인 중국에도 뒤처져있다. 중국이 팹리스(반도체 전문설계 회사)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에 집중적으로 투자하며 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고 있지만 한국은 여전히 메모리에 편중된 산업과 특정 대기업에 종속된 구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를 비롯해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등 전문가들로부터 대응 방안을 들어봤다.
우선 정부가 반도체 설계 인력 부족을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문이 많았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는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설계인력이 중요한데, 인력이 많이 부족하고 벤처기업 육성도 안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이 과감한 M&A에 나서야 하고 팹리스 지원을 통한 생태계 조성에도 한몫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 등 대기업은 3박자(자체 기술, M&A, 고급 인력)가 맞아야 중국의 추격을 막을 수 있다”며 “대기업은 중소 팹리스의 소량 위탁 생산을 받아주고, 기술 지원도 해줘야 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시스템반도체 산업의 이와 잇몸 역할을 하는 팹리스와 파운드리 육성을 위한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매칭펀드'와 같은 정부의 투자 지원을 비롯해 무상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① 반도체의 수요처가 다양해지면서 시스템 반도체가 중요해지고 있다. 한국의 경쟁력을 평가해 달라.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한국의 반도체 경쟁력은 전세계 반도체 시장 매출액의 25% 정도를 차지하는 메모리 반도체에 국한돼 있는 게 현실이다. 나머지 75%인 시스템 반도체(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가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동부하이텍이 전력반도체 등의 아날로그 반도체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지만 일부 분야를 제외하곤 글로벌 업체들에 비해 상당히 뒤처져있는 상황이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한국의 반도체는 제조·설계 두 분야 중 제조 기술이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가장 앞선 양산 공정인 14나노 제조 기술을 대만, 미국과 함께 보유한 국가다. 그러나 설계 기술은 미국에 비해 뒤처진다.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스마트폰에 탑재되는 AP 제조 공정 기술에선 삼성전자가 최고 수준이다. 대만의 TSMC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데, 현재는 살짝 앞서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제품 종류가 너무 많다. 그 중 하나인 AP 쪽은 잘하고 있다. 세계 1~2위 수준이다. 그러나 이를 제외한 다른 제품군은 한국에서 하지 않는 것이 많아 전반적인 수준을 논하긴 어렵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메모리보다는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이 확실히 떨어진다. 최근 들어서는 디스플레이 드라이브 구동칩을 만드는 등 과거보다 많이 개선됐으나, 개선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지 않다. 중국, 대만이 잘하는 것에 비하면 부족하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을 확보하려면 설계 인력이 중요한데,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벤처기업 육성도 잘 안 되고 있다.
②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가 취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한국의 메모리반도체 경쟁력이 세계 1위까지 오르게 된 것은 정부 주도로 삼성 등 대기업 중심의 메모리반도체 육성 정책에 모든 역량을 집중했기 때문이다. 메모리반도체는 소품종 대량생산을 통한 원가경쟁력 강화가 핵심인데 반해, 다품종 소량생산이 주를 이루는 비메모리반도체는 제조경쟁력보다 회로설계능력이 더 중요한 분야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비메모리반도체에 대한 기업들의 투자가 활성화돼야 하고 대학에서는 회로 설계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정부 사업 중 ‘시스템 2010’이라는 게 있었다. 그 사업을 통해서 시스템반도체 생태계를 조성하려고 했는데, 어느 정도 좋아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시스템 2015 사업도 진행했지만( 2011~2015) 생태계가 많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지금까지는 정부가 시드머니(초기 자본)를 제공하고 팹리스(반도체 설계회사),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회사), 반도체 장비회사들이 비즈니스를 확장하는 식으로 생태계를 개선하려는 노력해 왔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정부가 지원해 줬기 때문에 업체들의 정부 의존성이 커져서 실패했다고 본다. 업체들도 물론 노력을 했지만, 비즈니스를 성공시키려는 필사적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다. 정부 주도로 하는 것은 더 이상 소용이 없다고 본다.
민간 주도의 노력도 필요하다. 대기업은 팹리스 회사들이 많이 생기면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할 것이다. 민간 주도로 하려면 벤처캐피털 등 투자자들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실력 있는 팹리스는 투자를 받아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벤처캐피털 규모가 많이 커져 환경이 좋아진 편이다. 벤처캐피털에 어필할 수 있는 비즈니스 모델을 팹리스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팹리스들의 제품을 보면 스마트폰 부품들이 많다. 구동 드라이브 회로, 전력을 제어하는 시스템 반도체(pmic) 등이 있다. 떠오르는 다양한 사물인터넷(Iot) 분야에도 도전해야 한다. 혈압이나 당뇨를 측정하는 헬스케어 센서라든지, 자동차 등에 필요한 센서들을 만들 수 있다고 알리고 벤처캐피탈의 투자를 유도해야 한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팹리스가 많아져야 한다. 현재 한국에는 200개 정도의 팹리스가 있다. 중국의 600개에 비하면 부족한 숫자다. 500개 이상은 있어야 한다. 미국도 500개 된다. 미국의 경우, 개별 회사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한국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벤처 기업이 많아지려면 토양이 뒷받침돼야 하는데, 코스닥도 그런 역할을 많이 못하고 있다. 1999년에는 벤처기업육성책 같은 게 나왔다. 생태계는 정책 문제 뿐아니라 국가적인 문제, 국민성과도 상관 관계가 크다. 한국에서는 젊은 사람들이 대기업을 선호하는 현상이 뚜렷하다. 반면 대만은 중소기업 위주로 산업이 구성됐다. 중소 팹리스 위주로 돌아가야 시스템 반도체가 발전할 수 있다. 옛날처럼 똘똘한 중소기업이 많이 나오는 생태계가 되어야 한다.
③ 정부의 역할은 어떤 게 있을까.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1980~1990년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이 오늘날 한국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세계 1위가 되는 바탕이 되었듯이 비메모리 반도체의 경우도 한국이 세계 일류가 되기 위해서는 정부의 지원이 절실하다. 특히 다품종 소량생산인 시스템반도체 산업 특성상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이나 벤처기업에 대한 정부의 집중적인 지원이 필요하다.
또 삼성이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에 안주하지 않고, AP 등 시스템반도체 시장에 도전했듯이, SK하이닉스 등 다른 반도체 관련 대기업도 전기자동차, IoT 등 확대되는 신규 반도체 시장을 타깃으로 새로운 투자나 M&A에 나서야 한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정부와 대기업의 역할이 각각 있다. 정부는 벤처캐피털에 매칭펀드(정부가 같은 금액을 투자하는 것)를 많이 제공해 벤처캐피털이 팹리스에 투자할 수 있게 유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팹리스 창업을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
대기업은 팹리스의 소량 위탁 생산을 받아주고, 기술 지원도 해줘야 한다. 팹리스들이 반도체협회에 요청하면 대기업이 무상으로 기술을 지원하는 식이다. 팹리스는 설계만 하는 회사다. 팹리스가 좋은 제품을 내놓기 위해서는 이들에 부족한 소프트웨어나 소자 공정 기술 지원이 필요하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무: 팹리스는 새로운 아이템으로 시장을 창출하는 등 창조적인 일을 한다. IoT, 스마트카, 웨어러블, 드론 등 새로운 시장을 여는데, 퀄컴, 인텔 등 팹리스들의 역할이 컸다. 대형 팹리스가 좋은 아이템을 내놓고 시장을 키우면, 중소 팹리스들의 영역이 생긴다. 중소 팹리스들이 전력 반도체라든지, 센서 등 세부 부품 설계를 맡는다.
중소 팹리스가 설계한 제품을 완성도 있게 제조해 줄 대기업이 필요하다. 최첨단 제조시설을 갖고 있는 삼성과 같은 대기업이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이다. 정부는 팹리스를 늘릴 수 있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인재 육성과 창업을 잘할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한다.
④ 한국 반도체 산업이 무어의 법칙 이후를 어떻게 대비하고 있나.
한태희 성균관대학교 반도체시스템 공학과 교수: 업계, 학계에서는 트랜지스터를 대체할 수 있는 신소자(나노 와이어 등)를 개발하고 있다. 신소자들이 성공적으로 개발되면 앞으로 10년, 20년간 무어의 법칙 처럼 빠른 진보도 가능할 것이다. 다만 지금 무어의 법칙이 끝났다고 하는 건, 신소재들이 5년 내 트랜지스터를 대체할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본다. 신소자 개발이 실현되는 시점까지 5년~10년 정도는 반도체 성능 향상이 정체기에 접어들 것이다. 업계 전반적으로는 반도체에 의한 성능 향상이 벽에 부딪힌 만큼 소프트웨어를 통한 성능 향상을 노릴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반도체 업체들은 물질의 결정 특성을 이용한 'P램(위상변화 메모리)'과 물질의 저항 변화를 이용하는 R램, 자성(磁性)을 응용한 M램 등 차세대 기술에 대응할 것이다. 그러나 이들 신소자 제품의 개발이 어느정도 진척됐는지는 공개되지 않았다. 기업간 기술 개발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보안이 철저하다. 지난해 인텔이 3D크로스 포인트 칩을 개발한다 했는데, 아직 정확한 내용이 공개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P램의 일종일 것으로 예측한다.
반도체 집적도 향상이 한계에 부딪힌 만큼 P램, M램 등이 조만간 상용화되는 시나리오로 봐야 하는데, 올해 하반기쯤에 가면 새로운 기술에 대한 기업들의 발표가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 관계자: 전망은 모른다가 정답이다. 여러 기술이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3차원 반도체도 10년 전에 개발된 기술이다. 회로선 폭을 계속 얇게 만들다 보면 결국 회로를 위로 겹치도록 쌓을 것이라는 예상이 10년 전에 나왔다. 다음 단계에 대해서는 삼성, 인텔, IBM도 확신하지 못한다. 투자하려면 조 단위인데, 실패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앞으로는 전력이 더욱 중요해진다. IoT의 기본은 저전력이다. 성능을 높이려면 전력이 더 든다.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⑤ 한국 반도체 산업의 5년 후를 전망한다면.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 중국이 맹추격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도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1~2위는 유지하겠지만 지금처럼 많은 이익을 낼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지금 정도로 이익을 내려면 기술 격차를 많이 벌려야 한다. 스스로 기술 개발도 해야 하고 M&A도 과감하게 해야 한다. 고급인력 양성을 반드시 해야 한다. 3박자(기술, M&A, 고급 인력)가 맞아야 추격을 막을 수 있다.
시스템 반도체는 AP 사업의 경우 여전히 공정 경쟁에서는 유리한 고지를 유지할 듯하다. 디지털 카메라 속에서 필름 역할을 하는 반도체인 이미지센서는 소니에게 뒤지고 있지만 기술 추격을 5년 뒤에는 하지 않을까 싶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동부하이텍 등 파운드리 사업 규모가 지금보다는 커질 것이다. 5년 뒤 파운드리 쪽에서 다룰 수 있는 제품들이 많아져야 한다.
삼성과 하이닉스의 사업 모델이 바뀌어야 한다. 대량 생산 위주에서 소량 생산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양산력으로 승부를 보는 D램 등 대량생산 제품군의 경우 가격을 낮추는 데 한계가 있는 만큼 소비자 맞춤형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경쟁력이 훨씬 나아질 것이다.
임민규 SK머티리얼즈 대표이사: 어려운 질문이다. 중국이 위협요인이겠지만 5년 후인 2020년에도 한국의 메모리반도체는 여전히 세계 1위를 유지할 것으로 전망한다. 삼성의 파운드리 사업도 업계 상위권으로 올라설 것으로 보이며, 전기자동차 등 신규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도 동부하이텍 등 많은 한국업체가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기대한다.
소현철 신한금융투자 애널리스트: 굉장히 도전적인 상황이다. 중국이 맹렬히 추격 중이다. 중국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봐야 한다. 전세계 IT 기기의 60%가량이 중국에서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추월당할 가능성이 있다.
-한동희 기자, 조선일보(1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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