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흉한 현자’ 키신저] [키신저와 한반도] ....
[‘음흉한 현자’ 키신저]
[키신저와 한반도]
[당근과 협박으로 사우디 압박… ‘페트로 달러’ 구축한 외교 달인]
‘음흉한 현자’ 키신저
나폴레옹을 ‘찌질한 마초’로 그린 새 영화
‘외교의 전설’ 100년이 남긴 그림자도 짙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영화 ‘나폴레옹’을 두고 프랑스에선 격한 불만이 쏟아졌다고 한다. ‘전쟁의 신’으로 불린 천재적 전략가이자 ‘나폴레옹 법전’ 같은 근대 유럽의 법과 제도를 만든 영웅을 한낱 여인의 치마폭에 휘둘리는 시시한 남성으로 그렸으니 그럴 만도 하다. 거기엔 유럽 전역을 혼란과 공포로 몰아갔던 격변의 시기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영국적 시각이 담겨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 쪽에서 “영국인 감독의 반(反)프랑스 복수극”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밖에 없고 나폴레옹을 ‘위대한 영웅’과 ‘하찮은 괴물’ 사이의 존재로 보는 냉소적 시각도 어쩌면 온전한 평가를 위한 보완적 해석일 수 있다. 얼마 전 100세를 일기로 타계한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에 대해서도 ‘외교의 전설’ ‘세기의 경세가’란 칭송에 감춰진 어두운 이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사실 키신저 생전에 이미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엇갈렸다. 중소 갈등을 기회 삼아 중국의 문을 열고 소련과의 데탕트 시대를 이끈 ‘3각 외교’는 베트남전쟁의 늪에 빠져 있던 미국의 입지를 반전시킨 업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좌파로부턴 약소국 인권을 짓밟은 ‘냉혹한 전범’이라는, 우파로부턴 동유럽을 소련 영향권으로 넘겨준 ‘유화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키신저의 개인적 삶도 많은 키신저학(Kissingerology) 연구자와 전기 작가들의 해부 대상이었다. 나치 치하 독일을 떠나온 유대인 소년은 자기 능력을 한껏 발휘할 제2의 조국 미국에서도 억센 독일 악센트를 떨치지 못한 경계인이었다. 2차 대전 말 고향 땅에서 보여준 나치 색출 능력, 명석함과 집요함으로 이룬 학문적 명성, 끊임없이 권력을 좇은 끝에 얻은 최고위 외교관 자리까지 그는 내면의 불안을 지적 자존심과 인정 욕구로 채웠다.
키신저는 정의와 질서 가운데 늘 질서를 선택한 보수적 현실주의자였다. 학자로서 천착한 주제도 19세기 유럽의 세력균형 외교였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교묘한 외교 책략으로 40년 평화를 주도한 메테르니히와 철저한 현실정치(realpolitik) 외교로 독일을 통일한 비스마르크는 키신저 외교의 롤 모델이었다. 그런 탓에 그의 외교 협상엔 과도한 비밀주의, 진실의 절반만 얘기하는 속임수, 매력과 위선을 넘나드는 음모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카멜레온 같은 처신은 그의 생존 비결이었고, 아부는 만능의 언어였다. 그의 유려한 찬사에 누구든 귀를 열었다. 대통령 앞에선 ‘매파 중의 매파’였지만 리버럴 명사들과 만나선 ‘비둘기’가 되곤 했다. 사교계 모임에도 빠지지 않았고 미녀 스타와 함께 사진 찍히길 즐겼다. 반면 약자에겐 냉혹했다. 남베트남 대통령의 평화협정 거부를 두고 “무례는 약자의 갑옷”이라고 조롱했다. 부하 직원에게 서류를 내던지고 길길이 뛰며 소리 지르기 일쑤였다.
키신저는 퇴임 이후에도 자서전 집필과 정부 자문, 미디어 출연으로 명성을 유지했고, 기업인들을 상대로 지정학 컨설팅을 하며 상당한 재산도 모았다. 전 세계 권력과 부의 네트워크를 동원하는 영향력을 토대로 모든 이들이 그의 의견을 묻는 현자(賢者)로서의 후광을 누렸다. 하지만 그의 마키아벨리적 처세는 말년까지 변하지 않았다.
뉴욕타임스 부고 기사의 한 대목은 그런 키신저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 이후 안보동맹의 미래를 불안해하는 독일 측에 키신저는 트럼프의 사위이자 백악관 실세인 재러드 쿠슈너를 만나라고 조언한다. 물론 쿠슈너에겐 “동맹의 불안을 이용해야 한다. 계속 안절부절못하게 하라”고 미리 얘기해 둔 터였다.
-이철희 논설위원, 동아일보(2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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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와 한반도
6·25전쟁이 터졌을 때 헨리 키신저가 미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었다면 휴전선은 지금보다 150~200km 북상(北上)했을지 모른다. 키신저는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한 미국이 중국을 자극하지 말고 청천강과 함흥만을 연결하는 선(線)이나 남포~원산 주변의 북위 39도를 기점으로 휴전했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과 대한민국 국민은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을지 모르나 결과적으로 현명한 선택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1954년 하버드대 박사가 될 때부터 강대국 위주의 세력 균형에 관심을 가진 키신저에게 중견 국가나 약소국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2017년엔 미국과 중국이 ‘북한 정권 붕괴와 주한 미군 철수’를 맞바꾸는 ‘빅딜’을 해야 한다고 했다. 당사국인 한국의 입장은 무시한 채 패권 국가로 떠오른 중국을 인정, ‘거인’들끼리 동북아 안보를 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TIME지 표지에 20번 넘게 등장할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그에게 가장 굴욕적인 순간은 1973년 노벨 평화상 수상이다. 그가 베트남 평화협정의 공으로 레 둑 토 월맹 정치국원과 함께 노벨상을 받게 되자 노벨위원회 위원 2명이 항의의 의미로 사퇴했다. 뉴욕타임스는 그가 남미 군부 정권을 지지하고 캄보디아 비밀 폭격 작전 등에 책임이 있다며 “노벨 전쟁상을 받았다”고 조롱했다. 결국 키신저는 시상식에 참가하지 못했고, 1975년 베트남 적화 후 노벨상 반납 의사를 밝혔다.
▶30일 키신저가 100세로 사망했다. 그의 아들은 올 초 “꺼지지 않는 호기심으로 세상과 역동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그의 장수 비결로 꼽았다. 축구 팬인 그는 자신의 독일 고향 축구팀의 평생 후원자 겸 명예회원으로 지냈다. 여성에게도 호기심이 많아 국무 장관으로 재직 중에도 틈틈이 연예인들과 데이트를 즐겨 신문 가십난에 오르내렸다. 공직에서 물러난 후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며 재산을 약 5000만달러(약 646억원) 규모로 불렸다.
▶키신저의 호기심이 마지막으로 도달한 곳은 인공지능(AI)이었다. 그는 90세가 넘으면서 AI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 2021년 에릭 슈밋 전 구글 CEO 등과 ‘AI의 세계’를 출간했다. 지난 5월 100세 기념 인터뷰에서 “역사상 적군을 완파할 능력이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이제는 AI 때문에 그런 한계가 없어졌다”고 경고했다. 키신저가 최후까지 관심을 갖던 AI가 국제 문제에서 그에 버금가는 통찰력을 발휘할지 궁금해진다.
-이하원 논설위원, 조선일보(2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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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과 협박으로 사우디 압박… ‘페트로 달러’ 구축한 외교 달인
[홍익희의 新유대인 이야기]
현실주의 외교 펼친 키신저의 리더십
헨리 키신저가 지난달 20일 자신의 고향인 독일 바이에른주 퓌르트에서 ‘바이에른 막시밀리안 훈장’을 받아 들어 보이고 있다. 키신저는 올해 5월 27일 100번째 생일을 맞았다. /DPA 연합뉴스
헨리 키신저는 1923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유대인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유대인 아이들은 툭하면 길에서 두들겨 맞았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였다. 어린 키신저는 학교에서도 청소년 갱단의 폭력에 시달렸다. 반유대주의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의 가족은 키신저가 열다섯 살 때 피난길에 올라 1938년 8월 뉴욕으로 이민을 왔다. 대학살이 시작되기 석 달 전이었다. 그 뒤 키신저는 면도기 공장에서 일하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뉴욕 시립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다 1943년 미군에 입대했다. 이로써 미국 시민권을 취득했고 2차 대전에도 참전했다. 어린 시절 폭력을 피해 도망쳤던 고향 독일에 이번에는 점령군 자격으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키신저는 국가 간 힘의 충돌을 몸소 체험했다. 이는 훗날 그의 현실주의 외교의 토대가 된다.
전후 제대 군인 장학금으로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대학원 때 지도교수 도움으로 정부 컨설팅 일을 했다. 그 과정에서 1951년 한국에 와서 전쟁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이후 1954년 비엔나조약 분석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하버드에서 국제정치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정부 관련 일을 계속했다. 1957년 ‘핵무기와 외교’라는 저서에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대량 보복 전략’을 비판해 학자로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당시 소련 군부도 키신저의 저서를 높이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 성사시켜
키신저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미국의 국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든 서슴지 않았던 현실주의자인 키신저가 처해 있던 시대 상황을 보자. 키신저는 1969년 닉슨이 미국 대통령이 되자 국가안보보좌관으로 발탁됐다. 1971년 7월 키신저는 죽의 장막에 가려있던 베이징을 극비 방문해 이듬해 닉슨의 중국 방문을 성사시켰다. 미국은 중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소련을 견제하려고 했다. 또 1972년 제1차 미소 전략무기제한협정과 이듬해 병력 감축 협상으로 소련과 데탕트 정책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키신저는 핵전쟁 카드로 소련을 움직여 북베트남을 협상장으로 끌어내어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공로로 197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나 정작 평화가 찾아온 것은 사이공이 함락되어 남베트남이 항복한 1975년 4월 말이었다.
1973년 초 닉슨이 재선되자 국가안보보좌관 직책에 국무장관까지 겸임하게 됐다. 1973년 8월 김대중 납치 사건 때 키신저의 빠른 판단과 도움으로 김대중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현실 정치 신봉자인 키신저가 1969년부터 1977년까지 이룬 많은 외교 정책 중 가장 큰 업적은 추락하던 달러의 위상을 회복시킨 ‘페트로 달러 체제’ 구축이었다. 그 과정을 살펴보자.
1971년 8월 15일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이 특별 담화문을 발표하는 장면. 닉슨은 이때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 줄 수 없다”는 금 태환 정지 선언을 발표했다. 당시 이 발표로 국제 외환 시장은 혼란에 빠졌고 달러는 기축통화의 위상을 상실했다. /게티이미지코리아
1944년 7월 미국이 주도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영국 대표 케인스가 제안했던 세계화폐는 거부되었고 미국의 의도대로 달러 중심의 금환본위제도가 확립되었다. 35달러를 금 1온스와 교환해주는 금태환을 보장했다. 그즈음 미국은 전 세계 금의 80% 이상을 갖고 있었다. 1965년 암살당한 케네디 대통령을 승계한 존슨이 베트남 전쟁을 확대하면서 경제는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연준에 금 보유와 상관없이 달러를 더 발행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는 브레튼우즈 체제 참가국들을 속이는 행위였다. 연준은 대통령의 압력에 굴복해 화폐 발행량을 늘렸다. 그러자 금환본위제 아래에서 물가가 6%까지 치솟았다.
1960년대 미국의 금 보유는 전 세계 금의 절반 이하로 줄었음에도 오히려 1971년 들어 달러 통화량은 10%나 늘어났다. 이에 불안을 느낀 서독이 그해 5월 브레튼우즈 체제를 탈퇴했다. 그러자 다른 나라들도 동요하며 달러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스위스가 먼저 7월에 5000만달러를 금으로 바꾸어갔다. 이어 프랑스도 1억9100만달러를 금으로 태환해갔다. 8월에는 스위스가 브레튼우즈 체제를 떠났다. 1971년 8월 9일 영국마저 경제 대표가 재무부에 직접 찾아와 30억달러를 금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다. 미국 정부는 국가 부도 사태를 불러올지도 모르는 비상 국면에 직면한 것이다.
1971년 8월 13일 닉슨은 측근 참모 16명을 데리고 캠프데이비드 밀실 회의실로 들어갔다. 회의는 사흘간 이어졌다. 15일 정오 TV에 등장한 닉슨이 “더 이상 달러를 금으로 바꿔줄 수 없다”는 금태환 정지 선언을 발표했다. 이른바 ‘닉슨 쇼크’였다. 동시에 닉슨은 모든 수입품에 10%의 관세를 물리는 보호무역 조치와 90일간 임금과 물가를 동결하는 인플레이션 대책도 함께 발표했다. 닉슨은 ‘평화의 도전’이란 특별 담화문에서 “최근 몇 주 투기꾼들이 달러에 대한 전면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 따라서 저는 재무장관에게 통화 안정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달러의 금 교환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도록 지시했습니다”라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이후 일시적 중단이 영구적 중단이 되었다. 이로써 달러는 전적으로 미국의 신용에 기초한 ‘신용 화폐(Fiat Money)’가 되었다. 이렇게 미국이 하루아침에 금과 달러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써 그간 금 교환권이라고 믿어온 달러를 종잇조각으로 전락시켰다. 국제 외환시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무엇보다 달러가 기축통화의 위상을 상실했다.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일 쇼크가 덮쳤다.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간의 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따라 OPEC 회원국들은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나라들을 제재하기 위해 석유 무기화를 천명하며 원유 가격을 올렸다. 3개월 사이에 석유 가격이 배럴당 3.01달러에서 11.65달러로 387%나 급등했다. 또한 이스라엘이 점령지에서 철수할 때까지 이스라엘 지지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결정했다.
1973년 11월 8일 키신저는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살 국왕을 접견했다. 이 자리에서 달러의 명운을 좌우할 거래가 은밀히 진행됐다. 미국이 사우디 안보와 왕실의 안전을 보장하는 대신 OPEC은 원유를 오로지 달러로만 판매하는 협상이었다.
추락하던 달러의 위상 회복시켜
‘화폐의 몰락’을 쓴 제임스 리카즈에 따르면, 이 협상을 위해 키신저가 사전에 검토한 또 다른 옵션이 사우디아라비아 침공이었다. 명분은 사우디 내 미국 자본 보호였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람코는 애초 미국 자본에서 출발했다. 1933년 미국 ‘스탠더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가 사우디 정부에서 석유 채굴 허가를 받아 자회사를 설립했다. 이 자회사 ‘아라비안 아메리칸 오일 컴퍼니’의 약어가 아람코(ARAMCO)다.
헨리 키신저(왼쪽)가 1973년 12월 14일 사우디아리비아의 수도인 리야드에서 파이살 사우디 국왕과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있다. 키신저는 사우디와의 협상을 통해 1974년 6월 ‘군사 경제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이 사우디 안보와 왕실의 안위를 보장하는 대신 OPEC은 원유를 달러로만 거래하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 ‘페트로 달러 체제’는 추락하던 달러의 위상을 회복시켰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은 금수 조치 해제를 위해 사우디와 협상을 진행하는 동시에 군사 전략도 준비한 것이다. 키신저는 당근과 채찍을 동시에 보여주며 사우디 왕실을 압박해 1974년 6월 ‘군사 경제 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에는 사우디 산업과 군대 현대화 지원 등이 있지만 핵심 내용은 페트로 달러 체제 구축이었다. 이렇듯 페트로 달러 이면에는 당근과 협박으로 사우디가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든 키신저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의 외교 행적 곳곳에서 그랬다. 역사는 과연 키신저를 어떻게 평가할까?
[키신저의 힘은]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욕… 100세에도 활발한 행보
헨리 키신저는 100세 고령에도 활발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그는 지난 5월 18~21일 리스본에서 열린 빌더버그 회의에 참가했다. 이번 회의의 의제는 ‘AI, 은행 시스템, 중국, 에너지 전환, 러시아, 초국가적 위협, 우크라이나’ 등인데 그중 핵심은 ‘인공 지능’이었다고 한다. CNBC 보도에 따르면 올해 회의엔 총 23국에서 130명 인사가 참가했는데, 챗GPT의 아버지 샘 올트먼,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 데미스 허사비스 구글 딥마인드 CEO, 에릭 슈밋 전 구글 회장 등 인공 지능 관련 인사들도 참가했다. 키신저는 2021년 ‘인공 지능의 시대’라는 책을 에릭 슈밋 등과 함께 공저로 출간한 바 있다.
키신저는 이 회의 후 그의 100세 기념행사(5월 27일)를 위해 뉴욕, 런던을 거쳐 고향인 독일 퓌르트로 이동했다. 키신저는 지난해에도 ‘리더십’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지금은 또 다른 책을 집필 중이라고 한다. 나이에 구애받지 않는 왕성한 호기심과 탐구욕이다. 특히 그는 최근 언론 인터뷰를 통해 미국과 중국의 갈등에 대해 잇따라 강한 경고 메시지를 던지며, 파국을 막기 위해서는 공존할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홍익희 전 세종대 교수, 조선일보(23-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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