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나란히 걷는 법] [8·15에 “한일은 파트너”.. ] ....
[일본과 나란히 걷는 법]
[8·15에 “한일은 파트너” 尹 이례적 메시지, 일본호응 뒤따라야]
[한·일도 엘리제 조약 맺을 때가 됐다]
일본과 나란히 걷는 법
[특파원 리포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대에서 열린 '도쿄포럼 2023'에서 환영사를 하고 있다. /SK그룹
일본 공연의 성지(聖地)인 도쿄 돔구장에서 일본 록그룹인 X재팬의 리더 요시키(YOSHIKI·본명은 하야시 요시키)가 피아노를 쳤다. 4만명이 꽉 채운 돔구장에서 요시키가 연주하는 1980년대 명곡 ‘엔드리스 레인(Endless Rain)’의 피아노 선율이 흘렀고 한국 아이돌그룹 투모로우바이투게더의 태현이 “아임워킹인더레인(I’m walking in the rain), 유쿠아테모나쿠”라며 첫 소절을 불렀다. ‘와’ 하는 함성은 순간 도쿄돔을 채웠다. 지난달 28일 도쿄 돔구장에서 열린 ‘2023 마마어워드’에서 21살의 K팝 아이돌이 58세 중년의 J팝 전설인 X재팬 요시키와 일본 관객을 만난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지난달 30일 일본 도쿄대학교에서 열린 '도쿄포럼 2023'의 비즈니스 리더스 세션에서 발언하고 있다. 2023.12.1 /SK수펙스추구협의회
이틀 뒤에는 일본 지성(知性)을 대표하는 도쿄대 야스다강당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등장했다. 최 회장은 데루오 후지이 도쿄대 총장에 이어 무대에 올라, 영어로 “한국과 일본이 누렸던 ‘단일한 세계 경제권’ 시대는 거의 끝났다”며 “(경제 분단의 시대에) 미국과 중국·EU는 각각 25조달러, 18조달러, 16조달러의 경제권을 가졌는데, 일본과 한국은 혼자선 작은 시장”이라고 말했다. ‘2050년 세계에서 가장 늙은 나라가 되는 한일이 함께 7조달러의 경제권을 만들자’는 주장이었다. 옆 자리에 앉은 야스히로 사토 게이단렌 부회장은 물론이고 관객석의 20~30대의 도쿄대학생과 대학원생들이 경청했다.
한국의 고도 성장기를 이끈 60~70대 독자들에겐 낯선 광경일 터다. 1960년대 경제 부흥에 나선 한국은 줄곧 ‘극일(克日)’을 내걸고 일본의 앞선 경제·산업·문화를 배우는 입장이었다. ‘아시아의 4룡’이라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당시 세계 2위 경제대국 일본과 비교하긴 민망했던 게 현실이다. 한국 재벌은 일본 기술자들을 주말에 공장으로 모셔와 노하우를 귀동냥하고 저녁을 대접했다. 방송국 PD는 도쿄에 한 번씩 가선 여관에 틀어박혀 TV방송만 밤새 보고 와선 프로그램에 써먹었던 시절이다. 일본 노래를 베꼈다는 한국 인기곡의 표절 논란은 자주 사실이었다. ‘기술이든, 노래든, 심지어 실수까지도 모두 베낀다’는 일본의 비야냥을 들었다. 축구 한일전에서나마 일본과 대등한 한국을 느끼며 위안받던 때다.
극일(克日)이라 불리던 시대는 갔다. 우쭐댈 일만은 아니다. 일본 등만 보고 뛰면 만사 오케이던 시절도 끝났기 때문이다. 이젠 일본과 나란히 걷는 법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올해 7차례나 기시다 후미오 총리를 만난 것도 이웃나라 일본과 대등하게 사는 법을 찾는 과정일지 모른다. 도쿄대에서 만난 대학생은 “노쇠한 일본 경제를 걱정하는 한국 최 회장의 충고를 새겨듣겠다”고 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도쿄=성호철 특파원, 조선일보(23-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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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에 “한일은 파트너” 尹 이례적 메시지, 일본 호응 뒤따라야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열린 제78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은 단순히 빼앗긴 국권을 되찾는 것이 아니었다”며 공산 세력에 맞선 자유 민주주의 수호, 산업화·민주화로 이어지는 대한민국 현대사가 곧 독립운동의 연장선이라는 인식을 밝혔다. 그는 “공산 전체주의를 맹종하며 조작 선동으로 여론을 왜곡하고 사회를 교란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여전히 활개 치고 있다”며 “결코 이러한 세력들에게 속거나 굴복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특히 “한일 양국은 안보와 경제의 협력 파트너”라며 대일 관계를 비중 있게 언급했다. 윤 대통령은 북한의 남침 시 일본 내 유엔사 후방 기지 7곳이 ‘자동·즉각 개입’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일본이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에 맞서는 ‘안보 파트너’라고 했다. 반일·극일 메시지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일반적이었던 역대 대통령의 8·15 경축사와 달리 일본을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로 규정하며 한일 협력 관계를 강조했다.
윤 대통령은 전임 정부 시절 파탄 직전까지 갔던 한일 관계 복원을 위해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왔다. 한국 대통령으론 12년 만에 양자 정상회담을 위한 일본 방문에 나섰고, 기시다 총리의 서울 답방이 이어졌다. 최대 걸림돌이던 징용자 배상 문제도 ‘제3자 변제안’을 제시해 물꼬를 텄다. 문재인 정부가 파기 선언까지 한 한일 지소미아(군사정보보호협정)가 정상화되고, 정상 간 셔틀 외교가 재개될 만큼 양국 관계가 회복된 것은 윤 정부가 선제적으로 손을 벌린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윤 정부로선 국내 정치적 부담과 반발을 감수한 ‘통 큰’ 결단이었지만 일본 측 호응이 아직 미흡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 정부는 징용자 배상에 일본 기업들이 참여하는 일부터 여전히 막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관련해 윤 대통령이 제시한 ‘한국 전문가 참여’ 등의 선결 사항에 한 달 넘게 답을 주지 않는가 하면, 이번 주말 미국에서 열리는 한미일 정상회의 때 오염수 문제를 의제로 끌어올리려는 무리수까지 두고 있다. 지지율 만회를 위해 ‘일본인 납북자 송환’을 추진하는 기시다 총리가 한국을 건너뛰고 북한과 비밀 접촉에 나섰다는 말도 나온다.
일본의 태도는 실망스럽지만 예상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상대방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되풀이되면 어렵게 찾아온 관계 개선 기회를 망칠 수 있다. 파국에 빠졌던 양국 관계를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은 대단한 용기와 인내심을 요구한다. 한국은 서둘지 말고, 일본은 재 뿌리지 말아야 한다.
-조선일보(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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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도 엘리제 조약 맺을 때가 됐다
지난 7월 유럽의 리투아니아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의에는 한국·일본·호주·뉴질랜드 등 아태 4국 정상이 참가했다. 작년 마드리드 나토 정상회의에 이어 두 번째다. 필자가 처음 벨기에 브뤼셀의 나토 본부를 방문한 1994년에는 아직 냉전 시대의 혼란이 남아있던 시절로, 나토를 확대하는 게 맞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었다. 30년도 지나지 않은 지금, 나토 정상회의에 아태 4국 정상이 참석하는 데다 스웨덴이 나토에 가입했고 우크라이나의 가입도 논의되고 있으니, 격세지감을 느낀다.
나토의 변화만큼이나 한·일 간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졌다. 리투아니아 나토 정상회의에서 윤석열 한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했다. 올해만 네 번째다. 오는 18일에는 미국 대통령의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일 정상회담이 열리고 3국 정상회담을 정례화할 것이란 이야기도 나온다. 한·일 관계는 1990년대 ‘준(準)동맹(quasi alliance)’이라는 말이 나온 지 3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미래 방향성이 보이는 것 같다. 유럽에서 프랑스·독일이 하는 역할을 아시아에선 한·일이 맡자는 이야기다. 필자는 줄곧 아시아 협력·통합의 중심 축이 한·일 협력이라고 주장해왔다. 한·일 관계를 프·독에 비유할 때는 단순한 안전 보장 협력을 넘어선, 문화적·사회적 상호 이해의 기반 위에 민주주의의 동지 국가로서 지역 안정화의 핵심이 돼야 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깝고도 닮았지만, 역시 다른’ 애증의 한·일 관계는 프·독과 비슷하다. 이런 한·일에는 엘리제 조약(프랑스·독일 화해협력조약)과 같은 조약이 적합하지 않을까.
올해는 엘리제 조약 체결 60주년이다. 아데나워 서독 총리와 드골 프랑스 대통령이 1963년 1월 22일 파리의 엘리제궁에서 조약에 서명한 지 60주년인 올해 1월 22일, 독일과 프랑스 정치인들은 소르본 대학에 모여 성대한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프랑스·독일 간 우호 관계의 기반인 엘리제 조약은 그 내용이 매우 포괄적이다. 양국 정상은 아무리 적어도 매년 2회는 만나야 한다. 외교부 장관은 최소 3개월에 한 번 씩은 만나, 서로 협조해야 한다. 양국 국방부 장관들도 최소 3개월에 한 번씩 만나, 서로의 전략·전술을 맞춘다. 양국 군대의 인적 교류와 장비·예산 협조, 민간 방위 분야의 협력 등이 엘리제 조약에 기술돼 있다.
무엇보다 특징적인 대목은 외교·국방뿐만 아니라, 교육·청소년 정책 담당자들도 2개월마다 정기 모임을 갖는다는 점이다. 교육 분야에선 독일과 프랑스 국민이 상대국 언어를 습득하는 게 중요하다는 점이 조약에 강조돼있다. 독일 학생이 프랑스어를, 프랑스 학생이 독일어를 배우도록 양국 정부가 장려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류 드라마나 K팝이 세계적인 콘텐츠로 부상했고, 이전보다 부쩍 많은 전 세계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무척 닮았으면서 어떤 대목은 근본적으로 다른 언어인 일본어와 한국어를 양국 젊은이들이 서로 배우는 건, 상대국의 문화·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장기적으론 양국을 잇는 토대가 될 것이다.
엘리제 조약은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18년이 흐른 뒤에야 아데나워와 드골이라는 두 정치인이 일군 ‘전설’과도 같은 일이다. 당시 독일과 프랑스는 둘 다 안보 분야에서 미국의 신뢰성에 적잖은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과는 데탕트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고 영국과는 핵잠수함을 축으로 하는 특수한 ‘핵동맹’으로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미국의 약속(commitment)이 얼마나 지속할지 의구심을 품고 있었던 서독의 아데나워 총리는 당시 핵 개발에 나선 프랑스를 훨씬 신뢰할 만한 파트너라고 여겼다.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바로 옆 나라와의 관계를 보다 확고한 토대 위에 올려놓는 일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이다. 프·독이 느꼈던 당시의 필요성은 현재 한·일 관계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이와마 요코정책연구대학원대학 교수, 조선일보(23-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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