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 못 치는 IMF 총재는 왜 박세리를 극찬했나] ....
[골프 못 치는 IMF 총재는 왜 박세리를 극찬했나]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억대 연봉 ‘주 52시간 제외’…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할 때]
골프 못 치는 IMF 총재는 왜 박세리를 극찬했나
[김윤덕 칼럼]
저출산·저성장 탈출법으로 韓 여성골프 비결 제시한 불가리아 출신 게오르기에바
“남녀가 서로 조력자 되면 성별 격차 줄일 수 있고 국가·기업 성장도 극대화”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Kristalina Georgieva) 국제통화기금(IMF) 총재가 1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 별관에서 열린 세계 여성이사협회 포럼에 참석해 기조연설를 위해 단상에 오르고 있다. /뉴시스
서울에 온 국제통화기금(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가 박세리 얘기를 꺼냈을 때 조용한 탄성이 번졌다. 지난 14일 세계여성이사협회가 주최한 특별포럼에서다. 그는 “변화를 만드는 여성의 능력을 의심하는 이들은 박세리 선수가 1998년 US 여자 오픈에서 날린 ‘불가능한 샷(the impossible shot)’을 봐야 한다”고 했다. 풀숲에 떨어진 공을 포기하지 않고 물속에 들어가 승리의 샷을 쏘아올린 박세리는 수많은 소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이 자라 세계 스포츠사에 탁월한 전통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정작 자신은 골프를 못 친다고 해서 좌중의 폭소를 터뜨린 총재가 박세리에게 경의를 표한 건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파산 위기 대한민국에 다시 일어설 힘을 준 ‘IMF 영웅’이었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든 한 명의 여성이 후배들에게 얼마나 큰 영감과 자신감을 주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에바 자신이 유럽연합(EU)에서 가장 가난한 불가리아 출신이었다. 공산주의의 붕괴, 오염된 지하수로 병들어가는 가족을 보며 환경경제학자가 된 그는 EU 예산 집행위원, 세계은행 최고경영자를 거쳐 IMF 수장에 오른 ‘국민 영웅’이다.
그 역시 차별적 시선에 놓이기 일쑤였다. 총리나 정치인들을 찾아가면 통역을 위해 따라온 여성으로 오해받았다. 학술대회에 꽃무늬 재킷을 입고 갔다가 황급히 무채색 정장으로 갈아입은 일화도 들려줬다. “소수와 비주류 의견을 제시해야 할 내가 남성 지배적인 문화에 항복한 거나 다름없었다”며 후회했다. 정작 마흔이 되기 전에는 성별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몰랐다고 했다. 일을 잘하거나 못하거나의 문제이지, 성별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고 믿었다. 그러나 EU와 세계은행, IMF에서 일하면서 성별 다양성의 부재가 한 국가의 경제성장에 얼마나 큰 손실을 가져오는지 절감했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량 강화’를 강조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일하는 여성의 수는 남성보다 18% 적고, 임금은 30% 적게 받는 등 선진국 중 성별 격차가 가장 심한 한국이 OECD 평균 수준으로 격차를 줄일 경우 1인당 국내총생산이 18% 상승한다”고 진단했다. 저출산 늪에서 탈출하는 비법이 한국의 여성 골프에 있다고도 했다. 세계 100대 여성 골퍼 중 한국이 33명을 차지한 비결은 재능 있는 선수가 실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지원했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를테면 정부는 모든 아이가 양질의 보육과 교육을 받을 기반을 마련하고, 기업은 단축·유연근무제를 더 많은 근로자에게 확대하며, 남성의 육아휴직에 더욱 강력한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급여체계를 연공서열 아닌 성과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 “몇 년간 공을 쳤느냐보다 누가 더 잘 치느냐가 중요하므로!”
문제는 실행력이다. 전임 총재인 크리스틴 라가르드가 “한국은 집단자살(collective suicide) 사회”라고 개탄한 게 2017년이었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도 아이를 갖는 순간 일을 포기해야 하는 한국 사회엔 미래가 없다는 여대생들을 만난 뒤 라가르드는 문재인 정부를 향해 “사회안전망 없이 여성들을 경쟁시키면 출산을 포기한다. 결혼과 출산을 안 하면 성장률과 생산성이 떨어지고 재정은 악화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러나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2017년 1.05명이던 출생률은 0.6명대 진입이 코앞이다.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20대 여성은 10명 중 3명도 되지 않고, 결혼은 해도 아이는 낳지 않는다. 사교육비가 매년 최고치를 찍는 마당에 출산은 미친 짓이기 때문이다.
역설적이게도 국가 소멸에 대한 위기감이 가장 낮은 곳은 정치권이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총선이고, 표를 위해서라면 남녀 갈라치기도 불사한다. 미래를 논하겠다는 신당들조차 저출산 해법의 열쇠가 여성이 아이도 키우며 일할 수 있는 성평등한 사회 개혁에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페미’ 낙인이 두렵기 때문이다.
게오르기에바는 “남녀가 서로의 조력자가 될 때 국가도 기업도 최고의 성과를 올린다”고 했다. 실제로 그는 “남성들의 전폭적 지지 속에” IMF 부서장의 여성 비율을 25%에서 50%로 늘리고 최고위직 5명 중 3명을 여성으로 임명했다. 추경호 부총리, 임종룡 우리금융 회장 등 이날 포럼에 참석한 경제계 지도자들에겐 이렇게 당부했다. “남성 리더들이 성평등 의지를 표명하고 실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대한민국이 살아남으려면 이런 지도자가 필요하다.
-김윤덕 선임기자, 조선일보(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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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었어요
직장내 괴롭힘 금지법 4년 5개월… 증거·증언 수집은 피해자의 몫
신고 3만 건 중 인정은 12.8%뿐 “그래도 사회는 계속 바뀔 겁니다”
“제겐 크리스마스의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수화기 너머 그의 단정한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성탄절을 앞두고 제보 몇 건을 받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회사에서 오래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는 피해자들의 사연이었다. 국내 대기업에서 일하는 이도 있었고, 유명 글로벌 기업 직원도 있었다. 이들 사연을 취재하면서 종종 가슴이 갑갑했고, 또 먹먹했다. 피해자들이 자신이 피해자임을 입증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금 깨달아서였다.
한 대기업 팀장은 지난 2년 동안 매일 일기를 썼다. 직속 상사에게 매일 오전 6시부터 밤 11시까지 텔레그램으로 폭언 섞인 문자를 받으면서부터였다. ‘네 목 위에 있는 게 머리 맞냐’ ‘변기에 대고 얘기해도 너랑 얘기하는 것보단 시원하겠다’ 같은 내용의 메시지가 아침이고 밤이고 날아들었고, 그때마다 A씨는 ‘나는 정말 그토록 무능한가’ ‘살아 있는 게 의미 있나’라고 자문했다고 한다. 참고 견디다 고용노동부에 신고했지만 회사는 가해자를 징계하는 대신 피해자를 다른 부서로 옮기려 했고, 그는 사표를 썼다.
상황을 뒤집은 건 동료들이다. “부끄러운 선례를 남길 순 없다”고 동료들이 항의했고 결국 가해자가 부서를 옮기게 됐다. A씨는 “전 정말 운이 좋은 경우임을 안다”고 말했다. “증언해줄 동료 한 명이 없어 직장 내 괴롭힘을 인정 못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알거든요....” 그가 다시 울먹였다.
작년 12월부터 올해 7월까지 유명 글로벌 시계 S그룹에서 일했던 B씨는 반면 아직 힘겨운 싸움 중이다. 그는 이 회사에서 7개월가량 시계 테크니션으로 근무하며 고객이 본사에 시계 수리를 맡기면 이를 조사하고 견적을 내는 일을 맡아왔다. 입사 초기부터 그는 직속 상사인 부장에게 끊임없는 괴롭힘과 언어 폭력에 시달렸다. 부장은 고객이 무상 수리 보증 기간에 시계 수리를 신청하면 B씨에게 “이런 (돈이 안 되는) 것은 그냥 돌려보내라”고 했고, 고급 쿼츠 시계 수리가 들어오면 배터리만 교체해도 될 시계를 놓고 “전체 부품 교체 수리로 다 바꾸라”고 했다고도 했다. 이 경우엔 고객이 수리 비용을 받아들이면 내야 할 돈이 5만원에서 95만원으로 불어났다. B씨가 이를 거부하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호통쳤고, 나중엔 화장실 다녀오는 횟수까지 제한하며 괴롭혔다. B씨는 부장을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했지만 회사는 이를 받아 들여주지 않았다. 관할 노동지청에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노동청은 “사내 조사가 미흡한 것은 맞지만 어쩔 수 없다”고 했다. B씨는 “1차 조사에서 사측이 일을 키우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대충 덮으면 이를 뒤집을 방법은 별로 없다”고 했다.
2019년 7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시행된 지 4년 5개월. 그러나 여전히 객관적 증거나 증언을 찾는 건 피해자의 몫이다. 회사에 입사하는 순간부터 상사에게 괴롭힘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매일 사진을 찍고 녹음하고 다닐 직원이 대체 몇이나 될까. 실제로 지난 4년 동안 고용노동부에 접수된 신고 3만843건 중 괴롭힘으로 인정받은 경우는 12.8%, 검찰 송치·기소까지 이어진 경우는 0.7%에 불과하다.
그래도 A씨 사례를 보면서 희망을 품어본다. 한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은 말했다. “물론 직장 내 괴롭힘을 제대로 조사하긴 쉽지 않아요. 그렇지만 성범죄 피해도 예전엔 신고하는 것 자체가 금기였고 눈총 받을 일이었지만 이젠 아니잖아요. 사회는 계속 바뀔 겁니다.”
기도한다. 오늘 크리스마스 기적이 내일은 당연해지길. A의 기적이 언젠간 일상이 되길.
-송혜진 기자, 조선일보(23-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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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대 연봉 ‘주 52시간 제외’…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할 때
[천광암 칼럼]
고소득 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없는 美
애플-테슬라 신화 탄생시킨 노동문화
日도 노동개혁 위해 ‘脫시간급’ 개혁
한국판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 시급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첫 시정연설에서 우리 사회의 가장 시급한 개혁 과제로 연금, 노동, 교육을 꼽았다. “지금 추진되지 않으면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게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하지만 1년 7개월이 지나도록 3대 개혁의 진전은 없는 상태다. 제자리걸음 아니면 뒷걸음질이다. 연금개혁과 관련해서는 맹탕이나 다름 없는 ‘정부 개혁안’을 국회에 던져 놓았다. 교육개혁은 ‘만 5세 초등학교 입학안’을 준비 없이 내밀었다가 역풍을 맞은 뒤 오리무중이 됐다.
그래도 한 가닥 희미한 불씨라도 살아있는 것을 굳이 꼽자면 노동개혁 정도다. 지금까지 공전을 거듭해온 경제사회노동위원회의 노사정 대표자들이 17일 윤 정부 출범 후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작은’ 진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렵게 온 기회인 만큼 어떻게 해서든 살려 나가야 한다.
그러자면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올해 3월 추진하려다 무산된 ‘근로시간 개편안’의 틀에 매달리는 것은 헛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주 69시간 근무’라는 주홍 글씨가 한 번 새겨진 이상, 그것을 지워내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아예 판을 바꿔서 윤 대통령의 공약집에도 관련 내용이 있었고 인수위에서도 검토한 적이 있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white-collar exemption·고연봉 관리·전문직 근로시간 규제 적용 제외)’부터 테이블에 올려 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세계적으로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을 선도하는 미국은 한국과 달리 연장근로에 대한 제한이 전혀 없다. 법정 근로시간인 주 40시간을 넘어서는 연장근로에 대해 기본시급의 1.5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것이 전부다. 그뿐 아니라 총연봉이 10만7432달러를 넘는 고연봉 임원·관리직·전문직·전산직에 대해서는 연장근로 수당을 지급할 의무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다. ‘몰아서 일하기’가 가능한 이런 제도적 바탕 위에서 애플이 나올 수 있었고, 테슬라가 나올 수 있었다.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은 장시간 근로를 장려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가 아니다. 고연봉 관리·전문직의 경우 근로시간이 아니라 일의 성과가 중요하다는 취지에서다. 일본이 2019년 일명 ‘고도(高度) 프로페셔널 제도’라는 이름의 일본식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를 도입한 것도 2차산업 중심의 시간급제를 탈피해 노동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다.
일본의 경우, 노사 합의를 전제로 고도의 전문지식을 갖추고 연수(年收) 1075만 엔이 넘는 노동자에 대해서는 노동시간과 관련된 규제를 하나도 적용하지 않는다. 금융상품개발자, 컨설턴트, 연구개발자, 공인회계사, 변호사 등이 대상이다. 출퇴근이나 휴가에 대해서는 노동자가 자유롭게 의사결정권을 행사한다. 건강을 해치지 않도록 연간 104일의 휴일도 보장받는다.
한국에서도 윤 정부 이전부터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제도 도입 논의가 있었다. 문재인 정부 시절이던 2019년 10월 당시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김병관 의원은 ‘근로소득 상위 3% 이내’ 고소득 근로자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적용을 제외하는 법안을 대표 발의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근로소득 상위 3%’면 2021년 기준으로 연봉 1억2200만 원 수준이다. 첨단 분야 연구개발이나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서 억대 고액 연봉을 받는 핵심 인재라면 회사에 대해서도 충분한 협상력이 있다. 이들의 근로시간까지 국가가 나서서 미주알고주알 간섭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올해 한국의 대중 무역수지는 31년 만의 첫 적자가 예상되고 있다. 중국 경제가 한국을 추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현상이다. 이대로 가면 잠재성장률이 0%대, 심지어 마이너스로 추락할 것이라는 경고도 안팎에서 나온다. 한국 경제가 이처럼 급속히 가라앉는 배경에는 2019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중 34위로 꼽히는 낮은 노동 유연성이 중요한 요인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물론 장시간 근로에 따른 부작용을 개선하려면 주 52시간 근로제의 큰 틀은 필요하다. 하지만 주요 경쟁국들에 비해 지나치게 경직적이라는 문제점을 시급히 개선하지 않으면, 반도체 바이오 배터리 미래자동차 인공지능(AI) 금융 등 핵심 분야의 경쟁에서 낙오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한국의 미래 먹거리를 책임진 핵심 인재들만이라도 획일적인 52시간 규제의 족쇄에서 풀어줄 필요가 있다.
-천광암 논설주간, 동아일보(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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