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여 만에 일단락되는 국정농단 수사·재판… 뭘 남겼나] ....
[7년여 만에 일단락되는 국정농단 수사·재판… 뭘 남겼나]
['정윤회 사건 재조사'가 그렇게 화급한 사안인가]
[아, 박근혜 시대.. ]
['세월호 7시간']
[최순실 청문회]
[産經 記者, 가토]
7년여 만에 일단락되는 국정농단 수사·재판… 뭘 남겼나
박근혜 정부 시절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으로 재판에 넘겨진 김기춘(왼쪽) 전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4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과 1년 2개월을 각각 선고받은 후 법정을 나서고 있다. 뉴시스
박근혜 정부 때의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24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의 파기환송심에서 각각 징역 2년, 징역 1년 2개월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이 재상고하지 않는 한 이른바 ‘국정 농단 사건’의 사법 절차는 7년여 만에 마무리된다.
국정 농단 사건은 2014년 ‘정윤회 국정 개입’ 의혹과 2016년 ‘최순실의 미르·K스포츠 재단 출연금 모집’ 의혹으로 시작됐다. 정 씨는 헛짚은 것이었으나 뜻밖에 그의 부인이었던 최 씨가 등장했다. 미르·K스포츠 출연금은 대부분 뇌물로 인정되지 않았다. 롯데의 추가 출연금만 면세점 사업과 관련해 뇌물로 인정됐다. 삼성은 출연금이 아니라 최 씨 딸 정유라 씨에 대한 승마지원금 등이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뇌물로 인정됐다. 묵시적 청탁이라는 법리가 동원됐다. 안종범 전 경제수석과 문형표 전 복지부 장관은 최종 지시자가 따로 있음에도 직권남용죄로 유죄가 됐다.
국정 농단 사건은 문재인 정부에서 ‘적폐 청산’으로 이어지면서 수많은 곁가지로 뻗어나갔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은 최 씨와의 관련성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지만 국가정보원을 동원한 불법 사찰 혐의가 인정됐다.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은 특별활동비에서 청와대 등에 지원한 돈 때문에 국고손실죄로 처벌받았다. 김 전 비서실장과 조 전 장관은 ‘문화계 블랙리스트’로 사실상 유죄가 확정됐다. ‘세월호 보고 조작’ ‘기무사 계엄 문건’ 사건은 요란스러웠으나 무죄로 끝났다.
숫자로만 보면 58명이 기소돼 48명이 유죄 선고를 받았다. 내용적으로 보면 검찰이 비중을 둬 기소한 많은 혐의가 무죄로 드러났다. 특히 직권남용죄의 남용이 빚어졌다. 국정 농단 수사를 주도한 박영수 특별검사는 대장동 사건의 주범 김만배와의 돈거래로 기소돼 재판을 받고 있다.
국정 농단 사건과 뗄 수 없는 이른바 ‘사법 농단 사건’과 관련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에 대한 1심 선고는 오늘 내려진다. 삼성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묵시적 청탁 근거로 제시된 ‘기업 현안’인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관련 1심 선고는 다음 달 나온다. 혁명에 버금가는 사건들이 잇따랐다. 법정의 평가 이후에는 역사의 평가가 남아 있다. 이들 사건이 국가와 사회에 어떤 기여를 했는지 혹은 어떤 폐단을 낳았는지 찬찬히 들여다보고 교훈을 얻을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2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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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회 사건 재조사'가 그렇게 화급한 사안인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12일 언론 인터뷰에서 "정윤회 문건 사건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 조사와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민정수석실을 조사하겠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전날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을 검찰에서 제대로 (다시) 수사할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고 언급한 데 이어 나온 발언이다.
검찰이 정윤회 문건 사건 수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 이때 파헤쳤더라면 최순실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다. 왜 이렇게 됐는지도 다 밝혀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작고한 김영한 당시 민정수석의 업무일지엔 '장(비서실장) 령(대통령) 뜻 총장 전달-속전속결, 투 트랙'이라고 적혀 있었다. 빨리 덮으라고 대통령이 검찰에 지시한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당시 민정비서관이었다.
줄거리를 국민이 다 알고 있다고 해도 또 파헤쳐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대통령이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돼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문 대통령은 제1공약으로 '박근혜 적폐(積弊)청산'을 내세웠다.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새 정부가 제대로 출범하는 데 집중해도 시간이 모자랄 상황이다. 민정수석실은 아직 사무실 정리도 끝나지 않았다는데 이렇게 대통령, 수석이 나서야 할 정도로 정윤회 문건 사건 재조사가 화급한가.
어차피 강제 수사권이 없는 민정수석실 자체 조사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결국 검찰이 재수사를 해야 하는데 잘못하면 대통령이 또 검찰에 정치보복 수사를 지시하는 것이 된다. 새 검찰총장에게 일임하는 것이 정도(正道)일 수 있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당하고 감옥에까지 가 있다. 더 이상의 형벌이 없을 것이다. 그것도 모자란다고 청와대가 권력을 잡자마자 다른 일 제쳐놓고 이미 다 알려진 사건을 또 조사해 지난 정권을 손보겠다고 한다면 그것이 지금 이 시점에서 정말 국민이 바라는 일일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일보(17-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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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박근혜 시대..
이제 우리는 박근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
舊시대의 잔해 위에 무엇을 세울지는 남은 우리 몫이다
후대의 역사 책에서 박근혜 정부 4년이 실패로 기록되는 것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스캔들에 휘말린 박 전 대통령 개인만의 실패가 아니다. 나라 전체로도 4년 세월은 어두운 그늘이 많았다. 경제가 침체되고 민생은 악화됐으며 사회 모순이 심화됐다. 공(功)도 있었지만 과(過)를 누르긴 힘들다. 이렇다 할 국가 발전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우왕좌왕 세월을 보냈다.
박근혜 정부의 실패는 아베 정부의 성공과 대비돼 더욱 어둡게 느껴진다. 비슷한 시기 권좌에 오른 두 사람은 여러모로 비교 대상이었다. 출범 초기 여건은 아베 쪽이 불리했다. 4년 전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의 늪에 빠져 있었다. 성장 동력은 쪼그라들고 디플레이션의 탈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설상가상 후쿠시마 원전 사고까지 터진 직후였다.
상대적으로 우리 쪽은 양호했다. 박 대통령 취임 무렵 한국은 금융 위기를 조기 극복한 모델로 꼽혔다. 저성장 기미가 보였으나 일본보다는 경제 활력이 살아 있었다. 삼성전자·현대차의 글로벌 약진이 계속됐고, 한류(韓流)가 유행했다. 박근혜 정부는 시대정신을 등에 업고 탄생한 듯 보였다. 경제를 살리고 양극화를 해소하며 국가 정체성을 바로 세우라는 시대정신 말이다.
4년 뒤 두 사람은 정반대 운명을 맞았다. 아베는 바닥을 헤매던 경제를 악순환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부인 연루 스캔들이 터졌으나 집권 4년의 성과는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역대 총리 중 네 번째 장수(長壽) 기록까지 세웠다. 반면 박 전 대통령은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파면당했다. 4년 사이 두 사람의 운명이 천당과 지옥으로 갈렸다. 두 나라의 국가 운명도 비슷한 길을 걸었다.
이 모든 것이 대통령 탓이라 한다. 어느 정도 사실이다. 국정 파행의 상당 부분은 박 전 대통령의 무능·불통 리더십에서 비롯됐다. 비선에 놀아나고, '수첩 인사'로 국정을 망쳤으며, 일방통행 스타일로 불신을 샀다. 소통 대신 청와대 깊숙이 틀어박혀 고립을 자초했다. 대통령의 언행 중 이해되지 않던 것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최순실 스캔들이 터지고야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대통령도 거대한 시대 구조의 한 부분일 뿐이다. 모든 원인을 개인 잘못으로 돌리는 것은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지난 4년의 국가 실패엔 수많은 공범과 조연들이 있었다. 대통령 보좌에 태만한 청와대 참모들이 제1 공범이다. 친박 핵심들도 있다. 권력에 기대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도 어느 하나 직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대통령과 측근의 관계는 왕조(王朝) 시대 같았다. 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한 친박은 "궁궐서 쫓겨난 여인에게 사약을 내렸다"고 했다. 대통령 주변의 의식 구조가 이런 수준이었다. 내시(內侍)같은 측근들이 대통령을 더욱 망쳐놓았다.
검찰과 사정 기관은 '짖지 않는 개'였다, '정윤회 문건'이 나돌고 최순실 일당이 암약해도 마냥 눈감고 있었다. 관료 집단은 여전히 영혼이 없었다. 부당한 지시가 내려와도 군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명문대 교수들은 학사 부정을 도왔고, 공기업 회장은 인사 압력에 굴복했다. 스캔들과 관련된 그 수많은 사람 어느 누구도 경보 벨을 울리지 않았다. 국정 농단을 감시하고 견제할 어떤 시스템도 가동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 교체가 필요하다고 야당은 주장한다. 그러나 야당 역시 국가 실패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경제 활성화 개혁 법안들을 그렇게도 발목 잡은 것이 야당이다. 정책에 '박근혜표(票)' 딱지만 붙으면 훼방부터 놓았다. 국회 밖에선 반대 진영이 끊임없이 정권을 흔들었다. 세월호 사태 이후 박근혜 정부는 온갖 음모론에 시달렸다. 국정 리더십을 발휘하려야 하기도 쉽지 않았다.
왜 박근혜 정부는 아베처럼 못 했느냐고 한다. 일리 있는 얘기다. 그러나 아베에겐 리더십을 발목 잡는 허들이 적었다. 거짓 음모론으로 공격하는 세력도, 정책을 훼방 놓는 국회도 없었다. 야당은 아베의 각종 개혁 법안을 군말 없이 동의해주었다. 구조조정한다고 파업하는 노조도 없었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진영도 아베의 국정 운영을 발목 잡지는 않았다.
리더십은 물론 팔로어십(리더를 따르는 협조정신) 측면에서 우리는 일본에 뒤졌다. 아베도 잘했지만 그를 뒷받침한 시스템과 정치 문화가 더 훌륭했다. 한국과 일본의 4년을 가른 것은 나라의 실력 차이였다. 이 총체적인 국가 실패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면 우리는 발전하지 못한다.
결국 여기까지 왔다. 전직 대통령이 인신 구속의 심판정에 오르는 상황만은 어떻게든 피했으면 했다. 두 번 다시 되풀이돼선 안 될 국가적 비극이다. 이렇게 우리는 한 시대를 떠나보내고 있다. 무너진 구시대의 잔해(殘骸) 위에 무엇을 세워 올릴지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박정훈 논설위원, 조선일보(17-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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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7시간'
가토는 두 달 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을 마치고 본사 사회부 편집위원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때 별일 없이 일본으로 돌아갔다면 지금 사회부 고참 기자로서 평범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그가 유명 인사가 된 것은 '세월호 7시간' 때문이었다. 무죄를 받고 귀국한 그는 아베 총리의 위로를 받았고 '왜 나는 한국에 이겼는가'란 거창한 제목의 책을 내 상까지 받았다. 전국을 돌며 특별 강연도 하고 있다.
▶술자리 잡담이던 '세월호 7시간' 소문이 국제 뉴스가 된 것은 정부가 3류 가십성 기사를 문제 삼아 그를 법정에 세운 뒤였다. 평범한 외국 기자가 '언론 자유 투사'가 됐고 시시한 소문이 '대통령 탄핵 사유'로 커졌다. 가토 재판에서 그가 쓴 의혹은 거짓으로 밝혀졌지만 곧바로 '청와대 굿판'과 '성형 시술' 소문이 자리를 대신했다.
▶'성형 시술' 소문은 정말로 끈질겼다. 최순실 사태가 터지자 한 지상파 방송은 성형 시술에 초점을 맞추고 제보자를 찾는다는 공고까지 냈다. 어느 야당 대표는 "주사가 더 좋고 정신이 몽롱해 국정을 못 한다면 내려오라"고 했다. 침몰하는 세월호와 주사기 다발을 든 최순실을 배경으로 한 대통령 누드 그림이 국회에 걸리기도 했다. '약에 취한 대통령 때문에 아이들이 죽었다'는 식으로 몰아갔다.
▶이런 의혹에 그제 특검이 답했다. 주치의, 자문의를 비롯해 '주사 아줌마' '기치료 아줌마' 등 시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의 사고 당일 행적을 샅샅이 조사했다. 모두 '세월호 7시간'과 무관했다. 대책본부에 가기 전 대통령 올림머리를 90분 동안 손질했다는 보도도 사실이 아니었다. 미용사를 조사한 특검은 '4월 16일 대통령의 머리 손질은 비교적 빨리 마무리됐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이미 나라 체면은 땅에 떨어졌다. 다들 상처를 입었다. 책임지는 사람도 없다. 일본 기자 한 명만 '영웅'이 됐을 뿐이다.
▶대통령은 누명을 벗었다. 하지만 '최선을 다했느냐'는 물음은 남아 있다. 대통령이 잘못해 아이들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정치 공격이다. 그러나 사고 직후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고 사고 보고서를 든 육군 중령은 자전거를 타고 청와대 집무실과 관저를 이리저리 뛰어야 했다. 대통령은 사태의 심각성이 드러난 뒤 3시간 만에 대책본부를 찾았다. 비서실장조차 대통령을 일주일에 한 번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온갖 풍설들이 헛소문으로 밝혀졌지만 국민의 아쉬움이 말끔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선우정 편집국장, 조선일보(17-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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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청문회
최순실씨가 26일 처음으로 국회의원들 앞에서 입을 열었다. 최씨가 여러 차례 청문회 출석에 불응하자 국회 국정조사 특위는 이날 서울구치소 수감동으로 직접 찾아가 2시간 30분 동안 비공개 청문회를 가졌다. 예상대로 그는 자신과 관련된 혐의에 대해선 대부분 부인했다. 이미 사실로 확인된 부분조차 "모른다" "아니다"고만 했다.
최씨는 딸 정유라의 이화여대 부정 입학에 대해선 "우리 딸은 이대에 정당하게 들어갔다"고 했다. 교육부 감사 결과 이대 측이 정씨보다 성적이 좋은 두 명을 떨어뜨리려고 이들의 수험번호를 면접위원들에게 알려주고 점수를 낮게 준 입시 부정이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는데도 통째로 부인했다. 1992년 독일에서 전남편인 정윤회씨와 공동으로 세운 회사에 대해서도 "처음 듣는다"고 했다. 김기춘 전 비서실장, 우병우 전 민정수석과 그의 장모인 김장자씨, 안종범 전 정책조정수석 등 핵심 인물들은 모두 모른다고 했다. 김장자씨와 함께 골프를 했다는 증언이 여럿 있는데도 모른다고 한 것이다.
최씨는 미르·K스포츠재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 두 재단 명칭과 사무실 위치까지 지정했다. 그런데도 대기업 출연금 강제 모금 과정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공모 관계가 없었다고 부인했다. 광고감독 차은택씨가 청문회에 나와 "최씨 요청을 받고 김종덕 전 문화체육부 장관과 김상률 교육문화수석을 추천했다"고 증언했는데도 그는 이 역시 부인했다.
이날 최씨의 모습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자신과 제 가족밖에 모르는 사람'이란 것이다. 박 대통령이 자신 때문에 탄핵소추된 상황이다. 그런데도 '지금 딸과 박 대통령 중 누가 더 상실감이 크고 어렵겠느냐'는 물음에 최씨는 울면서 "딸이죠"라고 답했다. 아무리 모녀 관계라 해도 상식을 벗어난다. 최씨는 '당신이 죽어서라도 박 대통령 탄핵이 기각됐으면 하는 바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끝내 답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에게 서운한 것이 있느냐' '대통령을 가족처럼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도 입을 다물었다. 그는 "대통령에 대해 얘기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복잡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르·K재단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했다. 대통령에게 떠민 것이다.
의원들은 최씨가 말로는 "죄송하다" "종신형을 받을 각오가 돼 있다"고 했지만 아직도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고 느꼈다 한다. 책임감과 죄의식, 법의식 자체가 부족한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최씨는 다 부인하다가 마지막에 "나라가 바로 섰으면 좋겠다"고 했다는데 황당하다고밖엔 할 말이 없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이날 다른 장소에서 열린 비공개 청문회에서 "박 대통령은 최씨를 신뢰했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이처럼 공인 의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람,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사람, 지식도 지성도 없는 자격 미달자를 평생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다. 최씨 청문회에 참석한 의원들은 하나같이 "어떻게 이런 사람에게 나라가 휘둘렸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국민들 심정이 다 그럴 것이다.
-조선일보(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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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經 記者, 가토
기자가 특종 보도로 이름을 떨친 경우는 많지만 허위 보도로 유명해지는 건 별로 본 적이 없다. 그런 사례로 꼽을 만한 게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이다. 작년 8월 '박근혜 대통령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누구와 만났을까'라는 기사와 검찰 수사로 그는 일본에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세월호 참사 날 박 대통령 행적을 교묘하게 스캔들로 연결한 기사였다.
▶그날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머물렀고 가토가 스캔들 당사자로 지목한 정윤회씨도 다른 사람을 만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그런데도 일본 정계와 우익 언론은 그를 자유 언론의 투사(鬪士)로 대접했다. 반한(反韓) 감정을 부추기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아베 총리는 그를 관저로 불러 다독이기까지 했다.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기소돼 8개월 출국 정지됐다가 일본으로 귀국한 직후였다. 산케이는 그의 귀국을 보도하는 데 1면의 3분의 2를 썼다.
▶산케이는 가토 기사가 사실무근으로 드러났는데도 정정 보도는커녕 사과 한마디 하지 않았다. 인터넷 기사도 내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되레 지면을 통해 '한국은 언론 탄압국'이라는 주장만 되풀이했다. 아사히신문이 32년 전 위안부 관련 기사를 뒷받침할 증거가 없다며 취소하자 "오보(誤報)에 대한 진정한 사과가 없다"고 비판했던 산케이다. 그러면서 자기네 오보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자에게 오보는 치명적인데도 부끄러움조차 없다.
▶시민단체 고발이 있었다곤 해도 검찰이 이 문제를 기소까지 끌고 가면서 빌미를 준 측면도 있다. 검찰은 고발이 들어오면 수사해야 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명예훼손이 아니었다. 언론 자유 논란이나 외교 문제로 비화할 소지가 다분했다. 예상대로 허위 보도 자체보다 가토 처벌 여부와 한·일 갈등만 화제가 됐다. 급기야 어제 1심 법원까지 "기사는 부적절한 점이 있지만 언론 자유 보호 영역에 포함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얻은 건 없고 손해만 막심한 '바보 기소'였다.
▶이제 가토와 산케이는 무죄판결에 기대 '언론 자유 투사' 장사판을 벌일 것이다. 그러나 법원이 무죄판결을 내린 건 보도가 사실이어서가 아니다. "비방 의도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결일 뿐이다. 재판부는 이미 재판 중간에 허위 보도라는 점을 밝혔고 가토 스스로도 "이의를 제기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이 사례는 저질 보도에 대해선 법의 잣대를 들이대기보다 공론장(公論場)에서 실체가 드러나게 하는 게 상책이라는 교훈을 남긴다. 아니면 아예 무시하거나. 그랬다면 가토는 절대로 언론 자유 운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원규 논설위원, 조선일보(15-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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