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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政 애국자들과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美와 비밀회담 뒤.. ]

뚝섬 2024. 9. 11. 09:33

[臨政 애국자들과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美와 비밀회담 뒤 북침” 北은 이승만을 이렇게 악마화했다]

 

 

 

臨政 애국자들과 공산주의는 왜 실패했는가

 

[朝鮮칼럼]

구한말 유학은 서양·일본을 순결한 조선 더럽히는 짐승과 도적으로 봐
신탁통치 논란 때 임정도 비슷… 미군정을 침략으로 보고 반대
하지만 그 결과는 공산 세력 득세, 신냉전 몰아치는 지금은 난세
역사에서 얻은 지혜를 자각해야

 

1945년 12월 30일 새벽, 서울 원서동에서 총성이 울렸다. 한국민주당 당수 고하 송진우가 암살되었다. 3·1운동의 주역으로, 일제와 줄기차게 싸운 민족 지도자였다. 그런 애국자가 왜 해방 후 첫 암살 대상이 되었을까? 정치 노선이 문제였다. 해방 후 송진우는 세 가지 정치적 입장을 천명했다. 자유민주주의, 임정 봉대, 미군정 인정이다. 새로운 국가를 세울 원칙이었다.

 

해방 후 가장 중요한 과제는 체제 선택이었다. 1946년 8월, 서울 시민 1만명을 대상으로 한 미군정청 여론조사를 보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지지율이 총 77%에 달했다. 다수 지식층도 공산주의를 인류의 희망으로 여겼다. 하지만 송진우는 자유민주주의를 지지했다. 1인이나 한 계급의 독재가 되면, 국민의 “생명, 재산과 자유가 보장될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누가 건국의 주체가 될 것인가’ 역시 핵심적 과제였다. 송진우는 인공에 맞서 임정을 지지했다. 하지만 신탁통치를 놓고, 임정과 정면충돌했다. 1945년 12월 말, 신탁통치안이 알려지자 분노의 물결이 한반도를 휩쓸었다. 12월 29일, 좌우를 망라한 정당‧사회단체 대표들이 김구의 숙소 경교장에 모였다. 신탁통치 문제로 밤새 격론이 벌어졌다. 김구는 눈물을 흘리며, “우리 민족은 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신탁통치만은 받을 수 없다”며 격정을 토로했다. 강원룡 목사에 따르면, “모두들 소리소리 지르고 난장판이 벌어지는데, 그저 흥분해가지고 서로 욕설을 하고 이렇게 야단”을 쳤다.

 

그런데 송진우가 일어나 침착하게 “민족의 대계가 아니냐. 그런데 우선 여기서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의문 원문을 읽은 분이 있느냐. 민족의 영도자들이 그 원문 내용을 모르고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그 역시 반탁주의자였지만, 만약 5년 내 통일 정부가 가능하다면 신탁통치에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역설했다. 미군정에서도 “탁치는 침략이 아니라 독립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원조와 후견을 의미하는 것이니, 한민족은 냉정하기 바란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신탁통치와 미군정을 침략으로 본 임정은 미군정에 불복하라는 포고문을 발했다. 송진우는 미군이 최소 2년은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떠나면 조직화된 공산 세력이 권력을 쥘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송진우가 옳았다. 미군이 떠난 뒤 6.25전쟁이 일어났다. 지난해 말, 일론 머스크는 한반도의 야간 위성사진을 엑스에 올렸다. 사진의 제목 ‘낮과 밤의 차이’처럼, 남쪽은 휘황찬란하게 빛나지만, 북쪽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다. 그 놀라운 차이는 1948년 체제 선택의 결과였다. 대런 모글루의 저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남북한을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런데 왜 임정의 애국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실패했는가? 역사의 현실을 오독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이후, 한국인이 직면한 최대의 사상적 문제는 ‘세계(world)의 이해’였다. 한말의 저명한 의병장 면암 최익현은 서양이 “중화를 오랑캐로, 인류를 금수로 만들었다”고 개탄했다. 수운 최제우는 ‘요망한 서양 도둑(西洋賊)’이라고 보았다. 유학과 동학이 본 당시의 ‘세계’는 서양과 일본이 순결한 조선을 더럽히는 짐승과 도적이라는 것이었다. 1876년 신사유람단을 따라 처음 일본을 방문한 유길준은 비로소 세계가 “일찍이 나 혼자 추측하던 바와 같지 않음을 깨달았다.” 그의 저서 <서유견문>은 ‘세계’의 발견에 대한 한국인의 첫 종합 보고서이자, 미래 한국이 나갈 지도였다.

 

의병장 기삼연의 제자인 송진우도 본래 유학자였다. 하지만 일본 유학을 통해 민주주의와 과학을 수용했다. 1925년 발표한 ‘세계의 대세와 조선의 장래’에서, 그는 “조선이 세계 구성의 일부”이므로, 세계와 조선 관계를 “냉정하고 엄숙하게 관찰”해 한민족의 운명을 개척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긴차절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1876년 개국 이래 이런 ‘세계’ 이해에 도달하기까지 50년이 걸렸다. 해방 후 송진우의 역사적 선택은 그 산물이었다.

 

더불어민주당의 시대착오적 반일 몰이는 계보가 있다. ‘세계의 이해’가 결핍된 유아론적 민족주의가 그 뿌리다. 이상으로서의 민족, 현실로서의 세계가 공존할 길을 찾는 것은 지난 150년간 한국민에게 지난한 정치적‧정신적 화두였다. 그 간극을 깊이 이해했던 송진우는 신중하게 역사의 행로를 판단하고, 진중하게 실천에 옮겼다. 신냉전의 파고가 몰아치는 지금은 난세다. 역사의 가시밭길을 헤치며 깊이를 더해 온 ‘세계의 이해’, 그것이 미래를 밝히는 등불이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조선일보(24-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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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와 비밀회담 뒤 북침” 北은 이승만을 이렇게 악마화했다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서 상영 중인 영화 ‘건국전쟁’의 한 장면. photo 임화승 영상미디어 기자

 

4월 총선을 앞두고 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우남(雩南) 이승만(1875~1965)의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건국전쟁’의 돌풍이 거세다. 영화진흥위원회 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2월 22일 기준 ‘건국전쟁’의 누적관람객은 총 82만명. 관람객이 몰리는 주말을 기점으로 누적관람객 100만명 고지를 돌파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5만명이 손익분기점이라는 다큐멘터리영화로는 이례적 흥행돌풍이다. 그간 ‘영화정치’에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던 여당인 국민의힘을 비롯한 우파 진영에서는 ‘건국전쟁’ 관람 인증릴레이도 이어진다. ‘건국전쟁’을 제작한 김덕영 감독은 “건국전쟁 100만명 관객돌파가 현실이 되고 있다”며 “성원에 힘입어서 ‘건국전쟁 2’ 제작에 곧바로 돌입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영화 ‘건국전쟁’과 관련해 “이승만의 공(功)만 언급하고 과(過)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안 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하지만 영화의 초점은 그간 북한을 비롯한 국내 좌파 진영에서 건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을 어떻게 악마화했느냐에 모아진다. 실제로 북한은 ‘조선대백과사전’과 같은 공식 백과사전을 통해 6·25전쟁 때 김일성의 한반도 적화통일 야욕을 분쇄시킨 이승만을 부단히 악마화해왔다.

 

반면 이승만의 정적(政敵)이지만 김일성과 어느 정도 인연을 맺었던 김구를 비롯해, 김규식·여운형·조봉암 등에게는 각각 ‘민족주의자·민주인사(김구)’ ‘애국지사(김규식)’ ‘정치활동가(여운형)’ ‘남조선혁명가(조봉암)’와 같이 비교적 관대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이승만을 악마화하는 북한의 역사서술 태도는 남한 내 좌파 진영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이 제대로 된 대접을 못 받는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됐다는 평가다.

 

1945년 12월 서울 동대문의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정부 개선 전국환영대회에 함께 참석한 이승만과 김구(오른쪽). photo 뉴시스

 

‘6·25전쟁은 이승만의 북침’

 

단적으로 조선대백과사전은 이승만을 기술한 대목에서 ‘친미(親美) 매국역적, 초대 남조선 괴뢰대통령’으로 지칭하고 있다. 이어 “1919년 3·1운동 후 미국에서 조직되었던 ‘한성임시정부’와 상해(상하이)에서 선포된 ‘임시정부’에서 집정관 총재와 국무총리로 되었다가 ‘임정’의 배척을 받고 사임하였으며 오랫동안 미국에서 살면서 친미반공분자로 전락되었다” “1945년 10월 미 군정의 앞잡이로 서울에 들어왔으며 ‘독립촉성중앙협의회’ 총재, ‘민주의원’ 의장, ‘국회’ 의장 등을 거쳐 1948년 8월 남조선 괴뢰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승만에 대한 왜곡된 서술은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에도 이어진다. “집권기간 ‘북진통일’을 떠벌이면서 미제의 사촉 밑에 1950년 6월 25일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였으며 남조선을 미제의 완전한 식민지 군사기지로 인간 생지옥으로 전락시켰다”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6·25전쟁’은 소련 스탈린과 중공(中共) 마오쩌둥의 사전동의를 구한 김일성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것은 그간 소련과 중국의 사료들에 의해서도 수없이 입증된 바 있다. 한데 북한은 여전히 6·25전쟁이 미국과 이승만의 ‘북침’이란 허위기술을 고수하고 있다. 이어 조선대백과사전은 “1960년 4월 인민봉기(4·19혁명)에 의하여 괴뢰정부가 붕괴되자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쫓겨갔다가 죽었다”고 이승만에 대한 서술을 마친다.

1953년 8월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식을 지켜보는 이승만 대통령(뒷줄 가운데). 앞줄은 변영태 한국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미국 국무부 장관(오른쪽). photo 국가기록원

 

덜레스, 이승만과 비밀회담 후 북침’

 

이 같은 서술태도는 이승만과 김일성이 맞붙은 ‘6·25전쟁’을 다룬 대목에서도 이어진다. 조선대백과사전은 6·25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란 이름으로 기술하는데, 그 대목에서 “38선 일대를 시찰한 전쟁광신자 덜레스(전 미국 국무장관)는 서울에 다시 돌아가서 이승만 역도와 비밀회담을 가지고 6월 25일(일요일)에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불의의 침공을 개시할 것을 지시하였다. (중략) 미 제국주의자들과 그 주구 리승만 괴뢰도당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드디어 불의에 공화국 북반부에 대한 무력침공을 개시하여 조선인민을 반대하는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등으로 허위기술을 이어간다. ‘역도’ ‘주구’ ‘괴뢰’와 같은 말에서 상당한 적개심이 드러난다는 평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후로 일어났던 주요 사건들에 관한 서술 역시 마찬가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로 일어난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만 해도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주도의 무장봉기로 촉발된 사실이 명백하다.

 

조선대백과사전은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각각 ‘제주도인민봉기’ ‘려수(여수)군인폭동’으로 표현하는데, 각각 ‘미제 침략자들이 조작한 5·10 망국 단독선거를 반대하여 주체 37(1948)년 4월 3일 제주도 인민들이 일으킨 반미구국항쟁’ ‘전라남도 여수 주둔 남조선괴뢰군 제14연대 군인들이 미제의 식민지 파쑈통치를 반대하고 민주주의와 조국의 통일독립을 지향하여 일으킨 대중적 무장폭동’으로 기술한다.

 

특히 4·3사건과 여순사건을 기술하면서 미 군정과 이승만 정부의 진압과정만 유독 강조하는 것은 국내 좌파 진영의 태도와 거의 흡사하다. 여순사건의 경우, “당황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은 이 지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폭동진압에 날뛰었다. 폭동군인들과 무장한 인민들은 비행기, 포병, 장갑차 부대까지 동원하여 공격해 오는 미군과 괴뢰군, 무장경찰대들을 맞받아 용감히 싸웠다”는 식이다. 또 4·3사건을 기술한 대목에서는 “원쑤(원수)들의 그 어떠한 발악과 학살만행도 제주도 인민들의 투지를 꺾을 수 없었다. 제주도 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은 미제와 남조선 괴뢰도당의 야수적 폭압과 미제의 고용간첩인 박헌영 도당의 간첩행위로 말미암아 계속되지 못했다”는 식이다.

 

1954년 7월 미국 국빈방문 때 차에서 내리는 이승만 대통령을 영접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왼쪽은 리처드 닉슨 당시 부통령. photo 국가기록원

 

독도 지켜낸 ‘평화선’도 깎아내려

 

반면 북한은 이승만의 주요 업적을 기술하는 데는 지극히 인색한 태도를 보인다. 영화 ‘건국전쟁’에서 꼽는 이승만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은 6·25전쟁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약 70년간 이어진 한반도의 장기평화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하지만 ‘한미상호방위조약’이란 적화통일의 최대 걸림돌을 만난 북한의 서술은 정반대다. 조선대백과사전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남조선미국 호상방위조약’으로 부르는데, “미제가 조선인민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투쟁을 방해하며 필요한 때에는 정전협정을 파괴하고 또다시 조선에서 범죄적인 침략전쟁을 도발하기 위하여 남조선 괴뢰도당과 체결한 조약”으로 기술한다.

 

아울러 “이 조약은 괴뢰군 통수권과 작전지휘권 장악과 관련한 모든 협정들을 재삼 확증한 것으로서 미제 침략자들이 남조선을 군사기지로 군사적 부속물로 철저히 전변시키고 식민지 고용군대로서의 남조선 괴뢰군을 대대적으로 증강하고 통제장악함으로써 그를 침략과 전쟁정책 수행에 효과 있게 써먹으려는 야욕을 여지없이 드러내 놓은 침략적 조약”이라며 “남조선 괴뢰도당이 미제에 아부굴종하면서 남조선을 영원히 미제의 식민지로 팔아넘기려는 노골적인 매국조약”이라고 비난했다. 그간 586운동권을 비롯해 국내 좌파 진영에서 주한미군 철수 등을 주장하면서 펴온 논리와 거의 흡사한 셈이다.

 

심지어 북한의 이승만에 대한 일관된 부정적 서술은 독도 영유권을 확실히 했다는 평가를 받는 ‘평화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대통령은 6·25전쟁 중인 1952년, 이른바 ‘이승만 라인’으로 불리는 한·일 해상경계선 ‘평화선’을 선포해 독도 영유권을 굳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는 영화 ‘건국전쟁’에서도 “북한과 일본의 영토침탈을 두 차례나 막아냈다”고 찬사를 보내는 부분이다.

 

반면 북한은 ‘평화선’을 서술하면서 “이승만 괴뢰도당의 ‘평화선’과 거의 같은 선상에 이른바 ‘클라크 라인’이라는 것을 새로 설정하여 일본 어선은 물론 일체 선박의 항행을 금지시켰다”며 “실제상 이승만 괴뢰도당의 ‘평화선’은 미제 상전에 의하여 공고한 것으로 되었다”고 애써 평가절하했다.

 

아울러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이란 항목에서는 “남조선에 대한 미제의 식민지 예속화정책의 본질적 특징은 우선 ‘총독’을 통한 직접적인 통치와는 달리 제놈들이 길러낸 앞잡이들을 내세워 괴뢰정권을 조작한 후 그것을 통하여 식민지 통치를 실시하는 것”이라며 “미제가 조작해 낸 남조선의 역대 ‘정권’들은 철두철미 매국적이고 반인민적이며 예속적인 괴뢰정권들”이라고도 혹평했다.

 

영화 ‘건국전쟁’에서 한반도에서 철수하려는 미국을 상대로 한 반공(反共)포로 석방 등 벼랑끝 외교전술을 구사한 이승만의 자주성을 강조한 데 반해, 북한은 ‘식민지’ ‘앞잡이’ ‘괴뢰’와 같은 말로 이승만 정권의 자주성 자체가 없다고 본 것이다.

 

미국 하와이의 한인기독교회에 세워진 이승만 대통령 동상. photo 뉴시스

 

테러와 협잡으로 괴뢰대통령 4선 날조’

 

자연히 이승만의 과오로 꼽히는 몇몇 사건들에 대한 부정적 서술은 말할 것도 없다. 김일성의 과오로 불리는 주요 사건에 관해 일절 함구하는 것과 확연한 대조를 이룬다.

 

대표적인 것은 6·25전쟁 와중 불거진 군수비리인 ‘국민방위군 사건’이다. 국민방위군 사건은 6·25전쟁 때 제대로 식량과 피복을 공급받지 못한 국민방위군 5만~8만명이 사망한 사건으로, 당시 이시영 부통령이 사임하고, 신성모 국방장관이 경질됐다. 이와 관련 조선대백과사전은 “1951년 남조선괴뢰군 상층장교들이 이른바 ‘국민방위군’에 공급될 식량, 피복, 신발 등의 군수물자를 횡령사취함으로써 ‘국민방위군’에 속했던 수많은 남조선 청장년들을 굶겨 죽이고 얼궈(얼어) 죽이고 질병에 걸리게 한 사건”으로 기술한다.

 

이승만에 대한 부정적 서술은 이승만의 하야를 촉발한 3·15부정선거와 4·19혁명에서는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3·15부정선거로 촉발된 4·19혁명은 이 대통령의 최대 오점 중 하나로, 결국 이 대통령의 하야와 하와이 망명으로 이어진다.

 

반면 영화 ‘건국전쟁’은 1960년 3월 15일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이 대통령의 경쟁자였던 민주당 조병옥 후보가 선거 직전 병으로 미국의 월터리드병원에서 수술을 받은 뒤 사망한 상태였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따라 경쟁자 없이 대통령에 단독 입후보한 이승만이 부정선거를 획책할 동기가 없었다는 것이 김덕영 감독 측 주장이다. 부정선거를 주도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이 아닌 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장면 후보와 맞붙었던 이기붕 자유당 부통령 후보였다는 것이다.

 

3·15부정선거 직후 경남 마산(현 창원)에서 일어난 ‘3·15의거’를 ‘마산인민봉기’로 기술한 조선대백과사전은 김일성의 교시를 인용해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반대하여 마산시민들이 벌인 영웅적 투쟁은 남조선 인민들의 구국투쟁이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는 신호였다”고 기술했다.

 

이어 ‘4월인민봉기’로 4·19혁명을 기술한 대목에서는 “4월인민봉기의 도화선으로 된 것은 1960년 3·15부정선거에서 유례없는 테러와 협잡을 감행하여 이승만 역도의 괴뢰대통령 4선과 괴뢰부통령 당선을 날조한 것”이라며 “이 선거협잡은 이승만 파쑈(파쇼)독재정권에 대한 남조선 인민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고 기술했다. 이와 함께 이승만의 동상을 끌고 다니는 시위대의 사진도 게재했다.

 

-이동훈 기자, 주간조선(24-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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