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급 엔저에 ‘싸구려 국가’ 된 일본] [사라지는 '극진한 환대'] ....
[역대급 엔저에 ‘싸구려 국가’ 된 일본]
[사라지는 일본의 '극진한 환대']
['하루 300만명 북적' 시부야… ]
[가마우지 신세를 면하는 법]
역대급 엔저에 ‘싸구려 국가’ 된 일본
최근 일본에선 하와이 문화를 체험하는 ‘하와이 물산전’이란 행사가 성황이다. 일본인들의 하와이 사랑은 원체 각별하지만 인기를 끄는 이유를 알고 보면 짠하다. 이젠 하와이에 직접 가기 어렵기 때문이다. 2019년까지 일본인의 해외 관광지 톱3 안에 빠지지 않던 하와이 호놀룰루는 올해 명단에선 사라졌다. 달러당 엔화값이 160엔을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엔저(엔화 가치 하락)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싸구려 일본(야스이 닛폰)’이라는 자조가 나올 정도로 엔저가 장기화된 일본인들의 일상은 팍팍하다. 수입 가격이 크게 오르면서 학교 급식에서 미국산 쇠고기가 사라졌다. 1980년대에도 가던 해외 수학여행을 포기하는 학교가 늘었다. 지갑이 얇아진 사람들이 저렴한 상품만 찾으면서 ‘100엔 숍’의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1조 엔을 돌파했다. 과거엔 일본인들이 해외를 누비며 “야스이, 야스이(싸다 싸)”를 외쳤지만, 이젠 반대로 일본으로 몰려든 외국인 관광객들이 “싸다 싸”를 연발한다.
엔화 구매력 감소에 가난해진 일본인들
일본이 엔저를 용인한 건 2013년 금융 완화와 재정 확대, 성장 전략 등 ‘3개의 화살’을 쏘아 올린 ‘아베노믹스’로부터 시작됐다. 엔화 약세는 수출기업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주요 수단이었다. 하지만 투자 확대와 소득·소비 증가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해외로 생산기지를 옮긴 일본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수출 확대의 온기가 내수로 퍼지지 않았고 저성장은 장기화됐다. 오히려 수입가격 상승으로 서민과 중소기업이 타격을 받았고, 엔화 구매력이 떨어지면서 일본 국민이 가난해지는 결과만 낳았다.
장기 저성장은 익숙한 일본의 문화도 바꿔 놓았다. 선진국의 넉넉한 여유가 사라지면서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환대)’ 문화가 실종됐다. 값싸게 일본을 즐기러 온 해외 관광객들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에 외국인에게 웃돈을 받는 ‘이중 가격제’가 확산하고 있다. 일본 제조업을 상징하는 ‘모노즈쿠리’(장인 정신)도 희미해졌다. 도요타를 비롯한 일본 자동차업계 전체에 만연한 인증 조작 스캔들은 일본 기업들에 적당주의가 스며들고 있다는 증거다.
‘좋은 엔저’를 표방하며 시작한 정책이 ‘나쁜 엔저’를 넘어 ‘슬픈 엔저’로까지 전락하게 된 것은 구조개혁을 통한 경제 체질 개선이라는 고리가 빠졌기 때문이다. 일본의 수출기업들은 엔저로 손쉽게 실적을 올리면서 경쟁력 강화를 위한 노력을 외면했다. 글로벌 트렌드인 디지털 전환에 뒤졌고, 성장을 견인할 새로운 산업에 대한 투자는 부족했다. 일본의 잠재성장률은 20년째 0%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구조개혁 없인 저성장 탈출 없다’는 교훈
한국도 일본의 상황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일본이 엔저라는 마약에 취했다면 한국은 수출의 캐시카우 역할을 해준 중국의 달콤함에 취했다. 반도체의 물결에는 잘 올라탔지만, 인공지능(AI) 등 차세대 산업에선 뒤졌다. 올해 들어 반도체 수출이 반짝 호황을 보이자 그나마 지난해 바짝 긴장하던 위기감도 쑥 들어가 버렸다. 노동·연금·교육 개혁은 어느새 화두에서 사라졌고,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저출산은 이제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듯하다.
한국의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지난해 사상 처음으로 일본을 앞질렀다는 소식은 반갑지만 정작 핵심은 따로 있다. 통계 기준연도를 개편해 보니 이미 2014년에 소득 3만 달러 시대에 진입했다는 것이다. 10년 동안 3만 달러 초중반의 덫에 걸려 있었단 얘기다. 장기 저성장의 위험을 보여주는 일본에서 교훈을 얻어 구조개혁의 돌파구를 열지 못한다면, 좋았던 옛 시절을 그리워하며 신세 한탄하는 다음 차례는 한국이 될지도 모른다.
-김재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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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일본의 '극진한 환대'
지난 21일 일본 중부 야마나시현 후지카와구치코마치 편의점 로손 앞으로 검은 가림막이 설치되고 있다. 후지산 전경이 보이는 이곳에서 사진을 찍으려는 외국인 관광객이 몰려들자 아예 가려버린 것이다./AP 연합뉴스
최근 일본 야마나시현의 한 편의점 앞에 높이 2.5m, 폭 20m의 검은 가림막이 설치됐다. 이곳은 일본 최고봉 후지산 전경을 볼 수 있어 늘 외국인 관광객들로 붐비는데, 소음과 거리 쓰레기 등 문제가 불거지자 아예 아무도 볼 수 없게 가려버렸다. 일본에서조차 ‘편의점 앞에서 지역 특산품을 파는 등 기회로 삼을 수 있는데 과도한 조치’란 지적이 나온다.
도쿄 아사쿠사 등 일본 주요 관광지에 위치한 잡화점·수퍼마켓 점포엔 최근 계산대에 의자가 설치되고 있어 화제다. 지난해 아르바이트 노조의 요구에 따른 것으로 업체들도 ‘앉아서 손님을 응대해도 괜찮다’며 속속 지침을 바꾸고 있다. 편의점 앞에 가림막을 세우든 직원이 앉아서 손님을 받든 대수롭지 않은 문제라 넘길 수 있다. 하지만 일본 특유의 ‘극진한 환대’ 문화를 고려하면 최근 외국인을 바라보는 일본의 달라진 시선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변화들이다.
일본 식당·잡화점 등 직원은 손님에게 인사할 때 허리 각도부터 표정, 멘트, 말 속도까지 교육받는 경우가 많다. 외부에서 온 손님을 극진히 모셔 다시 찾게 만든다는, 이른바 ‘오모테나시(お持て成し)’ 문화다. 이런 문화가 최근 관광객 손님을 대하는 방식부터 시작해 눈에 띄게 흐려지고 있다.
최근 엔저로 외국인 관광객이 늘며 오버투어리즘(관광 공해) 문제가 부상하자 이들의 외국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냉소적으로 바뀌고 있다. 가장 문제는 이를 ‘싫으면 오지 마’란 식으로 해결하려 한다는 것. 홋카이도 유명 관광지 니세코초는 올 11월부터 여행객에게 인당 최고 2000엔(약 1만7000원)의 ‘숙박세’를 걷는다. 오사카에선 아예 외국인 관광객에게만 징수금을 걷자는 안을 논의 중이다. 도쿄 일부 식당은 일본어를 못하는 손님에게 음식값을 1000엔씩 올려받겠다고 선언했다.
현지 관광 전문가들조차 이러한 조치가 “일본의 미덕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우려한다. 한 교수는 “외국인은 안 와도 된다는 발상은 굉장히 위험하다. 게다가 인구 감소의 시대 아닌가”라고 했다. 반면 최근 일본 사회에 대한 외국인의 불만을 다룬 기사엔 이러한 현지 네티즌 댓글이 달렸다. “일본은 천국이 아니다.” 일본은 더는 외국인들을 위한 ‘천국’ 같은 나라가 아니고 자국을 찾은 외국인이 외려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최근 국내 한 연예인이 식당에서 일반인 손님 밥값을 지불해준 일화가 화제가 됐다. 그는 “그분들이 (나를) 먹고살게 해줬기 때문”이라며 공을 돌렸다. 일본이 관광대국에 오른 배경도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특유의 오모테나시 문화도 한몫했겠지만, 반대로 꾸준히 찾아주는 관광객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발전했을까. 감탄고토가 되어선 안 될 것이다.
-김동현 기자, 조선일보(2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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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300만명 북적' 시부야…
[신현암의 '新도쿄견문록']
시부사와가 만든 전원도시에 철도가 시너지
100년전 사업가의 꿈, 그리고 경쟁
일본의 대표적인 번화가로 꼽히는 도쿄 시부야역 인근의 야경. 시부야역은 하루 이용객 수가 300만 명에 이른다./시부야역 홈페이지
16만명 대(對) 300만명. 서울의 강남역과 도쿄 시부야역의 하루 이용객 수다. 강남역은 2호선과 신분당선만 있는 반면, 시부야는 9개 노선이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두 지역의 차이는 엄청나다. 하긴 TV에서 일본 뉴스를 전할 때마다 배경 화면으로 등장하는 시부야 스크램블 교차로를 떠올리면 거의 20배에 가까운 차이가 어느 정도 실감은 간다.
시부야에 가면 ‘100년 만에 한 번, 시부야 대개조’란 캐치 프레이즈가 자주 눈에 띈다. 어마어마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상징한다. 2012년 시부야의 34층 복합 건물인 ‘히카리에’가 완공된 이래 9개의 고층 빌딩을 지었으니 ‘대개조’는 틀림없다. 그런데 100년 만에 한 번이란다. 도대체 100년 전에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울 강남이 1960년대 말까지 전기조차 없었던 한적한 지역이었던 것처럼 시부야도 19세기 말까지는 시골이었다. 1885년 JR 야마노테선 시부야역이 생겼지만 그냥 역일 뿐이었다. 개통 초기의 하루 평균 이용객 수는 34명이었다는 통계에서 보듯,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사업가로 꼽히는 시부사와 에이이치는 이 부근에 전원도시를 만들고 싶었다. 도시 기능은 살리되, 시골의 푸르름까지 최대한 살아있는 지역을 꿈꿨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있는 파리의 도로를 그리면서, 1918년 ‘전원도시 주식회사’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3년 분양을 시작했다. 같은 해 발생한 관동대지진이 새 집에 대한 수요를 부추기면서 분양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다. 이곳은 지금도 고급 주택가로 남아 있다.
그런데 아무리 동네가 쾌적하더라도 접근성이 부족하면 의미가 없다. 훗날 ‘도큐 그룹’을 일군 고토 게이타는 이 점에 착안, 전원도시가 있는 덴엔조푸역과 시부야역을 잇는 철도를 만들었다. 그 덕분에 시부야역에서 전철로 12분이면 덴엔조푸역에 도착한다. 그래서 ‘전원도시의 탄생은 시부사와의 발상력과 고토 실행력의 합작품’이라고 표현한다.
고토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34년 시부야역에 백화점을 오픈했다. 철도회사가 백화점을 운영하는 것은 특이한 일이었다. 당시 백화점은 미쓰코시, 이세탄, 마쓰자카야 등 포목점이 주도하던 업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즈니스 기회는 어디에든 있었다. 고토의 스승이자 ‘한큐 그룹’을 일군 고바야시 이치조는 더 많은 손님을 전철에 태우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역 위에 백화점을 짓는 비즈니스 모델을 떠올렸다. 1920년 자기가 운영하던 역 2층에 도쿄의 한 백화점을 입점시켰다. 수요가 늘어나는 모습을 보고 사업의 성공을 확신한 그는 1929년 새로운 터미널을 준공하면서 한큐 백화점을 탄생시켰다. 이런 스승의 모습을 보고 5년 뒤 고토는 시부야역에 백화점을 연 것이다.
일본에는 200개가 넘는 철도 회사가 있는데 도큐, 한큐처럼 대형 회사는 16개가 있다. 도큐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세이부(西武) 철도였다. 그 또한 고토의 모델을 답습, 유통업을 확장시켰다. 그래서 도큐 그룹과 세이부 그룹은 서로 으르렁거리는 견원지간이었다. 세월이 흘러 창업자가 모두 사망한 뒤 사업을 물려받은 아들들은 화해했다. 도큐 그룹은 이케부쿠로가 본거지인 세이부 그룹의 시부야 진출을 환영했다. 도큐 브랜드 일색인 시부야에 세이부 백화점은 그렇게 탄생했다.
도큐든 세이부든 대부분의 백화점은 30대 이상을 겨냥했다. 그런데 세이부는 20대를 타깃으로 한 ‘시부야 파르코’를 만들어 순식간에 인기를 끌었다. 위기의식을 느낀 도큐는 ‘시부야 109′를 만들어 10대를 겨냥했다. 점점 시부야는 젊은이의 거리로 변모했다. 전원도시를 만들겠다는 한 사람의 꿈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 새로운 경쟁, 새로운 타깃을 거쳐 오늘날의 시부야를 만들었다. 향후 서울은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모습으로 발전할지 궁금해진다.
-신현암 팩토리8 대표, 조선비즈(2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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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마우지 신세를 면하는 법
[신상목의 스시 한 조각]
‘음미(吟味)’는 시가(詩歌)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며 감상하는 것을 말한다. ‘음(吟)’은 시를 읊는다는 뜻이다. 한시(漢詩)는 시상(詩想)이 떠오른다고 쉽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구(字句)의 뜻과 함께 평측(平仄), 압운(押韻) 등 형식 요소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 시를 나지막이 낭송하면서 청각 등 감각기관을 동원해 그 완성도를 ‘씹고 뜯고 맛보는’ 과정이 음미의 본래 뜻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에도시대에 재판의 심리(審理)에 해당하는 행위를 음미(일본어 발음 ‘긴미’)라고 하였다. ‘긴미스지(吟味筋)’는 관청이 주재하는 재판, ‘긴미가타(吟味方)’는 담당 관리를 지칭하는 말이다. 시를 감상한다는 원뜻으로부터 사물이나 현상을 철저히 파헤치고 조사한다는 뜻이 파생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인식 대상을 심층적이고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생각의 깊이를 더한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다.
음미의 반대말로는 ‘우노미(鵜呑み)’가 있다. 우(鵜)는 가마우지를 말한다. 우노미는 가마우지가 물고기를 통째로 삼키는 모습을 빗댄 말로, 사물이나 현상의 실체, 실상을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덥석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일본에는 가마우지의 이러한 습성을 이용해 물고기를 잡는 ‘우카이(鵜飼)’라는 낚시법이 있다. 목줄을 맨 가마우지가 자맥질을 하여 물고기를 삼키면 어부가 그를 토해내게 하여 수확을 챙기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넘치는 정보 속에 그럴듯한 가짜 뉴스까지 기승을 부리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매일같이 판단력이 시험에 드는 세상이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이 던져주는 정보를 가마우지처럼 덥석 물다가는 남 좋은 일이나 시킬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성급한 결론을 피하고 눈앞의 정보를 찬찬히 음미하며 부화뇌동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그나마 낭패를 줄이는 길일 것이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4-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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