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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협약] [中 대사 말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

뚝섬 2024. 9. 4. 11:00

[간도협약] 

[中 대사 말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

 

 

 

간도협약

 

한인들 많이 살던 간도 지역, 일본 마음대로 청 영유권 인정 

‘순종실록’에 적힌 ‘간도협약’ 내용. 1909년 9월 4일 일본은 청나라와 ‘간도협약’을 체결해 간도 지역에 대한 청의 영유권을 인정했어요.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어요. /국사편찬위원회

 

오늘로부터 115년 전인 1909년 9월 4일 일본과 청나라가 ‘간도협약’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약을 통해 일본은 청의 간도 영유권을 인정했습니다. 간도는 우리나라와 중국 사이에서 영토 분쟁이 계속 이어지던 곳이었는데요. 분쟁이 해결되지 않은 채 일본과 청이 조약을 체결한 것입니다. 당시 대한제국은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였습니다. 오늘은 간도협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게요.

 

청나라, 간도를 ‘봉금 지대’로

 

간도(間島)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접한 만주 일대를 말해요. ‘간도’라는 말의 유래에 관해선 여러 설이 있어요. 두만강에 살던 사람들이 땅을 일부 개간하고 ‘사이섬’이라고 불렀는데, 그 이름이 강 건너 전체를 가리키게 확대되었다는 설이 유력해요. 간도는 서간도와 북간도(동간도)로 나뉘어요. 백두산을 경계로 압록강 연안을 서간도, 두만강 연안 일대를 북간도라고 하지요.

 

보통 간도라고 하면 북간도를 의미해요. 토지가 척박했던 서간도에 비해 북간도는 토질이 양호해 우리나라 사람이 많이 거주했어요. 지금처럼 국경선 개념이 명확하지 않았던 시기에는 많은 한인(韓人)이 그곳에서 경작을 하면서 살아갔죠.

 

그런데 17세기에 등장한 청나라가 간도를 자신들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봉금 지대(이주를 금지하고 사람이 살지 못하게 한 구역)’로 정했어요. 특히 조선인들의 간도 지역 출입을 금지했어요. 그럼에도 조선인들은 생업 때문에 계속 간도로 이주했고, 외교 갈등이 빈번해지자 두 국가는 1712년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표시합니다.

 

간도(間島)는 압록강과 두만강에 접한 만주 일대를 말해요. /그래픽=김하경

 

하지만 비석에 적힌 ‘서쪽의 압록과 동쪽의 토문을 분수령으로 삼는다’는 내용에서 ‘토문(土門)’이 어느 강인지를 두고 이견이 생겼어요. 조선은 토문강을 송화강 상류로, 청나라는 두만강으로 해석했죠. 토문강이 송화강 상류면 조선 영토가 훨씬 더 위쪽으로 넓어져요. 그래서 ‘토문’이라는 단어 때문에 영토 분쟁이 발생한 거죠. 이후 1881년 청나라는 봉금을 해제하고 자국인의 간도 이주와 개간, 농경을 장려했습니다. 이 시기 먹고살기 어려웠던 조선인들도 간도로 많이 이주했죠. 영토 분쟁 해결을 위한 논의들이 있었지만 문제는 뚜렷하게 해결되지 않았어요.

 

일본, 만주 진출 위해 이용

 

그런데 일본이 간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일본의 확고한 대륙 침략 의지 때문이었어요. 대륙으로 나아가려면 만주에 대한 권익을 확보하는 게 매우 중요했는데요. 이를 위해 일본은 남만주 철도 부설권에 관심을 가져요. 대륙과 일본을 연결할 수 있는 철도를 짓겠다는 원대한 구상을 갖고 있었던 거죠.

 

그런데 청에서 일어난 반제국주의 농민 투쟁인 의화단 사건 진압을 명분으로 러시아군이 만주를 장악하면서 일본의 계획에 차질이 생겨요. 러시아가 만주에 대한 지배력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도 강화해 나갔기 때문이에요. 결국 이로 인해 러시아와 일본은 전쟁(1904~1905)을 벌이게 됩니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와 만주에 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 확보해요. 그리고 만주 진출을 위해 간도 문제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간도 문제에 개입하려면 명분이 필요했어요. 당시 간도 지역의 한인들은 청국 관리들에게 탄압을 받으며 참혹한 상태에 놓여있었어요. 일본은 이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설치한 통치 기구인 통감부는 간도에 사는 한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비밀리에 사전 현지 조사를 실시했어요. 이 조사를 바탕으로 1907년 통감부간도파출소를 설치했습니다. 

 

1910년대 초 간도로 이주하는 함경북도 주민들. /국립중앙박물관

 

그러자 청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거물급 관원과 병력을 간도에 보내 일본에 강경한 의사 표시를 했어요. 청나라는 간도 문제에 대해서 순순히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당시 청은 내부 부패로 무너져가고 있었고 혁명의 기운이 고조되고 있었어요. 간도 지역은 청이 자신들의 발상지라고 생각한 곳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기울어져 가는 왕조의 위신이 더욱 실추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또 일본에 이 지역을 양보하면 다른 열강들이 이 같은 전례를 들어 나라의 경계가 되는 변두리 땅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까 우려하기도 했어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쟁에 막대한 돈을 쓴 만큼, 추가로 청과 전쟁을 치를 처지는 못 된다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마침 국제 정세도 중국에 우호적인 상황이었어요. 일본이 만주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하자 독일, 미국 등이 견제하려고 나섰거든요.

 

상황이 점점 더 안 좋아지자 일본은 청과 외교 교섭에 나섰습니다. 그리고 남만주의 철도 부설권 등을 일본이 얻는 대신, 간도 지역에 대한 청의 영유권을 인정하는 간도협약이 체결됐습니다. 협약을 통해 일본과 청은 두만강이 우리나라와 청의 경계선임을 확인했어요. 간도 지역에 거주하는 한인의 거주권과 토지 소유권은 인정했지만 사법권은 청이 행사하는 것으로 규정했죠.

 

일본과 청의 간도협약 체결 이후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들은 치발을 하고 중국식 옷을 입어야 했어요. 청으로 귀화하라는 압박도 받아야 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간도 영유권을 청에 넘긴 대신,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만주 지역 철도와 광산 이권을 가지게 됐습니다. 간도 일부 지역에는 일본 영사관이 설치됐고 이를 통해 일본은 간도 지역 한인들을 통제할 수 있었죠. 그렇게 간도에 살던 우리나라 사람들은 중국과 일본 양쪽에서 견제를 받아야 했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조선일보(24-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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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대사 말에서 얻은 '뼈아픈 교훈'

 

화성 화재 사망자 다수가 조선족
우리 동포 희생에 싱하이밍 '훈계'
주변국에 수탈·착취당한 민족사
나라 빈약하면 언제든 되풀이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가 지난 24일 경기 화성시에 위치한 일차전지 제조 공장 아리셀 화재현장을 방문하고 있다./뉴스1

 

화성 배터리 공장 화재로 숨진 23명 중 17명이 중국인이다. 대부분 20~40대 젊은 조선족이다. 현장을 찾은 싱하이밍 중국 대사는 “중국 당과 정부가 우려하고 있다”며 “한국 기업들이 뼈아픈 교훈을 얻어 다시는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화재 원인 규명과 피해 수습, 재발 방지는 싱 대사 말이 아니라도 우리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그의 ‘훈계’를 들으며 떠오른 것은 민족의 기구한 운명이다. 조선족은 중국인이기에 앞서 한민족이다. 먹고살기 위해 조국을 떠났다가 먹고살기 위해 돌아왔다. 우리 민족이 우리 땅에서 숨졌는데 중국이 큰소리를 친다.

 

19세기 조선은 기근이 끊이지 않았다. 순조 때인 1809~1810년과 1832~1833년, 고종 때인 1876년 기근이 기록에 남아 있다. 1832~1833년 기근은 순조가 백성의 20~30%가 줄었다고 할 만큼 심각했다. 굶어 죽은 사람도 많지만, 나라를 떠난 사람도 많았다.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땅은 비옥한데 사람이 살지 않는다고 소문난 간도로 갔다. 간도의 한인은 1860년대에 7만7000명에 달했다. 경술국치 후 일제의 수탈과 압제를 피해 온 사람이 합류했다. 1940년 간도 한인은 145만명으로 늘었고, 지금 중국 내 조선족은 190만명이다. 이 중 70만명이 한국에 들어와 있다.

 

연해주 이주도 비슷한 시기 시작됐다. 1937년에 18만명의 한인이 극동 러시아 지역에 살았다. 그해 스탈린은 이들 거의 모두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일본과 전쟁을 앞두고 한인이 일본 첩자 역할을 할 것이라는 우려, 중앙아시아 낙후 지역을 한인 노동력을 이용해 개간한다는 경제적 목적이 함께 작용했다. 지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은 50만명이고, 이 중 8만명이 국내에 들어와 산다.

 

150여 년 전 나라가 가난하고 힘이 없어 조선족과 고려인이 생겼다. 화성 화재로 조선족이 겪는 고통의 씨앗은 그때 뿌려졌다. 국제사회를 지배하는 원칙은 예나 지금이나 ‘힘’ 아니면 ‘돈’이다. 급할 때는 돈보다 힘이다. 구한말 역사는 주변국의 한민족 수탈사라고 할 수 있다. 자신들의 전쟁과 노역에 한인을 이용했다. 일제 강점기 국내외에서 강제 동원된 한인이 780만명에 달한다는 통계가 있다. 간도의 한인은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내전에 6만3000명이 참여해 3500명이 숨졌다. 스탈린의 강제 이주 과정에서 한인 2만여 명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숨졌다.

 

민족 수탈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19세기만큼 먹고살기 어려운 북한 주민이 대상이다. 중국의 수산물 가공회사에서 일하는 북 주민 1000여 명은 하루 18시간 냉동 생선을 손질한다. 공장 관리자는 수시로 때리고 “도망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인다”고 협박한다. 이 생선들은 대부분 한국으로 수출된다. 한인의 노동을 착취해 만든 상품을 한인에게 팔아 중국인이 주머니를 채운다. 러시아 건설 현장은 북한 인력이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다. 2017년 유엔 제재 직전 러시아 내 북한 노동자는 3만명, 전체 외국인 노동자의 20%였다. 이들은 1년에 3일 쉬고 하루 16시간 노동해 한 달 100달러를 손에 쥐었다.

 

조선족의 죽음을 보며 50년, 100년 후 우리 후손이 어디서, 어떤 대접을 받으며 살지 상상해본다. 그때까지 대한민국이 선진국일까. 과연 나라가 존재하기는 할까. 자식이 자기보다 못살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려면 나라가 빈약해 주변국에 유린당한 과거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싱 대사 발언에서 얻어야 할 ‘뼈 아픈 교훈’이 아닐까.

 

-황대진 사회부장, 조선일보(24-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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