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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블루' 제왕 티무르.. ]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뚝섬 2024. 11. 3. 05:35

[초원을 찬란하게 물들인 '실크로드 블루' 제왕 티무르는 정복자이자 사상가였다]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초원을 찬란하게 물들인 '실크로드 블루' 제왕 티무르는 정복자이자 사상가였다

 

실크로드 문명 유적지
우즈베키스탄 여행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명성을 날린 부하라의 상징 탑인 46m 높이의 ‘칼란 미나레트’가 이슬람 신학교 등으로 쓰이던 건물 사이에 우뚝 서 있다./정지섭 기자

 

금메달 8개로 12위. 우즈베키스탄이 지난 파리 올림픽에서 거둔 성적이다. 미국·중국·일본·한국·독일 등 전통의 스포츠 강국들 다음이다. 금 다섯을 복싱에서 땄고, 유도·태권도·레슬링에서 하나씩이다. 이 순도 높은 전투력이라니. 수도 타슈켄트에서 만난 대학생에게 “당신들 원래 그렇게 잘 싸우냐”고 묻자 싱긋 웃으며 답한다. “티무르의 후예들이니까.” 옆자리 친구가 참견했다. “아미르(왕·지배자) 티무르는 현명하고 똑똑했어. 싸움만 잘하는 전사가 아니고.”

 

14세기 중앙아시아와 이란·이라크·시리아·튀르키예와 인도 북부까지 아우르는 거대 제국을 세웠던 제왕 티무르. 그의 후예들 앞에서 ‘한국에서 우즈베키스탄은 미녀들이 소를 몰고 밭을 매는 나라로 알려져 있다’는 해묵은 클리셰를 꺼내려다 참았다. 여행객은 이 나라에 머무는 내내 티무르와 함께할 운명이다. 그는 후손들에게 칭기스칸인 동시에 광개토대왕이고 알렉산더 대왕이면서 세종대왕이니까. 

수천 년간 유라시아 제국의 명멸을 지켜본 아르크 요새 정상에서는 부하라 시내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정지섭 기자

제국의 수도 사마르칸트를 일군 티무르가 잠든 무덤은 생전 그가 좋아했던 파란색 돔을 얹은 건물 안에 조성돼 있다./정지섭 기자

 

◇사원의 마을 부하라를 지나

 

티무르(1336~1405)는 냉정한 정복자이자 초원을 찬란한 문화로 꽃피운 사상가였다. 그를 문무겸전으로 만들어준 기반은 ‘믿음’이다. 9~10세기 이슬람 신앙의 중심지 부하라에서 피어난 이슬람 문명이 없었더라면 한낱 부족장으로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부하라 기차역 앞은 휑뎅그렁했다. ‘뭐지?’ 하는 생각은 차로 달려 20여 분을 부하라 시내로 접어들면서 ‘뭔가!’로 바뀌었다. 황량한 창밖 풍경은 도시와 극적으로 만나기 위한 암전이었던 셈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사원(寺院)’을 뜻하는 도시 이름에 걸맞게 걸어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역사 유적 42개가 촘촘히 있고, 90여 곳의 호텔·호스텔·게스트하우스와 60여 곳의 카페와 식당,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장신구 공방과 가게들이 어우러져 있다. 고대 실크로드 중심 도시마다 들어서 늦은 밤 불을 밝혔던 캐러반서레이(상인들을 위한 숙박·휴식공간)가 21세에도 다른 형태로 존속하고 있었다.

 

푸른 돔을 얹은 모래색 건물이 다닥다닥 붙은 부하라 거리는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노천 미술관이자 건축 전시장. 그중 백미는 17세기 당대 실권자 나지르 지반베기가 지은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 정문 문양이다. 이슬람이 죄악시하는 돼지를 발톱으로 붙들고 있는 두 마리의 불사조가 머리를 마주댄 가운데에 황금색 햇살로 치장된 사람 얼굴이 있다. 이슬람이 금기시하는 사람과 짐승 형상을 구체화할 정도로 당대 권력자들의 자신감은 하늘을 찔렀다. 12세기에 건립된 탑 칼란 미나레트는 높이가 46m, 낙타젖과 석고를 이겨서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기단부는 지름 9m에 이르는 부하라의 상징이다.

 

해 질 녘 어둠이 깔리자 탑의 밝은 모래색이 짙은 고동색으로 바뀌며 그림자를 드리운다. 미로처럼 얽힌 곳곳을 돌아다니면 다리가 욱신해지더라도 아르크 요새에 오르는 걸 빼먹지 말자. 1920년대 제정 러시아 복속 전까지 수천년 동안 요새 겸 왕궁 역할을 하며 제국의 영욕을 지켜본 장소. 지금도 발굴·복원 공사가 곳곳에서 진행 중인 성채 높은 곳에 저녁 무렵 오르면, 푸른 돔 지붕과 모래색 건물 곳곳에서 저녁 손님을 맞으려 불 밝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 손님 중 하나라는 사실에 뿌듯하다. 

사마르칸트 최고 인기 관광지 레기스탄 광장 건물의 타일이 저녁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다./타슈켄트 티무르 왕조 박물관에 들어서면 대형 샹들리에와 사방에 꾸민 티무르의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정지섭 기자

 

◇푸르른 땅 사마르칸트를 넘어

 

도시는 찬란하고 눈부셨다. 그게 탈이었다. 아름다움이 정복자를 불러들였다. 1500년 시차를 두고 알렉산더 대왕과 칭기스칸의 군대에 쑥대밭이 됐다. 그 폐허를 ‘동방의 로마’라 불리는 사마르칸트(푸른 땅이라는 뜻)로 부활시킨 주역이 바로 티무르다. 칭기스칸 이후 일대에서 최대 규모의 제국을 일군 그는 익히지 않은 양고기를 영토 곳곳에 두고, 가장 오랫동안 선도를 유지하는 곳을 도읍으로 삼았다. 그렇게 선택한 곳이 여기다.

 

선천적으로 파랑을 동경하던 티무르는 눈부시게 푸른 이 도시의 하늘빛을 둥근 지붕에 담아두게 했다. 도공들은 유약을 발라 구워낸 푸른색 타일로 건물의 지붕과 외벽을 마무리했다. 그 푸르름에 대한 집착이 효험을 봤을까? 티무르 이후에도 도시는 창창하게 번성했다. 세계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연중 끊이지 않는 관광지이면서 정치·경제적으로 수도 타슈켄트와 쌍벽을 이루는 끗발 있는 도시가 됐다. 초대 대통령(이슬람 카리모프)의 고향이고, 현 대통령(샵카트 미르지요예프)이 주지사를 지냈다.

 

도시의 영광이 압축된 곳이 레기스탄 광장. 반듯하게 닦인 광장의 삼면은 푸른 돔을 얹고 푸른 타일로 치장한 세 마드라사 건물(울루그벡·틸라카리·쉬르도르)이 둘러싸고 있다. 이슬람 신학자를 길러내던 본래 기능을 잃었지만 건물은 지금도 살아 숨쉰다. 공간 곳곳을 전시 공간으로 꾸몄을 뿐 아니라 스카프·양탄자·장신구·지갑·인형·조각 등을 파는 공방 겸 가게로 바꿨기 때문이다. 물건 하나하나에 장인의 손길이 깃들어 있고, 마음 편하게 구경하라는 미소가 거친 호객행위를 대신한다.

 

사마르칸트의 건축 양식은 티무르의 5대손 바부르가 인도로 진출해 세운 무굴 제국 시기에 타지마할이라는 이름으로 꽃피웠다. 이런 도시를 일군 왕가의 내력이 궁금하다면 영묘(靈廟) 샤하진다로 갈 일이다. ‘천국의 계단’이라고 이름 붙은 계단 양옆으로 티무르 제국의 황금기를 이룬 왕가 사람들의 넋을 기린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방마다 각각 다른 촘촘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타일로 장식했다. 저녁이 밤으로 바뀌어 하늘이 코발트빛으로 물들면 장식의 비현실적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 이곳에선 ‘천국의 계단’을 오를 때와 내릴 때 헤아린 숫자가 같다면 진짜 천국에 간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다. 설령 틀리더라도 실망하진 말자. 내 발 붙인 곳이 살 만하다면 그곳이 천국이거늘. 아닌가?

 

푸른 도시를 일군 제왕 티무르의 묘를 놓칠 순 없는 법. 금빛 무늬에 주름을 가미한 푸른 돔을 얹고 양옆에 미나레트(탑)까지 세운 거대한 왕가 납골당 안에 티무르의 검은 석관이 후손들 석관의 십자 호위를 받으며 누워 있다. 제왕의 기운을 담아가려는 듯 석관으로 쉴 새 없이 플래시 세례가 쏟아진다. 

타슈켄트의 대형 시장 초르수 바자르의 향신료 가게에 다양한 색깔의 양념이 가득 쌓여 있다./정지섭 기자

 

◇돌의 도시 타슈켄트로

 

티무르 제국이 저물고 16세기 샤이반 왕조에 이어 19세기 제정 러시아가 장악한 뒤 공산주의 제국 소련의 일부로 병합되면서 의도했든 안 했든 티무르의 이름은 빠르게 지워졌다. 망각의 세월은 그러나 티무르의 영광에 가려졌던 다른 위인이 조명받는 시기이기도 했다. 우즈베크 문학의 창시자로도 추앙받는 15세기 정치가 알리셰르 나보이 같은 이들 말이다.

 

오래전부터 석공예 산업으로 유명해 ‘돌의 도시’라는 이름이 붙은 타슈켄트에 티무르가 부활한 것은 1991년. 소련의 붕괴와 함께 독립한 신생국엔 강력한 구심점이 필요했다. ‘우리 모두는 티무르의 후예’는 분열을 떨치고 단결하자는 주문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과 카를 마르크스 동상이 서 있던 자리에 1994년 오른손을 쭉 뻗은 티무르의 초대형 기마상이 세워졌다. 소련 시절에도 손꼽히는 대도시였던 타슈켄트 관광의 시작점은 티무르 동상이 서 있는 티무르 광장이다. 

17세기 권력자 나지르 지반베기가 건립한 부하라의 이슬람 신학교 건물 외벽에는 이슬람이 금기시하는 동물과 사람의 모습이 표현돼 있다./정지섭 기자

 

티무르의 아우라는 1996년 유네스코 지원으로 설립된 티무르 왕조 박물관으로 이어진다. 푸른빛에 금빛을 가미한 지붕을 이고 있는 둥근 건물은 박물관인 동시에 거대한 이슬람 건축물이다. 티무르 시대 유적과 복식, 건축물 미니어처 등으로 구성된 전시물도 의미 있지만 건물 자체를 보는 재미가 극적이다.

 

1·2층을 뻥 뚫어놓은 공간에 대형 샹들리에를 달고, 사방을 티무르를 그린 대형 성화(聖畵·icon)로 둘렀다. 이렇게 추앙받는 그의 백성들의 오늘을 보고 싶으면 1977년 중앙아시아 최초로 뚫린 타슈켄트 지하철로 향하자. 교통수단인 동시에 명소다. 옛 공산국가 지하철 특유의 웅장하고 장엄한 꾸밈새에 화려하되 경박하지 않은 이슬람식 인테리어가 조화를 이뤘다. 알리셰르 나보이역은 그중에서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승강장 벽면이 나보이의 작품이 그림으로 표현한 부조로 장식돼 있는 지하 석굴이다.

 

이 지하철을 타고 초르수역에서 내려 출구로 나오면 중앙아시아 최대 규모 전통시장 ‘초르수 바자르’의 복판이다. 즉석에서 갈아준 과일주스를 홀짝이면서 ‘없는 게 없을 것 같은’ 시장을 둘러본다. 빨강·노랑·주황 등 알록달록 색깔의 향신료 가게를 보니 허기가 진다. 거의 모든 식당에 있는 볶음밥 ‘플롭’으로 배를 채울 차례. 집채만 한 솥에서 고기기름으로 꼬들꼬들 볶아낸 밥에 소·양·말고기와 건포도를 얹고 메추리알로 토핑한 플롭 한 접시를 비운다. 제왕의 기운을 맛본 것 같다. 

 

타슈켄트 티무르 광장에 우뚝 서 있는 티무르 기마상. 소련 시기 이 자리에는 스탈린·마르크스의 동상이 있었다./정지섭 기자

 

여행 수첩

 

우즈베키스탄항공과 아시아나항공 등이 인천~타슈켄트 직항편을 운항하고 있다. 소요시간은 6~7시간. 신용카드를 받는 곳도 많지만 현지 통화인 ‘숨’으로 환전을 해가는 게 좋다. 주요 문화유적 부근의 공중화장실 상당수가 유료(3000숨=약 330원)로 운영되기 때문. 원화로는 직접 환전이 안 되기 때문에 출국 전에 미리 달러로 바꿔야 한다. 우즈베키스탄의 주요 도시는 전반적으로 한국과 비슷하고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최근에는 점차 기온이 올라가는 추세다. 가을·겨울철에는 겉옷을 여유 있게 마련하는 게 좋다. 대도시라도 물가는 그리 비싸지 않은 편. 밥이나 커피 값은 대략 서울의 60~70% 정도다. 타슈켄트 지하철은 스크린도어가 없어 승강장 인파에 조심해야 한다.

 

철마로 부활한 고대 왕국 아프로시요브

 

최대 시속 250㎞… KTX도 투입 

부하라를 출발해 사마르칸트를 지나 종점 타슈켄트에 도착한 아프로시요브 열차. 중앙아시아 최초의 고속철도로 2011년 개통했다./정지섭 기자

 

사마르칸트는 폐허 위에 세워진 도시다. 기원전 7세기에는 고대 왕국 아프로시요브가 인도·중국·아라비아·캅카스 등을 이어주던 길목에 있었고, 실크로드 무역 중심지로 번성했다. 그러나 1220년 칭기즈 칸이 이끄는 몽골제국 기병대에 짓밟히면서 쑥대밭이 됐고, 한 세기 뒤 들어선 티무르의 사마르칸트에 영광의 이름을 넘겨줬다.

 

잊혔던 그 이름 ‘아프로시요브’가 약 800년 만에 철마(鐵馬)로 ‘부활’했다. 2011년 개통한 중앙아시아 최초의 고속철도 아프로시요브는 한국 KTX와 SRT, 일본 신칸센 등을 빼닮은 늘씬한 유선형 열차. 중앙아시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우즈베키스탄(3600만명)은 옛 소련 시절부터 교통과 물류 요충지로, 철도·도로망이 진작에 깔려 있어 공사가 어렵지 않게 진행됐다.

 

수도 타슈켄트에서 각각 300㎞, 590㎞ 떨어진 사마르칸트와 부하라까지 최대 시속 250㎞로 달린다. 타슈켄트를 출발해 두 시간이면 사마르칸트, 네 시간이면 부하라에 닿는다. 빠르고 편안한 데다 쾌적하기까지 하니 열차 착발 시간이 되면 각 도시 기차역은 외국인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이코노미·비즈니스·VIP 세 등급이 있는데 가장 싼 이코노미석조차 KTX 특실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널찍하고 아늑하다.

 

다만 수요에 비해 열차 편이 자주 있는 것은 아니라서 가급적 빨리 열차표를 마련해 두는 게 좋다. 자리에 앉은 손님에게는 달콤한 초콜릿 빵과 커피가 제공되고, 뭘 더 먹으려면 수시로 지나가는 수레를 불러 세우면 된다. 아프로시요브의 현 종점은 부하라이지만, 서쪽으로 더 뻗어서 실크로드 유적이 몰려 있는 히바·누쿠스까지 총길이 1200㎞로 연장될 예정이다.

 

반가운 소식 하나 더. 지난 6월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의 고속철도 수출입 계약 체결에 따라 2027년부터는 국내에서 제작된 KTX-이음이 아프로시요브의 일원으로 실크로드를 달린다. 우즈베키스탄 철도 당국은 또 이탈리아의 관광 여행 회사 아르셀라와 손잡고 2026년 말부터 초호화 여객열차를 선보일 예정이다.

 

-정지섭 기자, 조선일보(24-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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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실크로드 교역 중심지… 티무르 제국때 국제도시로 

이슬람 종교 지도자, 왕족 등 주요 인물의 묘지가 있는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의 역사적 장소 ‘샤히진다’. 샤히진다는 오랜 세월에 걸쳐 파괴와 재건이 반복됐는데, 현재 모습 대부분은 티무르 때 갖춰졌어요. /유네스코

 

지난달 윤석열 대통령 부부가 중앙아시아의 세 국가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했어요. 이때 우즈베키스탄 방문을 마무리하는 일정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사마르칸트를 찾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과 함께 아프로시압 박물관, 레기스탄, 구르 아미르, 울루그 벡 천문대 등 유적을 방문했어요.

 

해발고도 750m 산지에 위치한 사마르칸트는 ‘중앙아시아의 진주’라고 불리는 곳이에요. 특히 실크로드의 중심지로 동서양 문화가 교차하며 발전했어요. 2001년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습니다. 오늘은 사마르칸트의 역사에 대해 알아볼게요.

 

중국과 로마 잇는 중계무역으로 번성

 

사마르칸트에는 기원전부터 이란계 종족인 소그드인이 살았어요. 고대 소그드인이 살았던 지역을 소그디아나라고 불렀는데, 오늘날 사마르칸트 일대가 그 지역이에요. 중국에서는 이들이 세운 국가를 ‘강국(康國)’이라 불렀죠. 소그드인은 아이가 태어나면 입에 꿀을 넣어주고, 손에는 아교(짐승의 가죽, 힘줄, 뼈 따위를 진하게 고아서 굳힌 끈끈한 것)를 발랐다고 해요. ‘꿀처럼 달콤한 말로 장사를 해서 번 돈이 손에 들어오면 절대 나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였다고 해요.

사마르칸트에 있는 레기스탄. /위키피디아

 

이런 문화 덕분인지 소그드인은 일찍이 상업 활동을 시작했어요. 기원전 3세기 파르티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됐을 때쯤에는 실크로드 교역의 주역이 됐지요. 파르티아는 당시 로마 제국과도 세력을 겨룰 정도로 강성한 나라였어요. 중국 한나라와 로마 제국을 연결하는 중계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어요. 파르티아는 중국 비단을 로마에 팔고 로마의 유리와 금·은 세공품 등을 중국과 동아시아에 전달했는데, 소그드인들이 그 역할을 맡았어요.

 

사마르칸트는 중요한 거점이었던 만큼 파르티아 외에도 사산조 페르시아, 돌궐, 중국 당나라 등 여러 나라의 지배와 침략을 받았어요. 그러다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한 이슬람의 아바스 왕조가 세력을 넓히는 과정에서 이 도시를 두고 당나라와 격돌했는데, 바로 751년 탈라스 전투예요. 전투에서 이슬람 군대가 승리하면서 사마르칸트는 이슬람 도시로 거듭났어요. 이때 중국 포로들을 통해서 중국의 제지술, 비단 직조술 등이 이슬람 세계에 전해졌죠. 전쟁 직후 사마르칸트에는 제지 공장이 세워졌고 제지 기술이 발전했어요. 이 지역은 19세기까지 이슬람 문화권의 대표적인 종이 생산지가 됐습니다. 이후에도 이 일대 수많은 기술자, 상인, 학자들이 사마르칸트로 몰려들면서 명실상부한 중앙아시아 문명의 중심지로 발전했어요.

 

파괴와 부활

 

사마르칸트의 운명은 칭기즈칸의 침략으로 바뀌고 말았어요. 11세기 말 이 지역에는 호라즘 왕국이 자리 잡고 성장하고 있었어요. 왕국은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하는 동서 무역을 독점해 번영을 이뤘죠. 하지만 칭기즈칸이 요구한 교역과 외교 관계 수립을 거절해 몽골군의 침략을 받았어요. 이때 몽골군이 사마르칸트를 침공해 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모스크(이슬람교에서 예배하는 건물)를 포함해 도시 시설을 초토화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이 시기까지 사마르칸트의 중심지는 북부 아프라시압 언덕 일대였는데, 이때 상당수가 파괴돼 현재도 소수 유적만 남아 있어요.

 

완전히 폐허가 된 사마르칸트가 화려하게 부활한 것은 14세기 후반 티무르 제국이 이곳을 수도로 삼으면서부터였어요. 티무르 제국은 튀르크계 티무르(1336~1405)라는 인물이 세운 거예요. 그는 칭기즈칸의 명예를 계승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군사적 정벌을 거듭해 대제국을 건설하고, 수도 사마르칸트를 새롭게 정비했어요. 푸른 빛을 좋아한 티무르는 도시의 주요 건물을 푸른색으로 꾸몄어요. 사막과 초원을 오가며 교역하던 상인 집단은 푸른 빛이 보이면 사마르칸트가 그리 멀지 않았음을 알았다고 해요.

 

티무르 제국을 세운 티무르의 동상. /유네스코

 

티무르는 레기스탄을 도시의 새로운 중심으로 삼았습니다. ‘레기’는 ‘모래’, ‘스탄’은 ‘광장’이란 뜻인데, 이 지역이 운하를 따라 실려온 모래와 진흙이 굳어 형성된 지반이라서 붙은 이름이라고 해요. 레기스탄에선 아미르(아랍어로 ‘지도자’라는 뜻)의 대관식과 외국 사신들의 아미르 알현식이 열렸을 뿐 아니라, 제국 내 중요한 일들이 결정되고 공표됐죠. 제국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어요. 이곳에선 바자르(대시장)도 열렸죠. 1403년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프랑스 사절 클라비호는 ‘바자르가 성을 가로질러 형성돼 세계의 사방에서 몰려든 물건으로 가득 차고 거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그 많은 상품이 금방 동이 나버리곤 했다’고 묘사했어요. 이뿐만 아니라 티무르는 원정을 나갈 때마다 정복지의 유명한 예술가와 건축가, 학자 등을 데려왔어요. 그렇게 티무르 제국은 경제·문화 강국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16세기 튀르크계 우즈베크인의 침략으로 티무르 제국이 몰락하며 사마르칸트도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어요. 티무르 제국 몰락 후 이 지역에 우즈베크인이 세운 샤이반 왕조는 서쪽 부하라로 수도를 옮겼고, 이후 사마르칸트는 점차 쇠퇴했어요. 19세기 접어들어 러시아 제국이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면서 사마르칸트는 러시아령으로 편입됐어요. 1924년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됐지만, 약 5년 만에 타슈켄트에 그 자리를 내줬어요. 1991년 우즈베키스탄이 소련에서 독립하면서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이자 역사 도시로 명맥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김윤주 기자, 조선일보(24-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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