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행복했다" 南 임애지와 "3등밖에 못했다" 北 방철미의 동메달] ....

뚝섬 2024. 8. 16. 09:12

["행복했다" 南 임애지와 "3등밖에 못했다" 北 방철미의 동메달]

[여의도와 경기도까지 번진 '격노' 바이러스]

 

 

 

"행복했다" 南 임애지와 "3등밖에 못했다" 北 방철미의 동메달

 

[박성민의 정치 포커스]

둘 다 동메달 땄지만 상반된 반응
"행복했다"며 개인 강조한 임애지와

"3등밖에 못했다"며 아쉬워한 방철미
이젠 이념 넘어 자유·개인주의의 시대

 

과거 극복은 자유주의 세대 몫
X세대 한동훈·M세대 이준석 같은 보수

미래를 향한 경쟁에서 한발 앞서간다
민주당도 과거 벗어나 미래 경쟁하길
 

 

뜨거운 8월이다. 폭염은 계속되고 있고 세계를 뜨겁게 달궜던 올림픽 열기는 아직 식지 않았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은 확전되고 이스라엘과 하마스 휴전은 난망한데 이스라엘과 이란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 와중에 8·15 광복절을 둘러싼 분열은 ‘끝나지 않은 100년 전쟁’을 절감하게 한다.

 

정치는 전쟁과 스포츠 사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전쟁으로 가까이 가면 상대를 ‘죽일 적’으로 보고, 스포츠로 가까이 가면 ‘이길 경쟁자’로 본다. 스포츠 정신은 공정한 룰, 치열한 경쟁, 깨끗한 승복이다. 경기가 끝나면 승자와 패자가 유니폼을 교환하며 존중을 표한다. 전쟁과 정치는 퇴로를 열어주느냐에서 갈린다. 오늘 정치는 스포츠보다 전쟁에 가깝다.

 

예상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남긴 올림픽 선수단의 주축은 이른바 Z세대다. ‘선진국에서 태어난 세대’인 이들은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실력을 맘껏 뽐냈다. ‘전쟁 세대’ ‘민주화 세대’ ’X세대’와 달리 Z세대는 ‘개인주의’ 성향이 강하다. 이전 세대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배드민턴 안세영 선수의 도발적 문제 제기는 세대 전쟁으로 번졌다.

 

‘후진국에서 태어난 세대’가 국가·회사·가족 같은 집단이 우선이었다면 MZ는 ‘개인’이 우선이다. 좋은 일이다. 그럴 때가 됐다. 집단주의는 투혼은 있을지 몰라도 즐기지는 못한다. 승자에 대한 존중과 패자에 대한 배려를 할 여유가 없다. 집단이 주는 압박을 벗어던지면 승자를 인정할 수 있고 패자에 대한 안타까움도 느낀다. 동메달이어도 금메달 딴 듯 기뻐한다. 설사 메달을 따지 못해도 최선을 다한 모습에 모두가 박수를 보낸다.

 

파리 올림픽 복싱 여자 54kg급에서 나란히 동메달을 딴 한국의 임애지와 북한 방철미는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임애지는 “파리 올림픽에서 많은 사랑과 관심을 받아서 행복했다”고 한 반면 방철미는 “1등을 하자고 생각하고 왔지만 3등밖에 쟁취하지 못했다”며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집에 메달을 가져가면 누구에게 가장 먼저 걸어주고 싶은지’에 대한 질문에 임애지는 “파리 올림픽을 준비하면서 도움받은 사람이 너무 많다. 만나는 사람 다 한 번씩 걸어줄 것 같다”고 한 반면 방철미는 “동메달이 내가 바라던 그런 것이 아니니까 별로 생각나지 않는다”고 했다. 방철미는 과거 우리 모습이다. 현재 우리 모습은 임애지다.

 

전쟁은 국가·민족·종족·종교와 같은 집단 사이에 일어나므로 잔인하다. 정치도 이념·진영 같은 집단 간 전쟁이 되면 잔인해진다. 올림픽을 즐기는 새로운 세대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적을 냈다. 정치도 잔인한 전쟁이 아니라 즐기는 축제가 돼야 한다. 상대에 대한 존중과 관용이 정치와 민주주의를 전쟁이 아니라 스포츠처럼 만든다.

 

‘8·15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과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아울러 기념하는 날이다. 둘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흐른다. 이승만과 김구는 여전히 두 진영의 상징으로 추앙과 격하의 대상이다. ‘건국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언젠가는 역사적 화해의 순간이 올 것이다. 아마도 그 주역은 이념과 진영 같은 집단에 속하지 않은 ‘단단한 개인(작가이지 논객인 이선옥의 표현)’의 몫일 것이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세대가 열 것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친일 대 반일’ ‘독재 대 민주’ ’보수(우파) 대 진보(좌파)’와 같은 이념의 시대를 살았다. 자유주의와 개인주의는 숨 쉴 공간이 없었다. 사람 나고 이념 났지, 이념 나고 사람 난 게 아니다. 예수 말대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을 위해 존재한다면 이념의 노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 서거 직후인 2009년 8월에 기고한 칼럼 ‘2039년의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썼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죽었을 때, 대중은 비로소 왕조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그가 죽고서야 마음속 ‘조선’은 사라졌다. (...) 30년 후인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죽었을 때, 대중은 비로소 독립운동의 시대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이미 한반도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죽고서야 마음속 ‘통일된 조국’이 미련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 30년 후인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죽었을 때, 대중은 비로소 독재시대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YH 사태·부마항쟁 등 철권통치의 벽에 금이 가기 시작했으나 그가 죽고서야 마음속 ‘두려움’이 사라졌다. (...) 30년 후인 2009년 8월 18일 김대중이 죽었을 때, 대중은 비로소 민주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실감했다. 민주화운동 출신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이 연속으로 대통령이 되고, 선거를 통한 평화적 정권 교체가 자리 잡았지만 그가 죽고서야 마음속 ‘민주화 시대’는 막을 내렸다. (...) 30년 후인 2039년 우리는 또 한 명의 위대한 지도자를 잃을 수 있다. 그가 누구일지는 알 수 없으나 지난 세대의 지도자들이 그랬듯이 다음 세대의 지도자도 ‘위대한 유산’을 남길 것이다. (...) .”

 

다음 세대의 지도자는 보수주의·진보주의를 넘어서는 ‘자유주의’와 집단주의에 맞서는 ‘개인주의’로 무장하고 나타날 것이다. ‘전체주의’로 가고 있는 민주당을 이길 주체는 ‘올드 라이트’나 ‘뉴 라이트’는 아니다. 역사 전쟁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세대만이 과거에 갇혀 있는 세대를 극복할 수 있다.

 

X세대인 1973년 한동훈과 M세대인 1985년 이준석의 등장은 자유주의와 개인주의 지평 확대에 도움이 될 것이다. 1960년대생 오세훈 서울 시장, 1970년대생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 1980년대생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의 경쟁은 세대교체를 가속화할 것이다. 뒤를 보면서 걸으면 빨리 갈 수도, 멀리 갈 수도, 똑바로 갈 수도 없다. 앞을 보고 걸어야 한다. 미래를 향한 경쟁에서 보수 진영이 한발 앞서가기 시작했다. 민주당도 과거 전쟁에서 벗어나 미래 경쟁을 해야 한다.

 

-박성민 정치컨설턴트, 조선일보(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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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와 경기도까지 번진 '격노' 바이러스

 

보통 사람들은 화가 나도 표출 못 하고 쌓아 두는데
격노는 권력자들의 특권.. 절제 없는 격노, 심판받을 것
 

 

더불어민주당 정청래, 최민희 의원.

 

야당의 공세가 효과를 거둔 것인지 격노 하면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1년 전 해병대원 사건 시작이 대통령 격노였다는 게 야당 주장이고, 대통령실은 아니라고 반박한다. 여권에선 “대통령은 화도 못 내냐”고 했다. 그러나 사건 전후로 용산 주변에서 대통령의 격노와 고성(高聲) 이야기가 계속됐다는 게 찜찜한 구석이다.

 

어느 때부터 대통령실 근무자들에겐 상관들 심기 관리가 일과가 됐다고 한다. 최상부에서 격발된 격노가 수석 및 비서관급으로 완충지대 없이 전달되고, 결국 실무자에게 도착하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누군가는 “큰 소리가 자주 들렸다”고 했고, 다른 누구는 “질책을 듣고 너덜너덜해진 수석을 마주하는 게 힘들었다”고 했다. “화를 내지 않으면 일이 안 돌아간다”는 말을 들었다는 인사도 있다.

 

여당 참패로 끝난 4월 총선 이후 대통령실서 나오는 격노 이야기는 뜸해졌다. 그런데 이젠 여의도로 ‘격노 바이러스’가 퍼졌다. 상임위원장 최민희는 탈북자 의원에게 전체주의 국가에서 살다 보니 민주주의도 모르느냐고 했고, 여성 공직 후보자에게는 뇌 구조를 물었다. 군미필자 정청래는 제복의 장군에게 일어나라, 앉아라, 나가라고 명령했다. 이 정도 혐오와 차별, 모욕이면 형사처벌까지 각오해야 하지만, 이들에겐 완장과 면책특권이라는 방패가 있다. 200석 가까운 의석을 확보한 총선 결과가 격노에 거침없는 날개를 달아줬다.

 

용산의 격노가 베일에 싸여 있다면 여의도 격노는 유튜브를 통해 무한대로 퍼진다. “퇴장하라” “몇 살이냐”는 고성은 지지자들에게 보내는 구애 신호다. 놀라운 건 국회 경력 두 달 남짓의 초선들까지 “건방 떨지 말라” “웃지 마라”며 격노의 옥타곤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이다. 컵라면을 끓인 여직원에게 격노했다는 경기지사 동영상은 스위트남의 ‘미담’인 줄 알았더니 연출 논란의 ‘괴담’이 됐다. 용산, 여의도 곳곳이 격노와 고성으로 몸살이다.

 

그렇다고 격노를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버럭 화를 낸다는 것은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자의 특권이다. 눈치 볼 일 없는 사람들만 소리 지르며 화낼 수 있다. 보통 사람들은 참는다. 화낸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화내는 사람이나 화를 받아내야 하는 사람 모두에게 분노는 득보다 실이 크다. 격노는 권력 남용과 갑질로 가는 입구다.

 

격노하면 일이 내 뜻대로 풀리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건 착각이다. 눈앞에서만 복종할 뿐 조직은 망가지는 데, 그게 권력자에겐 보일 리 없다. 칼이 두려운 건 칼집에 들어 있을 때다. 일단 휘둘러 버리면 그때부터는 너 죽고 나 살자의 투쟁이다. 칼집 속 칼처럼 분노도 가슴에 품고 있을 때가 가장 무섭고 두렵다.

 

영국 밴드 오아시스는 ‘화내며 돌아보지 말라(Don’t Look Back In Anger)’ 노래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유권자들은 4년 또는 5년 동안 임시로 부여된 권력이 격노라는 특권을 제 것인 양 휘두르는 것을 보며 분노를 꾹꾹 담아 둔다. 어떤 누적된 분노는 병이 되기도 하고, 어떤 축적된 분노는 금메달의 원동력이 됐다. 권력자들의 격노와 달리 유권자들은 분노를 새겨두며 터트릴 때를 기다린다. 4월 총선에서 권력을 향해 누적된 분노가 한번 터졌고 이제 다음 심판 대상을 노리고 있다. 절제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땅속 마그마처럼 꿈틀거리고 있음을 용산과 여의도 모두 명심해야 한다.

 

-정우상 논설위원, 조선일보(24-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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