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 문학상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 .... [아, 2024 노벨상]
[노벨 문학상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
[우리는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아시아 여성 작가 첫 노벨 문학상의 주인공 ‘한강’]
[아, 2024 노벨상]
노벨 문학상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
세계가 K컬처 동경하는 시대
일등공신은 외국인 번역자들
노벨 문학상 받고도 왈가왈부
픽션은 역사도 다큐도 아니다
노벨 문학상 발표 후 서울 광화문 책마당에 전시된 한강의 대표작과 책을 읽는 사람들 /권재륜 사진작가
10여 년 전 미국 연수를 갔다가 마트 계산대에서 언어적 충격을 받았다. “Paper or Plastic?” 페이퍼 뭐라고?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미국인이 충청도 속도로 느리게 다시 물었다. “Paper, or, Plastic?” 그 영어 실력으로 어쩌자고 아메리카에 왔어, 하는 표정으로. 구매한 물건을 종이봉투와 비닐봉지 중 무엇에 담을지 묻는 것이었다. 성문종합영어로 배운 이론과 실제는 사뭇 달랐다. 소통이 안 되는 외로움의 괴로움이여.
올해 노벨 문학상은 그래서 더 놀라운 일이다. 한강이 세계적인 작가가 되도록 길을 터 준 것은 문학 에이전시나 글로벌 출판사가 아니라 한국 문학에 흥미를 느낀 외국인 번역가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번역에는 ‘출발어’ ‘도착어’가 있다. 직항이 없을 때 환승하는 것은 그 세계에서도 매한가지. 변방의 언어로 쓴 글일수록 결국 영어로 어떻게 도착하는지가 중요하다. 한국 문학은 영어(직항) 또는 프랑스어(환승)로 옮겨져야 비로소 주류 무대에 진출한 것이다.
한국인 첫 노벨 문학상의 숨은 MVP는 데버라 스미스다. 한국어를 독학하다 한국학 석·박사 과정을 밟은 이 영국 여성은 좋아하는 작품을 공유하고 싶어 자발적으로 ‘채식주의자’를 번역했다. 스미스는 “아내가 채식을 시작하기 전까지 나는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Before my wife turned vegetarian, I’d always thought of her as completely unremarkable in every way)”로 시작하는 이 소설로 2016년 한강과 함께 맨부커상을 공동 수상했다.
소설가 한강(오른쪽)과 번역가 데버라 스미스. 스미스는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뒤 서울 연희문학창작촌에 여러 번 입주해 작업했다. /맨부커상 공식 X(옛 트위터)
세속적으로 노벨 문학상이 문학의 최고봉이라면, 한강은 이 길잡이와 함께 등정 루트를 개척한 셈이다. 스미스에게 문화적 열등감 따위는 없었다. ‘소주’를 ‘코리안 보드카’로, ‘만화’를 ‘망가’로 옮기자는 영국 편집자들과 싸우며 원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그 이유를 묻자 “해외 독자들이 한국 문학에 점점 익숙해지면 소주·만화 등 한국적 문화 산물이 스시·요가처럼 쉽게 이해될 날이 올 것”이라고 답했다.
영화 ‘기생충’의 아카데미 4관왕 뒤에도 미국인 번역가가 있었다.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거 없나?”를 “Wow, does Oxford have a major in document forgery?”로 바꿔 1인치의 장벽을 명랑하게 돌파한 달시 파켓. 원작의 목소리와 개성을 살리면서 최적의 착륙 지점을 찾아낸 일등공신이다. 서울살이 25년이 넘은 그는 “한국은 몰라보게 발전했지만 한국 사람들이 행복한지는 모르겠다”며 “한국의 다음 숙제는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정신 건강”이라고 했다.
K팝, K무비, K드라마, K푸드에 이어 한국 문학까지 세계가 한국과 K컬처를 동경하고 있다. 이 호시절에 가장 시대착오적이며 정신 건강을 해치는 집단은 정치권이다. 고성, 비난, 혐오 등 국회를 지배하는 언어는 얼마나 저열하고 낯뜨겁고 험악한가. 국정감사장에서 으르렁거리다 노벨 문학상 소식에 일제히 싸움을 멈추고 박수치며 웃는 장면은 그로테스크했다.
한국 사회 일각이 한강의 소설을 둘러싼 왈가왈부로 소란하다. 어떻게 읽든 독자의 자유지만 픽션은 역사도 다큐도 아니다. 기뻐하고 축하해야 온당한 일인데 자신의 독법과 역사의식을 강요하며 “당신은 좌냐 우냐?”고 묻는 야만을 목도한다. 편 가르기는 그만하자, 정신 건강에 해롭다. 창작과 번역 작업을 더 지원하고 제2의 데버라 스미스, 달시 파켓이 등장할 수 있도록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잔칫상을 엎을 때가 아니다.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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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한강 읽기는 둔감의 굳은살 깎여 나가는 아픔
노벨상으로 우리의 집단적 기억이 보편성 획득
‘추앙’보다 공동체 ‘메타 스토리’ 생성 넘치길
한강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 몸이 아프다. ‘채식주의자’를 수년 전 처음 읽었을 때도 그랬고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난 지금 다시 읽어 보아도 그러하다. 일상이라는 견고한 성채를 쌓고 살아가면서 나날이 늘어가는 뱃살과 함께 너절한 세상을 비웃는 신공으로 무장한 심지어 나 같은 중년 남자에게도 그러하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이를테면 그런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 사회에서 자리를 잡아가면서, 타인들에게 시달리면서, 스스로 무기력함에 익숙해지면서, 지하철에서 각자의 휴대전화를 들여다보면서, 우리는 온몸에 각질처럼 굳은살을 붙여오지 않았겠는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몰래 고통과 슬픔을 겪으면서 삶을 견디고 있음을 정면으로 직시케 하는 것이 한강의 소설이라면, 그 둔감의 각질이 사포에 깎여 나가는 듯한 아픔은 문학의 위대한 힘이라 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을 “K문학의 쾌거”인 것처럼 축하하는 것이 나는 못내 어색하다. 마치 올림픽에서처럼 한국 문학이 보다 예쁘고 훌륭한 글을 뽑는 경연대회에서 다른 나라의 문학을 물리치고 더 나은 평가를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히려, 작품을 통해 형상화된 우리의 공동체가 지니고 있는 집단적 기억과 슬픔이 인류의 보편성으로 이해될 준비가 되었다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축하할 일이라기보다는 경건해야 할 일이고, 지금까지 작가가 이룬 성취만큼이나 앞으로 우리에게 많은 숙제가 남은 셈이다.
노벨 문학상 수상 결정 이후 쏟아진 이야기들은 사실 일방적인 ‘추앙’의 기사들이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한강 작가의 작품을 둘러싼 ‘메타 스토리’는 충분히 생성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은 우리의 몫이라 생각한다. 예컨대, ‘소년이 온다’를 읽는 것은 5·18에 대한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집단적 기억을 공유하는 계기가 되겠지만, 또한 수많은 독자가 자기만의 이야기를 덧붙일 수 있는 이야기의 공간이 생긴 것이라고 본다. 그 공간은 한강 작가 덕분에 여느 때보다 아주 많은 사람이 말할 수 있고 서로를 들어줄 수 있는 공간이 될 것이다. 한 사람이 쓴 이야기가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틔우는 것이 문학이다.
‘채식주의자’를 읽은 사람이 수백만 명이 넘어서는 순간, 그리고 이들이 가부장, 여성, 환경, 소수자, 폭력, 예술에 대한 생각을 잠깐이라도 해본다면, 그리고 이들 중 1%라도 주변을 돌아보고 옆 사람의 슬픔을 이해하려 노력한다면, 우리 공동체는 적어도 그만큼 나은 곳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말하고 싶은 ‘메타 스토리’란 그런 것이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 혹은 어제의 이야기가 새로운 이야기의 싹을 틔우고 새로운 이야기의 레이어를 만들어 오늘의 나와 우리에게 남기는 그런 흔적들. 그런 사소한 흔적들이 퇴적되어 세상은 바뀔 것이다.
노벨 문학상이 결코 추앙의 대상이 아니며 그것이 생성하는 ‘메타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는 점은 사실 2015년 수상자인 알렉시예비치의 작품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다. 수많은 보통 사람의 증언을 모으고 이들의 낮은 목소리를 통해 전쟁, 소비에트, 체르노빌이 남긴 고통을 담담하게 그린 작품들은, 또다시 수많은 사람이 읽고 풍부한 새로운 ‘메타 스토리’들을 만들면서 인류의 보편적인 자산과 지혜로 남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공론장이라고 하면 노벨 문학상만큼 좋은 공론장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수상 결정 이후 쏟아진 또 다른 뉴스는 서적 판매 사이트들이 마비되거나 책이 품귀되고, 사람들이 줄을 서서 책을 사려는 모습이었다. 아마도 한동안 한강 작가를 비롯한 문학 도서 읽기 붐이 불 것만 같다. 그러나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문학적 감수성을 누릴 마음의 준비가 되었는지, 특히 우리의 아들딸들에게 그런 기회를 누릴 준비가 됐는지는 의문이다.
문학은 근본적으로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 보는 것, 혹은 타인의 삶과 생각을 이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토대가 아니겠는가. 공감하는 시민, 협력하는 정치를 우리 공동체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된 것도 결국 문학 교육의 실종과 맥을 같이하지 않나 생각한다. 우리는 그런 모범이 되고 있는가. 우리는 그런 후속 세대를 기를 수 있는가. 우리는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문득 이 지점에서 내일 재·보궐선거, 특히 서울시교육감을 뽑는 보궐선거를 생각한다. 정당 깃발조차 없이 빨강과 파랑의 색깔만 남아 있고, 역사 교육에 대한 진보와 보수의 앙상한 슬로건만 외쳐지는 선거이다. 메타 스토리는커녕 제대로 된 스토리도 없는 선거이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이끌 것이며 이들이 만들어갈 미래의 공동체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정말 소설을 읽을 준비가 되었는가.
-박원호 객원논설위원·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동아일보(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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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여성 작가 첫 노벨 문학상의 주인공 ‘한강’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한국 소설가 한강(54·사진)이 선정됐습니다. 한국 작가가 이 상을 받은 건 처음이며 아시아 여성 작가로도 최초입니다. 아시아 작가로 과거에 이 상을 받은 사람은 인도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1913년),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와 오에 겐자부로(1994년), 중국의 모옌(2012년) 등 4명뿐입니다.
1970년 광주에서 태어난 작가는 소설가였던 아버지(한승원) 아래서 일찍부터 한국 소설과 함께 성장했습니다. 그는 1993년 ‘문학과 사회’에 시 ‘서울의 겨울’이, 199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며 본격적인 작가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2005년에는 심사위원 7명의 전원 일치 평결로 소설 ‘몽고반점’이 이상문학상 대상을 받았는데, 당시 아버지(1988년)에 이어 2대가 같은 상을 받은 것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뛰어난 문학적 성취로 주목받았던 한강은 2016년 ‘채식주의자’로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 인터내셔널상을 수상하면서 일반 국민에게도 널리 알려졌습니다. 이후 눈부실 정도의 수상 소식이 이어졌습니다. 2017년 ‘소년이 온다’로 이탈리아 말라파르테 문학상을, 2018년 ‘채식주의자’로 스페인 산클레멘테 문학상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또 지난해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로 메디치 외국문학상을 수상했고, 마침내 올해 노벨 문학상을 받았습니다.
한강은 인간의 폭력성이 가져오는 삶의 모순, 그리고 약자들의 상처와 비극을 집요하게 탐구해 온 작가로 꼽힙니다. 이번 노벨 문학상도 그녀의 작품이 가지는 소수자성에 주목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수상 발표에서 “그녀의 작품은 폭력, 슬픔, 가부장제 등 다양한 장르를 탐구하며 경계를 넘나든다”고 평가했습니다.
한국 독자들은 지금까지 노벨 문학상이 발표되면 수상 작가 작품 중 한국어로 번역된 것이 있는지부터 찾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릅니다. 한국어로 바로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어가 비록 오랜 역사를 지닌 언어라고는 하나 전 세계에서 사용하는 인구는 8200만 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문학과 한국어는 더 이상 한 국가의 언어와 문학이 아니라 세계 문학의 중심에 놓이게 됐습니다. 이것이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일 것입니다.
-이의진 도선고 교사, 동아일보(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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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024 노벨상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어느 해보다 올해 노벨상은 참신했다. 신경망 인공지능의 대부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제프리 힌턴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고, 알파고를 갖고 한국을 방문한 데미스 허사비스가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인공지능 알파폴드 개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노벨 생리의학상은 마이크로RNA(miRNA)의 유전자 조절을 규명한 빅터 앰브로스와 게리 러브컨에게 돌아갔다. 마이크로RNA 분야를 개척한 김빛내리 교수와 인공지능을 통한 단백질 연구 선구자인 백민경 교수가 아깝게 노벨상을 놓쳤다는 보도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에 전 국민이 행복해서 그런지, 올해는 노벨 과학상 불발에 대한 자조 섞인 한탄은 별로 없는 거 같다.
올해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모두 한 분야를 개척해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다. 기호 인공지능 패러다임이 지배적이었던 시절, 힌턴은 신경망 인공지능이 가능할 뿐 아니라 기호 인공지능보다 뛰어날 수 있다고 믿고 이를 증명하는 데 일평생을 바쳤다. 기존 패러다임에 도전하는 이런 업적은 옛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학자들에게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미국 학계가 새 이론에 개방적일지라도, 올해 노벨상을 받은 앰브로스는 마이크로RNA 연구를 담은 획기적 논문을 낸 뒤에도 하버드 대학에서 종신교수가 되지 못하고 다른 대학으로 옮겨야 했다.
노벨상의 역사를 뒤져보면 나중에 노벨상을 받은 논문이 처음에는 인정받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하다. 국제 학술지 ‘피직스 레터스’(Physics Letters)는 힉스 입자를 예견한 피터 힉스의 논문에 퇴짜를 놓았고, 고교 생물학 교과서에 나오는 크렙스 사이클을 주창한 한스 크렙스의 논문도 네이처지(誌)가 출판을 거부했다. 그렇지만 외국에서는 이런 연구를 낸 연구자가 계속 살아남아 연구하는 환경이 갖춰져 있다. 우리 사회는, 우리 과학계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여는 연구를 격려하고 있나? 실제로는 적당한 수준의 연구에 만족하면서 노벨상 철에만 혁신적 연구를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아닌가? 1년에 한 번 있는 노벨상 발표 때라도 우리 스스로 진심 어린 반성과 성찰을 해야 할 것 같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조선일보(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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