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발해사 중국사라는 中 정부의 자가당착] [광개토대왕릉비]
[고구려-발해사 중국사라는 中 정부의 자가당착]
[광개토대왕릉비]
[실크로드 7000km 대장정]
[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고구려-발해사 중국사라는 中 정부의 자가당착
약 10년 전 중국 홍산(紅山)문화 중심지인 중국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츠펑(赤峰)시 발굴 현장을 취재했을 때 일이다. 홍산문화는 기원전 4700년∼기원전 2900년경 요하(遼河) 서쪽 일대에서 번성한 신석기 문화. 그런데 시내에서 차로 2, 3시간 거리의 아오한치(敖漢旗) 박물관에서 기묘한 광경을 목격했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옥과 채문토기(彩陶·채색 안료로 무늬를 그린 토기)만 집중적으로 전시돼 있을 뿐, 한반도와 교류 흔적을 보여주는 빗살무늬토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옥과 채문토기는 중원 문명의 영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당시 동행한 국내 고고학자는 “홍산문화가 중원 문명의 원류로 선전되면서 예외적으로 출토되는 채문토기가 요하 지역을 대표하는 선사 유물로 둔갑했다”고 말했다. 민족이나 영토 관념조차 없었던 선사문명마저 중화민족의 역사 속에 끼워 넣은 것이다.
최근 중국의 동아시아 고대사 왜곡 시도가 지성의 요람인 대학 교육에까지 손길을 뻗치고 있다. 중국 정부가 올 3월 발간해 대학교재로 보급한 ‘중화민족 공동체 개론’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선사시대부터 시진핑 집권 이후 최근까지 중국 내 소수민족들의 수천 년간 역사를 정리했다. 이 중 “당나라 당시 동북방에 고구려, 발해 등 변방 정권이 연속해 있었다. 이들은 모두 한자를 썼고 역대 중원 왕조의 책봉을 받았다”는 내용이 문제시되고 있다. 고구려와 이를 계승한 발해를 한반도가 아닌 중국의 변방사로 규정한 것이다.
책은 한 발 더 나아가 고려의 고구려 계승까지 전면 부정하고 나섰다. 본문에 “918년 왕건이 한반도에 신라인을 주체로 고려 왕조를 세웠는데, 약칭이 마찬가지로 ‘고려’이지만 이전의 고구려나 당나라 번속이던 발해와는 계승 관계가 전혀 없다”고 주장한 것. 고려 문신 서희가 993년 자국을 침공한 거란의 소손녕에게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천명한 사실과 배치된다. 이는 고려사뿐 아니라 중국 송사(宋史)에도 기술된 역사적 사실이다. 시진핑이 주창한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원’의 선조들이 남긴 역사 기록마저 스스로 부정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역사 왜곡 아닌가.
최근 세계 역사학계는 고대로부터 중원과 변방 민족의 상호작용이 수평적으로 이뤄졌다고 보고 있다. 중원의 고급 문화가 변방에 일방적으로 흘러간 게 아니라, 서로 이점을 주고받으며 상호 발전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크 에드워드 루이스 미국 스탠퍼드대 교수는 ‘하버드 중국사’ 시리즈에서 북위, 북주, 북제 등 변방 유목민족의 문화가 중원 왕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썼다. 예컨대 당나라 측천무후가 황제에 오를 때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한 것은 군주를 신의 화신으로 본 유목민족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것. 이처럼 수당 왕조는 5, 6세기 북중국을 지배한 변방 민족들로부터 많은 제도와 관행을 흡수했다는 것이 세계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중국은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앞세운 ‘중국몽’에서 깨어나 역사를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미중 갈등에 이어 한국 등 주변 동아시아 국가들과 불필요한 역사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상운 문화부 차장, 동아일보(24-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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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넓은 영토 개척한 광개토대왕…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 업적 기록해
청나라 관리들 이끼 없애려 불내고 일본은 비석의 내용을 조작해 발표
고구려, 일·중 역사 왜곡 대상 됐죠
현충일 전날인 지난 5일, 국립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묘비에 한 남성이 큰 'X'자 모양으로 흰색 스프레이를 뿌려 경찰에 붙잡혔어요. 비석은 중요한 사건을 기록하거나 특별한 사람을 기리기 위해 세워져요. 그래서 이번 사건처럼 비석 글자에 낙서를 하거나 글자 자체를 깎아 훼손하는 일도 생기죠. 동아시아의 고대 역사를 알 수 있는 소중한 기록인 광개토대왕릉비도 예전에 비석 훼손으로 몸살을 앓았다고 해요. 역사 왜곡 문제와도 연관이 있답니다.
◇1880년 이끼로 덮인 광개토대왕릉비 발견되다
1880년 청나라 지린성에서 한 농부가 이끼와 덩굴에 덮여 있는 거대한 돌덩어리를 발견했어요. 높이는 6.39m, 무게 37t이나 되는 범상치 않은 크기였죠. 이끼가 끼어 확실하지 않지만 누군가의 비석 같았어요. 큼직한 비석이 매우 중요한 유물일 것이라고 직감한 농부는 지방 정부에 비석을 발견했다는 사실을 알렸어요.
그 후 청나라 지방 관리들이 찾아와 비석에 끼어 있는 이끼를 쉽게 없애기 위해 비석에 쇠똥을 바르고 불을 질렀어요. 이끼를 험하게 걷어내다 보니 비석의 몸에 균열이 생기고 표면이 터져 나가는 등 심각한 손상이 발생했고 글자가 훼손됐어요. 비석의 꼭대기까지 타는 데 무려 한나절이나 걸렸어요. 비바람과 세월, 그리고 불 때문에 닳은 글자를 바로 알아보기는 어려웠어요. 비석 위에 먹을 발라서 종이에 찍어내는 '탁본'을 해야 내용을 읽을 수 있었죠. 비석에 새겨진 글자는 무려 1775자나 됐어요.
과연 이 비석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그의 정체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 호태왕'이라고 적혀 있었어요. 풀이하면 '국강상 지역의 무덤에 있으며, 넓은 영토를 개척하고, 나라를 평안하게 했던 사랑스러운 왕 중의 왕'이란 뜻이에요. 호태왕은 고구려의 제19대 왕 광개토대왕이랍니다. 이 비석은 광개토대왕릉비였던 거죠.
광개토대왕릉비가 발견된 지린성은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였던 국내성이 있던 곳이에요. 광개토대왕의 아들이자 고구려의 제20대 왕인 장수왕이 414년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며 비석을 세운 것이지요.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출생에서부터 광개토대왕까지의 왕위 계승에 대한 내용이 기록돼 있어요. 영토를 크게 넓히고 국경의 정비 사업을 펼친 그의 업적도 낱낱이 써 있어요. 또 당시 전성기를 누렸던 고구려가 주변 국가들과 어떻게 싸워 이겼는지 세세하게 나와 있답니다.
◇비석 위에 적힌 문장, 역사 왜곡 표적 돼
1883년 일본은 청나라 스파이 역할을 하는 첩보 장교 사코 가게노부를 만주에 파견했어요. 그는 광개토대왕릉비가 청나라에서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고 비석을 찾아가 탁본을 떴어요. 사코는 이것을 일본군 참모부에 전달했죠. 일본은 이 탁본을 바탕으로 1884년 본격적으로 광개토대왕릉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해 5년 뒤인 1889년 비석 문장 해석을 발표해요.
그런데 역사 왜곡으로 추정되는 수상한 내용이 있었어요. '신묘년(391)에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신라를 무찔러 신하의 나라로 삼았다'는 거예요. 역사학자 대부분은 '신묘년 고구려가 왜구와 백제를 격파하고 신라를 구원하여 (고구려가 신라를) 신하로 삼았다'는 내용으로 해석해요.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여러 기록과 유물, 유적을 통해 고구려가 신라를 도와주기 위해 백제와 왜 연합군을 물리쳤다는 해석이 타당하고 정확함을 알 수 있거든요.
광개토대왕릉비 탁본 중에는 석회로 한자를 덮고 위에 다른 한자를 새긴 '석회 탁본'이 있어요. 1970년대부터 한·중·일 역사학자들은 석회 탁본이 일본군 참모부의 소행인지를 두고 논쟁해 왔어요. 중국 학자는 현지인들을 인터뷰하고 문헌 기록을 추적해 일본군과 무관한 중국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주장했어요. 그러나 석회 탁본 내용이 일본의 역사 왜곡에 유리하기 때문에 정황상 일본군 소행이라는 반대되는 주장도 있지요.
일본 학계는 광개토대왕릉비 구절을 마음대로 해석한 뒤, 고대에 왜가 한반도 남부 지역을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해요. 4세기 후반 일본이 한반도 남부 지역인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했다는 거예요.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통치하였다고 주장하지요. 일본 학계는 이런 주장을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본사' 교과서에 싣기도 했어요. 이에 대해 양심 있는 학자들로 구성된 한·일 역사공동연구위원회에서는 지난 2010년 임나일본부설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혔답니다. 일본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으려는 노력이지요.
그런데 2015년 검정 통과된 일본 중학교 역사 교과서에 여전히 '신라가 일본에 조공을 바쳤다'는 등 역사를 왜곡한 내용이 실렸다고 해요. 게다가 중국 정부는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중국 소수민족 역사로 편입하는 동북공정 정책을 펴고 있지요. 주변 나라들의 역사 왜곡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세요. 국외에 위치한 중요한 문화재도 앞으로 더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야 한답니다.
-기획·구성=김지연 기자/지호진·어린이 역사 전문 저술가, 조선일보(1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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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릉비
[고대사의 진실을 찾아서]
광개토왕릉비문 논란
日 '임나일본부설' 근거로 삼고, 韓 "고구려가 倭 격파" 주장
나머지 1750자에도 주목해야
414년 고구려 장수왕은 아버지 광개토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대한 비석을 수도 국내성에 세웠다. 그로부터 150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1880년 무렵 재발견된 이 비는 오늘날 국제적 논쟁거리의 하나가 되었다. 광개토왕릉비에는 1775자가량의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문헌 자료에 없는 많은 역사상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광개토왕릉비문이 논란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 핵심은 '신묘년(辛卯年)' 기사이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신라·가야 및 왜(倭)가 맺고 있던 국제 관계가 20자(字)란 아주 짧은 문장에 담겨 있으며, 이 문장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고대의 한·일 관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난 2004년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독립기념관을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장에 마련된 광개토왕릉비 모형과 비문 탁본을 둘러보고 있다.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는 건 백제 정벌 명분 내세우기 위한 고구려의 과장' 가능성
비문이 재발견된 초기부터 일본은 신묘년조를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 와서 백잔(백제)과 □□□羅(가라·신라)를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而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라는 판독과 해석을 통해 '임나일본부설(說)'의 근거로 삼았다.
이에 정인보는 이 문장에서 주어인 고구려가 생략되었다는 이른바 '고구려 주어설'을 주장했고, 박시형·김석형·정두희 등의 다양한 해석으로 이어졌다. 고구려가 왜를 격파하였다거나 고구려가 백제·신라 등을 신민으로 삼았다는 해석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가운데 1972년 재일(在日) 사학자 이진희가 일본 육군참모본부가 비문을 변조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문 연구는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그리고 1981년 중국의 왕젠췬(王健群)이 현지 중국인 탁본공에 의해 석회가 발라지고 비문이 변조됐음을 확인했다. 그래서 지금은 석회를 바르기 이전에 만들어진 원석(原石) 탁본을 비문 연구의 주자료로 삼고 있다. 특히 그동안 '海'로 판독되었던 글자는 변조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원석 탁본에 의거해 '每' '泗' '浿' '�' 등 여러 글자로 판독하여 해석이 분분하다.
중국 길림성 고고문물연구소 주운태의 광개토왕릉비 탁본. 점선 안이 ‘신묘년 기사’이다. /전재홍 기자
글자 판독만이 아니라 문장 해석도 각양각색이다. 많은 견해가 당시에 결코 왜가 백제나 신라를 신민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정황론을 전제한다. 하지만 비문이 반드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는 보장도 없다. 예컨대 백제와 신라가 고구려의 오랜 속민(屬民)이라는 비문 기사부터 과장되어 있다. 그래서 기왕의 판독대로 왜가 백제와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되 이는 고구려가 백제 정벌의 명분으로 내세우기 위해 과장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즉 신묘년 기사는 사실이 아니라 당대 고구려인의 필법에 따른 허구라는 관점이다. 또 비문에 보이는 여러 민(民)의 용례가 '고구려 태왕(太王)의 민'이란 의미라는 점에 근거하여 신묘년조에 기록된 신민(臣民)의 주체 역시 고구려 왕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같이 당대 고구려인의 시각에서 비문을 해석하는 근래의 연구는 '훈적비(勳績碑)'라는 본래 성격을 고려할 때 매우 유효한 연구 방법이다.
신묘년 기사는 문자 판독과 문장 해석, 역사상 이해가 서로 충돌하면서 판독문을 확정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는 무엇이 정답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이제는 신묘년 기사에 집착하기보다 비문 전체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비문에는 거란·숙신·후연 등을 포함한 당시 동북아 전체의 역사를 그려볼 수 있는 단서가 담겨 있다. 천하관(天下觀)등 동북아 최고 수준의 고구려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내용도 풍부하다. 그럼에도 20자의 신묘년 기사에 가려 나머지 1750여자에 담겨 있는 역사상이 아직 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는 1500년 전 고구려인이 쓴 광개토왕릉비문을 근대 한·일 관계사를 재구성하는 텍스트로 이용한 결과이다. 이에 대한 성찰에서 비문 연구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임기환 서울교대 교수, 조선닷컴(16-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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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7000km 대장정
‘광개토왕비’를 처음 발견한 자들은 조선의 심마니였다
"광개토대왕비 건립 1600주년 역사관 확립 계기 마련해야"
가욕관을 빠져나와 다시 서쪽으로 향한 감신공로(甘新公路)를 탄다. 길은 황량한 벌판을 가로지른다. 먼지 때문인가? 하늘이 온통 뿌옇다. 하늘과 땅의 색이 거의 같아 지평선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안 된다. 아지랑이 춤추는 도로에서 순간 몽롱함을 느낀다. 내가 탄 자동차가 마치 한 장의 화지 위에 붓이 되어 흘러감을 느낀다. 어디로 가는가? 길은 맞는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좌종당
얼마를 달렸을까. 눈을 뜨니 울창한 버드나무가 보인다. 잠깐 눈을 감았다가 뗀 사이에 버드나무 가로수가 나타나다니, 마치 사막 속에서 무릉도원을 만난 느낌이다. 이 버드나무는 일명 좌공류(左公柳)라고 부르는데,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인 좌종당(左宗棠)이 심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주천공원의 우물에 있던 커다란 버드나무도 좌공류였다. 당시 좌공류는 삼천리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지나며 훼손되어 지금은 가욕관에서 신강성에 이르는 길에서 드문드문 볼 수 있다.
하서주랑에서 볼 수 있는 좌공류
좌종당은 중국 서북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도와 위구르 민족의 반란을 평정한 사람이다. 그는 나무심기를 좋아했는데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지금의 신강으로 향할 때, 이곳 하서주랑을 지나게 되었고 군사들에게 명령해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나무를 심고 나면 그뿐, 아무도 관리하지 않았다. 귀찮고 이득 없는 일을 굳이 나서서 할 일이 무엇인가. 이 핑계 저 핑계로 미루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좌종당이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는 길에 살펴보니 당나귀가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먹고 있는데도 어느 누구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좌종당은 즉시 당나귀를 잡아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고루 앞에서 목을 잘라버렸다. 그러고 나서 선포하였다.
“만약 또다시 나무를 상하게 하는 당나귀가 있다면 주인까지도 똑같은 죄로 다스릴 것이다.”
소문은 삽시간에 퍼지고 그 후로는 버드나무를 훼손하지 않아 오늘의 멋진 풍경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좌종당과 동향 친구인 양창준(楊昌浚)은 좌종당의 업적을 찬양하는 헌시(左公柳)를 지었다.
장군은 변경에서 돌아올 기약 없고
大將籌边尙未还
고향의 식구들만 천산에 가득하네
湖湘子弟滿天山.
새로 심은 버드나무 삼천리 길이
新栽楊柳三千里
봄바람에 이끌고 옥문관에 이르네
引得春風度玉關.
좌종당, ‘광개토대왕비’ 세상에 알리다
좌종당은 청나라 정치가이지만 우리에게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조선 영조 때인 1770년, 홍봉한(洪鳳漢) 등이 왕명을 받아 ‘문헌비고(文獻備考)’를 편찬하고, 정조 때인 1782년에 석학 이만운(李萬運)이 9년에 걸쳐 보완하여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를 지었다. 이곳에 보면 광개토대왕의 비문 발견 과정이 자세하게 나와 있다.
좌종당 초상
“성경성(盛京省) 회인현(懷仁縣) 통구(通溝) 등지는 바로 서간도의 경내이다. 그 땅이 압록강 오른쪽 언덕을 베고 있는데, 구련성(九連城)과의 거리가 150리다. 지금부터 300년 전에 한 비(碑)가 산골짜기 가운데서 발견되었는데, 고종 19년(1882년)에 청나라 성경장군(盛京將軍) 좌종당(左宗棠)이 비로소 사람을 사서 발굴하니, 바로 고구려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문(碑文)이었다. 비의 높이가 1장(丈) 8척이고, 남북 양쪽 면은 5척 6, 7촌, 동서는 4척 4, 5촌인데, 4면에 글자를 새겼다. 남쪽 면은 11행, 서쪽 면은 10행, 북쪽 면은 13행, 동쪽 면은 9행인데, 줄마다 41자(字)로 합계 43행 1,759자이다. 그 글이 심히 간결하면서도 고아(古雅)하여 동국 사기(史記)의 빠진 글을 보충하였는데, 황초령정계비문(黃草嶺定界碑文)과 함께 이 비의 전문을 수록하여 참고자료로 삼고자 한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개국하면서 자신들의 발상지를 신성시하여 만주 지역에 출입을 금지했다. 그 와중에 조선의 심마니들이 그곳에 묻혀 있던 비석을 발견하였지만, 그것이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비석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것은 좌종당 덕분이다. 그 뒤 1907년에 프랑스의 에두아르 샤반느(Edouard Chavannes)가 직접 만주를 탐방한 뒤 이 비석을 탁본해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고구려 광개토대왕비는 길림성 집안시에서 동북으로 3.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지점에 있다. 비문은 고구려 제19대 왕으로서 4세기 말부터 5세기 초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하여 동북아시아의 절대 강자로 군림한 훈적(勳籍)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광개토대왕의 정식 시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일반적으로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라고 부른다. 이 비를 중심으로 동북쪽 1킬로미터 지점에 장군총이 있고, 서남쪽 200미터 지점에 태왕릉이 있다. 장군총, 광개토왕비, 태왕릉이 서남쪽으로 일직선으로 놓여 있다. 태왕릉의 묘에서 명문(銘文)이 새겨진 벽돌이 발견되었는데, 이로 미루어본다면 태왕릉은 광개토대왕릉이 확실하다.
“원하옵건대 대왕의 무덤은 산 같이 안전하고 구릉같이 굳건하소서.(願大王之墓安如山! 固如丘!)”
중국, 광개토대왕비에 개 배치한 채 동북공정 진행
광개토대왕비는 왕의 2주기인 414년 9월 29일에 그의 아들인 장수왕이 세웠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끝내고 이 비를 유리 상자 속에 밀봉해 놓았다. 동북공정이 한창인 때 집안을 방문한 적이 떠오른다. 자신들의 역사왜곡작업을 남이 볼까 두려워한 나머지 외부인의 접근을 통제하고 있었는데, 사방 곳곳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하고도 모자라 비석 양옆에는 군용견인 커다란 셰퍼드로 지키게 했다. 사나운 개가 인기척이 나면 곧장 짖어대며 달려오는데 목줄을 매단 길이가 족히 20~30m는 됨직한 긴 줄이었다. 비석 앞에서 사진도 찍을 수 없게 만들려는 속셈인데 그 수법이 참으로 한심하였다. 태양의 자손으로 고대 동북아시아에 또 다른 문명을 건설했던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비에 한낱 미물인 개를 매어두고 지키게 하다니. 자국에 유리하면 타국의 역사쯤은 언제든 왜곡해 버리는 중국의 전략을 우리는 언제까지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안에 있는 광개토왕비
광개토대왕비는 6m가 넘는 사각기둥 형태의 암석으로 되어 있는데, 약 1800자에 달하는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신화와 광개토대왕의 정복활동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서체 또한 독특하다. 네모 반듯한 예서(隸書)를 사용했는데, 그 서체는 일찍이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가로획과 세로획의 굵기가 일정하고 급격한 파임이나 흘림도 없다. 단아하면서도 예스럽고 소박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와도 닿아 있다.
서체의 창조는 문자의 창조에 버금가는 것이다. 국력과 문화가 선진적이어야만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비문에 새겨진 독특한 서체는 당시 고구려의 선진적인 문명에서 발생한 문화적 자긍심이다. 비문의 서체를 자세히 보노라면 구수하고 질박한 남성미가 물씬 풍긴다. 가히 고구려인의 늠름하고 여유로운 기상을 느낄 수 있는 광개토대왕체(廣開土大王體)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추사체 이전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광개토대왕체에 대하여 얼마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이런 서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광개토왕비 탁본
광개토대왕비 1600주년해 동북아역사재단 역사의식 부재를 탓하다
2012년 10월 18일과 19일, 동북아역사재단은 광개토대왕 서거 1600주년 국제학술회의를 열었다. 주제는 ‘광개토왕비의 재조명’이었다. 신문사마다 이 내용을 보도하여 관심을 끌었는데 나는 보도된 사진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행사장 현수막에는 학술회의 주제를 한자로 표기했는데 그 서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안진경체였기 때문이다. 세계적으로 자랑해야 할 독특한 서체로 작성된 비문을 논하는 자리에 생뚱맞은 중국 서체로 현수막을 만든 것은 업무태만인가 아니면 사려 없는 단순함인가. 사소한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지만 이는 결코 사소한 일로 볼 수 없다. 동북아역사재단은 중국의 역사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적 지원으로 탄생한 재단이다. 그런 재단이 어찌 독특한 광개토대왕비체를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한 마디로 역사의식의 부재를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이런 역사의식으로 어떻게 고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의 연구자들이 내놓은 결과에 어떻게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지안에서 발견된 제2 고구려비
2012년 7월 29일, 지린성 집안시 마선향(麻線鄕) 마선촌의 마선하 강변에서 제2의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마선하는 압록강의 지류인데 이곳에서 돌을 캐던 농민이 우연히 땅속에 박힌 비석을 찾아내어 신고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비석이 발견된 곳을 기점으로 동남쪽으로 450여m 지점에 천추묘(千秋墓)가 있고, 서남쪽으로 1100여m 지점에 서대묘(西大墓)가 있다.
이 비석은 173cm의 화강암을 가공하여 만들었는데 비문의 글자 수는 광개토대왕비의 8분의 1 정도다. 현재까지 알려진 내용은 역대 왕들의 능묘에 비석을 세우고 안전하게 지키라는 당부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현재 집안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중국 정부는 이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를 두고 동북공정을 노리고 만든 가짜일 수도 있다는 의견이 있다. 중국이 떳떳하다면 비석을 공개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고대사의 유적은 관련 국가들과의 공동연구를 기본으로 그 내용을 밝히는 것이 정답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광개토대왕비가 건립된 지 1600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번에 집안에서 발견된 고구려비와 함께 기존의 광개토대왕비를 새롭게 해석하는 국제학술회의가 또 열릴 것이다. 당부하건대 2014년의 학술회의는 사소한 준비과정에서도 놓침이 없이 완벽한 행사가 되기를 기원한다. 광개토대왕비에는 고대 한·중·일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이것을 완벽하게 해석함으로써 우리 고대사를 바로 세울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이다.
-허우범(역사 기행 전문가), 1961년 인천에서 태어나 인하대학교 국문과와 동 교육대학원 석..
프리미엄조선(14-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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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동의 한민족 성장DNA 추적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혼이난 선비족의 정체
흉노에 이어 중국사의 중심에 선 선비족
1. 선비족의 기원과 화북을 제패한 화려한 등장
몽골고원을 근거로 거대국가를 이루었던 흉노에 이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기마유목민족이 선비(鮮卑)족이다. 선비족은 몽골-퉁구스계로 추정되는 유목민족으로, 몽골 동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일어나 몽골고원과 만주의 경계에 있는 대흥안령산(일명 선비산)에서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하였다. 시라무렌강은 내몽골 적봉시 북부에서 발원하며, 바로 홍산문화지역의 중심이다. 중국 사서에서는 흉노는 ‘호(胡), 선비족은 오환과 함께 ‘동호(東胡)’로 불린다.
선비족은 1세기초부터 흉노의 지배를 받았으나 흉노가 남·북 흉노로 분열하자 후한과 연합하여 북흉노를 서쪽으로 몰아내고 몽골고원을 차지해 북아시아의 패자가 되었다. AD 156년 ‘단석괴’란 걸출한 지도자가 나타나 부족을 통합하고 흉노의 옛땅을 차지하여 거대국가를 건설했다. 선비는 동호의 남쪽 일파인 오환까지 통합하여 몽골고원-바이칼호-만주-오르도스 지역 일대를 장악하면서 최대 영토가 490만㎢에 달했다. 이때 선비는 중국(후한)을 침략하는 등 힘을 과시했지만 단석괴 사후 다시 분열되어 내몽골에서 할거했다. 대릉하 유역의 ‘모용부’, 시라무렌강 유역의 ‘우문부’, 그 남쪽의 ‘단부’, 내몽골 현 호화호특시 방면의 ‘탁발부’등이 두각을 나타냈다.
후한 멸망 후 중국을 진이 통일했으나 ‘8왕의 난’으로 혼란을 겪는 가운데 북방 기마민족인 ‘흉노·선비·갈·저·강’의 5개 민족이 남하하여 화북지방에 각각 정권을 세웠다. “오호십육국” 시대(AD 304~439)로, 북방의 오호(五胡)와 한족이 세운 16개 나라가 135년 동안 흥망을 거듭했다. 오호는 다음과 같다.
① 흉노 분열 후 내몽골 지역에 있던 ‘남흉노’는 북쪽 선비 세력의 압력으로 황허강의 오르도스 지역으로 남하하였다가 만리장성 내 중국영역에 자리 잡았다. 남흉노의 직계 후손인 ‘유연(劉淵)’은 외척이 한나라 출신이어서 한나라 후예라는 명분으로 오호족 최초 정권인 한(漢·前趙)을 건국한다(AD 304). 유연의 아들 유총(劉聰)은 ‛중국의 아틸라’로 불리는데, 진나라 낙양을 점령하고 장안으로 쳐들어가 인구의 절반을 학살한 인물이다. 당시 북중국을 장악한 흉노세력을 피해서 양자강 이남으로 피난간 중국왕조가 동진이다.
② 전조의 유총 사후 흉노의 다른 계통으로 갈족인 석륵이 후조(後趙)를 세우고 전조를 멸망시켰으나 불과 20년만에 선비족 모용씨에게 정복당했다(AD 352).
③ ‘선비족 탁발씨 부족’은 내몽골 호화호특을 근거로 하다 만리장성 아래로 남하하여 산서북부에 자리 잡고 시조 ‘역미’의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다(AD 310). ‘선비족 모용씨 부족’은 현재의 요녕성 창려를 근거로 만주 남부 요동과 요서지역을 장악하고 ‘모용 황’이 연국(燕國: 전연·후연·서연·남연)의 기초를 다졌다(AD 337~438).
④ ‘티베트계 저족’은 감숙 남부와 사천 북부 산지에 근거하다가 ‘부홍’이 장안을 수도로 섬서 지역에 전진을 건국했다. 그후 국가기반을 확고히 한 ‘부견’이 모용의 지배지역을 모두 제압하고 북중국을 장악했으나 후대에 모용씨에 다시 자리를 내어줬다(AD 350~394).
⑤ ‘또다른 티베트계 강족’의 ‘요장’은 감숙성을 본거지로 하다가 ‘부견’ 사후 모용씨가 장악했다가 떠난 장안을 점거하여 후진을 세웠다(AD 386~417).
이처럼 왕국의 난립이 지속되던 대혼란기는 선비족 탁발부에 의해 다시 통일됐다. 탁발부의 역사는 ‘역미’에서 출발해 손자 ‘의여’가 대국(代國)을 세웠고, 5대손 ‘십익건’이 부족통합과 국가정비를 이루었는데, 십익건의 손자가 태조 도무제 ‘탁발규’이다. AD 386년 즉위한 탁발규는 모용의 후연을 정복하고 위(북위)를 건국하였다. 탁발규는 주위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오르도스에서 몽골 남부를 세력 하에 두면서 후연과 맞섰다.
AD 439년 3대 세조 태무제(탁발도)가 화북을 통일하여 거대한 탁발왕국을 건설해 남쪽 중국왕조(송)와 남북조시대를 열었다. 탁발사-도-준-홍-굉-각으로 이어져온 선비족 탁발왕조는 그러나 북방민족의 기풍을 잃으면서 문약해졌고 동·서로 분열되었다가 마침내 550~556년 북제·북주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후 분열된 중국을 통일하여 수나라를 건국한 양견(문제)은 북주의 군사귀족으로 한족과 선비족의 혼합혈통이다. 수에 이어 당을 건국한 당고조 이연도 마찬가지로 선비족 출신의 무장이다.
선비족 국가(왼쪽). 오른쪽은 프랑스국립 동양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3~4세기 선비족의 벨트 버클.
2. 기마군단 선비족이 건설한 국가들이 한민족 역사와 만난 현장
중국의 전국 7웅 중 패자인 ‘연’나라(오호 16국 시대 모용부의 ‘연국’과 다름)는 BC 300년경 ‘진개’를 앞세워 동호와 고조선을 공격했다. 중국은 전국시대를 진나라가 통일하고 한나라가 이어 받으면서 흉노정벌에 나섰으나 기마군단 흉노에 참패하고 오히려 흉노에 조공하게 됐다. 이런 와중에서, 한나라의 변방국이 된 ‘연’에서 고조선 계열 인물로 알려진 위만이 고조선 일부(번조선)지역을 점령하여 위만조선정권을 세웠으나, (BC 194) 한과의 전쟁 끝에 역사에서 사라졌다.
고구려의 영토확장 정책에 선비 모용부의 ‘연국’은 큰 걸림돌이 되었다. 고국원왕의 고구려는 연왕이 된 모용황의 침공(342년)으로 심대한 타격을 입는 등 후연 시대까지 이들은 고구려 서북방 팽창정책에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그러나 불세출의 영웅 광개토대왕은 후연의 수차례 공격을 격퇴시키고 대강국 고구려의 기틀을 공고히 했다. 광개토대왕은 5호 16국 시대로 불리는 북중국의 혼란 상황을 적절히 이용해 국력을 최대한 신장시키는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북위가 통일을 이루고 군사강국으로 등장하자 장수왕은 남북조 등거리 외교로 고구려를 안정시켰다.
선비족 무덤벽화 무사도(연나라 시대, 내몽골 조양)와 고구려 무용총 수렵도(왼쪽부터).
고구려는 이후 선비인들이 건설한 수·당나라와도 국운을 걸고 싸웠다. 수 문제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강국부민 정책을 추진했으나, 고구려 침략 전쟁으로 국력을 소진시키는 바람에 결국 실패했다. 598년 문제가 고구려 침략에 실패하자, 양제는 전왕의 실패를 만회하기 위해 113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살수에서 참패하고 평양으로 진공한 4만명 수군은 몰살되었다. 613년, 614년에 양제는 2·3차 고구려 침략전쟁을 일으키나 또 다시 실패했다. 수나라는 결국 37년만에 문을 닫았다.
당태종 역시 북방산서지역 한족과 선비족 혼합혈통의 귀족집안 출신이다. 이는 당 또한 민족융합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북방민족이 중원에 진출하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건국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연의 아들 이세민은 당 태종으로 즉위한 후 중원을 통일하였으나 두 번에 걸친 고구려 정복에는 실패했다. 그 후 3대 고종이 신라와 연합하여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안동도호부를 평양에 설치했으나 신라가 당을 격퇴하고 이를 차지했다.
3. 기마군단의 역사속에서 비추어 보는 한민족의 고대역사
스키타이, 흉노, 훈, 선비 등 AD 5세기 이전에 유라시아대륙에서 활약한 기마유목국가들은 자신들이 기록한 역사가 거의 없다. 반대로 그들로부터 정복 또는 침략당한 정주민의 기록속에 남아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 기록에는 왜곡이 많을 수 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기마군단이 건설한 국가들은 세계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들만의 독특한 역동과 흐름의 흔적이 너무나 뚜렷히 남아있다.
유라시아대륙의 기마유목민족이 건설했던 나라들은 민족이나 국경 개념이 대단히 개방적이었다. 유목민족제국은 대부분 다수 민족의 부족 연맹체라 할 수 있다. 흉노제국은 알타이 부족 연맹체로 튀르크, 몽골, 만주-퉁구스, 한(韓)민족계 등이 어우러진 혼성국가였다. 흉노란 제국은 있으나 흉노민족이란 없다. 또 선비란 민족은 있으나 선비라는 통일국가는 없다. 오늘날 터키에서는 흉노제국을 그들의 초기국가라 하고, 몽골에서는 자기들의 고대국가라 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히려 한민족과 흉노의 관계를 언급하면 민족주의 과대 발상이라 하는 한국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한(韓)민족은 하나의 민족이 아니다. 단일민족이란 이름으로 미화할 대상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광활한 유라시아 동·서 스텝지역에서 오랜 기간 삶을 영위했던 기마유목민족의 면면한 DNA가 오늘날 한국인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도 부정할 수도 없다. 우리의 고대국가에서는 언어·관습제도 등 많은 부분에서 알타이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어 이들이 알타이계의 부족연맹에서 출발했을 것으로 보여지는 것은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어떻게 다른 세상과 교류·협력했고 또 다른 세력과 투쟁하면서 살아왔는지, 고대 화려한 역사로부터, 어렵고 참담했던 기록으로부터 시작해 현재 우리가 묵도하는 기적의 현장에 이르기까지 마음의 여유를 갖고 풀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유라시아 기마유목민족사의 흐름에는 마음을 닫아버리고, 실존했던 고조선이 역사에서 사라진데 대해서는 눈을 닫아버리고, 중국이 가져가는 고구려사에 대해서는 인식을 닫아버려서는 우리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수조차 없게 되는 것이다.
-김석동(전 금융위원장, 경제 정책을 군사 작전에 비유할 정도로 강력한 추진력과 리더십으..
서울대학교 경영학 학사,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과 1차관,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 프리미엄조선(14-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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