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돌아가는 이야기.. ]/[時事-萬物相]

[절제하지 못하는 사회의 끝은] ['심리적 안전감'이 없는 조직.. ] ....

뚝섬 2025. 1. 24. 09:19

[절제하지 못하는 사회의 끝은]

['심리적 안전감'이 없는 조직은 왜 실패하는가?] 

[과음과 숙취, 그리고 인사불성] 

 

 

 

절제하지 못하는 사회의 끝은

 

이런 신화가 있다. 신들의 왕 제우스가 하늘에서 인간 사회를 내려다보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느라 사회가 늘 파탄 나고 종국에는 소멸되어 남아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제우스는 인간 사회를 구할 방도를 고민하다 전령사 에르메스를 시켜 두 선물을 내려보낸다. 하나는 ‘염치’를 뜻하는 ‘아이도스’, 또 하나는 ‘정의’를 뜻하는 ‘디케’다. 또 모든 인간에게 동물과 다른 특별한 기술을 부여하는데, 그게 ‘정치적 기술(arete politike)’인 ‘말(言)’이다.

 

세상은 대체로 강자와 약자, 부자와 가난한 자, 재능이 있는 자와 없는 자가 섞여 산다. 그 둘이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려면 우선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 대해 부끄러움(염치)을 지녀야 한다. 돈이나 재능은 자신의 노력보다는 운에 따른 것이니,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끄러움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약자에게는 정의가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갈등은 총이나 칼이 아니라 ‘말’을 도구 삼아야 서로를 죽이지 않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로마 시대 키케로가 웅변을 가리켜 ‘고요의 동반자’라고 했고, 20세기 수사학자 케네스 버크도 저서 머리에 ‘전쟁의 정화를 위하여’라는 부제를 달았다. 외교가 전쟁을 막아주듯, 말이야말로 세상의 갈등을 잠재우고 평화를 가져다주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고, 그 지지자들은 법원에 난입하고 헌법재판소 담을 넘으며, 주말마다 도심 시위로 온전히 다닐 수 없는 어지러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자유(헌정 질서)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구속(비상계엄을 선포)한다”는 희대의 모순어법(oxymoron)으로 세상에 충격을 준 대통령은 지도자 자리에서 내란죄 재판과 탄핵 판결 앞에 선 미결수 신분으로 떨어졌고, 사상 유례없는 입법 폭주와 국정 마비를 시도해 온 야당은 지금의 혼란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자기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데 여념이 없어 보인다. 담을 넘고 창문과 기물을 파손해 현행범으로 체포된 시위대가 90명에 이른다. 이들은 불법행위, 교사 방조 행위 등으로 재판받고 사법 처리될 것이다. 그 어디에도 강자의 염치와 약자의 정의, 언어라는 도구 사용은 찾아볼 수 없다.

 

강자를 순서대로 보자면, 야당이야말로 몰염치의 극치다. 숫자만 많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그들은 그렇게 정국을 운영하고 나라를 흔들었다. 누구라도 방해되면 탄핵하고 아무 법이라도 만들었다. 할 수 있으니까 다 한 것이다. 염치란 할 수 있어도 하지 않는 미덕이다. 그들은 강자의 미덕을 지니지 못했다. 상황이 이런데도 지지율이 오히려 여당보다 못한 것은 사람들이 그런 야당의 행태를 훤히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자기 자리에서 쓸 수 있는 수많은 카드 중 계엄이라는 낡은 카드를 흔들어 분란을 초래했다. 최종적으로 탄핵이 인용되고 그의 행위가 내란죄로 기록될지는 두고 봐야 알 일이지만, 시대착오적이고 상상력 빈곤의 하수(下手)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경영 전략 용어에 ‘불타는 갑판(burning platform)’이라는 것이 있다. 갑작스럽게 배가 폭발해 불길이 치솟는 갑판에서 선원이 불기둥에 휩싸인 바다에 뛰어들어 살아남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위기 상황에서 ‘확실히 죽기’보다 ‘죽을지도 모르지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선택하는 전략이다. 좋은 위기를 만들어 낭비하지 않고 성공으로 이끄는 전략이지만, 국가를 운영하며 배를 태운다는 발상은 너무 위험하다. 대통령은 야당이 발목을 잡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2년 더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국민이 원한 건 그런 상황에서 2년을 잘 버텨주는 것이었다. 버티고 관리하는 것도 능력이다.

 

대통령도, 야당도, 각자 조금씩 절제하는 미덕을 발휘했다면 지금 상황까지 오지 않았을지 모른다. 절제란, 모든 상황에서 현명하게 행동할 수 있게 하는 올바른 척도와 방식을 뜻한다. 절제는 어수선한 인간 마음을 질서 있게 다스리는 기술로, 말의 무게를 가능하고 적절히 조절해 사람들의 신뢰를 이끌어 내는 능력이다. 절제는 또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지 않고 옳은 일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선택하는 능력이기도 하다. 절제를 아는 사람은 한 순간의 분노로 관계를 망치지 않으며, 탐욕을 부리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는 일을 하지 않는다. 마치 포도주를 제대로 즐기려면 벌컥벌컥 들이켜지 않고 한 모금씩 음미해야 하듯, 절제하며 스스로 다스리면 포도주의 맛과 향을 즐기며 인간도 포도주처럼 성숙해질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우리 모두 행복을 원하는데 어째서 행복한 사람이 극소수인가’에 대한 답으로 ‘엔크라테이아(enkrateia), 즉 절제를 들었다. 그 논리대로라면 우리가 불행한 건 우리 사회에 절제되지 않은 힘이 너무 많기 때문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힘을 쓸 줄만 알지 절제할 줄 모른다. 더욱이 민주사회 정치 권력이란 자신들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위임받은 권력이다. 위임받은 권력을 제 것처럼 마구 휘두르는 정치인이 이끄는 나라의 국민은 결코 행복할 수 없다.

 

행복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일찍이 제우스가 내려다보며 혀를 찬 원시 공동체처럼 우리 사회도 강자의 염치가 사라지고, 약자는 정의를 빼앗기며, 말 대신 폭력이 횡행해, 종국에 서로 죽고 죽이는 공멸의 길로 빠져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박성희 이화여대 커뮤니케이션미디어학부 교수·한국미래학회 회장, 조선일보(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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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적 안전감'이 없는 조직은 왜 실패하는가?

 

[朝鮮칼럼]

누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팀 전체가 비난 없이 해결 나서나
마음의 상처 없이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모일 수 있나
'심리적 안전감' 없으면 리더의 극단적 결정 방치
다른 목소리 '배신자'라 잠재우면 해법보다 갈등·분열 심화돼

 

심장 수술 중 작은 실수가 생겼다고 하자. 의사나 간호사는 그 사실을 즉시 공개하고 함께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을까, 아니면 두려움에 숨길 수밖에 없을까?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조직심리학자 에이미 에드먼슨이 진행한 연구는 이 질문에 놀라운 답을 제시했다. 미국 전역의 심장 수술팀을 비교 분석했더니 어떤 병원 팀은 신기술을 빠르게 익혀 높은 성공률을 보이는 반면, 다른 팀은 같은 기술로도 실패를 반복했다. 두 팀의 결정적 차이는 “팀원들이 실수나 문제를 자유롭게 제기해도 비난받지 않는 안전한 환경”이 존재하느냐 없느냐였다. 즉, 누가 어떤 실수를 하더라도 곧바로 팀 전체가 문제 해결에 나설 수 있는 분위기가 팀의 학습 속도와 성과를 좌우했다는 것이다. 에드먼슨의 이 연구는 ‘심리적 안전감’이 조직의 혁신과 성장을 견인하는 핵심 동력임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심리적 안전감’이란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은 “팀원들이 질문, 문제 제기, 실수, 다른 관점을 자유롭게 드러냈을 때 팀 내부에서 비난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의미한다. 이는 단지 ‘서로 편안히 대하는’ 끈끈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팀 내부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호작용에 깔린 ‘안전한 의사소통 문화’를 의미한다. 심리적 안전감이 있는 조직은 토론이 환영받고 반론이 포용되는 환경이기에 팀원들이 의견 차이가 있어도 마음의 상처 없이 다음 날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모일 수 있는 공간이다. 이런 조직은 실패를 통해 빠르고 정확하게 오류를 수정해 나가며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지금 우리가 직면한 위기 상황을 보자. 현직 대통령이 부정선거 의혹을 주장하며 계엄령을 선포했고 국회가 이를 즉시 해제했으며 곧이어 대통령 탄핵안도 가결했다. 대통령은 내란 혐의로 구속됐고 헌법재판소는 탄핵안을 심판 중이며, 급기야 일부 극단 세력은 시위를 넘어 법원을 습격하는 폭도로 돌변하기까지 했다. 대한민국 법치주의의 최대 위기 속에 대다수의 국민들은 두려움과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이것이 ‘대통령 한 사람의 독선’만으로 설명되는 상황일까? 아니다. 심리적 안전감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위기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할 수 있다. 대통령실, 국무위원회, 여당 지도부 등 권력의 중추가 서로 견제하고 제동을 걸어야 할 중대한 순간에 침묵하거나 동조만 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일 수 있다. “그것은 옳지 않습니다”라는 말조차 제대로 꺼내지 못할 정도로 경직된 분위기, 즉 심리적 안전감이 전무한 조직 문화가 대통령의 극단적 결정을 방치했다고도 할 수 있다.

 

여당 내부에서 벌어진 ‘배신자’ 논란 역시 같은 맥락이다. 일부 의원이 탄핵 표결에 찬성했다고 해서 이들을 과격하게 비난하고 고립시키는 모습은 조직 내에서 자유로운 의견 제시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다른 목소리를 잠재우는 문화에서는 최선의 해법 도출보다는 오히려 갈등과 분열이 심화된다.

 

어디 여당뿐이겠는가? 어떤 조직이든 심리적 안전감이 높을 때 구성원들은 오판을 막을 수 있고 더 나은 선택지를 고민하며 실수마저도 배우는 기회로 삼는다. 애초에 내부의 비난이 두려워 침묵하는 심리가 자리 잡으면 결국 조직 전체는 공멸할 위험에 처한다. 이번 내란 정국이 보여준 정치적 혼란은 조직이 심리적 안전감 없이 운영될 때 얼마나 끔찍한 결과가 벌어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가령, 구글은 2016년에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젝트’를 가동하여 자사의 180개 팀을 해부해본 후에 팀의 성공을 예측하는 가장 강력한 지표로 심리적 안전감을 꼽았다. 최고의 성과를 내는 팀일수록 실수를 징계가 아닌 학습의 기회로 삼고 누구든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들은 혁신 동력이 떨어져 답보 상태에 빠진 한국 기업 문화에도 분명한 경종을 울린다. 옛 방식을 고수하거나 위계에 눌려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대로 펼치지 못한다면 세계시장에서 도태되는 것은 시간문제다. 반면 심리적 안전감이 뿌리내린 조직에서는 실패조차 발전의 자양분이 된다. 결국 국가든 기업이든 ‘권위와 침묵’이 아니라 ‘신뢰와 대화’가 살아 숨 쉬는 환경을 만들 때, 위기와 혼란을 넘어 진정한 성장과 혁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장대익 가천대학교 창업대학 석좌교수·진화학, 조선일보(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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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음과 숙취, 그리고 인사불성

 

[유광종의 차이나 別曲]

 

됨됨이가 아주 크고 멋져서 다른 이와 잘 어울리는 사람의 마음을 흔히 아량(雅量)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그러나 의외의 새김도 있다. ‘술 잘 마시는 이’의 뜻이다. 본래는 이 단어가 큰 술 그릇을 가리켰던 데서 비롯했다는 설명이 있다.

 

7되들이 술 그릇은 백아(伯雅), 6되짜리는 중아(仲雅), 5되 정도는 계아(季雅)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아(雅)’는 술 그릇의 고정 명칭으로 자리를 잡았고, 주량(酒量)이 대단한 사람에게는 ‘아량’이라는 별칭이 따랐다고 한다.

 

집의 문(門)을 가리키는 호(戶)도 마찬가지다. 대호(大戶)는 살림이 넉넉한 집이라는 뜻과 함께 술 잘 마시는 사람이라는 새김도 있다. 그 반대는 소호(小戶)다. 역시 가난한 집이라는 의미 외에 주량이 적은 이를 지칭한다.

 

옛 동양의 술은 대개 증류주가 아닌 탁주 위주였으니 한 말들이 술인 두주(斗酒), 그것을 사양치 않는 두주불사(斗酒不辭) 등의 표현이 가능했을 듯하다. 그런 기세로 술을 많이 마셔 크게 취하는 경우를 일컫는 단어가 명정(酩酊)이다.

 

특히 우리는 술을 마신 뒤 횡설수설하거나, 남에게 불편을 끼치는 행위를 가리켜 “주정(酒酊)을 부린다”고 한다. 의외의 표현이지만, 취향(醉鄕)도 술을 마시고 몸조차 잘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지칭하는 단어다.

 

미훈(微醺)은 약간의 취기가 있는 경우, 숙정(宿酲)은 지난밤 술이 아직 깨지 않은 숙취(宿醉)와 같은 말이다. 술에 만취해 정신을 못 차리는 곤드레만드레는 ‘흠뻑 취하다’는 뜻의 난취(爛醉)라는 단어가 곧장 어울릴 듯하다.

 

전날 들이켠 술에 미처 깨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작취미성(昨醉未醒)이다. 그로써 인사불성(人事不省)에 이르면 개인사도 나랏일도 다 엉클어진다. 중국도 고량주를 과음했는지 큰 몸집이 퍽 흔들린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명정, 숙취, 난취가 다 겹친 듯하다.

 

-유광종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조선일보(25-0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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