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헌재, 갈등 종결자 아닌 생산자 되려 하나] ....
[법원·헌재, 갈등 종결자 아닌 생산자 되려 하나]
[그래도 대통령임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
법원·헌재, 갈등 종결자 아닌 생산자 되려 하나
국민이 뽑지 않은 사법부
권위 독립·공정에 대한 신뢰가 원천
편향·정파성 노출 재판 반복해
신뢰에 기반한 권위 붕괴 자초
문형배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비롯한 헌법재판관들이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대심판정에서 열린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심판 첫 변론기일에서 심판정으로 들어서고 있다. /조인원 기자
사법부의 권위가 요즘처럼 추락한 적이 있었나. 시위대가 법원에 침범해 난동을 부리고, 헌법재판소 공격을 모의하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오는 지경이다. 사법부는 민주국가의 세 기둥 중 하나다. 사법부의 권위가 흔들리면 민주주의 시스템의 위기로 연결될 수도 있다.
대통령(행정)과 국회(입법)는 국민이 투표로 뽑는다. 민주적 정당성과 권위의 원천이 분명하다. 사법부는 국민이 뽑지 않는다. 법관은 시험을 통과해 높은 법대(法臺)에 앉아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사법부의 결정은 누구나 따라야 한다. 이런 사법부 권위의 원천은 무엇일까. 정치권력으로부터의 독립, 공정함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전부일 수밖에 없다. 사법부의 권위는 외부의 공격으로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편향적이고 정파성을 노출한 판결이 쌓이고 쌓이면서 스스로 무너뜨려 왔다.
윤석열 대통령 수사 과정에서 법원은 수사 주체, 관할 법원, 체포와 구속의 적부(適否) 등 숱한 논란을 방관하거나 증폭시켰다. 내란 혐의 수사권이 없는 공수처가 대통령을 수사한 것은 법원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있었다. 경찰이 수사했으면 일거에 논란을 잠재울 수 있었지만, 공수처가 신청한 영장을 그대로 발부함으로써 윤 대통령과 지지자들이 끝내 승복하지 않도록 만들었다. 이재명 대표에 대해서는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을 고려해 구속영장을 기각해 놓고는, 훨씬 더 심하게 감시받는 대통령의 영장은 발부했다. 법에 명시된 재판 기한 어기기도 예사로 해왔다. 이 대표의 선거법 위반 재판도 1·2심 기한을 다 어겼다.
우리법연구회·국제인권법연구회가 법원 내 사조직인 양 의심받은 것은 오래됐다. 소속·출신 판사라는 이유만으로 판결 결과가 예단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어떤 판사를 만나느냐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고 의심받는다면 재판이 로또와 다를 게 뭔가. 법원은 공정함만큼이나 공정하게 비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데도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늉조차 않는다. 국민은 법대 아래에서 머리를 조아려야만 하는 미천한 백성일 뿐인가.
헌법재판소는 법관 성향에 따라 판결이 달라진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하다.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은 취임 이틀 만에 탄핵 소추를 당했다. 야당이 취임도 하기 전부터 예고했던 정략적 소추였지만, 이를 4대4로 기각했다. 진보·보수 성향 재판관 숫자가 그대로 반영된 결과였다. 4명의 인용 의견 결정문을 찾아봤다. ‘2인에 의한 의결이 방통위법에 위반될 가능성이 있음을 인식하고 용인한 상태에서’ 심의·의결한 점을, 파면할 정도의 중대한 법 위반이라고 했다. 궁예의 관심법 재판도 아니고 남의 인식과 용인 여부를 어떻게 알 수 있나. 최고 법관들의 결정문이 치밀한 논리와 논증의 설득력으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을 뛰게 하지는 못할망정 헛웃음을 짓게 하는 대목이 있었다.
윤 대통령 탄핵 찬반 진영 간 대립은 잠재적 내란 상태라 할 정도로 걱정스러울 지경이다. 그런데도 헌재는 탄핵 심판을 몰아치듯 진행하면서 졸속 논란을 자초했다. 대통령 측이 신청한 증인은 4분의 1도 채택하지 않고, 초시계까지 동원해 증인 한 명당 신문 시간을 90분으로 제한했다. 모순된 증언에도 반박 질문을 못 할 수 있다. 문형배·이미선 재판관이 4월 18일로 임기가 종료되므로, 그 전에 심판을 끝내려 한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속도전은 그 기한을 감안해도 지나치다.
헌재는 헌법적 갈등의 최종 종결자여야 한다. 심판 결과가 나온 뒤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수긍은 할 수 있도록, 절차가 정의로웠음은 추호도 의심받지 않아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최종 해결자가 아니라 새로운 갈등의 생산자가 될 수 있다.
-조중식 뉴스총괄에디터, 조선일보(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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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대통령임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
[정용관 칼럼]
尹 헌재 최후 진술은 역사에 남을 것
‘최고의 公僕’다운 진정성 보여줄 때
일각의 전격 하야론 ‘가능성 제로’인 건지…
지지층에 “헌재 결정 100% 수용” 메시지라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에 대한 윤석열 대통령과 박근혜 전 대통령의 대응엔 결정적 차이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스스로 주저앉았다. 직접 싸우려 하지 않는 장수 옆에 군사가 남아 있을 리 없다. 이를 반면교사로 삼았는지, 원래 성정(性情) 자체가 다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윤 대통령은 싸움의 길을 택했다. “야당은 반국가 세력” “광란의 칼춤” “탄핵하든 수사하든 당당히 맞설 것”이란 작년 12월 12일 대국민 담화는 사실상 ‘내전(內戰) 선포’나 다름없었다.
그 뒤 2개월여 벌어진 과정은 지켜본 대로다. 여론조사만 놓고 보면 윤 대통령으로선 계엄 실패 직후의 ‘2 대 8’도 안 되는 불리한 정치 구도를 ‘4 대 6’ 안팎의 구도로까지 바꾼 듯 보인다. 보수 저변의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반감이나 두려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무능, 헌재의 정치화 논란 등 여러 복합적 요인이 작용했지만 적어도 대통령 자신이 싸울 의지가 없었다면 여기까지 오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지금 차가운 감방에서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지도 모른다. ‘복귀의 희망’이다. 여권과 지지층을 향해 “당이 자유 수호 운동을 뒷받침해야 한다” “모래알이 돼서는 안 된다” 등 연일 여론전을 독려하는 옥중 메시지를 내놓는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헌재 재판관 8명 중 보수 성향 누구의 판단에 따라 최종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는 둥 이런저런 예상이 난무하지만 그건 이 글의 주제는 아니다. 다만 탄핵 심판은 일반 재판과는 다른 정치적 속성을 띠지만 그렇다고 ‘여론 재판’도 아니라고 본다. 헌재는 헌정 수호라는 준거에 따라 엄정한 사법적 결론을 내릴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 좌우 이념에 따라 갈려선 안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의 머리 위엔 칼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국이다. 그의 운명도 운명이지만, 나라가 찬탄 반탄이란 두 개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상황 자체가 우려스럽다. 마치 나라 전체가 거대한 콜로세움의 흥분한 군중처럼 피를 보고 쓰러져야만 끝나는 검투사 게임에 몰입해 들어가는 듯 보이기 때문이다.
탄핵이 인용되면 좀 시끄럽다가 조기 대선 국면으로 넘어갈 것인가. 아마 그럴 공산이 크지만 박근혜 탄핵 때와는 다른 양상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보수 일각의 바람대로 ‘5 대 3’으로 기각되면 공권력에 의해 강제로 체포되고 감방까지 갔던 대통령이 최고 권력자로 복귀하는 영화 같은 장면이 펼쳐진다. 후유증의 질과 크기는 다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그 파장을 가늠하기 쉽지 않다.
이 와중에 최근엔 어느 보수 원로가 윤 대통령의 하야 가능성을 공개 언급한 걸 계기로 하야 논쟁이 제기됐다. 이른바 체제 전쟁을 벌이며 나름 성과를 거두고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 윤 대통령이 자진 사퇴할 가능성은 ‘제로’일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다. 여권에서도 “끝까지 버티다 산화(散華)하는 게 대선에 더 도움 될 것” “탄핵의 멍에는 벗는 게 나을 것” 등 득실 계산이 엇갈리는 듯하다. 야권에선 탄핵 심판 중인 윤 대통령에겐 ‘하야의 권한’이 없다고 선을 긋는 분위기다.
윤 대통령으로선 하야 옵션은 남는 장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끝까지 가야 일말의 활로가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내란 혐의나 명태균 문제 등의 ‘법적 봉인’을 보장받을 길도 없다. 탄핵 반대 강성 지지층들로부터 비겁하다는 힐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이런 정파의 득실이나 정략적 셈법을 떠나 하야는 윤 대통령도 한번 깊이 생각해 볼 만한 선택지라는 생각은 든다. 여론이 그나마 호전된 지금이라도 자신의 오판으로 빚어진 국가적 혼란에 대해 스스로 최고 수준의 정치적 책임을 지는 결자해지의 모습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
닉슨의 하야 성명서를 다시 찾아봤다. “지금도 임기 만료 전 떠나는 것에 내 본능은 온몸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위기에 몰렸을 때 부통령 애그뉴가 비리 혐의로 사임한 것과 관련해 닉슨이 자신의 탄핵을 막기 위해 애그뉴를 먼저 ‘속죄양’ 삼은 것이란 평가도 있다. 그렇게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 했지만 마지막 순간 닉슨은 본능을 억눌렀다.
윤 대통령은 곧 최후 진술의 시간을 맞는다. 역사에 남을 중요한 순간이다. 최고의 공복(公僕)다운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였으면 한다. 적어도 “탄핵 심리 과정은 유감이지만, 그럼에도 어떤 결정을 내리든 전적으로 수용할 것이다. 저를 지지했던 모든 분들도 100% 존중해 달라”는 명확한 메시지라도 나왔으면 한다. ‘그래도 대통령’임을 보여줄 마지막 기회가 아닐까 싶다.
-정용관 논설실장, 동아일보(25-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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