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제방'과 '백가쟁명'] [마오쩌둥 뺨치는 ‘이재명 전체주의’] ....
['백화제방'과 '백가쟁명']
[마오쩌둥 뺨치는 ‘이재명 전체주의’]
[마오쩌둥과 반(反)우파 투쟁]
'백화제방'과 '백가쟁명'
봄 맞아 일제히 피는 꽃처럼… 저마다의 정치 철학 주장
봄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꽃을 보는 즐거움이 크다는 것이지요. 목련, 벚꽃, 개나리, 진달래, 철쭉 등 알록달록 꽃이 활짝 피어 각자의 개성을 뽐내는 계절입니다. 이렇게 여러 꽃이 피는 봄을 표현하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백화제방(百花齊放)‘이란 말로, 온갖 꽃[百花]이 일제히[齊] 피어난다[放]는 뜻으로 요즘 어울리는 말입니다.
백화제방의 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각 당의 후보들은 유권자를 향해서 갖가지 공약과 정책을 쏟아냅니다. 선거 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모습은 고대 중국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사상가들이 각자의 사상과 철학을 주장했던 백가쟁명(百家爭鳴)과 비슷하지요. 많은 사람[百家]이 앞다투어[爭] 자기 학설이나 사상을 발표하고 토론한다[鳴]는 말입니다. 꽃들이 활짝 피어나듯 다양한 사상을 꽃피웠다는 뜻에서, 백가쟁명은 흔히 백화제방과 같이 쓰입니다.
춘추전국시대는 대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춘추시대 초기에는 170국이 있었는데 수많은 전쟁을 거쳐서 전국시대 말기가 되면 7국만 남게 됩니다. 그리고 7국 중 진(秦)나라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지요. 강자만이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시대, 각국의 왕들은 나라를 잘 다스려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한 대책이 필요했어요. 이에 사상가들은 저마다의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공자와 맹자의 유가(儒家)는 인의(仁義·어짊과 의로움)를 강조했고, 노자와 장자의 도가(道家)는 무위(無爲·사람의 힘을 가하지 않음)와 자연(自然)을 주장했고, 한비자의 법가(法家)는 강력한 법치주의를 내세웠습니다. 제자(諸子·여러 학자)와 백가(百家·여러 학파)가 활발하게 자신의 견해를 펼쳤기에, 이들을 제자백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는 혼란했지만 역설적으로 사상과 철학은 자유로운 토론을 거치면서 전성기를 맞이했죠.
제자는 자신의 사상이 이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현실에 적용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바로 유세(遊說)를 통해서였죠. ‘유세’는 자신을 정치에 기용해줄 왕들을 찾아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사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세의 성패가 곧 사상의 성패는 아니었습니다. 공자는 14년 동안 여러 나라와 왕을 찾아다녔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반면 한비자의 사상은 진나라 왕에게 채택되어 법치주의가 실현됐죠. 하지만 공자의 유가는 결국 약 20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하는 사상이 되었고, 법치주의를 채택한 진나라는 진시황이 죽고 얼마 가지 못해 멸망했습니다.
백가쟁명 시대의 유세 대상은 왕 또는 귀족이라는 극소수의 특정인이었다면, 오늘날 유세 대상은 다수의 국민입니다. 제자백가들이 자신의 사상을 현실화하기 위해 유세를 다니며 고군분투했던 것처럼, 오늘날 후보들은 국민에게 선택을 받기 위해서 온 힘을 쏟지요. ‘백화제방’의 계절, 현대판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채미현 박사·연세대 중국연구원, 조선일보(25-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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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 뺨치는 ‘이재명 전체주의’
[김순덕 칼럼]
체포동의안 일부러 부결 요청했다는 李
“가결자 찾아 책임 물으려” 설명에 소름
기만·사기로 인민에 재갈 물린 중국처럼
거대정당 부정직한 지도자는 더 두렵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한 중식당에서 비명계 인사인 김동연 경기도지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던 중 시계를 보고 있다. 이훈구 기자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는 복도 많다. 용장(勇將)은 지장(智將)을 못 이기고, 지장은 덕장(德將)보다 한 수 아래이며, 덕장도 복장(福將)에게는 어쩔 도리가 없다는데 이재명이 딱 그짝이다. 그가 유튜브 방송 매불쇼에서 2년 전 체포동의안 통과와 관련해 비명계와 검찰의 공모설을 말한 것이 5일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7일 느닷없이 석방되지 않았다면 지금쯤 “이재명이 통합행보 한다고 진짜 통합하는 줄 알았느냐”는 비난과 조롱이 ‘불신 지수’를 크게 높였을 게 틀림없다.
복장(福將)에게는 윤 대통령도 흑기사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선고도 늦춰졌다. 그 바람에 김부겸 박용진 등 비명계는 “심대한 명예훼손”에 “바보 된 느낌”을 접고 12일 이재명과 광화문 천막농성장에서 ‘국난극복 시국간담회’를 가져야 했다. 이재명 개인이 복장을 능가하는 운장(運將)인 건 분명하지만 다수 국민한테는 불운일 공산이 짙어 불안하다.
논란의 발언을 찾아봤다. 2023년 9월 대북송금 의혹·허위사실 공포 혐의 등으로 검찰이 구속영장을 신청하자 민주당에서 대거 이탈표가 나오면서 2차 체포동의안이 통과됐을 때 “인간 이재명, 솔직히 어땠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재명이 “뭐 예상한 일이었다”고 말한 건 대인 같은 풍모로 봐줄 수 있다. “왜냐면 그 전에 들은 얘기가 있다. 검찰 수사 과정, 당내에서 벌인 일, 내게 (사퇴를) 요구한 일 등을 맞춰 보니 다 짜고 한 일이더라. 당내 일부하고 (진행자 “검찰요?”) 짰다는 증거는 없고, 추측이다. 연관성이 있다.” 즉 이재명 자신이 비명계와 검찰이 공모했다고 말하진 않았지만 음모설을 흘리는 전법이다.
2022년 대선과 2023년 6월 대표 연설 때 이재명은 ‘불체포특권’ 포기를 약속한 바 있다. 그랬던 그가 체포동의안 표결 직전 돌연 민주당에 부결을 요청했다. 그때의 말 바꾸기를 사과하는 게 아니라, 누가 체포동의안에 찬동했는지 드러나게 하려고 일부러 부결을 요구한 것이라고 이번에 당당하게 공개한 것이다.
소름이 돋지 않을 수 없다. “드러내 뭐하시게요?” 진행자가 놀라서 묻자 이재명은 단호하게 답하는 것이었다. “책임을 물어야죠!”
총선 공천 과정에서 그들은 ‘비명횡사’했다. “당이 살려면, 민주당을 사적 욕망의 도구로 쓰고, 상대 정당 또는 아주 폭력적 집단(검찰)하고 암거래를 하는 이 집단들(비명계)이 살아남아 있으면 당이 뭐가 되겠느냐”는 게 이재명의 설명이다. 거꾸로 묻고 싶다. 민주당을 사적 욕망의 도구로, 불체포특권 포기 공약까지 깨면서 방탄도구로 이용한 자가 누군가? 당 대표라는 권력으로 의원들을 기만하고 모독한 대표가 더 큰 권력을 갖게 된다면, 앞으로 무슨 짓은 못할 것인가.
중국의 마오쩌둥도 1957년 이른바 ‘백화제방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백가쟁명과 짝을 이루는 한자성어다. 지식인과 관료를 향해 정부 오류와 당내 모순을 “자유롭게 비판하라”고 기만과 사기의 양모(陽謀) 책략을 쓴 것이다.
공포와 불안 속에 살던 중국 인민이었다. 마오쩌둥의 거듭된 요구에 관료들부터 조심스럽게 나섰다. 국방위원회 부주석 룽윈이 “6·25전쟁 당시 공산당군이 치른 희생의 대가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지식인들과 대학가에서도 “공산당 특권 배제” “레닌주의 독재 비판” 등 자유의 갈망을 터뜨렸다. 분명 마오쩌둥이 먼저 촉구했는데 5주쯤 지나자 중앙서기처 총서기 덩샤오핑이 반우파 숙청에 나섰다. 1958년까지 숙청된 사람이 무려 50만 명이다. 거짓과 술책으로 모든 인민의 재갈을 물리는 전체주의 대중통제다.
이재명은 ‘당원 중심 정당’이 리더십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원 중심이라는 정당에선 ‘당 중심’만이 우뚝 서 결국 전체주의 국가로 치닫는다는 게 역사의 교훈이다. 이재명은 비명계가 검찰과 짜고 체포동의안을 가결시켰다는 엄청난 ‘추측’을 발설하고도 “다 지나간 일”이라며 대충 넘겼다. 친명 좌장이라는 정성호 의원이 “대신 사과한다”고 했을 뿐이다. ‘김일성 수령 무오류’를 연상케 하는 겁나는 정당이다.
그나마 여소야대 정국에선 탄핵으로 직무에 부적합한 대통령 파면해 헌법질서와 정부 위기를 바로잡는 것이 가능하다. 거대 여당이 대통령까지 배출하면, 심지어 그 대통령이 누가 어디서 무슨 말을 하는지 색출까지 할 경우, 우리나라는 중국 뺨치는 전체주의 국가가 될까 두렵다.
이미 거대한 입법부가 행정부와 사법부까지 장악하면, 대통령 탄핵도 불가능하다. 그런 불행이 닥치지 않도록 국민은 대선에서 직무에 부적합한 후보를 눈 똑바로 뜨고 가려내야 한다. 정당이 먼저 후보를 걸러낼 책무가 있는 것은 물론이다.
-김순덕 칼럼니스트, 동아일보(25-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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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과 반(反)우파 투쟁
1956년 마오 "마음껏 비판하라" 선언
막상 공산당 독재 비난 봇물 터지자 반대 인물들 '우파'로 몰아서 탄압
中 정부, 비판 여론 경계하는 이유
최근 중국 정부가 약 3억명의 젊은이가 이용하는 유머 동영상 공유 애플리케이션(앱) '네이한돤쯔'를 '사회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전격 폐쇄했어요. 이에 반발한 중국인들이 전역에서 기습적인 차량 시위를 벌였다고 해요.
얼마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의 임기 제한을 철폐한 이후 중국 당국은 인터넷에서 시진핑 주석의 연임을 반대하는 각종 단어를 차단하고 있답니다. 전문가들은 이번 유머 동영상 폐쇄 사태도 '중국 정부가 비판 여론을 감시하기 위해 사회 분위기를 의도적으로 경직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중국은 왜 이토록 비판 여론이 생기는 것을 경계하는 것일까요?
◇공산당의 자신감 표출, '쌍백운동'
1949년 마오쩌둥(1893~1976)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을 대만으로 밀어내고 중국 본토를 통일했어요.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해 세계를 놀라게 했죠. 마오쩌둥은 토지 개혁을 통해 사회주의 체제를 갖추고, 한국전쟁 참전으로 내부 결속을 다져 공산당 지배를 확고히 했어요.
자신감에 취한 마오쩌둥은 1956년 '백화제방·백가쟁명'을 표방하며 대중에게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특히 공산당에 대한 비판까지 수용하겠다는 선언을 했어요. 누구든 자기 의견을 피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제자백가(諸子百家·기원전 770년~기원전 221년 중국에서 활약한 여러 학자와 학파)가 활약했던 춘추전국시대처럼 '문화적 황금기'를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포함된 선언이었어요. 이를 두고 맨 앞에 '백(百)'자가 두 개 들어갔다고 해서 '쌍백(雙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하고, 마지막 두 글자를 결합해 '명방(鳴放) 운동'이라 부르기도 해요.
자유로운 토론을 보장해주었지만 지식인들은 선뜻 나서서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어요. 그러자 마오쩌둥은 '말하는 자는 죄가 없으며, 듣는 자는 반성해야 한다'며 공산당을 적극 비판해달라고 호소했지요. 이에 지식인들의 공산당 비판이 시작되었고, 당에 대한 불만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어요. 이들을 공산당에 맞서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는 뜻에서 '민주당파'라고 해요.
쌍백운동 당시 공산당 비판에 앞장섰던 장보쥔이 우파로 몰려 군중으로부터 공개 비판을 받고 있어요. /그린비출판사
통렬한 비판 의견으로 대중에게 환호를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 저안평과 장보쥔이었어요. 저안평은 한 신문사의 편집장이었는데 '천하가 중국 공산당의 것인 양 당의 천하가 되고 있다'고 말했고, 교통부장이었던 장보쥔은 '공산당 일당(一黨) 독재를 그만두고 양당제(兩黨制)를 기본으로 하는 정당 정치 체제로 바꾸자'고 주장했어요. 이들의 활약에 힘입어 민주당파는 수십만 명 규모의 정치 조직으로 발전했지요.
쌍백운동의 분위기는 더욱 고조되어 갔어요. 민주당파는 마오쩌둥을 '살인마'로, 인민 민주주의를 '무뢰한의 독재'로 부르며 길거리 시위를 벌였어요. 그런가 하면 중부 후베이성에서는 1000여 명의 민주당파 학생이 공산당과 지방 정부를 습격하는 사건도 발생했어요. 쌍백운동을 적극 추진했던 마오쩌둥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요.
◇공산당의 반격, '반우파 투쟁'
1957년 6월 공산당은 기관지인 인민일보에 '민주당파는 우파(右派·좌파의 반댓말로 보통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단체 등을 말함) 분자'라고 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해야 한다는 사설을 실었어요. 공산당의 반격, '반(反)우파 투쟁'의 신호탄이었죠. 이로 인해 사회주의 문화 정책인 쌍백운동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부르주아(자본가) 우파로 몰려 공격의 대상이 됐어요.
가장 먼저 공격받은 것은 유명 여류 작가 딩링(1904~1986)이었어요. 딩링은 공산당에서 제명당했고, 공식석상에 모습을 보일 수 없게 되었지요. 이후 우파 분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외국인과 접촉하는 것도 불가능해졌어요. 직장에서 쫓겨나고 노동 교육을 강요받았으며, 농촌으로 추방되는 등 갖은 탄압을 받았지요.
1957년 반우파 투쟁을 외치는 행렬 모습. /위키피디아
1958년 7월까지 1년여에 걸쳐 지속된 반우파 투쟁의 결과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당원 작가, 예술가 등 7000여 명이 우파로 지목돼 당에서 쫓겨났어요. 당원들과 공산주의 청년단은 "우파가 전 인구의 5%쯤 된다"는 마오쩌둥의 말에 따라 모든 조직에서 5%의 인원을 뽑아내 추방하는 일을 벌였죠. 그 결과 55만여 명이 우파로 낙인찍혔어요.
당의 말만 곧이곧대로 믿고 서슴없이 공산당 비판에 나섰던 사람들은 반체제(反體制) 인사를 색출해내는 유인책에 걸려들었다며 통탄했어요. 이들은 덩샤오핑(1904~1997)이 집권하는 1970년대 복권(復權·한 번 상실한 권세를 다시 찾음)될 때까지 모진 고초를 겪어야 했죠.
이후 중국인들은 자기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고 침묵하거나 공산당이 주도하는 정책을 맹목적으로 따르기 시작했어요. 이는 중국의 정치 발전이 늦어지는 걸림돌이 되었죠. 더불어 권력자들은 정권에 대한 비판을 허용했을 때 감당하기 힘들 만큼 큰 역풍이 불어올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졌어요.
유머 동영상 앱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워 폐쇄까지 한 걸 보면 아직 중국의 정치적 자유만큼은 60년 전 마오쩌둥 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러나 인류 역사는 모든 대중에게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지요. 중국 정부는 과연 언제까지 이러한 역사의 보편적 흐름을 외면할 수 있을까요?
☞'백화제방·백가쟁명'(百花齊放 百家爭鳴):
춘추전국시대에는 10여 개의 제후국이 저마다 부국강병을 외치며 널리 인재를 등용했어요. 수많은 사상가와 학자가 다양한 의견을 쏟아냈고(백화제방), 유가·법가·도가 등 다양한 학파가 논쟁을 벌이기도 했어요(백가쟁명). 이를 두고 ‘온갖 꽃이 피고 많은 사람이 각기 자기주장을 편다’는 ‘백화제방·백가쟁명’이라는 말이 만들어졌지요.
-공명진·숭문중 역사 교사/기획·구성=박세미 기자, 조선일보(18-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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