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열린 러시아의 전쟁 지지 집회] ....
[서울에서 열린 러시아의 전쟁 지지 집회]
[OECD 38국 중에서 '적국'에만 간첩죄 적용하는 나라는 한국뿐]
서울에서 열린 러시아의 전쟁 지지 집회
러 대사, 대형 국기 들고 선동 연설
이달 들어 8차례 KADIZ 계속 침범
유사시 포항제철 타격하는 계획도
한국 무시하는 러에 결기 보여야
서울에서 외국의 주요 대사관이 몰려 있는 정동(貞洞)에 이런저런 일로 자주 가는 편이다. 조선일보사에서 영국 대사관 정문 옆 덕수궁 내부로 난 길을 따라가면, 미국 대사관저가 나오고 그 맞은편에 러시아 대사관이 보인다.
2022년 2월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 명령 이후 러시아 대사관 주변을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생겼다. 푸틴과 러시아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나 플래카드, 피켓이 있는지를 유심히 관찰해 왔다.
실망스럽게도 러시아 대사관 주변은 놀랄 만큼 평온하다. 정동제일교회와 배재공원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묻혀 있다.
오히려 한 달 전엔 이곳에서 대형 러시아 국기가 수십 개 펄럭이는 가운데 러시아 지지 행사가 열렸다.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는 우크라이나 침공 3주년인 지난달 24일, 대사관에서 나와 이례적인 집회를 개최했다. 대사 및 직원과 러시아인 수십 명이 참석한 전쟁 지지 집회가 서울 한복판에서 열린 것은 러·우 전쟁 이후 처음이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왼손에 러시아 국기를 들고 연단에 올라가 연설했다. “러시아는 오래전부터 안보 위협에 직면해 왔다”며 우크라이나 침공의 책임이 서방에 있다고 규탄했다. 그는 푸틴처럼 러·우 전쟁을 ‘특별 군사작전’이라고 부르며 “3년 전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날은 단극 시대가 끝나고, 공정한 민주적인 다극 국제 질서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날”이라고 했다. 참석자들은 러시아 국기를 들고 대사관까지 행진하기도 했다.
얼마나 한국을 우습게 알면, 서울 한복판에서 러시아 국기를 흔들며 이런 집회를 열었을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침공 1·2주년에는 이런 행사를 개최하지 않고 한국 눈치를 봤는데 이제는 완전히 달라졌다.
러·우 전쟁은 북한군 1만3000명이 파병되면서 더 이상 우리와 관계없는 일이 아니게 됐다. 러시아 파병 후 귀국하는 북한 장교들은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대남 침략용 야전교범을 가다듬을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에 맞섰던 병사들은 휴전선 곳곳에 배치돼 유사시에 대비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열린 러시아 대사관의 전쟁 지지 집회는 우리 정부의 유화정책이 자초한 측면이 있다. 한국 외교는 러시아가 북한과 전쟁을 함께 하는 동맹 조약 체결에 이어 북한군이 파병되는 상황을 겪으면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러시아가 10여 년 전부터 한국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을 가정해 포항제철, 부산의 화학 공장 등 민간 시설을 표적으로 삼는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했다고 보도했다. 러시아가 한국의 민간 시설에 대해 공격 계획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처음인데, 외교부는 러시아 대사를 초치하지도 않았다. 일종의 비공식적 선전포고라고 할 수 있지만, 항의하지 않고, 문제 삼지 않고 넘어갔다.
이달 들어 러시아 폭격기·전투기는 지난 11일부터 8차례에 걸쳐 우리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 진입하고 있다. 과거엔 KADIZ와 일본방공식별구역(JADIZ)을 함께 휘젓고 다녔는데, 이번엔 한국만 골라서 농락하고 있다. 러시아는 2019년 독도 주변의 우리 영공을 침범했는데, 유사한 사태를 재현하기 위한 예행 연습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럼에도 한국 외교부는 러시아가 “한국은 비우호국 중 가장 우호적인 국가”라고 반복해서 말하는 데 기대를 걸고 있다. 러·우 전쟁이 끝나면 북한은 쓸모가 없어져 그럭저럭 잘 지냈던 옛날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애인에게 구타당하면서도 “너를 사랑하니까 이러는 거야”라는 말에 가스라이팅 당하는 모습인데, 이게 헛된 희망이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 같다.
지금은 무엇보다 ‘러시아 공포증’ ‘러시아 특별국가론’에서 벗어나 담대하게 대하는 결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닫기를 바랄뿐이다.
-이하원 외교안보 에디터, 조선일보(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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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ECD 38국 중에서 '적국'에만 간첩죄 적용하는 나라는 한국뿐
중국은 국가를 배신하는 선동, 유혹, 매수 행위까지도 처벌
美 정보 무단 공개도 범죄로… 日·獨도 적국·외국 구분 없어
야당은 침대 축구… 간첩법 개정 반대하는 자가 간첩 아닌가
지난 1993년 시노하라(篠原) 사건은 간첩법 개정을 촉발한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진다. 일본 후지TV 서울지국장이었던 시노하라는 국방정보본부 소속 고영철 해군 소령을 포섭했다. 진급 누락에 불만을 가진 고 소령과 시노하라는 본격적인 스파이 활동을 전개했다. 3년 동안 각종 군사 시설과 병력 배치 현황 등을 촬영한 슬라이드 170여 장과 국방부 비밀문서 50여 건을 일본 대사관 무관에 넘겼다.
3년에 걸친 대담한 절도 행위는 마침내 꼬리가 잡혔다. 고영철은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으로 징역 4년형을 선고받았고, 시노하라는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형을 선고받고 추방됐다. 당시 시노하라 사건에 연루된 이들에겐 형법 98조에 따른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북한을 의미하는 ‘적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정부와 국회는 간첩의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형법 개정에 나서지 않았다. 그 결과, 한국은 처벌 걱정 없이 스파이들이 활동할 수 있는 환경, 그야말로 ‘스파이 천국’으로 변해갔다.
지난해 6월 중국인 2명이 부산 해작사에 입항한 미국 항공모함을 드론으로 불법 촬영하다가 적발됐다. 11월에는 또 다른 중국 국적 40대 남성이 내곡동 국정원 건물을 촬영하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부산에서 미국 항모를 드론으로 촬영한 중국인 3명은 2년 전부터 500여 군사 시설을 찍어온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모두 중국계 이민자, 관광객, 유학생 신분을 내세우고 ‘단순 호기심’이라고 주장하며 한국의 허술한 법망을 피했다.
지난해 국군정보사 소속 군무원은 1억6000만원을 받고 중국 동포에게 군사 기밀을 유출했지만 간첩죄로는 처벌하지 못했다. 지난 2022년 송파구 중식당은 중국의 비밀 경찰서로 드러났지만, 중국 주인은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됐다. 4조3000억원 상당의 첨단 기술을 중국에 유출한 전 대기업 임원은 산업 스파이임에도 부정경쟁방지법 위반으로만 송치됐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8국 중 간첩죄를 적국에만 한정한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다. 중국은 형법 제11조에 간첩죄 조항을 포함하고 있지만 2023년 반(反)간첩법 개정을 통해 제3국을 겨냥한 간첩 활동에 대해서도 처벌하고 있다. ‘국가를 배신하도록 선동·유혹·매수’하는 행위까지도 처벌 대상에 포함하는 등 이현령비현령식이다.
중국 국가안전부(MSS)는 지난해 5월 회사 근무 당시 반도체 관련 정보를 한국으로 유출했다는 혐의로 한국 교민을 반간첩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탈북자를 지원하던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미국 간첩법(Espionage act)은 미국에 해를 끼치거나 적을 도울 수 있는 국방 관련 정보를 무단으로 공개하는 행위를 모두 범죄로 규정했다. 검사가 기소에 유리하게 간첩법을 포괄적으로 규정해 스파이가 빠져나갈 구멍을 최소화한 것이다.
국정원 요원들과 접촉하다 체포된 한국계 대북 전문가 수미 테리는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였다. 일본도 지난 2012년 ‘특별비밀보호법’을 제정해 간첩 행위에 대해 ‘적국’과 ‘외국’을 구분하지 않고 처벌한다. 필리핀은 지난 1월 불법으로 군사 정보를 수집해 국가 안보를 위협한 중국인 간첩 5명과 각종 군사 시설 등을 불법 촬영한 중국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체포했다.
1953년 정전 협정 체결로부터 불과 한 달여 뒤에 제정된 한국 형법의 간첩죄는 72년째 토씨 하나 바뀌지 않고 있다. 강산이 여러 번 바뀌면서 한국은 빼내야 할 정보가 많은 부자 나라가 되었고, 간첩질의 최우선 대상국이 됐다. 조문상 ‘적국’을 ‘외국 및 외국인 단체’로 고치는 개정안이 지난 2004년부터 발의됐지만, 정쟁 속에 제대로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번번이 폐기 수순을 밟았다.
22대 국회는 군 정보사 기밀 유출 사건을 계기로 정치권에서 개정안 논의가 활발하다. 여야는 각각 다양한 간첩법 개정안 18건을 발의했다. 지난해 11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가 형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의결했다. 하지만 간첩 처벌 범위를 ‘북한’에서 ‘외국’으로 넓히자는 형법 개정안은 표류하고 있다. 야당이 돌연 반대 입장으로 선회하여 개정안을 법사위 전체 회의에 아예 올리지 않고 있다. 일부 강성 재야 단체의 요구에 동조해 ‘국정원 권한 남용으로 간첩 혐의자를 양산하고 민간 사찰 등 인권 침해가 우려된다’며 복지부동이다. 계엄을 빌미로 뜬금없이 공청회 등을 개최해 여론을 더 수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공(對共) 수사권이 경찰로 이관돼 국정원은 사실상 식물 기관이 됐다. 그러나 야당은 인권 침해 가능성을 이유로 개정 논의를 지연시키는 ‘침대 축구’ 전술을 펼치고 있다. 야당 내에 국정원장, 차장, 기조실장 출신 인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권이 없는 국정원을 내세워 재야 단체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은 자기모순적인 행태다.
최근 간첩 활동 혐의로 대법원에서 3년 6개월의 실형이 확정된 ‘자주통일 충북동지회’ 사건조차 간첩죄가 적용되지 않았다. 이들은 2017년 북한 문화교류국 공작원에 포섭되어 4년간 국가 기밀을 유출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자유 민주 질서에 해악을 끼칠 위험은 인정하면서도 간첩죄는 무죄로 판단했다. 수집한 정보가 국가 기밀이 아니라는 주장은 OECD 국가에서는 상상할 수 없다.
격변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외국과 적국의 구분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일 뿐이다. 이제라도 간첩법을 개정해 우리 국민과 국익을 지키는 최소한의 법적 안전망을 구축해야 한다. “간첩법 개정을 미루는 자가 간첩”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남성욱 숙명여대 석좌교수·전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 조선일보(25-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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