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온 종묘] [한국미의 정수, 종묘 정전] ....
[돌아온 종묘]
[한국미의 정수, 종묘 정전]
[종묘 새 단장… 왕과 왕비 신주 다시 모시네]
돌아온 종묘
개화기에 한양을 방문한 서양인들은 “어떻게 조선엔 망자와 신을 모시는 건물이 없느냐?”고 의아해했다. 파르테논이나 판테온과 달리 조선 왕실의 사당인 종묘는 외부에 공개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조선인조차 그 안이 어떤 모습인지 아는 이가 드물었다. 오늘날 조선 건축의 걸작이란 찬사를 받는 종묘가 오래도록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이유였다.
▶종묘의 건축미를 대표하는 건 ‘단순함’이다. 특히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정전(正殿)은 화려한 팔작지붕 대신 책을 펼쳐 엎어놓은 모양의 맞배지붕이 20개의 기둥에 의지해 100m 넘게 이어지는 극도로 단순한 형태다. 사진작가 배병우는 “땅끝까지 가려는 듯 낮게 퍼져 가면서 그처럼 장엄한 느낌을 주는 건물은 종묘밖에 없다”고 했고,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겨울의 눈 내린 종묘 정전 지붕은 거대한 수묵 진경산수화’라고 예찬했다.
▶세계적인 건축가들도 종묘를 주목했다. 스페인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은 프랭크 게리는 2012년 한국을 찾으면서 “다른 일정은 다 빼더라도 종묘 방문은 꼭 해야 한다”며 “한국인은 이런 건물이 있다는 것을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 “미니멀리즘은 감정이 배제되어야 하는데 이처럼 살아있는 느낌을 주는데 어떻게 미니멀리즘이냐”고도 했다. 그 후 많은 외국인이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화려함과는 다른 한국 전통 건축의 멋을 음미하려고 종묘를 찾는다.
▶종묘 정전이 5년의 보수 공사를 끝내고 오는 20일 시민 품으로 돌아온다. 그동안 창덕궁 옛 선원전으로 옮겨졌던 조선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다시 종묘로 모시는 환안제(還安祭)도 이날 열린다. 말 7필, 가마 28기가 1000명 가까운 행렬과 함께 창덕궁을 떠나 광화문을 거쳐 종묘까지 행진하는 장관이 펼쳐진다. 155년 만의 재연이고 조선 시대를 포함해도 네 번째인 드문 행사지만 ‘의궤’에 생생하게 기록돼 있어 완벽하게 재연된다고 한다.
▶종묘 건축의 아름다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정전을 둘러싼 낮은 담장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전은 권위적인 공간이다. 서양에선 주로 회랑을 써서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종묘는 담이 시야를 가리지 않고 두 전각의 위용을 한껏 드러내도록 낮은 담을 쳤다. 이 낮은 담장이 멋진 조경미를 더한다. 담 너머로 전각의 지붕과 그 뒤의 숲이 하늘을 배경 삼아 펼쳐지기 때문이다.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하는 북신문도 복원돼 지난해부터 휴일이면 일반에게 개방된다. 과거 왕족만 출입하던 곳이 시민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이런 게 복원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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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의 정수, 종묘 정전
조풍류 화가의 2020년 작 ‘종묘’와 종묘제례 일무 공연 /권재륜 사진작가
“파리 하면 에펠탑, 뉴욕 하면 자유의 여신상, 시드니 하면 오페라하우스가 떠오르는데 서울 하면 바로 떠오르는 대표적 아이콘, 랜드마크가 없다. 종묘는 어떨까?”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을 아름답게 그려낸 조풍류 화가의 ‘풍류, 서울을 보다’ 전시장에서 만난 어느 작가의 이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세계적 건축가 프랭크 게리는 종묘의 정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건축물은 없다. 굳이 비교한다면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정도와 견줄 수 있다.” 가로 101m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인 종묘의 정전은 ‘검이불루 화이불치(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라는 한국미의 정수를 제대로 담아낸 작품이다.
종묘 정전이 5년 가까운 보수 공사를 마치고 4월 20일 다시 개방된다. 창덕궁에 임시 봉안했던 조선 왕과 왕비 신주 49위를 옮겨오는 환안제도 열린다. 위 사진은 조풍류 작가의 2020년 작 ‘종묘’와 종묘제례 일무 공연.
2020년 보수공사 시작하기 전에 촬영한 종묘 정전 /권재륜 사진작가
-권재륜 사진작가, 조선일보(25-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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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묘 새 단장… 왕과 왕비 신주 다시 모시네
종묘 정전/윤주
“신주(神主) 모시듯 하라.” 조심스럽고 정성스레 다루거나 간직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돌아가신 분의 영혼이 깃든 신주를 소중하게 모시는 데에서 유래했다. 예로부터 신주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것은 세상 떠난 조상과 살아있는 후손이 만나는 자리로 중요하게 여겼다.
그중 최고의 격식을 갖춘 곳으로, 종묘의 중심 건물인 ‘종묘 정전(宗廟 正殿)’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왕조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사당이자 신전으로 영혼을 위한 공간이다. 왕에게 삶의 공간이던 궁궐과는 사뭇 다르게, 그 혼령을 모신 신주가 종묘의 주인인 셈이다.
신주는 몸을 떠난 혼령이 깃드는 상징적인 물품이다. 왕과 왕비의 신주는 밤나무로 만들었다. 옹이가 없고 결이 좋은 밤나무를 쓴다. 밤나무를 신주로 쓰는 까닭으로는 자손을 번성하게 하는 상징과 밤송이가 덮인 밤나무 율(栗)이 두려울 율(慄)도 품어 두려워하며 삼가고 공경하라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알려졌다.
종묘 정전은 칸을 나눠 19개의 실에 19명의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셨다. 신실 가장 위쪽 가운데에 신주를 모시고 그 위에 천을 두르듯 놓았다. 신주는 긴 직육면체의 대략 28cm 높이로 간결한 모양이다. 앞면에 묘호와 시호 등을 적고 윗부분이 볼록 올라와 있는 형태로, ‘규(窺)’라는 혼구멍을 뚫어 혼이 드나들게 했다.
그동안 종묘 정전이 보수 중이라 창덕궁 옛 선원전에서 신주를 임시로 봉안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모셨던 신주를 다시 제자리로 모시는 것을 환안(還安)이라 하는데, 종묘 정전이 새 단장을 끝내 임시 봉안했던 49위 신주의 환안이 시작된다. 20일에는 155년 만에 환안제가 재현된다. 세계유산 종묘에서 열리는 행사는 가히 장관일 듯하다.
신주를 다시 모시는 종묘는 정성 어린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신로(神路)를 이어주는 월대 박석들은 잘 정돈되었고, 장엄한 종묘 정전을 감싸는 나무들도 꽃잎 흩날리며 초록빛을 더하고 반길 준비를 하고 있다. 제자리를 찾아가는 풍경이 더없이 엄숙하고 아름답다.
-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조선일보(2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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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창경궁-종묘
경복궁은 조선 태조가 정도(定都)한 서울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고 가장 먼저 만들어졌지만 훼손이 잦았다. 태종 이후 임금 대부분이 거처했고 옛 모습이 가장 잘 보존된 곳은 창덕궁이다. 왕가의 식구들이 많아지면서 창덕궁 옆에 궁궐 하나를 더 지었으니 창경궁이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아울러서 동궐(東闕)로 불리던 하나의 궁궐이었다. 창덕궁의 후원은 창경궁의 후원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에 창경궁과 종묘는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임금이 비공식적으로 종묘에 행차할 때는 이 문을 이용했다고 한다. 사자(死者)들의 공간, 그러니까 신위(神位)를 모신 곳에는 문에 이름을 붙이지 않는다. 종묘의 정문은 현판이 없다. 마찬가지로 창경궁과 종묘를 가르는 담장에 있는 문에도 현판이 없다. 다만 궁궐 사람들이 그 문을 북신문(北神門) 북문(北門) 북장문(北牆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을 뿐이다.
▷일본이 1932년 지금의 율곡로를 만들면서 창경궁과 종묘는 분리됐다. 서울시는 율곡로 위에 터널을 만들고 그 위를 흙으로 덮어 창경궁과 종묘를 잇고 어제 개통식을 가졌다. 90년 만의 재연결이다. 물론 담장과 그 한가운데 문도 복원됐다. 다만 단체관람에 화요 휴무인 종묘와 개인관람에 월요 휴무인 창경궁의 입장 체계가 달라 문화재청이 이를 통합하기 전까지 한동안은 담장 사이 문을 통해 종묘와 창경궁을 왕래할 수 없다는 게 아쉬운 점이다.
▷그 대신 터널 위로 율곡로의 축선을 따라 만들어진 담장길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창덕궁 돈화문 쪽이나 길 건너편에서 올라 원남동 사거리로 내려가는 길이다. 이미 종묘의 서쪽 담장길인 서순라길, 동쪽 담장길인 동순라길에 카페와 식당이 들어서면서 이곳이 젊은이들의 핫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에 서순라길과 동순라길을 연결하는 북쪽 담장길까지 열리면서 이 일대가 더욱 활기를 띨 전망이다.
▷건축가들의 숙제 중 하나가 북한산에서 동궐로 이어진 녹지를 어떻게 남산까지 연결하느냐는 것이다. 이번에 녹지가 종묘까지는 이어졌다. 인왕산에서 발견된 산양이 종묘까지 내려올지도 모를 일이다. 종묘 앞에서 남쪽으로 세운상가가 시작된다. 세운상가가 종로 을지로 충무로 일대를 동서로 절단하고 있어 개발을 방해하고 있으니 없는 것으로 여기고 새로 개발하자는 생각과 어쨌든 세운상가가 보존해온 남북축을 활용해 종묘에서 남산까지 녹지공간이 이어지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이 충돌하고 있다. 어려워 보이지만 개발도 하고 녹지공간도 잇는 쾌도난마의 아이디어가 나왔으면 한다.
-송평인 논설위원, 동아일보(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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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갈라놓은 창경궁과 종묘, 90년 만에 다시 만나다
일제때 단절됐던 조선 궁궐
일제(日帝)가 종묘 관통 도로(현 율곡로)를 내며 갈라놓았던 창덕궁·창경궁과 종묘가 다시 만났다. 1932년 도로 개통 이후 90년 만이다. 율곡로를 지하에 넣고 그 위에 흙을 덮으면서 두 궁궐과 종묘를 하나의 숲으로 연결하는 녹지(8124㎡)가 들어섰다. 녹지는 서울 상암동 축구 경기장(7140㎡)보다 크다. 그 위로 옛 종묘 담장도 복원되며 두 궁궐과 종묘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던 일제 강점기 이전 모습으로 돌아갔다. 돈화문 앞에서 창경궁 경내를 지나 원남동 사거리까지 이어지는 담장 산책로가 새로 조성됐다. 길이 320m인 담장 산책로는 덕수궁 돌담길 못지않은 서울의 걷기 명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터널이 된 율곡로는 6차로로 확장돼 시원하게 뚫렸다. 2010년 오세훈 당시 서울시장이 ‘창경궁~종묘 연결 복원 사업’ 첫 삽을 뜨고 12년 만의 결실이다. 복원된 녹지와 종묘 담장, 담장 산책로는 오는 21일 일반에 개방된다. 장마가 잠시 멈춘 4일 오후, 막바지 시민맞이 준비로 바쁜 종묘 돌담길을 미리 가봤다.
창경궁과 종묘, 90년 만에 다시 만나다
◇총독부 “종묘 관통 도로 놓겠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원래 하나의 궁궐이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 동쪽에 있다 해서 동궐(東闕)로도 불렸다. 동궐은 북악산 응봉에서 뻗어나온 숲을 따라 종묘와도 연결됐다. 하지만 동궐과 종묘는 일제의 조선 병탄 이후 쪼개졌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11월 서울 도심에 바둑판 형태의 현대식 도로 29개를 놓는 경성시구개수안(案)을 발표했다. 그중 돈화문 앞에서 지금의 서울대병원까지 잇는 6호선은 동궐과 종묘 사이를 횡으로 통과하는 ‘종묘 관통선’이었다. 일제는 “경성을 서구식으로 문명화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추진 과정에서 옛 왕조의 여러 궁궐을 훼손했다. 종묘 관통선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열성조를 모신 종묘 훼손은 안 된다”는 순종의 반대에 막혀 진척되지 못했다.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며 상황이 반전됐다. 왕조가 무너진 뒤 15년여가 흘렀고 종묘 동쪽(현 동숭동)에 제국대학과 병원이 들어서며 교통량도 늘었다. 이런 변화에 맞춰 관통 도로를 개설하라는 목소리가 컸다.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도로를 뚫기 위해 종묘를 이전하거나 공원화하자고까지 했다.
◇종묘, 섬이 되다
1931년 5월, 창경궁 쪽으로 조금 수정된 노선으로 도로가 착공되며 결국 종묘 담장이 헐렸다. 조선일보는 그해 8월 2일 자 ‘헐려진 종묘 담터’ 기사에서 총독부의 종묘 담장 훼손 소식을 비감한 어조로 전했다. ‘(종묘의) 뒷담이 여지없이 헐려 넓으나넓은 길이 뚫리게 되어 자동차 구루마가 거침없이 앞으로 뒤로 횡행 관통하게 되었고(중략) 오랜 터의 없어지는 것을 모조리 보는 우리가 어찌 상심루(淚)가 없을 수 있으랴!’ 폭 22m 신작로가 이듬해 4월 완공됐다. 현재의 율곡로다. 종묘는 동궐에서 분리돼 섬처럼 떨어져 나갔다. 총독부는 조선 왕실의 반발과 비판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이 도로 위에 창경궁과 종묘를 연결하는 육교를 놓았다.
◇황톳길 산책로 걸으며 꽃과 나무 감상
서울시는 일제가 훼손한 동궐을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는 공사를 2010년 10월 시작했다. 이를 위한 율곡로 터널화 공사가 지난해 9월 완료됐다. 그사이 터널 위에선 궁궐 녹지와 담장 복원, 산책길 조성 공사가 진행됐다. 4일 오후 돈화문 옆 순라길을 걸어 산책로에 올라보니 탁 트인 전망대가 반긴다. 돈화문과 현대 계동 사옥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망대 맞은편으로 복원된 담장과 운치 있게 뻗어 있는 돌담길이 모습을 드러냈다. 산책로 초입 오른쪽엔 이곳이 유서 깊은 조선의 유적임을 알려주는 돌무더기가 눈길을 끈다. 2011년 궁궐 복원을 위한 문화재 시굴 조사 중 땅속에 묻혀 있다가 발견된 옛 담장 기초석이었다. 본격적으로 산책을 시작했다. 궁궐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어울리도록 애쓴 흔적을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담장은 조선 궁궐 담장에 쓰던 사괴석으로 쌓아 올렸고, 폭 3m인 산책로는 시멘트 대신 황토 원료의 흙콘크리트를 깔았다.
산책로 옆으로 동궐과 종묘의 주된 수종인 소나무 250여 그루, 가을에 낙엽을 즐길 수 있는 단풍나무 팥배나무 등 낙엽 활엽수 500여 그루가 줄지어 늘어섰다. 나무들 사이로 설치된 가로등은 성인 허벅지 높이로 일반 가로등보다 작았다. 동행한 문화재청 측은 “고궁의 예스러운 분위기를 즐기며 산책하는 시민의 시선을 고려한 높이”라고 설명했다. 봄에 피는 철쭉·진달래·옥매화, 여름에 꽃 피는 고광나무·황매화 등 계절에 따라 다양한 꽃을 감상할 수도 있다. 종묘 담장 산책로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여름철 기준) 통행할 수 있다.
◇육교 허물고 왕이 드나들던 北神門도 복원
산책로를 따라 200m쯤 가면 복원된 북신문(北神門)에 다다른다. 이 문을 통과해 창경궁과 종묘를 넘나들 수 있다. 동궐과 종묘가 도로에 의해 갈라지기 전엔 조선의 왕들이 이 문을 이용했다. 일제가 도로를 만들며 설치했던 육교는 철거됐다. 다만, 북신문을 통과해 창경궁과 종묘를 오가는 것은 당분간 불가능하다. 북신문 매표소가 설치됐지만, 자유 관람인 창경궁과 예약을 통한 시간제 관람인 종묘의 매표 시스템이 아직 통합되지 않았다. 창경궁과 창덕궁은 이미 함양문으로 연결돼 있으니 북신문만 개방되면 동궐과 종묘의 연계 관람이 가능해진다. 서울시와 문화재청은 복원 취지에 맞게 향후 북신문 개방에 필요한 조치를 협의하기로 했다.
◇일제의 조선 왕궁 훼손
일제는 덴노(天皇)의 궁궐 보존에 정성을 다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교토의 옛 궁궐인 어소(御所)가 폭격당하는 화를 피하려고 주요 전각을 해체해 보관했을 정도다. 총독부의 조선 궁궐 대우는 달랐다. 경복궁을 식민지 근대화의 선전장으로 동원하며 크게 망가뜨렸다. 온갖 박람회와 전시회를 열었고 그때마다 궁궐을 훼손했다. 1915년 ‘시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때는 전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며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에 있던 흥례문을 헐었고, 자선당과 비현각을 매각했다. 세자와 세자빈 숙소인 자선당은 일본인에게 팔려 도쿄에서 호텔로 쓰이다가 관동대지진 때 불탔다. 타고 남은 기단과 주춧돌만 해방 후 돌아왔다. 총독부는 1929년 조선박람회를 개최할 때도 도로를 확장한다며 경복궁 궁장(궁궐 담장)을 훼손했다. 이때 궁장과 연결된 동십자각이 궁에서 분리돼 도로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게 됐다. 서십자각은 전차 통행에 방해된다며 아예 허물었다. 고종 시절 500여 동이던 각종 건축물이 해방 당시엔 36동밖에 남지 않았다.
덕수궁의 선원전 일대엔 여러 학교가 들어섰고 돈덕전은 철거됐다가 최근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다. 조선 궁궐을 공원화할 계획도 세웠다. 총독부가 발간한 ‘경성도시계획 공원표’엔 경복원 창덕원 덕수원 공원화 계획이 실려 있다. 창경궁은 창경원으로 격하해 동물원 식물원 박물관으로 활용했다. 옛 전각을 허문 자리에 일본식 건물도 세웠다. 경희궁엔 일제의 조선 병탄 직후인 1910년 11월 통감부중학교가 들어섰다. 정문인 흥화문의 운명은 더욱 기구했다. 장충단으로 옮겨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당의 정문으로 쓰였다. 해방 후 신라호텔 정문으로 사용되다가 1988년에야 경희궁으로 돌아왔다.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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