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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명 ‘프란치스쿠스’… 검박한 마지막 길] [두 명의 교황] ....

뚝섬 2025. 4. 28. 06:02

[묘비명 ‘프란치스쿠스’… 검박한 마지막 길]

[두 명의 교황]

[교황의 묘비명]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늘 낮은 곳 걸은 프란치스코]

 

 

 

묘비명 ‘프란치스쿠스’… 검박한 마지막 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을 비롯한 세계 정상급 인사 80여 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130여 개국 대표단과 함께 25만 명이 장례미사에 참석했고, 15만 명이 운구 행렬을 따랐다. 26일 엄수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식 참석자들의 면면과 추모 인파는 바티칸 시국의 수반이자 14억 가톨릭 신도들의 지도자로서 교황의 위상을 실감케 한다. 하지만 장례식은 검박했다. ‘가난한 이들의 겸손한 수호자’였던 교황의 유언대로 품위 있되 소박한 마무리였다.

▷21일 선종한 교황은 전임자들과 달리 방부 처리를 않고 세 겹이 아닌 홑겹 관에 안치돼 조문객을 맞았다. 선종 후에도 우상이 되기보다 인간적이었던 교황의 마지막 모습에 조문객들은 사진기를 내려놓고 두 손을 모았다. 장지인 성모 대성전에서 교황의 관을 처음 맞이한 이들은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 76세에 즉위한 후 12년간 68개국을 돌며 약자들을 위로했던 고단한 몸은 땅 아래 묻혔고, 고급 대리석 대신 증조부 고향에서 캐낸 ‘민중의 돌’로 만든 비석엔 ‘빈자의 성인’에서 따온 교황의 라틴어 이름만 새겨졌다. ‘프란치스쿠스’.

▷검소했던 장례 절차는 교황직을 수행하던 모습 그대로다. 교황청은 보유 자산이 최소 8조5000억 원에 연간 예산이 1조2000억 원이지만 교황은 ‘가난 서약’에 따라 월급(4600만 원)을 모두 교회에 기부했다. 2001년 추기경에 서임된 후로도 월급(670만∼840만 원)을 받지 않았다. 교황이 남긴 전 재산이 100달러뿐이라는 아르헨티나 언론 보도도 나왔다. 교황은 저서에서 “교회의 사제, 주교, 추기경들이 고급차를 몰며 청빈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썼다.

 

▷청빈함은 12년 전 남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교황에 선출된 비결이다. 교황청 안팎으로 비리와 추문이 끊이지 않던 시기에 교황이 된 그는 방만한 재정 개혁에 나섰다. 2021년엔 “교황청 재정은 투명한 유리집이 돼야 한다”며 교황청이 전 세계에 보유한 5000여 개 부동산 실태를 공개했다. 교황청 고위직이 신자들의 헌금으로 영국 런던의 고급 빌딩을 시세보다 비싸게 사들였다 큰 손해를 본 사건이 계기가 됐다. 연간 800억∼900억 원의 적자 해소를 위한 추기경 임금 삭감 등 구조조정도 마지막까지 힘을 기울였던 과제다.

한국에선 김수환 정진석 염수정 유흥식 4명의 추기경이 나왔고, 이 중 2명이 선종했다. 2009년 선종한 김 추기경 장례미사는 일반인과 별 차이 없이 소박했고, 2021년 선종한 정 추기경 때는 코로나로 더욱 간소했다. 김 추기경은 각막 기증으로 빛을, 정 추기경은 장기 기증으로 생명을 주고 떠났다. 모든 걸 내어주고 빈손으로 떠난 성직자들을 보며 혼탁한 뉴스로 어지러운 세상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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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명의 교황

 

[강헌의 히스토리 인 팝스]

Sarah McLachlan 'Prayer of St. Francis'(1997)

 

<Prayer of St. Francis>, Sarah McLachlan (1997)

 

2019년 개봉한 영화 ‘두 교황’은 교황청의 부패 스캔들로 사임을 앞둔 베네딕토 16세와 그 후임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이 되는 베르골리오 추기경을 다룬 작품이다. 배우 앤서니 홉킨스와 조너선 프라이스가 두 교황 역을 맡았다. 실제 두 교황의 나이 차가 9년인데, 두 배우의 나이도 열 살 차이라 흡사하다. 홉킨스는 82세, 프라이스는 72세였다. 두 배우는 영국 웨일스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다. 나란히 그해 아카데미 남우 주연상과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보수와 개혁을 대변하는 두 교황이 서로에게 참회하고 서로에게 사면하는 마지막 시퀀스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숨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다.

 

영화 속에서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콘클라베를 통해 차기 교황이 거의 확정된다. 그 순간 옆자리의 브라질 추기경이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축원의 키스를 보냈고, 베르골리오 추기경은 자신의 교황명이 ‘프란치스코’여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다고 한다.

 

역대 266명의 교황 중에서 성인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쓴 이는 그가 처음이다. 흔히 ‘아시시의 성인’으로 불리는 12세기의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집안 출신이다. 젊은 시절에는 쾌락을 만끽했지만 신의 부르심을 받고 평생을 낮은 곳에 임한 성자다.

 

세라 매클라클런의 이 노래는 유명한 그의 기도문을 노래로 옮긴 것이다. “주님,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어둠이 있는 곳에 빛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게 하소서(Lord, make me an instrument of your peace/Where there is hatred, let me sow love/Where there is injury, pardon/Where there is doubt, faith/Where there is despair, hope/Where there is darkness, light/And where there is sadness, joy).” 최초로 무슬림의 발을 씻긴 교황 프란치스코는 100달러 남짓의 전 재산을 남기고 영원한 하늘의 품으로 돌아갔다.

 

-강헌 음악평론가, 조선일보(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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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지막 길,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 메운 25만명 - 지난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장례 미사가 26일 바티칸 성 베드로 광장에서 진행되는 모습. 예수 그리스도가 제자인 베드로에게 주겠다고 한 '천국의 열쇠'를 형상화해 설계된 성 베드로 광장에 조문객 25만명이 가득 찼다. 사진 기준 맨 아래 가운데 보이는 교황의 관을 기준으로 오른쪽 붉게 보이는 이들은 성직자들, 나머지 검은 옷을 입은 이들은 대부분 일반 조문객들이다. 왼쪽 아래엔 영성체 등 미사 절차를 돕는 사제들이 흰옷을 입고 모여 있다. 교황은 유언에 따라 로마에 있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에 안장됐다. /AP 연합뉴스

 

-조선일보(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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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의 묘비명

 

죽은 이의 삶을 기록하는 묘비명(墓碑銘)은 미라를 만들던 고대 이집트 때부터 있었다. 망자의 나이와 관직, 이름을 적었다. 로마인들은 묘비명에 망자의 삶도 담고자 했다. 눈길 끄는 문장이나 시(詩)로 인생을 축약했다. 오가는 사람들이 묘비명을 읽고 고인을 오래 기억하도록 묘를 붐비는 길가에 썼다.

 

▶묘비명 작성엔 문학적 함축과 은유, 기발한 아이디어가 동원된다. 심지어 문장을 쓰지 않기도 한다. 원주율을 소수점 이하 35개까지 계산한 네덜란드 수학자 뤼돌프 판쾰런의 묘비명은 그가 계산해 낸 원주율 숫자다. 가수 휘트니 휴스턴의 묘비명은 ‘THE VOICE’(목소리)다. 그녀의 팬들은 정관사 ‘the’를 붙임으로써 휴스턴의 목소리가 해와 달처럼 유일하다는 찬사를 바쳤다. ‘로마의 휴일’에서 열연한 배우 그레고리 펙 부부의 묘비명엔 애틋한 부부의 정이 담겼다. 펙의 아내는 남편 사후 9년 뒤 눈을 감으며 합장할 것과 ‘영원히 함께’란 묘비명을 새기라고 유언했다.

 

▶21일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묘비명이 공개됐다. 아무 장식 없는 비석에 프란치스코의 라틴어 표기인 Franciscus’(프란치스쿠스)만 적는다. 생몰연도, 재위 기간도 새기지 말라고 했다. 입관 의식을 생략할 것과, 장례는 교황청 돈이 아닌 생전에 자신이 모은 돈으로 간소하게 치르라고 당부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청빈(淸貧)을 평생의 지표로 삼았던 교황다운 마무리다.

 

▶생전의 교황은 다정하고 소탈했다. 누가 “당신은 어떤 사람이냐?” 물으면 이탈리아어로 ‘casalingo(가정적)’인 사람이라 답했다. 독신을 맹세한 사제로서 하느님의 자녀를 가족으로 섬겼다. 소아 병원을 찾아가거나 노숙자들을 교황청에 초대해 손수 발을 씻기며 “고통받는 이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것이 저의 소명”이라고 고백하는 교황을 사람들은 사랑하고 존경했다.

 

▶정치적으로는 진보 성향이었다. 빈부격차 해소를 촉구했고 동성애 문제에도 기존의 보수적 교회와 달리 전향적이었다. 세상을 바꾸려면 혁명이 필요하다고 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 수단은 어디까지나 ‘호의’와 ‘상냥함’이라고 했다. 영화 ‘두 교황’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식사 기도가 길어지자 당시 추기경이던 프란치스코 교황이 피자를 집어들다가 슬그머니 내려놓는 장면은 그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낸 명장면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록 한 단어의 이름으로 남겠지만 그의 묘비명을 보는 이들은 교황의 전 생애를 기억할 것이다. “교황님, 저희와 함께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기도하면서.

 

-김태훈 논설위원, 조선일보(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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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 늘 낮은 곳 걸은 프란치스코

 

21일 향년 88세로 선종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점진적 개혁주의자로 평가받는다. 최초의 신대륙 출신 교황이자 예수회가 배출한 첫 교황이었다. ‘교황청의 아웃사이더’인 셈인데 동시에 아르헨티나 국적이긴 하나 이탈리아 혈통이고 가톨릭 교리에 충실한 보수주의자였다. 급진적이지 않으면서 성추문과 부패 문제로 신뢰를 잃어가던 가톨릭 교회를 재건할 적임자로 제266대 교황에 선출된 그는 12년간 12억 가톨릭 교인들과 함께 안정적인 변화를 이끌며 울림이 깊은 말을 남겼다.

가톨릭의 최고 이론가였던 전임 교황과 달리 그는 거리의 성직자였다. “천성이 사람들과 함께하지 않고선 살 수 없다”던 그는 1969년 사제품을 받은 후 ‘가난한 자들의 아버지’로 불리며 평생을 낮은 곳에 사는 이들과 함께했다. 가난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제2의 출애굽’으로 여기는 해방신학의 고장 남미 출신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좌파적 해방신학에 거리를 두면서도 “가난한 이들의 깃발은 기독교도의 것”이라고 했다.

▷76세 고령에 교황이 된 그는 우려와 달리 전 세계를 바삐 다니며 평화와 화해를 호소했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도 피하지 않았다. 난민들의 떼죽음엔 “우리 모두 공범”이라고 질타했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이민 정책에 대해선 “다리가 아닌 벽만 세우려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무슬림 과격분자의 공격을 받은 후엔 이슬람과 폭력을 동일시하지 말라며 “이슬람 폭력을 말하려면 가톨릭 폭력에 대해서도 말해야 한다”고 했다. 2014년 방한 당시 세월호 리본을 단 그에게 주변에서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으니 떼는 게 좋겠다’고 하자 이렇게 답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성 소수자 문제에 대해선 전향적인 입장을 보였다. 동성애자 사제에 대한 질문을 받고는 반문했다. “내가 누구라고 그들을 판단하겠나.” 동성애, 이혼, 재혼에 대해서도 “하느님께서는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고 했다. 하지만 동성혼 허용과 여성 사제 서품엔 반대하며 가톨릭의 핵심 가치를 고수했다. 개혁론자들은 반발했지만 “더 크고 오래가는 합의를 만들려면 점진적으로 바꿔 나가야 한다”는 것이 교황의 지론이었다.

▷청빈했던 그는 교황에 오른 뒤엔 화려한 전용 숙소를 거부하고 소박한 사제들의 공동 숙소에서 살았다. 낡은 구두를 신고 순금 대신 철제 십자가를 목에 걸었다. 나머지는 다 헛것이라고 했다. “공작새를 보라. 앞에서 보면 아름답지만 뒤에서 보면 진면모를 알게 된다.” 마지막 부활절 강론에서 “전쟁을 끝내 달라”고 당부하고, 유언장에는 “장식 없는 무덤에 이름만 새겨 달라”고 했다. 13세기 ‘빈자의 성인’ 아시시의 프란치스코를 딴 이름다운 마무리다.

 

-이진영 논설위원, 동아일보(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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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럼프·마크롱 등 정상들 앞다퉈 “교황 장례식 참석.” 조문 외교의 장에서 고인 뜻 받들어 세계 평화 논의하기를.

 

-팔면봉, 조선일보(25-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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