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숙 동맹] [군사조약들]
[앙숙 동맹]
[군사조약들]
앙숙 동맹
어제의 숙적이 오늘의 동지… 공통의 적 나타나면 뭉쳤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고강도 관세 정책으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국제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간 경제와 안보, 인권 등을 두고 대립해 온 유럽 국가들과 중국 사이에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는 건데요. 최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중국과 EU(유럽연합)가 미국의 괴롭힘을 함께 막아내야 한다”고 말했어요. EU 역시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고요. 오는 7월엔 중국과 유럽연합이 정상회담도 가질 예정이랍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고 대립해 온 국가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손을 맞잡는 일은 세계사에서 낯선 일이 아닙니다. 공통의 적 앞에선 오랜 적대 관계를 뒤로하고 함께 피를 흘리며 싸우는 혈맹이 된 경우도 많았죠. 오늘은 역사 속의 ‘앙숙 동맹’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슬람 제국과 동맹 맺은 기독교 국가
16세기 초 서유럽의 프랑스는 유럽 내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합스부르크는 스위스에서 출발한 귀족 가문으로, 정략결혼을 통해 스페인과 헝가리, 네덜란드 등 넓은 지역에 영향력을 미쳤어요. 카를 5세 시기엔 권세가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스페인 왕, 신성로마제국 황제, 오스트리아 대공 등을 겸임했지요.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왼쪽)와 오스만 제국 황제 술레이만 1세(오른쪽)의 초상화를 편집한 사진. 두 사람이 체결한 프랑스·오스만 동맹으로 양국은 군사·경제적으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어요. /위키피디아
프랑스는 합스부르크의 팽창에 위기감을 느꼈고, 1525년엔 카를 5세가 이끄는 합스부르크 세력과 싸우다 국왕 프랑수아 1세가 포로로 잡히는 치욕까지 겪습니다. 굴욕을 당한 프랑수아 1세는 합스부르크에 맞설 강력한 동맹을 찾았죠. 그리고 그가 손을 내민 나라는 바로 오스만 제국이었습니다.
당시 유럽 국가들은 오스만 제국의 부상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1453년 비잔티움 제국(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린 뒤 발칸 반도를 빠르게 정복하며 유럽을 위협했죠. 이런 상황에서 프랑수아 1세가 오스만 제국에 군사 지원을 요청한 겁니다.
유럽 진출을 구상하고 있었던 술레이만 역시 프랑스의 제안을 반겼습니다. 결국 양국은 1536년 공식적으로 동맹을 맺었어요.
프랑스·오스만 동맹은 이탈리아 전쟁(1494~1559) 후반부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반도의 패권을 놓고 프랑스와 독일·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벌인 전쟁이었는데요.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프랑스를 지원해 1543년 니스를 포위했어요. 전쟁 중 오스만 함대는 프랑스의 항구 도시 툴롱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기독교 국가가 이슬람 국가의 군대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당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줬어요. 오스만 제국은 이 동맹을 통해 지중해 서부까지 영향력을 넓혔어요.
양국은 약 260년 동안 동맹 관계를 유지했어요. 1798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이집트를 침공하며 동맹이 깨지게 됩니다. 이때 오스만 제국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프랑스의 적이었던 영국과 연합하죠.
‘숙적’ 프랑스와 영국, 같은 편 되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9세기 후반까지 오랜 시간 동안 ‘숙적’이었습니다. 두 나라는 중세 시대부터 수차례 전쟁을 벌였지요. 대표적으로 14세기부터 15세기까지 100년 넘게 이어진 백년전쟁(1337~1453)은 양국 간 깊은 적대감을 남겼어요.
1904년 맺어진 ‘영불 협상’을 풍자한 삽화. 중년 남성으로 의인화된 영국(가운데)이 프랑스(맨 오른쪽 여성)와 함께 떠나는데, 독일(맨 왼쪽 남성)은 신경 쓰지 않는 척 등을 돌리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19세기 들어서도 양국은 인도,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식민지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습니다. 때로는 무력 충돌 직전까지 치닫기도 했었죠.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의 세력 구도에 큰 변화가 일어났어요. 독일이 급속히 강대국으로 부상한 것이죠. 독일은 해군력을 키우며 영국을 위협했고 대륙에서는 프랑스와의 국경에서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이에 오랜 적대 관계였던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하기 위해 협력을 모색하게 됩니다. 1904년 양국은 ‘영불 협상’을 체결해 식민지 갈등을 해소했습니다. 영국은 이집트에 대해, 프랑스는 모로코에 대한 권리를 갖기로 한 거죠.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제작된 삼국 협상 포스터. 왼쪽부터 프랑스, 러시아, 영국을 상징하는 인물이에요. /위키피디아
곧이어 러시아도 이 흐름에 합류했습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1904~1905)에서 패배한 뒤 외교적 고립을 우려하고 있었는데요. 마찬가지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항할 새로운 동맹을 원했어요. 이에 따라 영국과 러시아는 1907년 ‘영러 협상’을 맺어 페르시아, 티베트, 아프가니스탄 등 분쟁 지역에서의 활동을 조정하고 갈등을 정리했어요. 이로써 프랑스·영국·러시아 세 나라가 연결되면서 ‘삼국 협상’이 탄생했답니다. 삼국 협상의 출발은 공식적인 군사 동맹은 아니었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상대로 공동 전선을 형성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념보다 이해관계가 우선
이해관계에 따라 아주 일시적인 동맹이 맺어진 경우도 있어요. 20세기 나치 독일과 소련은 이념적으로 극단적인 적대 관계였습니다. 히틀러의 나치는 공산주의를 ‘인류의 적’으로 규정하고 독일 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어요. 스탈린의 소련 또한 나치와 파시즘을 부정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1939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벌어집니다. 서로를 침략하지 않기로 약속한 ‘독소불가침조약’이 체결된 것입니다.
1939년 8월 소련 공산당 서기장 이오시프 스탈린(왼쪽)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악수하고 있어요. /위키피디아
이 조약 이면에는 비밀리에 체결된 의정서가 있었어요. 이 의정서에서 독일과 소련은 동유럽을 서로 나누기로 합의했고 특히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했어요.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고, 소련도 2주 뒤 동쪽에서 폴란드를 침공했어요. 양국의 침공에 폴란드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지요. 그러나 이 ‘앙숙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독소불가침조약은 히틀러가 프랑스 방향의 ‘서부 전선’에 집중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맺은 일시적 합의였기 때문이죠.
히틀러는 2년 후 이 조약을 깨고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연합국 편에 서서 독일과 치열한 전면전을 벌였습니다. 국가 간 동맹에는 이념이나 원칙보다 눈앞의 이해관계가 더욱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5-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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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조약들
7년 전쟁서 英에 패배한 프랑스, 전략적으로 美 독립 지원
최근 러시아와 북한이 군사 협력을 강화하고 있습니다. 북한은 전쟁 중인 러시아에 대규모 파병을 하기도 했어요. 이런 움직임은 지난 6월 북한과 러시아가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조약’을 체결한 이후 본격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북한과 러시아 둘 중 어느 한 나라가 무력 침공을 받아 전쟁을 치르면 다른 한쪽이 군사 지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러시아와 북한이 전례 없는 수준으로 군사 협력을 강화하는 상황이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군사조약은 전쟁을 불러오거나, 세계 질서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기도 했거든요. 오늘은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친 군사조약들을 살펴볼게요.
프랑스와 군사동맹 조약… 미국 독립으로 이어져
1778년에 체결된 프랑스-미국 동맹 조약은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군사동맹이에요. 당시 신생국인 미국과 유럽 강대국인 프랑스가 협력해 많은 이를 놀라게 했어요. 두 국가는 어떻게 동맹을 맺게 됐을까요?
프랑스는 영국과의 7년 전쟁(1756~1763)에서 패배한 후 캐나다 지역 등을 뺏기며 국제적 입지가 좁아졌어요. 한편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전쟁 비용을 메꾸기 위해 식민지 미국에 설탕세, 차(茶)세 등을 부과하기 시작했고, 미국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있었죠. 이때 프랑스는 미국이 영국에서 독립하면 영국의 세력이 약화될 거라 판단했습니다. 영국과의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군사·경제적 지원이 필요했던 미국을 도와야겠다는 결론으로 이어졌죠.
1778년 프랑스와 미국이 군사동맹조약 등을 체결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이 조약은 미국 독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 의회 도서관
1776년 미국 의회는 공식적으로 영국에서 독립을 선언합니다. 이후 프랑스에 위원단을 파견해 동맹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했죠. 미국이 새러토가 전투(1777)에서 영국에 대승을 거두자 프랑스는 미국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군사동맹을 적극 추진합니다. 그리고 양국은 1778년 우호 통상조약과 군사동맹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프랑스는 미국을 독립국으로 공식 인정하고, 미국이 독립할 때까지 군사적 지원을 하기로 약속했지요.
프랑스는 미국에 무기, 탄약, 군복, 해군 병력 등을 지원했습니다. 특히 프랑스 해군 함대는 1781년 체서피크 해전에서 영국 함대를 격파했어요. 이어 프랑스·미국의 연합군이 요크타운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국은 항복을 선언했죠. 이후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됐답니다.
프랑스의 참전은 스페인과 네덜란드가 미국의 독립을 지지하게 만드는 도미노 효과를 일으켰답니다. 스페인과 네덜란드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고려해 미국 편에 섰고, 이로 인해 영국은 국제적으로 더욱 고립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해요. 이렇게 미국은 프랑스와의 동맹으로 독립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는 막대한 군사 지원으로 재정이 크게 악화됐어요. 이로 인해 프랑스 정부는 세금 인상을 단행했고, 이는 1789년 시민들이 일으킨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됐지요.
2차 세계대전을 가능하게 한 독소 불가침 조약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불과 며칠 전인 1939년 8월 23일. 나치 독일과 소련은 서로를 공격하지 않겠다는 ‘독소 불가침 조약’에 합의합니다. 양국의 동맹은 세계를 경악하게 했어요. 당시 독일은 소련의 공산주의를, 소련은 독일의 파시즘을 비난하며 서로를 적대시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양측은 전략적으로 조약을 체결했답니다.
1939년 8월 23일 소련 외무장관이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하고 있어요. 뒤에 독일 외무장관(뒷줄 왼쪽에서 셋째)과 소련 스탈린 서기장(뒷줄 왼쪽에서 넷째)이 서 있어요. /워싱턴 국립 공문서관
독일은 서쪽의 프랑스와 영국, 동쪽의 소련을 동시에 상대하는 양면 전쟁을 피하고자 했어요. 그래서 독일은 조약 덕분에 서부 유럽과의 전쟁 준비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소련은 조약을 통해, 언젠가 있을 독일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사력을 증강할 시간을 벌고자 했어요. 독소 불가침 조약은 공개 조약과 비공개 밀약으로 구성돼 있었는데요. 독일과 소련은 밀약을 통해 양국 사이 완충 지대인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했지요.
그 결과 독일은 소련 개입에 대한 걱정 없이 1939년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했어요. 이에 폴란드를 보호해주기로 약속한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습니다. 소련도 9월 17일 폴란드를 침공하며 동부 지역을 점령했지요.
그러나 독일과 소련의 평화는 일시적이었어요. 나치 독일은 유럽에서 자신들의 세력이 공고해지자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했기 때문이에요.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렇게 체결된 지 2년도 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답니다.
공산주의 세력 견제하기 위한 조약도
1951년에 체결된 미일 안전보장 조약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일본의 군사·정치적 관계를 규정한 중요한 협정입니다.
1960년 미국과 일본의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미일 안보 조약이 개정됐어요. 이에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이 도쿄 국회의사당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어요. /마이니치신문
일본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후 1952년까지 미국 연합군의 간접 통치를 받았어요. 그러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미국은 일본을 반공주의 진영의 핵심 국가로 육성하기 위해 일본과의 안보 협력을 원했지요. 더군다나 1950년에는 6·25전쟁까지 발발해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가 확산하는 것에 대한 미국의 우려가 더욱 커졌습니다. 미국은 일본을 경제·군사적 중심축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공산주의 세력을 견제하려 했지요. 일본은 미국의 안보 우산 아래 경제성장을 이루고 국제적 입지를 강화하려 했답니다.
1951년 9월 8일 2차 세계대전 종식을 위해 연합국과 일본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을 맺었고 이와 함께 미일 안보 조약이 체결됐어요. 일본은 자국 내 미군의 주둔을 허용했습니다. 이를 통해 일본은 군사적 방위를 미국에 의존하며 경제 발전에 집중해 고도 성장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냉전 기간 동안 일본을 동아시아 반공 전략의 핵심 거점으로 활용할 수 있었고요.
일본 국민 중 일부는 미군 주둔과 주권 침해 문제를 우려하며 해당 조약에 대해 반발하기도 했습니다. 1960년에는 미국과 일본 사이의 군사동맹 관계를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해당 조약을 개정한 것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지요. 하지만 미일 안보 조약은 오늘날에도 양국 관계뿐 아니라 동아시아의 안보 유지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윤서원 서울 단대부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오주비 기자, 조선일보(2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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