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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국민주권의 역설 ] [진짜냐 가짜냐 묻지 마라]

뚝섬 2025. 6. 2. 10:46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국민주권의 역설 ]

[진짜냐 가짜냐 묻지 마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국민주권의 역설 ] [진짜냐 가짜냐 묻지 마라]

 

[朝鮮칼럼]

대법원이 李 후보 파기환송하자 민주 "사법부가 국민주권 거슬러"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도 佛 대혁명 때 로베스피에르도 '국민' 이름으로 상대방 숙청
국민주권 신처럼 절대 군림하면 사회는 전체주의로 추락할 뿐
성찰·절제·균형으로 중심 잡아야
 

 

지난 1월 25일 오후 서울 도심 경복궁과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윤석열 대통령 탄핵 찬반 집회 모습./뉴스1

 

하나의 유령이 한국을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은 ‘국민’이다. 12·3 비상계엄 이후 ‘국민’이라는 말 사태가 났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후보가 주 고객이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관용어가 ‘자유’였다면, 이 후보는 ‘국민’이다. 12월 14일, 이 후보는 윤석열 전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소추를 촉구하는 성명서 ‘새로운 국민 승리의 날’을 발표했다. 이 성명서에서만 ‘국민의 마음’ ‘위대한 국민’ ‘국민의 명령’ ‘나라의 주인 국민’ ‘국민의 뜻’ ‘울부짖는 국민’ 등 28회나 ‘국민’이 등장한다. 민주국가의 정치가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법도 국민의 합의인 것이고, 결국 국민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 후보의 발언은 불온하다. 사법부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국민’이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일, 대법원이 이 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에 대해 유죄 취지의 파기환송을 선고하자, ‘국민’이란 말이 다시 봇물처럼 쏟아졌다. “대통령은 대법원이 아닌 국민이 뽑는다”(정청래 의원), “사법부가 감히 주권자의 의사를 거스른 것”(이언주 의원), “국민주권과 국민 선택을 사법이 빼앗으려 하고 있다”(조승래 민주당 수석대변인).

 

그 이후 민주당은 대법관 탄핵과 청문회, 대법원장 특검법을 서슴없이 몰아붙였다. 군사독재 때도 없던 일이다. 또한 “국민이 이재명을 지킬 것”(황정아 대변인)이란 명분으로 법원조직법, 헌법재판소법,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가히 ‘국민’ 중독증 수준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이 후보는 집권하면 ‘국민주권정부’란 이름을 붙이겠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의 삶을 결정하는 일은 정치가 하는 것도, 사법부가 하는 것도 아니라, 결국 국민이 한다”는 그의 신념이 “국민이 이재명을 지킬 것”이란 신앙과 결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미 그런 실례가 있다. 지난 22년, 보궐선거에 당선된 이 후보가 국회에 처음 출근하는 날, 이른바 ‘개딸’ 훌리건들이 보낸 화환에는 “이재명 건드리면 출동한다”는 유의 문구가 즐비했다. 개딸들은 이 후보를 조금이라도 비판하면, 민주당 의원이라도 ‘수박’ ‘똥파리’로 부르고, “민주당에서 나가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시달리다 못한 박지현 전 민주당 공동비대위원장은 “억압과 비난이 아닌, 폭력이고 범죄”라고 절규했지만, 이 후보는 ‘세계사적 의미가 있는 새로운 정치 행태’라고 감쌌다.

 

물론 전혀 새롭지 않고, 그 족보가 유구하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은 “마오 주석께 무한 충성하며, 가장 견결히 최고 지시를 집행해야만 한다”며, 마오쩌둥 비판자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 처형했다. 프랑스혁명 때 자신이 곧 국민이라고 믿은 로베스피에르는 비판자를 반혁명분자로 단죄해 단두대로 보냈다. 지금은 토크빌의 예상처럼, 보다 부드럽고 인간의 “품위를 떨어트리는” 방식을 쓴다. 야당에 “우리는 국민인데, 당신은 누구냐?(We are the People. Who are you?)”라는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주로 헌법 개정이나 언론 통제를 통해 100년 전통의 공화국을 무너뜨렸다.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입헌주의를 파괴하는 수법은 헝가리, 베네수엘라도 애용했다.

 

그런데 국민은 ‘정치적 픽션(political fiction)’이다(E. Morgan). 각각의 국민은 존재하지만, 전체로서의 국민은 ‘가상의 실체’란 뜻이다. 그러니 ‘국민의 뜻’이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주권주의(plebiscitarianism)는 팩트 확인이 불가능한, 하나의 신앙 같은 것이다(함재학). 물론 그 원리 덕분에 민주주의가 정당화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국민주권이 신처럼 절대 군림하면, 사회는 전체주의로 굴러떨어진다. 이렇게 “전체로서의 국민이 모든 주권을 갖지만”, 사실상 “개개 국민은 한 떼의 소심하고 일 잘하는 가축으로 전락”하는 게 토크빌의 민주적 전제(democratic tyranny)다. 형용 모순이자 국민주권의 역설이다. 민주주의의 신성한 원리인 국민주권은 무시해서도, 맹신해서도 안 된다. 민주주의의 생존은 그 간극을 인식하고 형평을 유지하는 고도의 균형 감각에 달렸다(C. Lefort).

 

한국 민주주의는 독재를 거쳐 1987년 민주화에 성공했지만, 지금은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민주적 전제’의 문 앞에 서 있다. 민주주의의 물질적, 제도적 조건을 넘어선 제3의 원소는 플라톤의 성찰, 토크빌의 절제, 몽테스키외의 균형 같은 마음의 습관(habits of heart)이다. 국민주권의 주술을 막는 지성의 부적이다.

 

-김영수 영남대 교수·정치학, 조선일보(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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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냐 가짜냐 묻지 마라 

 

제21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2일 서울 시내 한 거리에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통령 후보, 김문수 국민의힘 대통령 후보, 이준석 대통령 후보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뉴스1

 

16세기 프랑스 시골에서 일어난 실화가 바탕인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1982)은 진짜와 가짜의 모호한 경계, 정체성 문제를 다룬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집을 떠났던 마틴이 8년 만에 돌아온다. 무심했던 성격은 쾌활하게 바뀌었고 외모도 달라진 것 같다. 사람들은 ‘마틴이 맞나’ 반신반의하면서도, 동네 사람 이름부터 옛날 일까지 훤히 꿰고 있는 그를 점차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마틴은 전쟁에서 한쪽 다리를 잃었다”는 소문이 퍼진다. 의심이 자라나 소송이 시작된다. 마을 사람들은 법정에서 반으로 나뉘어 다툰다. 온 마을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맨 마지막 증인으로 나선 아내 베르트랑은 “남편이 맞다”고 증언한다. 그 순간, 목발을 짚은 ‘진짜 마틴’이 법정에 나타나 사람들은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진짜와 가짜가 다투다가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이런 유의 이야기는 여러 문화권에 걸쳐 존재한다. 항상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가짜를 조심하라’는 교훈으로 끝난다. ‘가짜’란 늘 공동체의 존속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한데 이번 대통령 선거에 진짜 대한민국’이란 슬로건이 등장했다. 마틴 기어의 재판이 중세 프랑스 마을을 둘로 갈랐듯,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 사회를 둘로 가르고 있다.

 

심리학적으로는 진짜라고 주장하는 쪽이 ‘정체성 불안(anxiety of identity)’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재명 후보 쪽에서 이 말을 들고 나왔는데, 그는 굽은 팔, 아버지 직업, 인권 변호사 등 개인적 서사를 구성하는 세부 사항에 허점이 많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대장동 개발 사업을 비롯해 위증 교사, 허위 사실 공표, 대북 송금 등 재판을 5건 받고 있기도 하다. 그는 “검찰의 조작 때문”이라고 하지만, ‘진짜 대한민국’을 강조한 무의식의 근저엔 개인적 취약성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 후보의 지지자들 역시 이런 사정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마틴 기어의 아내도 처음부터 남편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재판이 끝난 후 찾아온 판사에게 말한다. “마틴은 나를 무시했지만, 아누드(가짜 마틴의 실제 이름)는 나를 존중했고 진짜 남편처럼 신뢰하게 됐어요.” 말도 없이 자기를 버리고 떠난 남편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자기 기준에 따라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정치에는 기준이 있다. 분배와 평등, 성장과 안보 등 유권자의 가치관과 기준에 따라 지지 후보를 정하는 것이 선거의 본질이다. 다만, 지금 우리는 어느 한쪽이 자신의 취약성을 감추기 위해 ‘내가 진짜’라고 정체성을 앞세우면서 선거판이 거칠어졌다. 한쪽이 진짜라고 하면 다른 한쪽도 ‘내가 진짜’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죽기 살기로 싸울 수밖에 없다. 이게 지난 세 차례 대선 TV 토론을 보며 강하게 든 느낌이다. 가짜로 판명 나면 공동체에서 쫓겨날 수밖에 없다. 영화 속 가짜 마틴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제는 양쪽 모두에서 나오기 시작한 ‘내가 진짜’라는 말이 점점 위험하게 들리는 이유다.

 

-신동흔 기자, 조선일보(25-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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