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치 등록금과 맞바꾼 그녀의 '디지털 초상권'] [대포부대]
[몇 년 치 등록금과 맞바꾼 그녀의 '디지털 초상권']
[대포부대]
몇 년 치 등록금과 맞바꾼 그녀의 '디지털 초상권'
[장강명의 근미래의 풍경]
디지털 초상권 시장
기술이 인간의 삶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STS(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과학기술과 사회 연구) SF’라는 이름으로 소설을 써온 장강명 작가가 멀지 않은 미래에 우리가 보게 될지도 모를 기묘한 풍경을 픽션으로 전달합니다.
#디지털 초상권 시장
일주일 동안 혼자 끙끙 앓다가 글을 올립니다. 제가 이 문제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아서, 다른 분들 의견을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 자체가 욕먹을 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마음껏 욕해 주십시오. 욕을 먹고 고민을 접을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사귄 지 2년 조금 넘은 여자 친구가 있습니다. 동생 소개로 만났죠. 집안 형편이 어렵지만 열심히 사는 친구라며 만나보라고 하더군요. 직업은 평범한 회사원입니다. 첫눈에 반했고, 세 번째 만남에서 ‘내가 당신 사랑하는 것 같다’고 고백했습니다. 저 그렇게 순진한 놈 아닙니다. 30대 중반 건강한 남성이고 철없던 시절에는 클럽도 꽤 다녔습니다. 토킹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던 여성과 사귄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다르더군요. 내가 만약 누군가와 여생을 보내야 한다면 이 사람이다, 싶었습니다. 확 눈에 띄는 미모는 아닙니다. 하지만 단아한 분위기가 있습니다.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제 몸가짐도 조심스러워지고, 마음도 맑아집니다. 계속 이런 기분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귄 지 2년째 되는 날 청혼했습니다. 기뻐하면서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눈물은 기뻐서 흘리는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고백할 게 있는데 차마 직접 하지는 못하겠다며, 집에 가서 메일로 보내주겠다고 했습니다. 숨겨둔 아이라도 있나? 별거 중인 유부녀인가? 메일을 받기 전까지 별별 상상을 다 했습니다.
다들 집에서 가정용 인공지능 쓰시죠? 구독료 얼마 내면 아이돌 목소리나 고전 배우들 얼굴 데이터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아시죠. 화면 속 브루스 윌리스한테 에어컨 켜라고 지시할 수 있고, 스칼릿 조핸슨한테 오늘 날씨에 어울리는 음악 골라달라고 요청할 수 있고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불법이지만, 몰입형 성인용 인공지능 몰래 내려받아서 쓰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한때 돈 많이 벌던 ‘벗방 유튜버’들 어느 날 다 사라진 이유가 뭐겠습니까. 성인용 인공지능한테 밀려난 거잖습니까.
이 글 읽는 분들 중에 성인용 인공지능에 딥페이크 앱으로 다른 사람 얼굴 합성하려고 시도해 본 분도 있을 겁니다. 그건 그냥 불법이 아니라 남 인생 망치고 님 인생도 망칠 중범죄입니다. 음란물 유포죄가 아니라 제조죄 적용을 받습니다. 그리고 대부분 딥페이크 앱에 스마트록이 걸려 있어서, 합성 음란물을 만들면 노이즈가 5초에 한 번씩 발생합니다.
그런데 일반인도 디지털 초상권을 판매할 수 있는 시장이 있다는 거 아십니까. 파라과이에 그런 시장이 있습니다. 거기서는 디지털 초상권 거래와 재판매가 합법입니다. 그래서 파라과이에 페이퍼컴퍼니로 본사를 설립한 ‘캐스팅’ 업체들이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사람들, 특히 젊은 여성들의 디지털 초상권을 구매합니다.
이제 제 여자 친구가 고백한 내용이 뭔지 다들 짐작하셨겠죠. 대학교 1학년 때 선배 소개로 자기 초상권을 팔았다고 하더군요. 몇 년 치 학비를 그렇게 벌 수 있었다면서,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디지털 권리를 판다는 게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메일을 읽다가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그럼 지금 이 순간 전 세계에서 변태 녀석 수만 명이 내가 사랑하는 여인 얼굴을 한 인공지능과 음란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건가? 그 변태 녀석들이 보는 화면에서 내 여자 친구가 온갖 수치스러운 포즈를 취하고 있는 건가? 디지털 초상권 거래에도 종류가 있는데, 제 여자 친구는 자기 얼굴을 누구나 어디에든 입혀도 되는 조건에 서명을 했습니다. 그게 제일 비쌌으니까요.
제 여자 친구는 이 문제로 우울증에 오래 시달렸고,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고 합니다. 거리에 나서면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 것 같았다고요. 사실 한국인은 제 여자 친구의 얼굴 데이터를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몇 년 전에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로 인정받았습니다. 이제 제 여자 친구의 얼굴 데이터가 한국 서버에 올라오면 바로 삭제됩니다.
문제는 해외 서버들입니다. 눈을 감고 있으면 그 서버들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을지 자꾸 상상하게 됩니다. 평생 볼 일 없는 인간들인데,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자고 마음먹어도 상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여자 친구가 더 이상 단아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그 옆에서 제 마음이 맑아지지도 않습니다.
제 여자 친구는 자신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디지털 초상권 판매 계약을 맺은 뒤에는 대학가 근처 스튜디오에 가서 카메라를 보며 한 시간가량 다양한 표정을 지은 게 전부였다고요. 저더러 토킹 바의 바텐더와도 교제하지 않았느냐면서, 자기는 그 바텐더보다 떳떳하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언 부탁드립니다.
-장강명 소설가, 조선일보(24-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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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포부대
목적은 오직 하나, 좋아하는 가수 찍으려…
"왔다, 왔어! '대포' 챙겨!"
지난 25일 오전 11시쯤 서울 성북구 서경대학교 새내기 오리엔테이션에 축하 공연을 온 5인조 걸그룹 EXID가 탄 검은색 밴이 도착하자 팬들이 20㎝ 길이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로 여가수들의 모습을 쉴 새 없이 찍었다. 렌즈가 워낙 크고 두꺼워 '대포가 발사될 것 같다'는 의미에서 팬들 사이에선 '대포 카메라'로 불린다.
팬 정모(21)씨는 "좋아하는 가수의 표정이나 몸짓을 생생하게 찍기 위해 고성능 카메라를 쓴다"고 했다. 무게만 2㎏이 넘는 이 카메라는 20m 떨어진 거리에서 찍어도 피부 트러블까지 잡아낼 수 있다고 한다.
입대를 앞두고 대학을 휴학했다는 팬 정씨는 이날 충남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왔다. 지난 일주일간 천안, 서울 영등포·종로구 등 7곳의 일정을 쫓아다녔다. 정씨는 2013년 팬클럽 활동을 시작하면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 220만원짜리 카메라를 샀다. 정씨는 "지금도 장비 값과 교통비를 대기 위해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월 50만원 정도를 번다"며 "낮에 가수를 따라다녀야 하니 잠을 3시간밖에 못 잔다"고 했다. 주위 팬들은 정씨 카메라를 '엄마 카메라'라고 불렀다. 대포 카메라에도 '급'이 있었다. 성능이 가장 좋은 렌즈를 장착한 카메라가 '아빠' 칭호를 얻는다. '아빠 카메라' 다음으로 사양이 낮은 제품에 '엄마' '아기' 등 이름이 붙는 식이다.
유모(27)씨는 렌즈 값만 300만원 하는 '아빠' 카메라를 사기 위해 빚을 졌다. 이를 갚기 위해 대학 졸업반인 유씨는 지난달부터 서울의 한 공공기관에서 시급 6100원짜리 인턴 일을 시작했다. 고교생 오모(17)양 역시 카메라를 사기 위해서 4개월째 패스트푸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했다.
이 대포 부대들은 가수 사진과 동영상을 올리는 블로그를 운영하며, 찍은 사진들을 인화해 만든 '포토북'을 판매하기도 한다. 포토북을 4만원에 샀다는 박모(16)양은 "현실감 있는 사진을 받을 수 있어 구매했다"고 말했다. 유씨는 "요샌 무대 사진보다 공연 전후 걷는 모습을 찍어 올리는 게 인기"라며 "정형화된 무대 모습보다 자연스럽기 때문"이라 했다. 대형 연예기획사 관계자는 "초상권은 기획사에 있기 때문에 팬들이 사진을 찍어 공유하거나 판매하는 일은 안 되지만, 규모가 작은 기획사는 홍보를 위해 사진이 팬들 사이에 널리 퍼지는 것을 방조하기도 한다"고 했다.
대포 부대원들은 "좋아하는 가수와 직접 만나 교감하는 경험이 황홀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멤버들이 먼저 열혈 팬들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기도 한다. 이모(18)군이 카메라를 들이밀자 한 멤버가 왼손 검지와 엄지를 펼치는 수신호를 취했다. 이군은 "우리 팬들과 멤버들끼리만 아는 수신호"라며 "이렇게 인사를 하면 더욱 친밀감을 느낀다"고 했다. 팬 정씨는 "방송국에 오전 9시부터 가 있다가 사진 찍으며 얼굴도 보고 말 몇 마디 나누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조선일보(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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