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충청도 말투] [경상도 여선생] ....
[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충청도 말투]
[경상도 여선생]
[말모이 사전]
['사흘'이 검색어 1위 된 사연]
['말모이' 문화운동]
["왐마 어찌사쓰께라.. "]
정겨운 사투리, 귀가 즐거운 곳
[공간의 재발견]
“나는 막 엄청 배가 고프고 이런 건 없드라고. 그냥 참었다 먹어도 암사토 안 해.”
해남 여행길에 들른 식당. 옆 테이블에 앉은 중년의 무리 중 한 분이 한 말이다. 앞에 있던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능청스레 그 말을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잘살아가꼬 내장에 기름이 잘잘한갑고만.” 맞은편에 앉은 또 한 명의 친구가 말을 보탰다. “그것이 아니라 노동을 안 항께 그래 노동을.” 혼자 점잔을 빼며 밥을 먹는데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대화는 송강호가 하면 참 찰지겠다 싶으면서 일상의 대화가 무슨 영화 대본 같다는 생각도 잠시 했다.
이곳은 해남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길에 들른 식당이었다. 신문사에 있는 여행 담당 후배 기자에게 현지인들 가는 맛집 어디 없을까? 하고 물어 받아든 상호였다. 왜 그런 곳 있잖은가. 근처에 있는 회사원들이 삼삼오오 밥을 먹으러 오고 오랫동안 비슷하게 반복되는 풍경으로 분위기가 편안하고 관광객이 들어가면 딱 이질감이 느껴지는. 처음부터 ‘현지인 맛집’을 따지며 유난을 떨고 싶진 않았다. 숙소에서 문자메시지로 보내준 주변 맛집 리스트를 보고 두어 곳을 갔는데 뭐랄까 그냥 무미(無味)했다. 시스템이며 흐름이며 너무 매끈해서 딱히 매력이 없는. 그중 몇 곳은 2인상이 기본이라 가보지도 못하고 포기해야 했다. 그 후 바로 레이다망을 ‘현지인 추천 맛집’으로 돌렸다.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요즘 물가가 너무 올라 전복솥밭이 1만5000원. 저렴하진 않았지만 토실한 갈치구이 두 쪽과 부푼 계란말이, 이런저런 밑반찬이 입에 착착 감겼다.
흡족한 기분으로 차를 돌려 강진으로 떠났다. 다음 날 아침 운동회라도 열린 듯 요란한 새소리에 깨 고무신을 신고 어슬렁어슬렁 동네 산책을 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푸근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저 밑에서 잤소?” “네∼.” “산책할라고?” “네∼.” “저 위에까지 가봐도 좋은디 저기로 가믄 난리가 나부러.” “네? 왜요?” “개들이 엄청나게 지서브러. 오른쪽에 두 마리, 왼쪽에 한 마리.” 꽃 정보도 넌지시 알려주셨다. “저 담벼락에 자잘한 흰꽃 이름 아요? (헤헤 몰라요.) 저것이 마삭줄인디 향이 엄∼청 좋아. 내가 저 밑에서 살았는디 이 향을 따라가꼬 이리로 올라왔었당께. 저 밑에 집에도 그 꽃이 천지인디 거가 의원님 댁이요. 의원님.” 저녁에 간 주막 콘셉트의 식당에서는 “시방 혼자 와서 저녁밥을 달라고 하는 거여?” 하는 핀잔을 들었지만(물론 정감 어린 농담으로) 속 없는 사람 마냥 내내 기분이 좋았다. 다른 땅에서는 다른 소리가 나는구나. 남도에서 돌아온 주일. 다시 가고 싶다. 귀가 즐거운 곳으로.
-정성갑 갤러리 클립 대표, 동아일보(2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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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말투
1992년 가을, 오비 베어스와 빙그레 이글스 경기가 열린 잠실야구장. 관중석에 이글스를 응원하는 충청도 남자 몇이 앉았다. 줄곧 2대0으로 끌려 다니던 이글스가 9회초 대역전 기회를 맞았다. 투아웃에 터진 안타, 그리고 볼넷. 다음 타자가 장종훈이다. '호무랑' 한 방이면 끝난다. 그러나 너무 높이 뜬 공, 펜스를 넘기지 못하고 잡혔다. 실망을 안긴 선수에게 욕설을 퍼부을 법도 한데, 충청도 아저씨들 이 한마디 내뱉고 주섬주섬 일어선다. "뭐~~~~여."
▶선거 때 여론조사원이 충청도에 가서 "기호 1번이 좋으냐, 2번이 좋으냐" 물었다. 하나같이 "다들 훌륭한 분이라고 하대유" 한다. 여간해 속을 보여주지 않는 기질 탓에 후보자들은 애가 탄다. "꼭 좀 부탁드린다"는 애원에 "너무 염려 말어" "글씨유, 바쁜디 어여 가봐유" 했다면 해석은 가능하다. 전자는 '찍어준다'에 가깝고 후자는 '틀렸다'에 가깝다. 그마저도 "냅둬유" "종쳤슈"라면 상황 끝이다.
▶사투리에 담긴 삶의 풍경을 '방언정담'이란 책으로 펴낸 국어학자 한성우 교수는 충청도 화법을 '느린 화법'이 아니라 '접는 화법'이라고 했다. 분노에 차 하고 싶은 말이 종이 한 장 분량이라면 반을 접는다. 칭찬이라면 반의반을 접고, 사랑의 표현이라면 또 반을 접는단다. "그러고도 장종훈이 니가 홈런 타자여? 고따위로 야구 할라믄 때려쳐라" 할 수도 있지만, "뭐여~" 한마디로 접는 게 충청도 사람이란다.
▶그래서 오해도 받는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아 속을 알 수 없다, 우유부단하다, 뒤끝 작렬하다며 흉본다. 한데 충청도 토박이 입장에선 할 말이 많다. 바로 말하지 않고 에두르는 건 상대에 대한 배려다. 면전(面前)에 대고 욕을 하다니! 시시콜콜 따지며 덤벼드는 건 상것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배웠다. 충청도 말에 비유가 많은 건 그 때문이다.
▶그제 국회에서 한 의원이 성완종 리스트와 관련, 이완구 총리의 잦은 말 바꾸기를 지적하며 "'이완구 말을 믿을 수 없다'는 얘기가 있다"고 하자 이 총리는 "충청도 말투가 원래 그렇다"고 했다. 충청도 말이 모호한 건 사실이다. 예스, 노가 분명치 않다. 하지만 그건 신라와 고구려 침략에 시달렸던 백제인 특유의 지혜지, 말 바꾸기나 말장난이 아니다. 우회하되 정확히 목표물을 겨냥하는 게 충청도 말이다. 행간에 담긴 진의(眞意), 그 노여움이 얼마나 무서운지 충청도 아내와 살아본 남편들은 안다. 모르긴 해도 총리를 향한 요즘 충청 민심은 이럴 것이다. "저 냥반, 뭐~~~~여."
-조선일보(1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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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여선생
경상도 출신 초등학교 교사가
서울로 발령을 받았다.
첫 수업이 시작 되어
"연못 속의 작은 생물들"이란
단원을 가르치게 되었다.
생물들의 그림을 보여주며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연못 속에 작은 생물들이 억수로 많제~~, 그쟈?"
아이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바라보며
"선생님!, 억수로가 무슨 말입니까?
하고 물으니
선생님은 그것도 모르나???
"쌔-삐맀~따는 뜻 아이가~?"
아이들이 또 눈을 깜빡거리며
"선생님~!!,
쌔-삐맀따는 말은 무슨 뜻인데요?"
선생님은 약간 화가났습니다
"그것은 수두룩 빽빽!!하다는 뜻이야"
다시말해서
"항~거석 있다는 말이다."
그래도 이해를 못한 아이들은
선생님께 다시 물었다.
"선생님,
수두룩 빽빽과 항거석은 또 무슨 말입니까?"
그렇게 설명을 자세하게
해 주었는데도
아이들이 이해를 못하자
화가 머리 끝까지 오른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외쳤습니다.
;;
"이 바보들아~!!
연못속에 작은 생물들이
"천지빼가리" 있다!!
이 말 아이가 !!??"
쬐매한 못에
생물들이 쌔비맀다카이...
-한중 한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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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사전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아버지는 6⋅25전쟁에 참전했던 이야기를 곧잘 하셨다. 이남 출신 군인들이 아버지 사투리를 자주 놀렸다고 했다. 누군가 아버지를 부르면 관등 성명 대신 “어째 그러오!”가 튀어나와 그때마다 사람들이 웃었다. 누가 뭘 먹어 보라기에 “일 없소” 했다가 오해를 받기도 했다. 경상도 출신에게 “그게 무시기요?”라고 물었더니 “무시기가 뭐꼬?” 하기에 “뭐꼬가 무시기요?”라고 되물었다는 시절이다.
▶양파 값이 폭락해 수확을 포기하고 갈아엎는 전남 무안 양파 밭에 취재하러 간 적이 있다. 밭에 씌워놓은 비닐까지 함께 갈아엎고 있기에 “비닐은 걷어내야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그것도 다 돈이 들어서 그냥 엎는다”고 했다. “그래도 밭이 괜찮냐”고 하니 농부가 한숨을 내뱉었다. “느자구 없는 밭에서 느자구 없는 늠이 나오겄제.” 그게 ‘싹수없다’는 뜻이란 걸 나중에 알았다. 왠지 ‘싹수’보다 ‘느자구’가 정겹게 들렸다.
▶조선일보가 창간 100주년을 맞아 지난 1년간 전국에서 수집한 우리말 모음집 ‘말모이, 다시 쓴 우리말 사전’이 완성돼 그제 공개됐다. ‘말을 모은 것’이란 뜻의 말모이는 1911년 주시경 선생이 시작한 최초의 우리말 사전 원고 이름이다. 주 선생 작고 뒤 조선어학회가 사전 편찬을 주도해 1942년 초고를 완성했으나 일제 탄압을 받으면서 원고가 사라져 버렸다. 광복 후 이 원고가 서울역 창고에서 우연히 발견돼 1957년 조선말큰사전이 탄생했다.
▶조선일보 말모이는 주시경의 말모이와 같은 방법으로 사투리와 입말, 옛말들을 수집했다. 다만 인터넷과 팩스로 모았다는 점이 다르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2만2683단어를 보내왔고 강릉방언대사전을 비롯해 재야의 우리말 고수들이 펴낸 지역말 사전 10권까지 총 10만여 단어가 모였다. 이 가운데 표준국어대사전과 국립국어원 ‘우리말샘’에도 없는 단어 위주로 모두 4191표제어를 추렸다.
▶말모이엔 단어의 뜻과 용례뿐 아니라 지역별 문화 정보까지 실려있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강원 삼척에서는 가마솥을 ‘개매’라고 하는데 ‘개매 밑구영이 솥 밑구영 보고 저 검정 봐라 한다(가마솥 밑이 솥 밑을 보고 저 검정 봐라 한다)’는 지역 속담도 소개하는 식이다. 소설가 구효서는 “꽃멀미라는 말이 있어 나는 한껏 꽃멀미를 느낀다. 그 말을 알고부터 아, 꽃멀미 난다! 외치면 남김없이 후련해지곤 한다”고 했다. 말모이엔 그렇게 소리 내어 말하고픈 우리말이 몇 아름이나 담겨있다.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20-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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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이 검색어 1위 된 사연
한 지자체가 홈페이지에 "민원 처리 과정의 불편부당한 사례를 신고해 달라"고 쓴 적이 있다. 불편부당(不偏不黨·매우 공평함)을 불편(不便)하고 부당(不當)한 것으로 잘못 안 것이다. 한자 문맹에 따른 에피소드는 이제 기삿거리도 아니다. 안중근 의사 진료 과목이 무엇이었냐고 묻는 건 아무것도 아닐 정도다.
▶한자는 물론 우리말 교육도 제대로 되지 않는 듯하다. 엊그제 정부가 8월 17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하면서 "15~17일 사흘간 연휴"라는 기사가 나오자 "3일인데 4일이라니 오보" "15~17일이 사흘이냐? 나라 잘 돌아간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그러자 갑자기 '사흘'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 뒤로는 "3일이면 삼흘 아닌가" "기사에 어려운 한자어는 쓰지 말자" 같은 글이 등장했다. 사흘을 한자어로 안 것이다. 장난인지도 모르지만 '이틀'의 '이'를 '2'로 아는 사람도 적지 않다.
▶초등학생들이 '사흘'을 많이 검색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구글 번역 프로그램에 '사흘'을 써넣으면 'four days'라고 번역된다. 구글 번역은 수많은 번역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구글이 확보한 번역물에서는 '사흘'을 '4일'로 표기한 경우가 더 많다는 뜻이다. 심지어 일부 언론사 인터넷 기사에도 '장성택, 숙청 4흘 만에 사형 집행' '애리조나 감독, 4흘 만에 해임' 같은 제목이 달렸었다.
▶우리말은 숫자를 '일·이·삼·사…'로 읽을 때와 '하나·둘·셋·넷…'으로 읽을 때가 다르다. 날짜는 '1일·2일·3일·4일…'로 읽고 날수는 '하루·이틀·사흘·나흘…'로 센다. 시각 읽는 법은 더 특이해서 시(時)는 우리말로, 분(分)은 한자어로 읽는다. 외국인들은 "'이시 삼십분'이거나 '두시 서른분'이어야지 왜 '두시 삼십분'이냐"고 묻곤 한다. 사실 날수를 이르는 말에서 '이레·여드레·아흐레'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제 '사흘·나흘·닷새·엿새'도 잊혀가는 모양이다.
▶소셜미디어가 일상의 텍스트로 자리 잡으면서 올바른 글에 대한 관심 자체가 사라지고 있다. '역대급' '가성비' 같은 엉터리 한자어가 신문에 인쇄될 정도이고 '아는 사람' 대신 '지인'이란 말이 쓰이는 걸 보면 한자어를 싫어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에 영어 써야 '쿨한' 세태도 한몫 보탠다. 요즘 야구 중계를 보면 메이저리그 출신 해설가들이 "보더라인에 커맨드가 잘되고 있네요" 같은 초급 영어 경진대회를 하고 있다. 미국서 야구가 아니라 영어 몇 마디를 건진 모양이다.
-한현우 논설위원, 조선일보(20-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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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이' 문화운동
어머니는 기막힌 일을 들으시면 "어쨔 오려!" 하고 탄식을 하셨다. "옆집 아이가 교통사고로 다쳤답니다" 하고 말씀드리면 어머니는 "아이고매, 어쨔 오려" 하셨다. 나름 더듬어보면 '어째 옳여'가 떠오르고, 이어 그 뿌리에 '어찌해야 옳단 말이냐'가 있을 듯하다. 남도에서 흔히 듣는 '어째 쓰까'와 닿아 있다. 광주 송정역 시장에서 파는 문구에 '나으 가슴이 요로코롬 뛰어분디 어째 쓰까'란 글귀를 본 적 있다.
▶외국어로 번역이 어려운 우리말이 적잖다. 김소월 시 '진달래꽃'에서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의 '~드리오리다'는 번역가를 붓방아만 찧게 한다. 노래 '봄날은 간다'에서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의 '~더라'는 번역 불가라고 한 소설가는 단언했다. 조지훈 시 '승무'에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 나빌레라'의 '나빌레라'는 정말 어째 쓰까.
▶내년 3월 5일 창간 100년을 맞는 조선일보가 큰일을 벌인다. 할머니가 쓰시는 옛말, 시골 어른들의 사투리, 10대들의 새 말을 모아 앞으로 한 해 '아름다운 우리말 사전'을 엮는다. 국어학자 주시경 선생이 '말모이'란 이름으로 첫 국어사전 편찬을 시작한 지 108년 만에, 조선일보가 일제하 '문자 보급운동'을 선포한 지 91년 만에 발을 떼는 새로운 문화운동이다. 조선일보가 '말모이 100년' 운동을 알렸더니 이틀 새 새 어휘가 1300개 넘어 모였다 한다.
▶서울말 쓰던 직장 동료가 고향 벗과 전화할 땐 구수한 사투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듣고 있던 옆자리까지 정겨워진다. 일본 여성 작가 와카타케 지사코는 예순셋에 데뷔해 작년엔 '아쿠타가와상'까지 받았는데 소설 첫 줄부터 고향 도호쿠의 사투리를 쓴다. "표준어가 머리의 언어라면, 사투리는 몸통의 언어"라고 했다. '사투리란 나의 가장 오래된 지층'이라고 적고, "지금도 내 내면의 목소리는 어릴 적 쓰던 사투리"라고 했다.
▶'말모이 100년' 캠페인은 앞선 사전에는 못 보던 말, 번역이 잘 안 되는 말을 모으는 독립·애국의 정신운동이기도 하다. 주시경의 생각처럼 "말은 나라를 이루는 것"이며, 그 '말밭'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웃나라 작가가 부러워할 힘센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다. '차갑고 시원하다'를 충청에선 '차곰차곰하다' 하고, '민들레'를 경북에선 '말방나물'이라 하고, '진짜니?' 묻는 말을 진주에선 '에나가?' 한다는 것이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자 커다란 문화 자산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광일 논설위원, 조선일보(19-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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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왐마 어찌사쓰께라.. "
“왐마 어찌사쓰께라. 밴맹이라고 씨붕그리는 거시 아니고라이, 회관서 자꼬자꼬 농아리(잡담)나 허고 밍기적 놀자는 말에 잡해 있는 사이에, 어뜬 배라먹을 용천배기(나쁜 사람)가 토방독(디딤돌)에 점잖이 놓은 거슬 훔채가부렀단 말이요… 한샐팍(같은 사립문을 쓰는 이웃)서 가차이 사는 것도 아니고, 옆구랭이(옆구리)에 차고 댕기는 거시기도 아닝 게 도대체 찾을 수가 있어야재라. 훔채 묵고 숭개 묵고(숨겨 놓고) 그라고 살아서야 쓰꺼시요? 호랭이가 물어갈 놈의 영감탱. 인자 비얌때갈(뱀딸기) 나오고 밭때기 벌어묵기 전에 꼭 써금털털 헌것이라도 잊지 않고 갖다 드리께라. 쨈만 기둘리쇼잉.”
새로 장만한 삽 한 자루 있었는데, 내가 집을 비운 사이 현관문 쪽에 있는 걸 잠시 빌려갔다가 잃어버린 모양이시다. 자진신고 기간도 아닌데 자초지종 주욱 말씀하시는 게 소설책 한 권이다. 에고대고 이 고주망태 술망탱이야. 그런데 말발 하나는 청산유수롤세.
“깨굴챙이(개구리) 튀나오고 벹발(햇살)도 참말로 거시기 좋고… 안그라요? 헤헤 그라믄 난중에 뵙시다잉.” 길 따라온 황구가 꼬리를 치며 앞장서자 아재는 여우 꼬랑지를 감추며 그 뒤를 솔솔… 삽질 정권이다 뭐다, 그놈의 토건족 때문에 죄 없는 삽이 대신 욕을 얻어먹는 시절. 그렇다고 삽이 미운 건 절대 아니다.
삽 한 자루 값이 고작 만원인데 어떤 명품 만년필은 수십만원도 넘을 걸 아마. 그래도 촌에선 펜보다는 삽이지. 삽질을 잘해야 사람 같다는 소리를 듣는다. 잃어버린 삽이야 아재가 새로 주시겠다니 괜찮고, 훔쳐 가신 분도 아마 댁에서 가지고 나온 줄로 착각하신 거 같고, 길 가다말고 아재가 전봇대에 오줌을 누시는데 개도 흉내내며 오줌을 눈다. 오줌을 털 때까지 재밌는 구경일세. 저 삽자루 같은 사람. 쓸데없이 강바닥에서가 아니라, 진짜 논밭에다 삽질하는 몇 안 되는 사람. 귀한 사람이라 눈에 오래오래 넣어둔다.
–“임의진의 시골편지”, 경향신문(11-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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