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얼굴 보존된 왕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뿐] [표준영정]
[초상화로 얼굴 보존된 왕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뿐]
[표준영정]
초상화로 얼굴 보존된 왕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뿐
25대 임금 철종 어진(왼쪽 부분 불에 탔음). /문화재청
조선시대의 국왕 중 후대에 가장 칭송을 받은 군주라면 4대 세종과 22대 정조일 것입니다. 이들의 얼굴, 초상화를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네,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임금들의 진짜 얼굴이 아닙니다. 모두 후대에 상상을 가미해 그린 초상화이기 때문입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27명의 임금이 있었지만, 지금 남아 있는 어진(御眞), 즉 임금의 초상화(초본 포함) 중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태조, 세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의 초상화뿐입니다. 이 여섯 임금이 아닌 다른 왕의 초상화는 대부분 1950년대 이후 별 근거 없이 새로 그린 것입니다.
조선 왕조의 마지막 두 임금인 고종과 순종의 어진이 물론 있지만, 이들은 어진 말고도 사진이 많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사람의 얼굴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직 초상화나 초상화의 초본을 통해서 그 얼굴을 알 수 있는 조선 시대의 임금은 태조(1대), 세조(7대), 영조(21대), 철종(25대) 등 네 명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이렇게 된 걸까요.
6·25 전쟁이 끝난 지 1년 남짓 지난 1954년 12월 26일 아침 6시 20분, 부산의 용두산 근처 판자집에 살던22세 식모가 2층 마룻바닥에 촛불을 켜 둔 채로 잠자고 있었습니다. 촛불이 갑자기 바닥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불길이 일어났고, 북서풍을 타고 순식간에 번져 용두산 동남쪽 일대 피란민촌 298동을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사망 1명, 이재민은 1422명이 발생했으며 피해 금액은 397만4000환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불길이 인근에 있던 관재청 창고로까지 옮겨 붙은 것이었습니다. 공무원들이 창고 열쇠가 어디에 있는지 찾지 못해 불타는 걸 보고만 있을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창고에 무엇이 있었을까요? 전쟁으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자 서울에 있는 궁중 유물 4000점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역대 임금의 어진과 재상을 그린 초상화, 고서적, 은제기 같은 보물급 유물이었습니다.
조선 전기의 어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많이 사라졌습니다. 그래도 태조와 세조 어진은 보존됐습니다. 1921년 이왕직(李王職)은 창덕궁에 신(新)선원전을 만들고 여러 궁궐에 흩어져 있던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아 봉안했습니.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이 어진들은 다른 옛 황실 유물 4000여 점과 함께 임시 수도 부산으로 옮겨졌습니다. 용두산 근처에 있던 관재청 창고였죠. 1953년 휴전 이후에도 계속 그곳에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전쟁이 언제 다시 날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쉽게 다시 옮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왕실 유물 4000점 중에서 3500점이 불에 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소실된 유물 중에는 숙종, 정조, 순조, 헌종의 어진도 있었습니다. 일제와 6·25전쟁을 거치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았던 어진들이 한순간에 어처구니없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작업한 명품 중 명품이며 임금의 실제 얼굴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이렇게 잿더미가 됐던 것이죠.
정조 어진 원본은 조선 시대 대표적 화가인 단원 김홍도가 제작에 참여한 작품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합니다. 놀라운 것은 화재 전 사진 촬영해 놓은 어진조차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왕들의 실제 모습이 어땠는지 우리는 영영 알 길이 없게 돼 버린 셈입니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네 임금의 초상화가 무엇인지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전북 전주 어진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국보 조선 태조 어진. /문화재청
먼저 국보로 지정된 조선 태조의 초상화입니다. 지금 전주의 어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제작했다는 태조 어진 26점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있는 유일한 어진입니다. 조선 말인 1872년 제작한 것이지만, 충실하게 옛 그림을 베껴냈기 때문에 원래 초상화를 그렸던 조선 초 기법을 잘 간직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림 속 태조 이성계는 임금의 복장인 곤룡포를 입고 익선관을 쓴 채 위엄 있는 표정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인(武人) 출신다운 기개가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적절한 음영을 넣어 얼굴이 살아 있는 듯한데, 옆으로 늘어진 귓불은 넉넉한 풍모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눈썹 위에 난 작은 혹까지도 세밀하게 그렸습니다. 조선 임금의 어진 중에서 전신상(全身像)으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것은 이 초상화가 유일하기 때문에 더욱 큰 가치를 지닙니다. 그런데 이 어진 역시 최근에 훼손된 적이 있습니다. 2005년 무려 40㎝가 찢어져 얼굴의 귀와 입 부분이 큰 상처를 입었던 것입니다. 관리 소홀로 인한 참사였습니다.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소장 중인 조선 21대 임금 영조 어진. /문화재청
초상화가 살아남았다는 데 있어서 가장 운이 좋은 임금은 영조였습니다. 영조의 어진은 임금일 때 익선관을 쓴 상반신 초상화와 임금이 되기 전 연잉군 시절 초상화까지 다행히 2점이 화마 속에서도 보존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익선관을 쓴 어진은 보물로 지정돼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 있는데, 51세 영조 임금의 모습을 그렸습니다. ‘터럭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사람이 아니다’라는 조선 시대 초상화의 정신을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예전에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 역으로 출연했던 배우 이순재씨와 상당히 닮은 얼굴입니다.
철종 어진은 용두산 화재의 비극을 가장 생생하게 전하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림 왼쪽 부분과 얼굴의 입 주변이 불타 버렸지만, 복원이 가능할 정도로는 남았습니다. 군복을 입은 조선 임금의 유일한 초상화라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군복의 화려한 채색에서 당시 화가들의 필력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2018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공개된 조선 7대 임금 세조 어진 초본. /뉴스1
그런데 2016년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세조의 어진은 불타 버렸지만, 1935년 이당 김은호 화백이 왕실의 주문을 받아 옛 어진을 베껴 그릴 때 만들었던 어진의 초본이 경매에 나온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조의 얼굴이 세상에 공개된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왕이 되는 과정에서 숱한 혈육과 신하들을 죽인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착하고 순박해 보이는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수양대군 시절 젊었을 때 초상화가 아니냐’는 말도 나왔지만 분명히 초상화 속 인물은 곤룡포를 입고 있었습니다. 얼굴에 수염이 거의 없는데, 이것은 세조 어진을 봤던 김은호 화백의 생전 증언과도 일치합니다. 이 작품은 국립고궁박물관이 낙찰을 받았고, 아쉬운 대로 어진 복원 작업도 가능해졌습니다. ‘인상 좋은 살인마’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유석재 기자, 조선닷컴(24-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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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처음 도입 당시 정부에서 영정을 그릴 인물과 화가를 정해 심의..
세종대왕의 얼굴은 정말로 1만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초상화 모습 그대로일까. 아니, 그렇지 않다. 우리가 아는 세종대왕의 얼굴은 화가가 자료와 상상을 바탕으로 그린 가상의 얼굴이다. 세종대왕 생존 당시 그려진 초상화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1만원권 지폐에 등장한 세종대왕의 얼굴은 국가가 인정한 그의 '표준 얼굴'이다. 'KS 마크를 받은 초상화', 즉 '표준 영정(影幀)'이다.
표준 영정이란 '국가가 공인한 선현(先賢)의 초상화'를 뜻한다. 후세가 추앙하는 역사적 인물 중 생존 당시 초상이나 사진이 없는 경우에 한해 기준이 될 만한 초상화를 정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다만 디지털 이미지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1970~80년대엔 사진 자료가 남아 있는 근대 이후 인물의 경우에도 표준 영정을 만들기도 했다. 표준 영정은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지정을 받는다. 현재까지 지정된 표준 영정은 모두 94위다.
모델과의 유사성 놓고 논란 잦아
최근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표준 영정이 고증 논란에 휩싸였다. 역사교육연대회의가 국정 교과서인 초등 5학년 2학기 사회(역사) 교과서의 오류를 짚은 기자회견에서 "이 교과서 85쪽에 실린 태조 왕건 초상화가 왕의 관모(冠帽)가 아니라 신하가 주로 쓰던 복두건을 쓰고 있어 고증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면서다. 이에 교육부는 보도자료를 내고 "신하 의복을 입고 있다고 지적받은 왕건 사진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영정·동상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태조 왕건의 정부 표준 영정"이라고 해명했다.
'표준 영정' 고증 논란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불거진다. 그중 가장 잦은 건 실제 인물과의 유사성 논란이다. 대표적인 것이 1973년 지정된 세종대왕 영정이다. 이 그림은 1973년 세종대왕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농아(聾啞) 천재 화가인 운보(雲甫) 김기창(1913~2001)이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어진(御眞)'이라고 하여 왕의 얼굴을 초상화로 그려 남겼지만, 6·25 당시 어진을 보관했던 부산 광복동 관재청에 화재가 나면서 세종대왕 어진은 불타 없어지고 태조 이성계 등 몇 명의 어진만 남아 있는 상태다. 운보 김기창은 기록과 역사학자들의 의견에 상상력을 가미해 세종대왕 영정을 그렸다. 이에 "작가가 상상으로 그린 그림을 어떻게 정부가 역사적 인물 얼굴의 '표준'으로 인정할 수 있느냐"는 논쟁이 끊임없이 일었다. 창의력의 산물인 예술에 '표준'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느냐도 문제가 된다.
그림은 영정을 그린 화가들의 행적 때문에도 종종 논란이 된다. 지난 2007년엔 월전(月田) 장우성(1912~2005)이 그려 1978년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유관순 초상이 표준 영정에서 지정해제됐다. 대신 윤여환 충남대 교수가 새로 그린 유관순 영정이 새로운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다. 기존 영정이 옥살이하며 고문당한 수형자 기록표 사진을 참고해 얼굴이 붓고 콧방울이 주저앉는 등 꽃다운 소녀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 장우성 화백에 대해 친일 논란이 일었다는 점 등이 이유였다.
인물 성격·유전 요인 고려해 그려
표준 영정은 1973년 처음 도입 당시에는 정부에서 영정을 그릴 인물과 화가를 정해 심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기존 초상 중 사람들에게 친숙하거나 역사적 의미가 있는 초상을 표준 영정으로 추인하기도 했다. 2000년대 초부터 정부는 더 이상 표준 영정 관련 예산을 편성하지 않는다. 각 지방자치단체나 종친회가 비용을 대 영정을 제작한 후 표준 영정 심의를 의뢰하는 방식으로 바뀌면서 화가 선정 권한이 정부에서 의뢰자에게로 넘어갔다. 영정 한 점을 그리는 데 드는 비용은 보통 5000만~2억원 선이다.
표준 영정 심의는 영정·동상심의위원회가 맡는다. 심의위원회는 모두 12명의 전문가로 구성돼 있는데, 역사·미술사·복식·관모·공예·무구(武具)·골상학 등을 전공한 학자와 화가·조각가 등이다. 표준 영정은 사전 심의를 원칙으로 한다. 안휘준 영정·동상심의위원장은 "일단 스케치 검사부터 들어간다. 작가에게 실물 크기의 스케치를 받아서 관모, 복식, 신발, 의자 등을 보고 위원들이 심의하고 수정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가장 고민하는 건 얼굴을 어떻게 그릴까이다. 일단 인물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한 인물을 놓고 학자, 행정가, 사상가 등 어떤 캐릭터로 볼 것인지에 대해 토론이 벌어진다. 심의위원인 조용진 한국얼굴연구소장은 "인물의 성격에 대해 대중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심상이 있다. 같은 장수라 해도 지장(智將), 덕장(德將), 용장(勇將)에 대한 사람들의 심상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최대한 반영하려 한다"고 말했다.
작업을 맡은 화가들에게도 얼굴에 대한 참고 자료가 없는 영정을 그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원효, 우륵, 광개토대왕 등의 표준 영정을 그린 이종상 서울대 명예교수는 "영정이라는 것은 단순 초상화와는 달리 존숭받는 인물을 그리는 거다. 존경받는 역사적 인물의 정신까지 표현해야 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 이종상 교수는 "인물의 정신을 담아내기 위해 원효를 그릴 때는 그의 사상인 기신론(起信論)을 파고들어 나중에 동국대에서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았다. 우륵을 그릴 때엔 악학궤범을 열 번도 더 읽었다"고 말했다. 인물을 그릴 때 외양에 치우치지 않고 정신까지 표현해야 한다는 '전신사조(傳神寫照)'는 동양에서 오래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화론(畵論)이다.
유전적 데이터도 반영된다. 이종상 교수는 "보통 인물을 그릴 때 80세가 넘은 그 집안 후손들을 만나 골상학적 특징을 연구해 반영한다"고 말했다. 윤여환 교수는 "논개 영정을 그릴 때 신안 주씨 종친들의 용모를 분석해 우성 용모 유전인자를 추출하고 해당 영정의 품격에 맞는 용모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이렇게 그린 영정에 대해 후손들이 불만을 표하는 경우도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후손들은 보통 자기 조상들이 미남으로 표현되길 원하기 때문에 '우리 집안에 이렇게 턱이 긴 사람이 없는데 턱이 지나치게 길다' '눈꼬리가 지나치게 올라가 사나워 보인다' 등 외모에 대한 지적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愛國心 고취 위한 상징
우리나라에 표준 영정 제도가 처음 도입된 건 1973년. 그해 4월 28일 박정희 대통령이 이 충무공 탄신 기념제전에 참석한 후 "각지에 있는 이 충무공의 영정을 통일하고 충무공 동상 건립을 규제하는 방안을 전문가와 협의하라. 앞으로 충무공 동상은 통일된 영정에 의해 세우도록 하고 충무공을 빙자한 상행위를 철저히 단속하라"고 윤주영 당시 문공부 장관에게 지시한 것이 계기가 됐다.
윤주영 전(前) 문공부 장관은 "당시 이순신 장군 영정이 전국 곳곳에 있었다. 각 영정의 얼굴이 전부 다르다 보니, 충무공을 기리는 행사를 할 때 과연 어떤 영정을 모셔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데 애로가 있었다. 그래서 고증을 받아 '표준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1973년 '제1호 표준 영정'으로 아산 현충사에 봉안돼 있던 충무공 영정이 지정됐다. 월전 장우성이 이충무공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고 1953년 그린 것이다. 윤인수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 학예연구사는 "당시 몇몇 영정들이 경합했는데, 현충사에 봉안돼 있어 국민에게 가장 익숙하다는 이유로 현충사 영정이 표준 영정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같은 해 '제2호 표준 영정'으로 운보 김기창이 그린 세종대왕 영정이 지정됐다. 이듬해엔 월전 장우성의 다산 정약용과 강감찬, 현초(玄艸) 이유태(1916~1999)의 퇴계 이황 등이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다. 미술평론가 최열씨는 "1970년대 정부의 표준 영정 사업은 6·25 전쟁 후부터 시작된 조국 근대화·산업화 운동의 일환으로 봐야 한다. 국민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어줄 수 있는 상징물을 만들기 위한 애국현창사업으로서 민족의 영웅, 애국자, 위인 등을 기렸다"고 말했다.
화폐에서도 표준 영정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000원권의 퇴계 이황은 표준 영정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100원 이순신, 5000원권 율곡 이이, 1만원권 세종대왕 등은 표준 영정을 토대로 새롭게 화폐 도안을 했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정면으로 제작된 표준 영정의 경우 좌우 대칭이라 위조가 쉬워지는 문제 등이 발생할 수 있어서 화폐용 도안을 다시 제작했다"고 말했다.
표준 영정 제도는 외국에선 찾아보기 힘들다. 해외 화폐에서도 역대 대통령이나 왕 등의 얼굴을 도안으로 사용하지만 사진이나 초상화 자료가 남아 있는 경우가 많아 굳이 '가공의 이미지'를 창출하지는 않는다.
표준 영정으로 지정된 이미지가 법적 구속력이 있을까?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표준 영정은 어디까지나 혼란을 줄이기 위한 '기준점'일 뿐이다. 지자체나 공공기관에서 동상을 만들거나 옛 선현의 이미지를 사용할 때 기준점으로 삼아 활용하라는 것이지 '꼭 이를 따라야 한다'는 규제는 없다"고 말했다.
-곽아람 기자, 조선일보(15-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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