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 섬'들의 위기] [세인트키츠네비스]
['천국 섬'들의 위기]
[세인트키츠네비스]
'천국 섬'들의 위기
카리브해의 영국령 섬나라 터크스 케이커스(Turks and Caicos) 제도는 미국 부유층이 선호하는 휴양지다. 청록색 열대 바다와 비단처럼 부드러운 흰색 모래가 만나 환상적 풍경을 보여주는 ‘그레이스 베이 비치‘가 유명하다. 미국에서 ‘천국 같은 섬‘으로 뜨면서 최근 한국인도 종종 찾는다. 그런데 2023년 10월 영국 가디언은 이 섬에서 치안 당국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폭력 범죄가 만연하고 있다는 영국 정부의 내부 보고서를 보도했다. 부유한 관광객들이 뿌리는 돈을 보고 여러 갱단이 몰려들었고, 인구 4만6000명의 작은 섬이 ‘마약 밀매 루트‘까지 됐다는 것이다.
▶카리브해엔 7000여 개 섬, 13개 독립국이 있다. 위협 요소로는 허리케인의 빈발, 해수면 상승 등이 주로 꼽혔다. 남미 대륙과 가까운 그레나다는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허리케인 피해를 이유로 국채 이자 지급 유예를 선언했다. 일대를 강타한 초강력 허리케인 베릴로 인해 국내총생산(GDP) 3분의 1 수준의 막대한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지난해 5월 개최된 유엔 군소도서개발국 회의에서는 자연재해가 잦아지면서 소규모 섬나라들이 복구 비용 때문에 빚더미에 올라앉는 문제가 심각하게 논의됐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새 카리브해 국가들을 괴롭히는 문제에 ‘초국가 범죄‘가 더해졌다. 중남미에서 생산된 마약이 미국으로 가는 길목 역할을 하게 된 때문이다. 카리브해 섬나라들의 관광 산업은 대부분 미국 자본과 미국 관광객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런 ‘미국과의 근접성‘이 비극의 씨앗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11월 미국 회계감사원은 “카리브해 지역의 높은 살인율은 미국에서 밀반출된 총기와 관련 있다”는 보고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카리브해의 낙원 중 하나로 꼽히는 바하마에 미국 국무부가 최근 “범죄에 주의하라”는 여행 경보를 내렸다. 바하마는 분홍빛 모래가 열대 바다와 만나는 ‘핑크 샌드 비치‘와 야생 돼지가 헤엄치는 ‘돼지섬‘으로 유명하다. 플로리다주(州) 마이애미에서 약 30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아 미국인들이 즐겨 찾는다. 그런데 최근 무장 강도, 절도, 성폭행 사건이 늘면서 외국인 피해자가 속출하고 있다.
▶세계의 다른 섬나라 신혼여행 성지들도 요즘 비슷한 문제에 시달리고 있다. 태평양의 피지는 필로폰의 경유지가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 발리는 매년 3만톤의 플라스틱이 바다에 버려지면서 해변의 쓰레기 탓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자연이 만든 ‘천국의 섬‘들이 인간이 만든 문제에 위협받고 있다.
-김진명 기자, 조선일보(25-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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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키츠네비스
알렉산더 해밀턴은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다. 초대 재무장관으로 중앙은행을 만들고 경제의 초석을 다졌다. 미 헌법의 기초자(起草者)이기도 하다. 덕분에 10달러 지폐 속 인물로 대접받고 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엔 그늘이 있었다. 출신 때문이다. 평생 맞수 토머스 제퍼슨을 비롯한 '건국 아버지들' 중엔 출신지가 달라도 힘깨나 쓰는 집안 출신이 많았다. 해밀턴은 달랐다.
▶서인도제도는 북미 대륙 밑 카리브해에 있다. 거기 작은 점처럼 연결된 남부 섬들이 '앤틸리스열도'다. 이 열도의 북쪽 섬들을 리워드제도라고 하는데 이 중 두 섬을 묶어 33년 전 독립한 나라가 '세인트키츠네비스연방'이다. 경기도 고양시만 한 땅에서 지금 강원도 태백시 수준인 5만4000명이 산다. 미주 대륙에서 가장 작고 가장 늦게 홀로 선 나라다. 해밀턴은 여기서 태어났다.
▶당시 그곳은 영국 식민지였다. 남편이 못마땅해 섬으로 도망 온 프랑스계 여인이 영국계 소상인 남자와 동거하다 낳았다. 얼마 후 해밀턴의 아버지는 도망갔다. 어머니는 그가 열 살 때 숨을 거뒀다. 유산도 못 받았다. 하지만 그에겐 인내와 성실, 도전적 글과 말솜씨, 탁월한 정치력이 있었다. '낙도(落島)의 알거지'에서 '미국의 아버지'로 성장했다. '아메리칸 드림'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
▶세인트키츠네비스를 아는 사람들은 얼마 안 된다. 해밀턴도 고향을 그다지 언급하지 않았다. 왕년의 단거리 육상 스타 킴 콜린스가 세상에 이곳을 알린 거의 유일한 국민일 것이다. 독립 후 백인이 사라지고 사탕수수 농장에 끌려 온 흑인 노예의 후손이 국민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문이 남지 않아 이제 사탕수수 농업은 파산 지경이다. 갱들이 설쳐 치안은 불안하다. 그런데 이 나라 국민이 되겠다고 제 발로 국적(國籍)을 얻은 한국인이 있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처제라고 한다.
▶요즘 이 나라의 중요한 돈벌이가 국적 장사다. 25만달러를 예금하거나 40만달러를 투자하면 국적을 준다. 인터넷 공간에 브로커가 판을 친다. 방문도, 의무 체류도 필요 없다. 카리브해 낙도로 떠나 자식을 해밀턴처럼 키우겠다는 맹모(孟母)의 당찬 결의인가. 물론 그럴 리 없다. 몇 년 전 남미 온두라스 위조 여권으로 자녀를 국내 외국인 학교에 넣었다가 걸렸던 사람이다. 이번엔 아예 다른 국적을 얻어 자식을 다시 외국인 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그녀는 자신의 '새 조국' 세인트키츠네비스가 어디쯤 붙어 있는지 알기나 할까. 우 수석 처제 덕분에 세상 별별 나라 공부를 다 해본다.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16-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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