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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사도' 메달]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뚝섬 2025. 5. 22. 08:16

['평화의 사도' 메달]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인천 아닌 '주문진상륙작전'이 될 수도 있었다?]

[맥아더의 선물]

 

 

 

'평화의 사도' 메달

 

1950년 12월 미 7사단 31연대 소속 스톰스 소령이 함경남도 장진호에서 쫓아오는 중공군을 향해 방아쇠를 연신 당겼다.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북진할 때만 해도 전쟁이 금방 끝나 아내와 세 아들, 뱃속의 아기를 다시 만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매복한 중공군과 영하 40도 추위가 덮쳤다. 소령은 마지막까지 응사하다 눈 속에 쓰러졌다고 부대원들은 기억한다. 어제 제16회 아시안리더십콘퍼런스(ALC)에서 스톰스 소령의 3남(77)이 아버지를 대신해 국가보훈부가 주는 ‘평화의 사도(Ambassador for Peace)’ 메달을 받았다.

 

▶이 메달은 6·25에 참전한 22국 유엔군 용사의 희생과 공헌을 기리는 것이다. 2010년 6·25 60주년을 계기로 본격 수여됐다. 2013년 정전 60주년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6·25를 “승리한 전쟁”으로 규정했다. ‘잊힌 전쟁’으로 불리던 미국 내 평가를 교정한 것이다. 우리 정부도 그해부터 메달 제작에 별도 예산을 투입했다. 메달엔 태극 문양과 비둘기, 태극기와 유엔기(하늘색) 색깔이 들어간다. 지금까지 5만여 명의 유엔군 참전 용사와 유가족이 받았다.

 

▶미 해군 예비역 대령 윌리엄스는 1952년 함경북도 회령 상공에서 소련 미그기 7대와 공중전을 벌여 4대를 격추했다. 그의 전투기엔 총탄 자국 263개가 남아 있었다. 진짜 탑건이었다. 그런데 대령은 2023년에야 이 메달을 받았다. 6·25 공식 참전을 부인하던 소련과의 교전 자체가 극비였기 때문에 기밀 해제 전까지 무공훈장은 물론 메달도 달지 못했다. 그는 “그때 (남북을) 통일시키지 못한 게 여전히 아쉽다”고 했다.

 

▶미 해병대 예비역 병장은 LA 총영사관에서 이 메달을 걸고 우리말로 ‘아리랑’을 불렀다. “한미 우정은 변함없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현지 메달 수여식에는 지역 정치인들도 참가해 한미 동맹을 강조한다. 지난달 메달을 받은 미 예비역 해병은 6·25 때 찍은 사진을 휴대전화에 저장하고 다닌다. 그는 “제가 젊음을 바쳐 지킨 한국이 그동안 많은 업적을 이뤘다”며 감격해 했다.

 

▶유복자로 태어난 스톰스 소령 막내아들은 한 인터뷰에서 “마땅히 지켜야 할 자유를 위해 싸운 아버지와 눈부시게 발전한 한국이 자랑스럽다”고 했다. 참전 유엔군이 연인원 200만명이다. 전사 4만여 명, 실종 4000여 명이다. 현재 39만여 명이 생존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들이 없었으면 우리도 김씨 왕조의 노예가 됐다. 진정한 ‘평화의 사도들’이다.

 

-안용현 논설위원, 조선일보(25-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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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는 비상한 智力·엄격함·독선으로 수많은 찬사와 비난 동시에 받아…

아시아에 집중한 최초의 軍 전략가 전략적 영감으로 인천 상륙 감행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 살려

 

그는 존경받았지만 사랑받지는 못했다. 지력은 독선에 묻혔고 전술적 탁월함은 상명하복 무시로 빛을 잃었다. 엄격함은 주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했다. 당연히 애칭도 없었다. 그의 아내조차도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다. 종종 앞뒤가 안 맞아서 매일 성경을 읽고 자신을 교황과 함께 이 세상 그리스도 왕국의 수호자라고 생각했지만 정작 교회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찬사와 그 이상의 비난을 한몸에 받은 더글러스 맥아더 이야기다.

 

미국 역사에 그를 가두면 캐릭터가 제대로 설명이 안 된다. 오만함의 영역에서 그의 국내 경쟁 상대는 조지 워싱턴과 링컨 정도다. 장군들의 전쟁사로 넓혀 보면 나폴레옹이 그와 어깨 높이가 비슷하다. 둘 다 참모가 필요 없는 비상한 두뇌로(나폴레옹은 듣는 척은 했다) 멀리 떨어져서 관찰하는 건 몰라도 밑에서 일하기는 죽기보다 싫은 사람들이다. 집안도 좋았다. 할아버지는 주지사였고 아버지는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필리핀 총독이었다. 그는 나중에 일본 총독이 된다.

일본 패망 한 달 후 일본 국왕이 그를 찾아왔다. 군 작업복 차림의 맥아더는 예복을 갖춰 입은 일왕과 다정하게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맥아더는 일왕보다 키가 45㎝나 컸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신이 꼬맹이처럼 찍힌 그 사진을 보고 무너져내렸다. 맥아더는 그렇게 가학적으로 일본을 지배했다그러면서도 그가 일본에 심으려 했던 것은 낯설고 생소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였다(실은 강요에 가까웠지만).

(좌) 일본군 대원수 히로히토 - 히로히토 일왕이 1938년 도쿄 육군사관학교 졸업식에 백마를 타고 들어서고 있다. 히로히토는 메이지헌법에 따라 군 통수권을 지닌 대원수였다./ (우) 맥아더와 히로히토… 히로히토(오른쪽) 일왕이 일본 패전 한 달여 후인 1945년 9월 27일 도쿄의 미국 대사관을 찾아가 맥아더 사령관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히로히토는 넥타이를 단정히 매고 차렷 자세로 서 있는 반면 맥아더는 셔츠의 위 단추를 푼 채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는지 엉덩이 부분에 얹힌 두 손이 보이지 않는다. 이튿날 일본 정부는 신문에 이 사진의 게재를 금지했다. 그러나 연합국최고사령부(GHQ)가 언론을 막지 말고 사진 게재를 명령하자 29일자 신문에 일제히 실렸다. /AP

 

'자유와 민주를 기반으로 아시아인의 운명은 아시아인들에게.' 그의 모토였다. 일본 최후의 쇼군(將軍)으로 불렸던 맥아더에 대한 일본인들의 숭배는 거의 광적이었다. '맥아더 장군님께'로 시작하는 편지와 선물이 한 해에만 44만통이나 쏟아져 들어왔다. 일본 성인의 거의 1%가 자발적으로 그런 일을 했다. 정복자와 피정복자 사이에 벌어진 인류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맥아더도 그런 일본이 싫을 리 없었다. 6·25가 터지기 전까지 5년 동안 그가 도쿄를 떠난 것은 딱 두 번뿐이다. 마닐라와 서울에서 열린 독립기념식에 참석할 때였는데 그나마 당일로 돌아왔다.

 

대통령 후보가 아쉬웠던 공화당에서는 몇 차례 그를 본국으로 초청했다. 맥아더는 이렇게 답했다. "내가 단 몇 주일이라도 귀국한다면 미국이 동양을 포기했다는 소문이 태평양 전체에 퍼질 것이다." 이 정도 수준의 자아도취 발언은 유사 이래 맥아더뿐이다. 뭐, 누구나 할 수는 있다. 남들이 웃어서 그렇지.

맥아더에 대한 영화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77년이다. 맥아더 역(役)은 그레고리 펙이 맡았는데 평점도, 흥행도 별로였다. 무엇보다 그레고리 펙은 '휴일'에나 어울리지 '전쟁'에는 맞지 않았다. 아무리 배우가 천의 얼굴이라고 하지만 착착 붙는 역할이라는 게 있다. '인천상륙작전'에서 맥아더 역할을 맡은 리엄 니슨은 데뷔작부터가 '엑스칼리버'의 기사 역이었다.

 

'인천상륙작전'을 보면서 맥아더의 연극적인 대사가 거슬린다는 분들이 있다. 실제 맥아더가 그랬다. 그는 언제나 배우처럼 행동했고 늘 카메라 렌즈를 의식했다. 항상 담배 파이프를 물고 있었다. 설정이었다. 그는 집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선글라스 아닌 안경을 쓴 맥아더의 사진을 본 적이 있는가. 그러나 집에서는 거의 안경을 쓰고 지냈다. 말투도 그렇다. 중저음의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슬픔과 흥분을 말할 때면 높고 가늘게 올라갔다. 연극 대사처럼 드라마를 만들어 가며 말하는 것은 그가 반대자들을 설득할 때 쓰는 전형적인 수법이었다(영화에도 나온다. 듣다 보면 말려 들어간다). 그와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자리가 끝나고야 얘기를 나눈 게 아니라 얘기를 들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맥아더가 웨스트포인트사관학교가 아니라 브로드웨이나 할리우드에 진출했어도 성공했으리라 믿는다. 이 달변이 안 먹힌 유일한 인물이 이승만이다. 이승만이 주로 이야기했고 맥아더는 예스와 노 할 틈만 겨우 얻었다.

맥아더는 로마를 모델로 만들어진 미국이라는 제국의 집정관이자 총독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집정관과 총독 자리를 자기가 알아서 그냥 했다. 미국 역사상 한 개인에게 이렇게 무한대의 권력이 허용된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아시아에 집중했던 최초의 군 전략가였다. 유럽만 중시하던 워싱턴과의 불화는 피할 수 없었다.

 

현재 미국에 가장 중요한 곳은 아시아다. 안목일까 영감이었을까. 인천 상륙은 영감이었다. 이성적으로는 그런 판단 못 내린다. 그리고 그 영감이 꺼져가던 작고 가난한 나라를 살렸다(이 표현은 식상하다. 우리는 더 이상 작지도 가난하지도 않다).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너무 늦게 만들어졌다. 고마움을 모르는 민족에 좋은 날이 이어졌다는 이야기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글: 남정욱 숭실대 문예창작학과 겸임교수, 조선일보(16-08-11), 사진: 조선일보(12-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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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아닌 '주문진상륙작전'이 될 수도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의 오해와 진실]

北, 상륙작전 예측했다지만 정확한 일시·장소는 파악 못 해
후보지로 군산·주문진도 거론… 맥아더 리더십, 작전 성공 이끌어

 

영화 '인천상륙작전'에 관객이 몰리면서 이 작전의 추진 과정과 성공 비결에 대한 궁금증도 커지고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6·25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맥아더 사령관이 주도한 작전이라고만 할 뿐 사실은 그다지 알려진 게 없다. 6·25전쟁의 전사(戰史) 연구와 편찬 사업을 맡고 있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조성훈 전쟁사부장에게 자문해 인천상륙작전의 실체에 접근해본다.

애초 인천상륙작전 예정일은 7월 22일

1950년 6월 29일 한강 전선을 시찰한 맥아더 UN군 사령관은 미 제1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키는 작전을 구상했다. 7월 22일로 작전 날짜까지 잡았다. 하지만 7월 20일 북한군에 대전을 빼앗기는 등 전황이 급박해지면서 작전은 연기됐다. 맥아더는 곧바로 상륙 작전을 재구상했다. '인천을 점령한 뒤 서울을 탈환하면 적의 보급로는 차단될 것'이라며 인천을 점찍었다. 하지만 극심한 조수(潮水) 간만(干滿)의 차이를 이유로 미 합참본부는 인천 대신 군산을 후보지로 내세웠다. 미 해군은 평택 포승읍을 제시했다. 결국 인천·군산·주문진 등 세 곳 상륙 계획안을 작성했고 최종 회의를 통해 인천으로 결정됐다.
  

인천상륙작전 당일인 1950년 9월 15일 미 해병대원들이 인천 응봉산 앞 해안에 상륙하기 위해 사다리로 제방을 올라가고 있다. 현재 응봉산 자유공원에는 맥아더 동상이 있다. 위 작은 사진은 마운트 매킨리호에 탑승하고 인천에 도착한 더글러스 맥아더 UN군 사령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Getty Images 이매진스

 

 북한도 상륙 작전을 예견했다?

1956년 소련으로 망명한 이상조 전 북한군 정찰국장은 전쟁 당시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상륙 작전에 대비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조언을 들었다고 회고했다. 이상조는 북한으로 돌아와 이 내용을 보고했지만 김일성은 귀담아듣지 않았다고 한다. '북한의 사전(事前) 인지설'은 최근까지도 학계에서 쟁점이 되고 있다. 1950년 8월 말쯤에 북한이 유엔군 상륙 작전에 대비하기 위해 경계 강화에 나섰다는 의견도 있다. 반면 북한군 주력은 낙동강 전선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천의 경계 강화는 일상적 수준이었다는 반론도 있다. 결과적으로 북한군은 상륙 작전의 정확한 일시와 장소는 파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미군만 상륙 작전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미 10군단의 제1해병사단과 제7보병사단을 인천에 상륙할 부대로 선택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난 뒤 군비 축소 때문에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때문에 한국 청년 8600여 명을 선발해서 일본에서 3주간 훈련한 뒤 인천상륙작전에 투입했다. 이들은 카투사(KATUSA·주한 미군에 근무하는 한국군)의 실질적 기초가 됐다. 미군 두 사단, 한국군 제1해병연대와 육군 제17연대 등 지상군 7만5000여 명이 상륙 작전에 참가했으며, 미국(226척)·한국(15척)·영국(12척)·캐나다(3척), 호주와 뉴질랜드(각 2척), 프랑스(1척) 등의 함정 261척이 투입됐다.

경북 영덕에서도 상륙 시도

UN군은 정확한 작전 지역과 시간을 감추기 위해 기만 작전을 벌였다. 미주리호는 동해안의 삼척을 포격했고, 군산에서도 미국·영국의 특공대가 상륙을 가장한 군사작전을 벌였다. 인천상륙작전 하루 전인 14일 포항 북쪽 장사동(현재 경북 영덕)에서는 한국군 독립 제1유격대대 820여 명이 상륙을 시도했다. 하지만 심한 파도와 적군의 집중포화 때문에 배가 좌초했다. 120여 명이 전사하는 등 희생이 적지 않았지만, 북한군을 교란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공헌했다.

맥아더의 공(功)이 아니다?

2차 대전 당시 노르망디 상륙 작전은 준비에 꼬박 1년이 걸렸지만, 인천상륙작전은 부대 동원을 포함한 작전 구상을 한 달 만에 마쳤다. 8월 2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미군 작전 회의에서도 반대 의견이 쏟아졌지만, 맥아더는 이렇게 설득했다. '실제로 저는 해군보다도 더 해군을 신뢰하고 있습니다. 인천에는 어려운 여건이 많지만, 해군의 능력만큼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5000분의 1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역경에는 이미 익숙하다"고 회고했다. 군사 전문가들은 맥아더의 리더십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요인이라는 사실에 이견이 없다.

 

 -김성현기자, 조선닷컴(16-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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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의 선물

 

6∙25쟁을 다룬 책 '콜디스트 윈터(Coldest Winter)'는 인천 상륙작전의 어려움을 재미있는 비유로 묘사한다. '인천은 상륙하기에 나쁜 요소를 고루 갖춘 곳' '인천은 해군을 싫어하는 사악한 천재들이 만들어낸 도시'…. 4㎞까지 드러나는 갯벌은 '초콜릿 반죽을 딱딱하게 만들기 위해 끈적임을 참으며 다리를 움직이는 느낌'이라고 했다. 좁은 항구는 이렇게 설명했다. '입구가 좁아서 상륙에 성공하려면 적군이 빠짐없이 모두 잠들어 있어야 했다.' 

 

▶일본 점령군 사령관이던 맥아더 장군은 사실상 황제였다. 권력은 물론 권위까지 천황을 이었다. 심지어 일본인의 존경과 사랑까지 받았다. 거리로 나서면 아이들이 성조기를 들고 환호했다. 그 재미에 깊이 빠져들었을 때 전쟁 소식을 들었다. 기록을 보면 첫 반응은 '무반응'에 가까웠다. 침략군을 '구식 소총을 든 바지 부대'쯤으로 여긴 것 같다. 허술한 군대를 보냈다가 초전(初戰)이 엉망이 됐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4년 동안 평점 98.14점을 받았다. 역대 최고다. 옮겨 다니는 자리마다 최연소 기록을 남겼다. 태평양전쟁 승리로 '살아 있는 최고 위인' 대접까지 받았다. 그런 그가 국지전 패배를 받아들일 리 없었다. 1950년 8월 23일 운명이 결정됐다. 맥아더는 불같은 연설로 미 육·해군 참모총장을 비롯한 인천 반대론자들을 단숨에 신봉자로 바꿨다. "운명의 초침이 재깍이고 있다. 행동하지 않으면 죽는다. 인천은 성공한다. 인천은 10만 생명을 구할 것이다." 10만명은 낙동강 전선에 갇혀 있던 미군을 뜻하는 듯하다. 결과적으로 인천이 구한 생명은 한국인 전체였다. 

 

▶맥아더는 열일곱 번 전선을 찾았다. 국군 1사단을 방문했을 땐 한국군 급식까지 챙겼다. 당시 사단장이던 백선엽 장군은 회고록에서 "일주일 뒤 일본에서 온 식량 상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했다. 김·오징어처럼 한국군 입에 맞는 전투 식량이었다고 한다. 맥아더는 실수도 했다.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무시해 수많은 군인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그가 구한 생명에 비할 바 못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탈환 직후 그를 "민족의 구세주"라고 했다. 

 

▶맥아더가 등장하는 영화 '인천 상륙작전'이 평단(評壇)의 혹평에도 많은 관객을 모으고 있다. '2016년판 똘이장군' '멸공의 횃불' '겉멋 상륙, 작렬' 같은 평론가의 난폭한 한 줄 혹평들이 오히려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호불호는 저마다 다르다. 자유롭게 평가하고 평가받으면 된다. 맥아더가 한국에 준 선물이 바로 그 자유니까. 

 

-선우정 논설위원, 조선일보(16-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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