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남부연합 깃발] [미국 무슬림]
[美 남부연합 깃발]
[미국 무슬림]
美 남부연합 깃발
미국 버지니아주(州)에서 앨라배마주까지 5주 1071km를 관통하는 주간(州間) 고속도로 85호선(I-85)은 미 동남부의 혈맥이다. 2022년 10월, 이 도로의 중간쯤 있는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스파턴버그에 가로 15m, 세로 9m의 대형 깃발이 세워졌다. 붉은색 바탕 위에 파란 십자가가 X자 모양으로 그려져 있고, 그 속에 13개의 하얀 별이 있는 ‘남부연합기(Confederate Flag)’였다.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며 1861년 미 연방을 이탈했던 남부 주들이 남북전쟁 때 사용한 깃발인데, ‘남부연합군 참전용사의 후손들’이란 단체의 지부에서 이를 사유지에 게양한 것이다.
▶남북전쟁은 1865년 링컨 대통령이 이끈 북부군의 승리로 끝났다. 미 정부는 남부연합을 ‘반란군’으로 규정했고, 많은 미국인들은 남부연합기를 인종차별의 상징으로 본다.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백인 경찰의 손에 사망하자, 미국 전역에서 대대적 인종차별 반대시위가 일어났다. 남부군 총사령관이었던 로버트 E. 리 장군의 동상 등 수많은 남부연합 상징물이 끌어내려졌다.
▶하지만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주들에는 남부연합 상징물을 자신들의 ‘역사’로 보는 사람이 많다. I-85가 지나가는 5주도 모두 여기 속한다. 그래서 하루 8만여 대의 차량이 지나는 곳에 남부연합기가 내걸린 것이다. 지난해 7월 한 청년이 이 깃발을 끌어 내리려다가 ‘사유지 침입’ 혐의로 경찰에 입건되자, “옳은 일을 했는데 왜 처벌하냐”는 논란이 일었다.
▶160년 전 남북전쟁은 끝났지만, 그 영향은 이처럼 미국 사회 곳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남부연합에 가담한 미시시피주에서 남부군 게릴라 부대 대령의 증손자로 태어난 미국 소설가 윌리엄 포크너는 평생을 이 문제에 천착해 1949년 노벨문학상을 탔다. 그는 ‘어느 수녀를 위한 진혼곡’이란 장편에서 남북전쟁의 영향을 이렇게 표현했다. “과거는 결코 죽지 않는다. 지나갔다고 할 수도 없다.”
▶공수처의 윤석열 대통령 체포 시도가 있었던 3일, 광주광역시가 시청사에 미국 버지니아 주기(州旗)를 게양해 여러 말이 나오고 있다. 광주시장은 여신이 폭군을 짓밟은 그림 아래 적힌 ‘언제나 폭군은 이렇게 되리라(Sic Semper Tyrannis)’는 문구가 “의미심장하다”고 했다. 그런데 이 깃발은 버지니아주가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며 남부연합에 가담했던 1861년 만들어졌다. 링컨이 ‘폭군’이란 것이다. 그 의미를 떠나 미국 주 깃발 게양을 뜬금없다고 생각할 사람이 많을 것 같다.
-김진명 기자, 조선일보(25-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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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무슬림
미국 헌법 13차 수정 조항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나기 직전 통과됐다. 공화당 출신인 링컨 대통령이 주도해 민주당의 거센 반대를 뚫고 아주 어렵게 성사됐다. 단 두 문장이다. '1조: 미국 혹은 미국이 다스리는 모든 곳에서 노예제 혹은 (적법한 절차에 의해 유죄가 확정된 범죄에 대한 형벌을 제외한) 강제 노동은 존재할 수 없다. 2 조: 이를 실행하기 위한 관련 법률은 의회가 정한다.' 이 두 문장으로 미국 노예제가 폐지됐고 모든 미국인의 '법 앞의 평등'이 이뤄졌다.
이 조항의 통과 이면에는 당시 북군 소속 흑인들의 수많은 희생이 있었다. 전쟁에서 자신들과 똑같이 죽어나가는 흑인들을 보며 노예제 폐지를 거부하던 백인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링컨은 이런 변화를 최대한 활용했다. 사실 전세는 이미 북군 쪽으로 완전히 기운 상태였지만, 링컨은 전쟁이 끝나고 평시로 돌아가면 백인들이 노예제 폐지를 외면할 것으로 봤다. 그래서 종전(終戰)을 일부러 늦추고 양당 지도부에 '노예제 폐지를 헌법으로 명시해야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거짓 정보까지 흘린 끝에 겨우 수정 조항을 통과시켰다.
링컨의 목적이 노예제 폐지 그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모든 미국인은 출발점이 평등해야 하고 그 정의가 지켜질 때 미국의 통합과 번영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선 헌법에 노예제 폐지를 명시하는 것이 필수라고 봤다. 예측은 옳았다. 미국은 통합됐고 세계 최강의 나라가 됐다. 링컨이 노예제 폐지에 반대하던 당시 민주당으로부터 '폭군' '독재자'라는 비난을 들어가면서 이뤄낸 역사적 성과였다.
지금 미국 사회에서 '전쟁에 나가 죽음으로써 애국한다'는 것은 법 앞의 평등을 얘기할 수 있는 가장 큰 근거이며 가치인 것이다. 그런데 201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도널드 트럼프가 민주당 유세에서 '미국을 위해 아무것도 희생한 것이 없다'며 자신을 비판한 무슬림 군인 전사자의 아버지를 조롱했다.
전사자의 아버지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포켓 헌법전을 꺼내 들고는 트럼프에게 "헌법전을 읽어보았는가. 거기에는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이라고 쓰여 있다. 알링턴 국립묘지에 가보라. 수많은 인종이 누워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지금까지 입에 발린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신물 난 상당수 미국인의 열광적인 호응 덕에 온갖 막말을 쏟아내고도 인기를 계속 높여 왔다. 그에게는 미국의 상당수 백인이 '말하고 싶지만, 차마 꺼내지 못하는 얘기'를 대신해준 솔직함의 매력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번에 트럼프가 건드린 것은 정치적 올바름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미국을 만든 근본적인 힘과 가치관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공화당 지도부까지 들고 일어선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무슬림 전사자 아버지가 꺼내 든 것은 단순한 헌법전이 아니라 미국이 세계에 자랑해 온 우수한 국가 경영 방식 그 자체였다.
-최원석 국제부 차장, 조선일보(1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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