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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자 무속 공개'라도] [무속에 빠진 명성황후] [似而非宗敎] ....

뚝섬 2024. 12. 24. 09:57

['공직자 무속 공개'라도]

[무속에 빠진 명성황후]

[似而非宗敎]

[최태민의 靈魂合一法]

[무속(巫俗)]

 

 

 

'공직자 무속 공개'라도

 

[홍성욱의 과학 오디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로봇 공학의 역사를 보면 미국에서는 주로 공장 자동화를 위한 로봇 팔이 발달했음에 비해, 일본에서는 인간과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 개발에 주력했다. 이 차이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일본 국민은 물론 연구자들까지 로봇과 같은 존재가 영혼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서양인의 시선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이런 문화는 동물과 식물, 로봇 같은 무생물에도 영혼이 깃든다는 일본 특유의 애니미즘(animism)에 기인한 것이었다.

 

만물에 깃든 이런 영혼을 특정한 샤먼(shaman)만이 접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다른 사람의 삶에 도움을 주거나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샤머니즘(shamanism)이다. 애니미즘이 인간과 다른 존재들 간의 물활론적 관계를 강조한다면, 샤머니즘은 샤먼의 매개적 행위를 더 주목한다. 서양의 샤먼은 주술사나 마법사인데, 우리나라에서 샤먼은 보통 무당이라고 부르는 무속인이다. 굿을 하면서 부채춤을 추고, 어떨 때는 칼 위에서 칼춤도 추면서 산 자와 망자를 이어주는 영매다.

 

한국의 샤머니즘은 역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유래가 깊다. 조선 시대에 유생들이 무속을 없애려고 했지만 실패했고, 이승만·박정희 정권에서 모두 미신 타파를 외치며 무속과 전면전을 치렀다. 이때 잠깐 주춤하는 듯하다가 무속은 또 부활했다. 지금 무속인을 찾아 점, 사주, 관상을 보는 행위는 국민적 취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최근 소셜미디어의 성장과 함께 무속인은 유튜브에서 채널을 개설하고 있고, 젊은이들이 사주·관상을 검색하는 빈도는 지난 5년 사이에 두 배로 늘었다.

 

누구도 미래를 정확하게 알기 어렵고, 영혼의 세계가 있는지 과학도 답하지 못한다. 무속은 이런 불확실성을 파고들어 우리에게 심리적 만족을 준다. 그런데 아픈 아이를 데리고 무당을 찾아간다든지, 굿판에 가산을 탕진하는 데에 이르면 무속의 폐해는 돌이키기 어려워진다. 나라와 사회의 지도층이 더 모범을 보여야 하는데, 오히려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회 지도자들이 더 깊게 무속에 빠져 있다. 공직자 재산 공개만이 아니라 ‘공직자 무속 공개’라도 해야 할 판이다.

 

-홍성욱 서울대 과학학과 교수, 조선일보(2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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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에 빠진 명성황후

 

왜 황후께서 무속과 풍수에 빠지셨을까? 민비 이야기이다. 흔히 민비가 임오군란(1882년) 때 충북 충주로 피신하면서 알게 된 무당 '진령군' 때문이라고 알려졌지만 이미 왕후로 책봉된 그때부터였다. 한미(寒微)한 가문의 그녀가 갑자기 왕후가 되었기에 제왕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왕후가 되면서부터 열등의식과 혼란스러운 정세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와 불안에 시달렸다. 게다가 자식 복도 없었다. 오로지 의존하였던 것은 민씨 일가와 무속이었다. 무속에 빠졌음은 그녀의 편지와 그를 모셨던 신하 윤치호의 일기에서 드러난다. 진령군 이전에 그녀는 남정식이란 무속인에게 의존했다. 임금의 건강운이나 곁에 두어야 할 신하들의 운세 등을 물었다.

그녀의 몰락(그리고 조선의 몰락)은 풍수에서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866년 왕후가 되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것이 친정아버지 묘 이장이었다. 1858년 친정아버지 민치록이 죽었을 때 여주 선영에 안장되었다. 비록 몰락하였지만 명문가 선영이라 지세가 좋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제천·이천·광주로 이장을 거듭한다. 그리고 1894년에는 경기도를 떠나 멀리 서해안 바닷가 충남 보령으로 이장을 한다. 이곳을 추천한 이는 충청도 수군절도사 이봉구였다. 그는 이 공로로 공조판서가 된다. 여주·제천·이천·광주의 땅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었다. 왕후가 올바른 풍수관·인생관·국가관을 갖추기 못했기 때문이다. 왕후의 정성이 부족하였던지 저승에 계신 친정아버지의 '응답'이 없었다. 이장 다음 해인 1895년 그녀는 일본인들에게 시해된다.

이장을 거듭할수록 국고는 탕진되었고 백성들의 원한은 하늘에 뻗쳤다. 새로 무덤이 조성될 때마다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전답을 빼앗기고 정든 고향에서 쫓겨났다. 황후의 아들(훗날 순종황제)이 쓴 '행록(行錄)'을 살펴보자. "좋은 묫자리를 보령에 정했을 때 경비가 너무 많이 드는데도 모두 자비로 하였으며 백성들을 하나도 동원하지 않았다. 묘를 쓰는 지역 백성들의 집을 철거하는 것과 상여가 지나가는 길옆 농작물이 손상되는 것과 조약돌 하나, 흙 한 삽에 대해서도 넉넉히 값을 치렀다." 이 말을 곧이들을 자 있을까?

20년 전 필자는 보령 현장을 답사했다. 그곳 촌로들은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당했던 고통과 원한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894년 보령으로 이장한 뒤 다시 110년 후의 일이다. 2003년 명성황후는 저승에서 친정아버지를 초장지(初葬地)로 되돌아가게 하였다(여주 가남읍 안금2리 마을 뒤). 다섯 번 이장하고 여섯 번 장사를 치른 이른바 '오천육장(五遷六葬)'은 조선 풍수사의 진기록이다.

박근혜 대통령 인생에 결정적 영향을 준 이는 최태민이었다. 그는 기독교·불교·무속·단군교 등 여러 종교를 전전하다가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다. 사이비 종교의 전형이다. 대개 이러한 사이비 종교들이 흔히 악용하는 것이 풍수·관상·사주·조상신 등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이 사교(邪敎)에 빠지지 않았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우연일까? 작년에 풍수 술사 황모씨가 박정희 전 대통령 묘를 재정비하였다. 자칭 "국장(國葬)을 두 번 주관"한 사람이라고 한다. 묘역 정비는 현충원 관리인들이 할 일이지, 굳이 풍수가 낄 일이 아니다. 황씨는 작년 말 김영삼 전 대통령 묘를 잡기도 하였다. 광중을 팔 때 돌들이 나왔다. 묘지에서 돌이 나오는 것은 풍수의 금기 사항이다. 그런데 이 돌들을 "봉황의 알"이라며 세상을 희롱했다. 이에 대해 풍수학자 최창조 전 서울대 교수는 "봉황의 항문이 찢어질 일"이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묘역 정비에 굳이 술사를 동원한 이유가 무엇일까? 요즘 더욱더 궁금해진다.

-김두규 우석대 교양학부 교수, 조선일보(16-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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似而非宗敎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5공 재판 당시에 나온 법조계 문구로 기억된다. 성공하면 쿠데타가 아니라는 말이다. 사이비 종교를 이 논리에 대입시켜 보면 '성공한 사이비 종교는 사이비 종교가 아니다'도 될 수 있었다. 최태민교(敎)는 거의 성공할 뻔했다. 왜냐하면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했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사이비 종교가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한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에 비춰 보면 이례적인 사건이다.

언론 보도에 의하면 40년 전부터 최태민과 그 일가는 박근혜 영애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고 한다.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 맥킨지 보고서보다 더 장기적이고 치밀한 계획을 세웠고, 결국 성공했다. 앞으로 맥킨지는 최태민의 사이비 종교 성공 사례를 집중 분석해야만 한다. 육영수 여사가 죽었을 때 '네가 앞으로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엄마가 먼저 간 것이다. 길을 비켜준 것인데 왜 우매하게 울고만 있느냐'는 최태민의 편지 내용도 결국은 들어맞았다. 아시아의 지도자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로 됐다. 북한처럼 세습으로 된 것도 아니다. 모든 공정한 과정을 거쳐서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오죽하면 '선거의 여왕'이 별명 아니었던가.

이 모든 성공 신화의 밑바탕에는 최태민의 영발과 주술이 작용했던 것일까? 신문 보도에 의하면 10·26 당일에도 최는 박근혜에게 '오늘 아버지와 점심 약속을 해서 주변 사람을 모두 물리치라'는 당부를 했다고 한다. 주변 사람이 해코지를 할 거라는 예측이었을 것이다. 최태민이 지녔던 이 정도의 영발을 경험하면 어지간한 사람은 맹목적인 신봉자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영발을 갖추었더라도 사이비 종교는 마지막에 마각(馬脚)이 드러난다. 돈과 남녀 문제다. 제아무리 진짜 종교라도 여기서 문제가 불거지면 사이비 종교로 전락한다. 종교는 영발과 도덕을 모두 갖춰야 한다. 도덕이 없는 영발은 악령의 속삭임이다. 김영란법과 짝을 이루는 '최순실법'을 만들어 최씨 일가가 축적한 수천억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파사현정(破邪顯正)이다.

 

-조용헌, 조선일보(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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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의 靈魂合一法

 

최태민씨의 주특기는 '영혼합일법'이었다고 한다. 이걸로 한국의 심장부인 청와대를 완벽하게 접수하였으니, '최태민교(敎)'는 지난 4년간 한국을 통치한 셈이다. 도대체 영혼합일법이 어떤 것이길래 이처럼 위력을 발휘한 것일까?

이것은 무속 신앙에서 행해지는 '상계점(上繼占)'의 일종이라고 생각된다. 무당이나 점쟁이도 각기 주특기가 다르다. 병을 잘 고치는 무당, 미래를 잘 알아맞히는 무당, 말을 잘해서 사람을 감복시키는 무당이 있다. 그중에서 죽은 사람의 혼을 잘 불러내는 주특기를 가진 무당(점쟁이)이 있다. 망자의 혼이 그 무당에 실리는 것이다. 살아 있는 무당을 통해서 죽은 사람이 가족이나 친지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 '상계점'이라는 의미는 위(上) 세계의 이야기를 아래 세계에 중계(中繼)방송해준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저승의 이야기를 이승으로 중계해 주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러한 중계방송 무당을 영매(靈媒)라고 부른다. 원래 '무(巫)'자라는 글자 자체가 하늘(一)과 땅(一)을 가운데서 연결해(I) 주는 사람(人)이라는 의미다.

 

무녀가 작두를 타고 있는 모습. /조선일보 DB                 

 

상계점은 갑자기 사고로 가족이 죽으면 위력을 발휘한다. 몇 년간 병을 앓다가 가족이 죽으면 생전에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남기고 간다. 그러나 갑자기 사고로 죽어버리면 하고 싶었던 말을 못하고 가니까, 남겨진 가족은 망자의 마지막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를 듣고 싶은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상계점을 치면 망자가 살아생전 지녔던 특별한 버릇, 목소리를 점쟁이가 흉내 낸다. 점을 치러 간 사람은 망자의 특유한 목소리가 재현되어 나오면 기겁을 한다. 가족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이 나오기 때문이다. '벽장 위에 있는 왼쪽 서랍에 금팔찌가 있으니 그것은 막내딸 줘라!' '작은아버지에게 내가 신세를 많이 졌으니 너희들이 잘해라' '땅 소송 문제는 내가 풀어주겠다' '셋째는 이혼하지 마라. 부인이 심성이 곱다' 등등의 내용이다.

 

보통 서민들 상계점은 1~2회로 끝난다. 그런데 최태민교의 영혼합일법은 40년을 계속 이어왔고, 그 점사(占辭)의 대상이 일반 서민이 아니라 혼자 사는 한 나라의 여성 대통령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고 기이하다.

 

-조용헌, 조선일보(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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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속(巫俗)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전승되는 종교현상. 무당의 성격 한계에 따라 무속의 성격이 결정된다. 무당의 성격은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① 신(神)의 초월적인 힘을 체득하는 신병(神病)의 체험을 거쳐 신권화(神權化)한 사람이어야 한다. 평범하던 한 인간의 신병을 통하여 신을 체험하고 신의 영력을 얻어서 신과 교유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신병을 체험한 강신무(降神巫)는 신병을 신의 소명에 의한 종교현상으로 의식한다.

 

② 무당은 신병을 통하여 획득한 영통력을 가지고 신과 만나는 종교적 제의인 굿을 주관할 수 있는 자라야 한다. 굿은 무당들의 정통적인 종교적 표현이며 행위적 현상이라는 단서가 붙는다. 그 이유는 신병을 체험하여 영통력을 획득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제의를 독경식(讀經式)이나 불교의식에 의존한다면 무당 본래의 제의인 굿과는 이질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③ 무당은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서 민간층의 지지를 받고 종교적 지도자 위치에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민간층의 종교적 지도자로 인정되기까지는 민간층의 종교적 지지에 의한 사회적 공인이 전제되며, 무당이 비범한 신권자로서 민간인의 종교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때만 가능하다.

 

④ 무당의 신앙대상 신은 신병을 통하여 체험하게 되는 산신·천신·칠성신·용신 등의 자연신, 또는 장군신·왕신 등이고, 무당이 소망을 비는 신앙의식인 굿은 이들 신을 대상으로 한다.

 

무당을 이렇게 규정지을 때 지역에 따라 나타나는 성격차이와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는 무당의 갈래를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따른다. 현재 우리나라의 중·북부지역에는 신이 내린 강신무가, 남부지역에는 조상 대대로 혈통을 따라 계승되는 세습무(世襲巫)가 분포되어 있다. 세습무는 강신무로부터 분화되어 사회적으로 정착, 제도화하여 영력이 도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무당을 정리하면, 일차적으로 중부와 북부의 전통적 강신무인 무당 박수류와 남부의 세습무인 호남의 단골, 영남의 무당, 제주도의 심방이 있다. 이차적 방계무로서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 선무당류와, 호남·영남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명두·동자 등이 있다.

 

무속은 민간사고가 집약되어 무당을 중심으로 체계화된 종교현상이다. 국내 어느 지역에서나 행하여지는 무속의 기본제의로는 성주굿·삼신굿·지신굿·조왕굿 등 민가의 가신에게 기원하는 제의와, 서낭굿·당산굿 등 마을의 수호신에게 기원하는 제의가 있다.

 

특히, 굿의 제의순서는 민가의 가신으로부터 마을의 수호신을 거쳐 우주의 천신으로 이어지며, 일반 민간신앙을 집약, 체계화시키면서 무속의 굿은 진행된다.

 

따라서, 무속은 민간층의 종교의식이 집약된 것으로 한민족의 정신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생활을 통하여 생리화한 산 종교현상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인 무속을 한국의 종교사적 입장에서 보면,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한민족이 가지고 있었던 조직적 형태의 종교현상은 무속이라고 하는 귀결점에 이른다.

 

무속에 관한 우리나라 최고의 기록은 신라 제2대 남해왕 때의 것으로 1세기 초가 되고, 최초로 들어온 외래종교로는 4세기 후반의 불교로 알려지고 있다. 즉, 무속에 관한 기록보다 불교가 들어온 것이 약 4세기 후의 일이다.

 

그리고 무(巫)가 일반 자연종교 현상 속에서 전문화한 신직(神職)의 종교적 지도자로 자리를 굳히기까지는 오랜 역사를 흘러 왔을 것이며, 또 무를 시베리아를 비롯한 북아메리카 등 미개원시민족의 샤머니즘과 비교하여 볼 때 우리 무속의 역사적 배경은 청동기시대까지 소급시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무속은 이렇게 외래종교가 들어오기 전의 아득한 상고대로부터 한민족의 종교적 주류를 형성하고 있었으며, 또 외래종교가 들어온 뒤로도 민간신앙으로서 한민족의 기층적 종교현상으로 전승되어 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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