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장’을 아십니까?] ["딸아, 農高 가라"..]
[‘틈장’을 아십니까?]
["딸아, 農高 가라"..]
‘틈장’을 아십니까?
팀장은 임원과 직원 틈에서 눌리고 치받치는 처량한 신세
평화로운 해법은 ‘상호허겁’… 서로를 적당히 두려워합시다
베이비부머(1955~1963년생)는 부모를 섬긴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한다. 노년이 길어진 백세 시대를 앞둔 공포가 그 말에 서려 있다. 지금의 은퇴 세대는 자녀가 분가하거나 결혼할 때는 돕겠지만 부양을 기대하지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받들던 효(孝)라는 덕목의 퇴장과도 같다.
직장인 커뮤니티 플랫폼인 블라인드에서는 결혼 시장에 자기를 소개할 때 ‘부모님 노후 준비 완료’를 붙이는 게 유행이다. 부모의 노후 준비 완료가 자녀의 소개팅 스펙이 된 것이다. 당신이 내 부모를 부양할 책무는 없으니 안심하라는 신호다. 각박하게 들리지만 ‘노후 준비가 된 부모가 최고의 부모’라고 그들은 말한다.
빙하의 표면에 생긴 깊은 크레바스. 직장 내 세대 전쟁은 팀장의 책상 위에 이런 균열을 일으킨다. 변하지 않는 임원과 완전히 달라진 팀원들 사이에서 팀장은 괴롭다. /인터넷 캡처
직장도 급변하고 있다. ‘틈장’을 아십니까? 최근 이런 질문을 받았다. 어느 조직에나 있는 팀장이 요즘에는 스스로를 ‘틈장’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임원과 직원 사이에 끼어 있어서 틈장이다. 위에서 내려오는 불만, 아래서 치받는 불만이 모두 그의 책상에서 충돌하기 때문에 틈장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량한 신세라 틈장이다.
대기업 구성원의 행복지수를 분석해 보면 팀장 직급의 행복지수가 가장 나빠졌다고 한다. 저녁이 있는 삶, 일과 삶의 균형을 추구하는 문화가 퍼지며 회사에서 급한 일이 있을 때 사생활을 양보하고 다 같이 돕는 분위기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문제는 팀장에게 급한 업무가 내려오는 관행은 여전하다는 점이다. “팀장님, 내일까지 부탁해요.”
요청받는 시각은 대개 퇴근 무렵이다. 베스트셀러 ‘시대예보’에 묘사된 그다음 풍경은 빈집처럼 휑뎅그렁하다. 팀장이 사무실을 둘러보면 팀원들은 총총 사라지고 없다. 저녁이라고 해서 세상이 뚝 멈출 수는 없다. 변화된 관계와 역학 때문에 팀장은 독박 야근을 한다. 스트레스가 치솟지만 누군가는 틀어막아야 한다. 그래서 ‘틈장’이다.
팀원들도 할 말은 있다. 가장 끔찍한 공포는 ‘팀장님이 금요일 밤에 하는 전화’라고 한다. 불편한 세 가지가 뭉쳐 있기 때문이다. 팀장님, 개인 시간 침해, 전화. 조직 내 세대 갈등의 시작으로 흔히 지목된다. 프랑스와 이탈리아는 근무시간 외에 전화, 이메일 등으로 업무 연락을 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했다.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다.
한국 사회의 특징 중 하나는 ‘지연된 보상’이었다. 그것은 지금의 상하 관계가 지속되면서 집단이 하나의 유기체처럼 흘러가던 평생직장 시대의 보상 체계였다. ‘참고 기다리면 너도 수혜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더 이상 먹히지 않는다. 저성장과 세계화, 인공지능이 함께하는 무한 경쟁 시대에는 과거의 약속을 유지하기 어렵다. 젊은이들은 그래서 ‘즉각 보상’을 외친다.
지금 팀장들은 선배를 깍듯이 모신 마지막 세대이자 후배는 좀처럼 따르지 않는 첫 세대다. 최근 유행하는 ‘조용한 퇴사(quiet quitting)’가 그 균열을 증명한다. 직장을 그만두진 않지만 최소한의 의무만 다하고 그 이상은 기여하지 않겠다는 삶의 방식 말이다. 선배라는 말조차 사라질지 모른다. ‘앞서 경험한 사람’이라는 뜻이 무색할 만큼, 세상의 급속한 변화 앞에선 너나없이 신인이기 때문이다.
P부장이 L대리를 돕고 L대리가 L부장이 돼 K대리를 찾는 시스템은 붕괴되고 있다. 이 변화에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생태학자 최재천 교수는 “상호허겁(相互虛怯)이 인간을 평화롭게 만든다”며 “이 약간의 비겁함을 자연에서 배우자”고 했다. 상대를 적당히 두려워하고 서로 조심하며 예의를 지키는 상태가 생태계에 최적이라는 뜻이다. 큰 활자로 출력해 책상에 붙여 놨다. 상호허겁.
-박돈규 기자, 조선일보(2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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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農高 가라"..
인구학자 조영태 서울대 교수가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중2 딸에게 농고(農高)진학을 권하고 있다"고 했다. 남들 안 쳐다보는 분야에서 실력을 키우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조 교수는 "지금 유망한 직업이 미래에도 유망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의사·변호사 같은 직업은 고령화로 기존 의사·변호사 집단의 은퇴가 늦어지면서 신규 세대가 비집고 들어갈 빈자리도 점점 좁아진다는 것이다. 그는 대졸 학력의 희소가치도 사라지고 있다며 두 딸에게 사교육도 안 시킨다고 했다.
▶3년 전 일찍 세상을 뜬 경영 혁신 전문가 구본형씨가 '고딩의 딜레마'라는 표현을 썼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만 아니라 사회에 나가서도 '하기는 해야겠는데, 성과는 더디고, 하기는 싫은 상황의 올가미에 걸려 허우적댄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그런 덫에 걸려버리는 것은 덫이 널려 있는 곳으로 찾아가기 때문이다. 남들이 다 가고 있는 길로 휩쓸려 가 경쟁의 올가미에 걸린 상태에서 징징거리며 따라가면 인생은 고달플 수밖에 없다.
▶베이비 부머들 인생 목표는 단순했다. 공부 잘해 좋은 대학 나와 괜찮은 일자리 잡으면 거기서 대개 평생 먹고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어가고 있다. 올 초 다보스 포럼에서 발표된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 보고서는 인공지능·로봇공학 주도의 4차 산업혁명으로 2020년까지 선진국에서만 일자리 510만개가 사라질 거라고 예측했다.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어린이의 65%는 지금 있지도 않은 새로운 직업에서 일하게 된다는 것이다.
▶얼마 전 가천대 길병원에서 의사가 아니라 미국 IBM의 인공지능 왓슨(Watson)이 60대 대장암 환자의 치료법을 결정지었다. 지금 의대생들이 10년 뒤 어떤 직업 환경에 부딪혀 있을지 보여준다. 현재의 청소년들과 젊은이들은 기성세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안고 살아야 한다. 앞으로 어떤 기술이 등장해 어떻게 세상을 바꿔나갈지 예측하기 어렵다. 잘못 선택하면 테크놀로지 발전과 산업 재편에 몰려 속절없이 튕겨져나갈 수도 있다.
▶대학에서 배운 전공 지식 하나 갖고 평생 비슷한 일에 종사하기는 힘들게 됐다. 눈이 핑핑 도는 기술 발전에 유연하게 적응할 기초 체력을 튼튼히 만들어야 한다. 로봇·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자기만의 차별적 능력을 키우는 것도 필요하다. 그렇게 해서 다양한 청소년들이 각자 다양한 목표를 추구해 간다면 경쟁의 가혹함도 줄어들 수 있다. 모두가 한 이불 속에서 발버둥치는 건 좋은 전략이 아니다.
-한삼희 수석논설위원, 조선일보(16-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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