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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가 예견된 전쟁] [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 ]

뚝섬 2024. 12. 27. 10:26

[패배가 예견된 전쟁 ]

[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하다]

[미∙일 관계, 태평양 전쟁 벌였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패배가 예견된 전쟁

 

중일전쟁 발발 이후 미국의 압박이 고조되자 일본 수뇌부는 미국과의 전쟁을 현실감을 가지고 바라보기 시작한다. 군국주의가 도를 더해가는 가운데 1940년 10월 총리 직속 ‘총력전 연구소’가 설립된다. 각 중앙 성청, 육해군, 일본은행 등 국가 중추 기구 소속 문무(文武) 엘리트를 한데 모은 일종의 국책 싱크탱크였다.

 

산업 생산력, 과학기술력, 동맹 외교력 등 총력전 수행에 필요한 모든 요소와 자원이 이들의 관심사였다. 이듬해 여름 연구생들은 미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모의 훈련을 진행한다. 한 달 넘게 심도 있는 분석과 토의 끝에 이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 필패(必敗)’였다. 기습에 성공하여 서전(緖戰)을 승리로 이끈다 할지라도 전쟁 장기화에 따라 절대적 물량 열세의 일본에 승산이 없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 결과였다. 미국이 확전을 피해 적당한 선에서 강화에 나설 것이라는 일각의 기대는 타당성이 없으며, 종국에는 소련의 참전이 결정타가 되리라는 예측도 더해졌다.

 

마치 1945년 8월 이후로 시간여행을 해서 작성한 듯 (원폭 투하를 제외하고) 전쟁의 진행 경로까지 거의 정확히 내다본 시뮬레이션 결과였다. 보고를 접한 육군상(相) 도조 히데키는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러일전쟁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전쟁이 아니었고, 전쟁이란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서 결연히 분전(奮戰)하면 ‘의외성’이 작용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며 연구소 관계자들에게 함구령을 내렸다.

 

불과 3개월 뒤 일본은 진주만 기습을 감행해 미국과 전쟁에 돌입한다. 내부의 경고는 광기 어린 신념 앞에 무용이었다. 굳이 총력전 보고서가 아니더라도 정상적 사고력과 판단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미(對美) 개전이 가당치 않다는 것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지금도 일본 국민들은 뻔히 결과가 보임에도 스스로를 파멸에 몰아넣은 무모한 결정의 주체와 과정에 대해 의아함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신상목 기리야마본진 대표·前주일대사관1등서기관, 조선일보(24-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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對美 주화파 묵살한 日군부, 핵 파국 재촉하다

 

[한국인이 본 20세기 일본사]

 

《1941년 12월 7일 아침 일본 연합함대가 진주만을 기습했다. 선전포고도 없이 휴일을 틈탄 공격이었다. 작전은 대성공이었지만 그 비열함에 분노한 미국인들은 일치단결하여 전쟁에 뛰어들었다. 일찍이 미일 충돌을 애타게 바랐던 이승만은 1942년 6월부터 몇 차례에 걸쳐 미국의 소리(VOA) 단파방송으로 조선인들을 격동시켰다. 이 연설은 인터넷에서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독자분들도 꼭 들어 보시기 바란다. 일본에 처절하게 맞서 온 중국도 환호성을 질렀다. 후스(胡適)의 말대로 일본이 마침내 ‘할복’을 시작한 것이다.》

 

이승만 “日 패망 임박” 강조


1940년 미국은 태평양함대를 본토 샌디에이고에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옮겼다. 이것으로 일본이 자원의 보고인 동남아시아를 침략할 때, 병참선을 끊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일본은 동남아를 침략하려면 진주만을 동시에 공격해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 진주만 기지를 무력화시킨 일본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이어 미국과 영국령인 필리핀, 말레이반도, 싱가포르를 점령했다. 상상치도 못한 전과에 일본 전체가 흥분했다. 서양에 대한 오랜 피해의식에 찌든 일본인들에게 이 초기의 성공은 마약과도 같았다. 멀쩡하던 문인들도 전쟁 찬양에 나섰고, 식민지 조선의 일부 유명 문인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러나 이승만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후스와 마찬가지로 일본이 자멸의 길로 들어섰다고 판단했다. “나는 이승만입니다”로 시작하는 단파방송은 구한말 만민공동회 시절부터 명연설로 유명했던 그답게 조선인들의 가슴을 쳤다. ‘생명의 소식’, ‘불벼락’ 등 기독교 냄새 나는 용어와, 마치 부흥회 목사의 설교를 연상시키는 리드미컬한 웅변은 지금 들어도 매우 선동적이다. 오랫동안 대일 무력투쟁 시기상조론과 무용론을 견지했던 이승만은 이 연설에서 전 조선인의 무력투쟁을 촉구했다. “우리 내지와 일본과 만주와 중국과 시베리아 각처에 있는 동포들은 각각 행할 직책이 있으니, 왜적의 군기창은 낱낱이 타파하시오. 왜적의 철로는 일일이 타상(打傷)하시오. 적병의 지날 길은 처처에 끊어 버리시오. 언제든지 어데서든지 할 수 있는 경우에는 왜적을 없이해야만 될 것입니다.”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그의 연설은 “분투하라! 싸워라! 우리가 피를 흘려야 자손만대의 자유 기초를 회복할 것입니다”라며 끝을 맺었다. 이 단파방송 연설은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승만의 권위와 지명도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미드웨이 전투로 승기 잡은 美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군부를 대표한 내각총리대신 도조 히데키가 1943년 필리핀 마닐라 인근 니콜스 필드 공군기지에 도착해 일본군을 사열하는 모습(위 사진). 이듬해 필리핀 전투에서 일본군 30만 명 이상이 사상하는 대패를 당한다. 아래 사진은 1945년 6월 미군 B-29 폭격기가 일본 오사카 시내에 폭탄을 투하하는 장면. 일본 본토에 대한 미군의 집중 폭격으로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지역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일본은 연일 승전보를 울리며 축하 파티에 취했지만, 미국은 일본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강했다. 기술과 자원,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전쟁 지지에서 일본을 압도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양국의 생산력과 사기의 격차는 더 벌어졌다. 진주만 기습 반년 만에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항공모함 4척을 잃고 대패했다. 이걸로 사실상 전세는 기울었고 패전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이 와중에도 일본의 육군과 해군은 작전이나 비행기 생산 계획, 자원 분배 등 여러 문제를 놓고 다투었다(마리우스 잰슨 ‘현대일본을 찾아서2’). 심지어는 작전 정보조차도 공유하지 않았다. ‘일본인은 잘 단결한다’는 속설은 여기서는 예외였다.

일본의 사려 깊은 지식인들은 이미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고, 일부 정치인들은 군부정권을 타도하고 신정권을 수립한 후 미국과 교섭하여 하루빨리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군부 정권은 전쟁을 고집했다. 그러는 사이 사이판, 필리핀, 이오지마가 차례로 함락되고 일본 여러 도시에 대한 무지막지한 폭격이 시작됐다. 특히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 지역은 폐허가 될 정도였다. 필리핀 전투에서만 일본군 사상자 수는 30만 명을 넘었다. 이런 패배들의 책임을 지고 도조 히데키는 정권에서 쫓겨났지만, 군부는 본토 결전을 고집했다.

 

천황에 종전 상소 올렸지만… 

 

1945년 2월 히로히토 천황에게 종전 협상 권고 상주문을 올린 고노에 후미마로 전 일본 총리. 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히로히토 천황은 여전히 애매한 태도를 취했다. 미군의 다음 상륙 목표는 오키나와, 그리고 규슈였다. 더 이상 전쟁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전 총리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마)는 1945년 2월 히로히토를 만난 자리에서 상주문을 올렸다. 뜻밖에 여기서 고노에는 ‘공산 혁명’에 대한 위기감을 토로했다. 교전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한 글자의 비난도 하지 않고, 오직 소련이 동유럽과 아시아에서 벌이는 ‘적화’ 공작에 대해 우려했다. 원래 중산층 이하 출신이 많은 군 장교들 중에는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는 이들이 많고,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전쟁을 확대하여 마침내 대동아전쟁에까지 오게 된 것은 이 군부 내 일당들이 (국내 혁명을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계획이었던 것이 이제 명확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전쟁은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 ‘1억 총옥쇄(總玉碎)’를 부르짖는 자들은 “소위 우익이라고 불리지만 배후에서 이들을 선동하고 국내를 혼란에 빠뜨려 마침내 혁명 목적을 달성하려는 자는 공산분자”라고 단언한다. 군부 정권에 탄압받던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아연실색할 논리다. 고노에가 볼 때 미국은 타협 가능하고 말이 통하는 상대였지만, 소련과 공산당은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기존 체제를 갈아엎을 진짜 ‘적’이었다. 일본 군부는 그들에 물들어 있으니 천황이 결단하여 그들을 일소하고 전쟁을 끝내 달라는 것이었다. 고노에는 미군 진주 후 자살했지만, 함께 상주문을 만들었던 요시다 시게루(吉田茂)는 미 군정하에서 총리를 지내며 전후 일본의 반공노선을 이끌었다. 고노에 상주문에 보이는 세계 정세와 소련 위협에 대한 인식이 해방 후 이승만의 그것과 비슷한 점도 흥미롭다.

고노에 상주 사건이 발각되자 요시다는 헌병에 체포되었고 전쟁은 계속되었다. 일본 군부는 미군이 상륙해 천황을 처형할 것에 대비해 메이지 천황의 후손 중 한 명을 산악지대에 숨겨놓으려는 웃지 못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리고 여자들까지 죽창 훈련을 시켰다. 1945년 4월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고 참혹한 전투 끝에 양국 군인을 제외하고도 주민 10여 만 명이 죽었다. 그래도 결정을 못 내리던 히로히토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야 NHK를 불러들였다. 항복 선언을 녹음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눈치챈 일부 군인들이 녹음테이프를 빼앗으려 궁궐에 난입했지만 찾지 못했다. 1945년 8월 14일이었다.

-박훈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 동아일보(22-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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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일 관계, 태평양 전쟁 벌였지만... 지금은 둘도 없는 친구

 

미국 페리 제독 강요로 개항한 일본,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이뤄
1차 대전 후 만주사변으로 갈등…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전쟁 시작
미국, 항복한 일본 비군사화 추진… 냉전 시작되자 안전보장조약 체결 

 

지난 10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했어요. 이번 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센카쿠(尖閣·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일본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에서 일본을 지지하겠다는 뜻을 밝혔어요. 이에 아베 총리는 미국 내에 일자리 70만개를 창출하겠다고 화답했고요.

미국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군사·경제·정치 등에서 긴밀히 협조하는 끈끈한 동맹 관계를 이어오고 있어요. 태평양을 사이에 둔 두 나라의 인연은 언제 시작된 것일까요?

페리 제독의 흑선과 메이지유신

19세기 중반까지 일본은 서구 열강에 폐쇄적인 입장이었어요. 당시 일본을 다스리던 에도막부가 쇄국정책을 고수했기 때문이었죠. 그러던 1853년 6월 3일, 낯선 네 척의 검은 군함(흑선)이 일본의 평화로운 어촌 우라가에 나타났어요. 일본과 통상조약을 맺으라는 임무를 받은 미 해군 제독 매슈 페리(1794~1858)가 군함을 이끌고 일본에 도착한 것이죠. 이듬해에도 페리 제독이 흑선을 타고 찾아와 개항을 요구하자 에도막부는 이에 굴복해 미국과 불평등한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어요.

이후 다른 서구 열강과도 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일본 내에서는 에도막부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어요. "이참에 서구 문물을 수용해 근대적인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세력이 불어난 데다 불평등한 통상조약으로 일본 내 원료들이 과도하게 수출되면서 물가가 치솟았기 때문이죠.

결국 1867년 사카모토 료마를 중심으로 한 반(反)막부 세력의 압력에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일왕을 중심으로 한 메이지 정부가 들어섰어요. 메이지 정부는 이듬해 서구식 근대화를 위한 개혁에 착수했답니다. '메이지유신'이 시작된 것이죠.

메이지유신을 통해 일본은 단기간에 자본주의 경제 체제와 입헌군주제를 갖춘 강대국으로 성장했어요. 흑선을 앞세운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가 일본이 근대국가를 이루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된 것이죠.

만주사변과 태평양전쟁

서구식 근대화로 강국이 된 일본은 국제 관계에서도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받아들였어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을 맺어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습니다.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하였고요.

미·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도 함께 연합국으로 참전해 승전국이 되었어요. 1차 대전 직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주도로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유엔의 전신)이 창설되자 일본도 국제연맹에 가입하였지요.

좋아보이던 두 나라의 관계는 그 이후로 나빠지기 시작했어요. 1921년 미국이 워싱턴 회의를 통해 일본의 군비 확장을 제한하고 중국과 만주에 대한 영향력을 줄이자 일본은 미국에 불만을 품게 되었답니다.

1929년 경제 대공황이 전 세계를 덮치자 2년 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키고 만주를 식민지로 삼았어요. 군국주의의 목소리가 커지면서 전쟁과 식민지 개척을 경제 위기를 벗어날 해법으로 삼은 것이죠. 미국이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렸어요.

두 나라의 갈등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았어요.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전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부족한 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동남아시아를 침략했어요. 동남아시아에 식민지와 영향력을 갖고 있던 미국은 이에 대응하여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하는 강경책을 내렸답니다.

1941년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받은 미군 기지의 모습/위키피디아 

 

미국과의 교섭에도 별다른 성과가 없자 일본은 또다시 전쟁을 해법으로 택했어요. 1941년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오아후 섬 진주만에 머물던 미국 태평양 함대에 대규모 기습 공격을 감행하면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기습공격을 가했던 일본이 기세를 잡는 듯했지만, 경제력과 군사력 등 국력에서 앞선 미국이 곧 전세를 뒤집었어요. 1942년 미드웨이 해전을 기점으로 일본은 점점 수세에 몰렸습니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일본 국토가 쑥대밭이 되고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뒤에야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어요. 일본이 패망하면서 우리 민족도 광복을 맞게 되었지요.

전후 처리와 냉전

일본이 항복한 뒤 미군은 도쿄에 연합국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를 설치하고 일본을 무장해제하는 비군사화 정책을 추진했어요. 미군은 일본의 군수 생산을 금지하고 일본군을 해체해버렸어요. 태평양전쟁을 주도한 전범들을 체포해 법정에 세웠고요.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며 군대도 보유하지 않는다는 신헌법(평화헌법)도 공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고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의 대일본 정책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일본을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중심축으로 여기게 된 것이죠. 1951년 미국은 일본과 안전보장조약을 맺어 군사 동맹 관계를 구축했어요. 일본은 헌법으로 금지된 공식 군대 대신 자위대를 보유하게 되었고요.

이후 동아시아에서는 소련·중국·북한과 한국·미국·일본이 대립하는 치열한 냉전이 이어졌습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지며 냉전이 끝난 뒤에도 미국과 일본은 동맹으로서 북한·중국 등을 상대해 긴밀한 협조 관계를 이어오고 있어요. 

 

경제 성장과 '재패노포비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일본은 6·25 전쟁 이후 빠른 경제 성장을 이뤘어요. 1980년대가 되자 미국 다음가는 ‘제2의 경제 대국’이 되었답니다. 

 

그러자 미국 내에는 ‘일본이 미국을 제치고 최강대국의 자리도 빼앗는 게 아니냐’는 재패노포비아(Jap anophobia·일본 공포증)가 퍼졌어요. 일본 자본이 뉴욕을 상징하는 록펠러센터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인수에 참여하자 이런 우려는 더 커졌지요. 

 

하지만 1990년대가 되자 재패노포비아는 잠잠해졌어요. 이때부터 일본은 심각한 장기 경제불황(잃어버린 10년)에 빠졌지만 미국은 전례 없던 경제호황을 누렸기 때문이죠.

 

-김승호 인천포스코고 역사 교과 교사 , 조선일보(17-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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