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의 시심이 머물렀던 안동 고산정] [도산구곡(陶山九曲)]
[퇴계의 시심이 머물렀던 안동 고산정]
[도산구곡(陶山九曲)]
퇴계의 시심이 머물렀던 안동 고산정
안동 고산정.
“일동주인 금씨가/ 지금 있는지 강 건너에서 물어보았더니/ 쟁기꾼은 손 저으며 내 말 못 들은 듯하네/ 구름 낀 산 바라보며 홀로 앉아있네.” 퇴계 이황이 제자 거처인 고산(孤山)을 찾아 남긴 글이다. 시구 속 일동이 지금의 고산정이고 그 주인은 금난수(琴蘭秀·1530~1604)다. 금난수는 정자를 지으며 일동정사라고도 불렀다.
스승과 제자 나이 차는 29년. 퇴계가 숙부에게 배움을 청하러 청량산으로 수없이 다니던 길에 고산정이 있다. 뜻이 통하는 제자 금난수와 남다른 정도 있었겠지만, 고산 일원의 고고한 풍경이 그의 마음을 더 사로잡았는지도 모르겠다.
고산을 찾아 홀로 앉아있었다더니 그를 만났을까. 그 궁금증을 다른 시어가 풀어내 준다. “험준함을 넘어 깊은 곳에 한 천지를 얻으니/ 멋진 누대와 아름다운 정원에 영지밭이 비친다/ 예전에 와서 못 보고 이제 와서 만나보니/ 마치 이 골짝의 신선을 만난 것 같네.”
결국 그때는 못 만났지만, 반갑게 만나 건네받은 스승의 시에 감격하며 답을 한 금난수의 시가 또한 걸작이다. “고산에 다시 당도하시니 천기는 사월인데/ 긴 가래로 때때로 다시 거친 밭을 일군다/ 어찌 꼭 신선 공부를 배워 습득해야 하는가/ 세상 밖에서 우아하게 노니 이것이 신선이구나.”
퇴계가 청량산을 찾아보며 남긴 글에는 ‘내 고삐 잡고 그림 속으로 들어가네’ 하는 구절이 있다. 그래서 그랬는지 그 흔적 따라 청량산을 오가던 많은 선비의 사연도 고산정 일원에 덧대어져 있다. 낙동강가 수려한 풍광에 성현의 사상이 담긴 곳이 이제는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유명해졌고, 퇴계가 거닐던 예던길의 아름다운 구간으로 손꼽히며 탐방객을 맞는다.
고산정은 고산을 마주하고 있다. 홀로 우뚝 서 있어 독산(獨山)이라고도 하는데, 고산 주인이던 금난수는 정유재란 당시 의병을 일으켜 안동 수성장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호국의 달 6월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온 힘을 다한 선조를 기리며 고산에 올라 그림 같은 고산정을 바라본다.
-윤주 국가유산청 문화유산·자연유산위원, 조선일보(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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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구곡(陶山九曲)
조선 선비들은 경치 좋은 계곡의 대략 10리 정도의 구간을 9단계로 나누어 이를 구곡(九曲)이라 이름 붙였다. 각 곡(曲)마다 이름을 붙이고, 선비정신을 함양하는 과정으로 생각하였다.
낙동강 상류의 50리 정도를 도산구곡(陶山九曲)이라 한다. 청량산에서 외내(烏川) 군자리까지의 구간이다. 일반적인 구곡은 10리 정도 사람이 살지 않는 계곡을 일컫지만, 도산구곡은 50여 리의 빅 사이즈에다가 각 구간마다 명촌(名村)들이 세거해왔다는 점이 독특하다. 퇴계 선생의 직계 제자와 후손들이 거의 500년 세월 동안 이 도산구곡에 포진해 있었다.
1곡은 운암곡(雲巖曲)이다. 광산 김씨들이 대대로 살았다. 오천칠군자(烏川七君子)가 회자된다. 7군자 중에 후조당(後彫堂) 김부필(金富弼·1516~1577)이 유명하다. 2곡은 월천곡(月川曲)이다. 횡성 조씨들이 살았다. 월천(月川) 조목(趙穆·1524~1606)이 대표적이다. 3곡은 오담곡(鰲潭曲)이다. 단양 우씨들이 세거하였다. 퇴계가 존경하던 역동(易東) 선생의 서원이 있었다. 4곡은 분천곡(汾川曲)인데, 강호가도(江湖歌道)라고 하는 영남 풍류의 창시자인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1467~1555)를 전후하여 영천 이씨들의 600년 세거지이다. 5곡은 도산서원과 퇴계 후손들이 사는 의인(宜仁)·섬촌(剡村), 하계(下溪)와 계남(溪南)일대이다. 6곡은 천사곡(川沙曲)이다. 진성 이씨들의 원촌(遠村)과 천사(川沙) 마을이다. 원촌은 저항 시인 이육사의 고향이다. 7곡은 단사곡(丹砂曲)이다. 천석(泉石)을 사랑한 이극철(李克哲)이 살던 곳이다. 8곡은 고산곡(孤山曲)이다. 봉화 금씨 성재(惺齋) 금난수(琴蘭秀·1530~1604)의 바위절벽 밑에 있는 고산정(孤山亭)을 보고 필자는 감동받았다. 현재는 농암 종택이 8곡으로 옮겨져 있다. 9곡은 청량곡(淸凉曲)이다. 청량산인을 자처했던 퇴계의 수도처이다.
도산구곡 일대는 500년 동안 세월의 풍파에도 거의 풍광이 변치 않고 옛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아쉽게도 70년대 안동댐이 들어서면서 1곡에서 6곡까지 수몰이 되었다. 수백 년 명문가 집성촌들이 사라진 것이다. 현재 7·8·9곡만 남았다. 도산구곡 골짜기의 바위 틈새마다 진하게 쏟아부어 놓은 '먹물'은 세월의 풍우도 지울 수 없구나!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문화콘텐츠학, 조선일보(17-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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