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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 [합스부르크 왕조와 마리아 테레지아]

뚝섬 2024. 1. 23. 06:29

[마리 앙투아네트] 

[빈 미술사 박물관] 

[마리아 테레지아]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 앙투아네트

 

파리 중심부 센강 변에 있는 중세 건물 콩시에르주리는 궁전으로 지었지만 14세기부터 정치범 감옥으로 쓰던 곳이다. 이곳을 거쳐 간 죄수 중에 가장 유명한 인물이 프랑스 대혁명기의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1755~1793)다. 그곳에 76일간 수감돼 있으면서 재판받고 단두대의 이슬이 됐다. 남편 루이 16세는 그해 초 이미 단두대에 올랐다.

 

▶18세기에 오스트리아를 40년간 다스린 여제(女帝) 마리아 테레지아는 존경받는 통치자였다. 국가 재정을 아끼기 위해 진흙에서 추출한 황색 도료로 황실 소유 건물을 칠하게 해 일반 국민도 이 ‘테레지아 노랑’을 따라 할 정도로 근검절약했다. 그는 유럽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프랑스 부르봉 왕조와 전쟁 억제를 위해 결혼 동맹을 맺었다. 여제는 어린 딸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로 시집 보내면서 “정치에 개입하지 말고 남들 일에 관여하지 말라”고 했다.

 

▶1788년 프랑스 재정은 지출 6억2900만 리브르, 수입 5억300만 리브르의 적자 상태였다. 왕실 비용으로는 3500만 리브르가 할당돼 전체 지출의 6% 수준이었다. 국가 재정을 파탄 낸 주범은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전쟁 등을 치르며 남긴 막대한 부채였다. 부채 상환에 들어가는 금액이 전체 지출의 절반(3억리브르)이었다. 하지만 극심한 빈곤이 나라를 휩쓸자 ‘사치와 타락의 원흉’이라며 외국인 왕비에 대한 원성이 높아졌다.

 

▶콩시에르주리로 이감된 지 두 달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1차 심문이 열렸다. 기소장에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돈을 주고 정치 거래를 했다. 내전을 부추기며 애국자를 학살하고 외국에 전쟁 작전을 넘겨주었다. 8세 아들을 잠자리로 불러들여 근친상간을 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인쇄공, 가발 제조업자, 음악가, 목수 등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은 만장일치로 유죄판결을 내렸고 사형이 선고됐다. 당시 급진파 자크 에베르가 1790년부터 발간한 포퓰리즘 신문 ‘르 페르 뒤셴’이 “창녀” “암늑대”라고 부르면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근친상간 누명을 씌워 사형을 주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되고 몇 달 후 에베르도 다른 급진파들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왕족으로 누린 화려한 삶, 그와 대비되는 비극적 죽음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영화, 소설, 뮤지컬 등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프랑스 대혁명기에 덧씌워진 잘못된 소문은 이후 역사적으로 상당 부분 해명됐지만 여전히 따라다닌다. 잊을 만하면 종종 국내 정치에도 소환되는데 최근에도 그 이름이 등장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역사적 진실을 얼마나 알고 인용하는지는 의문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조선일보(24-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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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미술사 박물관

 

오스트리아 왕실의 초호화 박물관…"역사에 남을 건물 만들라"

 

600년 가까이 오스트리아를 장악하며 유럽을 호령했던 왕실 가문이 있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입니다. 합스부르크 왕가는 다른 유럽 왕실과 혼인을 통해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와도 연결돼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유럽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죠.

19세기 초에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이끄는 군대가 오스트리아를 넘보자 합스부르크 왕가는 보물과 유물을 어떻게 잘 보관할지 걱정이 생겼습니다. 14세기 중반 오스트리아의 공작 루돌프 4세가 각종 진귀한 물품들을 수집하기 시작한 이래 축적해 온 왕가의 보물과 예술적인 유산은 실로 어마어마했어요. 왕가에서는 박물관을 설립할 생각이 절실했지만, 실행에 옮기기까지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1848년에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선출되면서 비로소 박물관 설립 계획이 발표됐습니다.

◇왕실 보물 보관하기 위해 건설

요제프 황제는 건축가 카를 하제나워와 고트프리트 젬퍼에게 비용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길이길이 남을 웅장한 건물을 만들라고 당부했어요. 1871년부터 짓기 시작한 박물관은 온 정성을 다 쏟아부어 1880년에 완성됐습니다. 값비싼 대리석과 반짝이는 모자이크, 그리고 벽화로 호화롭게 장식하느라 시간을 더 들였고 1891년에야 공식 개관했습니다. 오스트리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빈 미술사 박물관이 탄생한 것이죠. 빈 미술사 박물관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박물관과 함께 유럽 3대 박물관으로 꼽힙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의 타나그라의 소녀와 아테나, 네크벳과 이시스가 있는 관, 대 피터르 브뤼헐의 바벨탑, 빈미술사박물관 실내입니다. /빈 미술사 박물관·위키피디아

 

박물관 안에 들어서면 너무나 화려한 모습에 잠시 정신이 멍해질 정도입니다. 둥근 실내는 개별 전시장으로 이어지는 12개의 아치형 입구들로 빙 둘러져 있어요. 대리석 바닥에서 높은 천장에 이르기까지 구석구석 빈틈 하나 없이 조각품과 금동 장식, 그리고 벽화로 꾸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원형의 공간을 미술품으로 장식하는 작업을 맡았던 여러 예술가 중에는 훗날 오스트리아를 대표할 만큼 유명해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도 끼어 있었어요.

◇미술사 안내하는 벽화

클림트의 벽화는 12m나 되는 높이에 그려져 있어요. 그냥 올려다봐서는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클림트의 열성 팬들은 이곳에 갈 때 망원경을 가지고 가기도 한대요. 2018년은 클림트가 사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는데요. 이를 기념해 박물관에서는 클림트의 그림 근처까지 올라가 가까이서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 기간 중에 임시 구조물로 계단과 다리를 놓아주었답니다.

클림트의 벽화는 아치 위쪽 기둥과 기둥 사이마다 그려져 있어요. '타나그라의 소녀와 아테나'를 보면, 기둥을 끼고 왼쪽에는 고대 그리스의 여인이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아테나 여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네크벳과 이시스가 있는 관'에서는 기둥 왼쪽에 고대 이집트에서 생명을 상징하는 앵크를 든 여인이 있고, 오른쪽에는 죽음의 여신 이시스의 이미지가 보입니다. 시대별로 고대 이집트의 미술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까지 모서리마다 그려두었어요. 전시실에서 펼쳐질 미술의 역사를 먼저 안내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신에게 도전한 바벨탑

이 박물관을 찾는 관람자가 꼭 보고 가는 대표 작품 중 하나는 1563년에 네덜란드의 화가 대(大) 브뤼헐(1525~1569)이 그린 '바벨탑'입니다. 바벨탑은 브뤼헐이 야심차게 구상한 작품이에요. 나선형으로 올라가는 건물뿐 아니라 멀리 보이는 마을의 모습에서부터 사람들의 옷차림과 동작에 이르기까지 세부 하나하나가 놀랍도록 정밀하게 표현돼 있습니다. 기독교 성서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인데, 특히 "도시와 탑을 건설해 그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라고 사람들이 말했다는 성경 구절에서 상상의 아이디어를 얻은 그림입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박물관을 개관한 지 불과 25년 만에 멸망하고 맙니다. 제국은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졌지만 빈미술사박물관은 여전히 과거의 영화를 기억한 채 관람자들을 기다리고 있어요.

-이주은·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기획·구성=최원국 기자, 조선일보(21-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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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테레지아

 

카를 6세, 아들 없어 법 바꿔가며 큰딸에게 영토·왕위 상속
주변국서 이를 빌미로 전쟁 일으키자… 마리아, 영국과 손잡고 왕위 지켜내

 

지난달 27일 오스트리아에서는 부패 스캔들이 터지면서 제바스티안 쿠르츠 총리(33)가 물러났어요. 사흘 뒤인 지난달 30일 알렉산더 판데어벨렌 대통령은 임시 총리로 브리기테 비어라인(69) 헌법재판소장을 지명합니다. 오스트리아 최초의 여성 총리죠. 비어라인은 오는 9월 치러질 국회의원 선거까지 임시 내각을 이끌게 됐어요.

오스트리아 역사 속 '첫 여성 지도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유일한 여성 통치자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입니다. 황제는 아니었지만 '여제(女帝)'라고 널리 알려졌을 정도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헝가리를 실질적으로 지배했죠. 공식 직함은 신성로마제국 황후, 오스트리아 대공비, 헝가리·크로아티아 여왕, 보헤미아 여왕입니다. 비어라인 총리와는 달리 그 자리에 앉기위해 엄청난 노력을 해야 했어요.

◇"딸도 상속받게 해주세요"

오스트리아를 기반으로 세력을 키운 합스부르크 가문은 15~16세기에 유럽의 제후들과 정략결혼을 하며 이탈리아의 시칠리아, 프랑스의 부르고뉴, 네덜란드, 헝가리 등에 넓은 땅을 가졌어요. 독일 지역 제후국이 선거로 뽑던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15세기부터는 합스부르크 왕가가 차지하게 됩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결혼 전 뛰어난 미모로 유명했어요.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연애결혼을 했는데, 아들 5명, 딸 11명을 낳습니다. 48세에 남편과 사별하면서 쓸쓸함을 음식으로 달래다가 풍만한 몸집이 됐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그런데 18세기 들어 문제가 터집니다. 왕위를 물려줄 아들이 사라진 겁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를 6세(1685~1740년)는 아들이 일찍 세상을 떠나고 딸만 셋이 있었거든요. 게르만족의 전통법인 살리카 법에 따르면 여성은 왕위 계승은 물론, 영토도 물려받지 못했어요. 땅을 넓혀나가는 데 도움을 줬던 정략결혼은 족쇄가 됩니다. 합스부르크와 결혼으로 얽힌 수많은 유럽 왕실도 합스부르크가(家) 영토를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차지할 근거가 생긴 것이거든요.

카를 6세는 나라가 분할되는 것은 원치 않았어요. 딸도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을 수 있도록 법을 바꾸는 '국사조칙(國事詔勅)'을 1720년 발표합니다. 게르만족 전통이 남은 왕국에서는 여왕 탄생이 불가능했는데 이를 가능하게 한 겁니다.

카를 6세는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보헤미아·헝가리 등을 무사히 상속하도록 프랑스와 스페인 등 주변국의 동의를 받는 데 여생을 바칩니다.

◇9년 동안 벌어진 '왕위 계승 전쟁'

 

1740년 카를 6세가 사망하면서 장녀였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왕위와 영토를 물려받으려 합니다. 그런데 카를 6세가 살아 있을 때는 마리아 테레지아를 후계자로 인정했던 이웃 나라들은 입장을 바꿔서는 이의를 제기합니다. 여자라서 인정하기 어렵다는 거죠. 이렇게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1740~1748)이 시작됩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프로이센, 프랑스, 바이에른, 스페인, 나폴리 등과 싸워야 했어요.

특히 프로이센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왕위를 인정받으려면 슐레지엔을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슐레지엔은 전체 영토에서 큰 부분은 아니었지만 상공업이 발달한 요충지였어요. 이를 거부하자, 프로이센은 무력으로 슐레지엔을 빼앗으며 전쟁을 일으키죠.

마리아 테레지아는 영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전세를 역전시켜요. 1748년 아헨조약을 맺고 슐레지엔 등 일부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자신의 왕위와 상속권을 모두 인정받습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자리는 마리아 테레지아 대신 남편 프란츠 슈테판(프란츠 1세)이 가져가게 됩니다. 카를 6세가 내놓은 국사조칙은 신성로마제국의 제위 계승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왕위에 대한 상속법만 바꾸는 것이거든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선출 방식은 형식적으로 제후국의 투표에 의한 것인데 여성은 피선거권이 없었어요. 그리고 선거로 황제자리를 지켜오는 합스부르크가도 이것까지 바꿀 수는 없었거든요.

의무 교육·징병제 도입

남편을 황제로 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모든 국정을 담당했어요. 남편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아들 요제프 2세와 권력을 나눠 가졌고요.

계몽사상에 영향을 받은 마리아 테레지아는 전국에 초등학교를 만들고 의무 교육을 실시했어요. 또 징병제를 도입해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군사력을 강화했지요. 또한 조세제도를 개편해 귀족과 성직자들에게도 세금을 걷어 재정을 강화했어요.

다만 끝내 슐레지엔을 되찾는 데는 성공하지 못해요. 프로이센과 7년 전쟁(1756∼1763)을 벌이지만 다시 패배하죠. 여성 통치자로 있으면서 5명의 아들과 11명의 딸도 낳아요.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 마리 앙투아네트입니다.

 

-윤서원 서울 성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일보(19-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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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기후이상은 세계적인 현상이다. 서울의 사우나 폭염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오스트리아 빈의 여름도 과거보다는 훨씬 더워졌다. 에어컨이 없어도 충분했던 빈의 여름나기가 힘들어졌다. 다행히 이 도시는 습하지 않고 바람도 시원해 그늘에만 들어가면 숨이 트인다. 전체 시(市) 면적의 절반에 달하는 녹지 덕분일 수도 있다.

빈 여행의 핵심인 링슈트라세(환상도로)는 더 시원하다. 옛 성벽을 허물고 그 자리에 만들어진 환상도로를 따라 가로수가 심어져 있다. 그렇게 이어진 나무 그늘을 따라서 돌면 한낮 땡볕 아래에서도 쾌적하게 도심을 둘러볼 수 있다. 예외는 링슈트라세의 중심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이다.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동상을 감상하려면 나무 그늘을 벗어나야 한다.
 

 

그럴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단순한 동상이 아니라 한 시대를 상징하는 장중한 기념물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중후반 합스부르크 제국과 유럽을 움직였던 수많은 사람이 기마상으로, 입상으로, 부조(浮彫)로 자신을 뽐내고 있다. 어린 모차르트도 보인다. 그리고 그 모두의 위에 마리아 테레지아(Maria Theresia· 1717~1780)가 군림하고 있다.

 

빈의 마리아 테레지아 동상 

 

고요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오른손을 앞으로 내밀고 있는 그녀에겐 어머니의 인자함이 묻어난다. 실제로 그녀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어머니 같은 존재였다. 링슈트라세는 1850~1890년대에 개발됐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가 한창이던 시기였다. 당연히 왕조가 배출한 군주들의 동상을 여기저기 세울 만했다. 그런데 그녀 한 명뿐이다. 모든 남자 황제의 동상은 궁전 뜰에 있거나, 뒷골목에 있거나, 공원 한구석에 있다. 그마저 남기지 못한 황제도 많다.

마리아 테레지아만이 링슈트라세의 한가운데 자리를 차지한다. 그녀를 중심으로 영웅광장,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뮤지엄 콰르테가 펼쳐져 있다. 그래서 이 광장 앞에는 대형버스들이 끊임없이 멈춰 서고 수많은 여행객이 쏟아져 나온다. 그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빈을 만끽하기 전에 예외 없이 그녀 앞으로 걸어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왜? 그녀가 마리아 테레지아이기 때문이다.

◇鐵의 여인, 美의 궁전을 짓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남긴 가장 유명한 건축 유산은 쇤브룬 궁전이다. 궁전은 빈 도심에서 서남쪽으로 약간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만큼 거대하지는 않지만 단아하다.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를 상징하는 노란색의 궁전 외관이 초록 숲, 만발한 꽃의 정원과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로코코 양식의 궁전 내부는 화려함의 절정이다. 그러나 쇤브룬 궁전이 유명한 건 우아한 외관도, 화려한 내부도, 아름다운 정원 때문도 아니다.
 

오스트리아 빈의 쇤브룬 궁전을 넵튠 분수 뒤편에서 조망한 모습. 마리아 테레지아는 중국풍·일본풍·인도풍으로 다양하게 방을 꾸밀 정도로 쇤브룬에 애정을 쏟았다. /게티이미지코리아

 

마리아 테레지아 때문이다. 이곳은 군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로서 치열했던 그녀의 인생을 오롯이 담고 있다. 그녀는 171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首長)인 카를 6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름다운 소녀였고, 춤과 노래를 즐겼다. 문제는 그녀에게 남자형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녀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을 다스릴 운명을 피할 수 없게 됐다. 1740년 카를 6세가 죽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조의 모든 것을 상속받았다. 여자 상속자는 가문이 빈에 자리를 잡은 13세기부터 450년이란 긴 세월 동안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자의 몸으로 帝國을 상속받다

'처음'에는 언제나 위험이 따른다. 카를 6세도 이에 대비해 자신의 딸이 제국 상속을 가능하도록 명시한 '국본조칙'을 유럽 각국으로부터 승인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국가를 지키는 건 상대방의 선의도, 외교적 수사로 포장된 문서도 아니었다. 믿을 수 있는 건 자신의 힘뿐이었다. 카를 6세는 어리석게도 그걸 몰랐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즉위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슐레지엔을 침공했다.

프로이센의 청년왕은 "슐레지엔만 넘겨주면 다른 적들로부터 당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슐레지엔을 양보하면 프리드리히 2세는 더 많은 것을 원할 것이며, 합스부르크의 약세를 눈치 챈 프랑스바이에른 등 다른 열강들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란 사실을. 그녀는 정치와 군사를 몰랐지만, 과감하게 타협을 거부했다. 전쟁을 선택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한 패전(敗戰)의 연속이었다.

100년 넘게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으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의 자원이 고갈됐던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물려받은 오래된 거대 제국이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남편도, 신하들도 협상을 주장했다. 그녀는 분노했다. "돈도, 신용도, 군대도, 경험도 없었다. 최후의 순간에는 적절한 조언조차 구할 수 없었다."(마리아 테레지아의 회고) 안으로는 패배주의가 만연하고, 밖으로는 사방에서 적이 몰려왔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강철 같은 의지와 탁월한 전략으로 적에 맞섰다. 슐레지엔을 되찾을 수는 없었지만 나머지 제국을 지켜내는 데는 성공했다.

◇나라를 위해 딸을 시집보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위키피디아 

 

제국의 해체는 막아냈지만 한때 온 유럽을 호령하던 합스부르크 왕조의 체면은 엉망이 됐다. 오랜 세월 신하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에 슐레지엔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순순히 슐레지엔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 힘으로 빼앗긴 땅을 힘으로 되찾아올 속셈이었다. 복수전은 재상 카우니츠(Kaunitz)와 장군 다운(Daun)에게 맡겨졌다. 카우니츠는 300년 가까이 합스부르크의 주적이었던 프랑스와의 동맹을 제안했다. 혁명적인 발상의 전환. 남편을 비롯한 각료 대부분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이 동맹의 가치를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의 적(敵)은 더 이상 프랑스가 아니었다. 적은 바로 슐레지엔을 강탈해 간 프로이센이었다. 그리고 프로이센을 꺾으려면 반드시 프랑스의 힘이 필요했다. 자존심 대신 생존을 선택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1756년 카우니츠를 내세워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프랑스에 이어 러시아까지 끌어들여 시작한 복수전은 실패로 끝났다. 그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적인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너무 뛰어났던 탓이다. 프리드리히 2세를 죽음 직전까지 밀어붙였지만 승리까지 따낼 수는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패배를 인정하고 내정 개혁에 몰두했다. 그녀의 치세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는 오늘날 동유럽 거의 대부분에 해당하는 영토에 더 깊이 뿌리내렸고, 영토를 굳게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랑스와의 동맹을 공고히 하기 위해 가장 사랑하던 막내딸 마리 앙투와네트를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루이에게 시집보냈다. 마리 앙투와네트는 15세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의도대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동맹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혁명으로 단두대에서 죽을 비참한 운명의 길을 가게 된다. 다행스럽게도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쇤브룬을 사랑했다. 중국풍, 일본풍, 인도풍으로 다양하게 장식된 방들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이 궁에 신경을 썼는지를 알 수 있다. 나랏일로 바빴지만 이곳에서 그녀는 남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슈테판 1세와 사랑했고 많은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여자였던 탓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지만, 합스부르크 왕가의 역사상 그녀만큼 '황제'에 어울렸던 사람은 없었다. 그녀만큼 후대에 큰 영향을 끼친 군주도 없었다. 마리아 테레지아합스부르크의 진정한 백미(白眉)다. 마리아 테레지아 광장과 쇤브룬 궁전이 그러하듯이.
 

 

마리아 테레지아 자녀 16명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등 대부분 佛 부르봉家와 결혼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테레지아는 제국의 주인인 동시에 아내였고 엄마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독일 접경지대인 로트링겐이란 작지만 전략적으로 중요한 공작령(領)의 상속자인 슈테판과 결혼했다. 정략결혼이었으나 두 사람은 서로 사랑했고, 부부 사이도 아주 좋았다.

1737년 첫딸을 시작으로 마리아 테레지아가 16명의 아이를 낳은 게 이를 보여준다. 그녀는 재위 초반 16년 동안 전쟁과 국사(國事), 임신과 출산을 병행하다시피 했다. 국익을 위해 자녀 대부분을 프랑스 왕실인 부르봉(Bourbon) 가문 출신과 결혼시켰다. 그녀의 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막내인 마리 앙투아네트로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로 있다가 혁명 때 단두대에서 이슬로 사라졌다.
 

 

-빈·쇤브룬=송동훈 문명탐험가, 조선일보(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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