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과 한명회] [월산대군(月山大君)] [절대 폭군 연산군.. ]
[압구정과 한명회]
[월산대군(月山大君)]
[절대 폭군 연산군의 막장 정치]
압구정과 한명회
MZ세대 북적이는 압구정, 조선 초기 권력자가 세운 정자
조선 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압구정도’예요. 가운데 소나무가 있는 언덕 위에 높이 세워진 것이 압구정입니다. 당시 압구정에 올라서면 한양(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
최근 서울 강남구 압구정 상권이 젊은 세대로 다시 붐비고 있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어요. 1988년 한국 맥도날드 1호점이 압구정에 들어선 뒤로, 압구정 로데오거리는 한국의 ‘유행 1번지’로 통했지요. 압구정은 이후 다른 신흥 상권에 밀려 침체를 겪다가, 최근 유명 맛집들과 패션 브랜드 매장들이 다시 들어오며 인기를 회복했어요. 그런데 압구정이란 이름은 조선 시대 때부터 있었다는 사실, 알고 있었나요? 오늘은 이름만큼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는 압구정에 대해 알아볼게요.
압구정을 건립한 한명회
압구정(狎鷗亭)은 조선 초기 최고 권력자였던 한명회(1415~1487)가 1476년에 세운 정자였어요. 한명회는 자신의 호(號)인 ‘압구’를 따 정자 이름을 압구정이라고 했답니다. 친할 압(狎) 자에 갈매기 구(鷗) 자를 써서 ‘갈매기를 벗 삼는다’는 뜻이에요. 노년에는 정치를 잊고 유유자적하며 한강 변에서 시간을 보내고자 지은 정자였답니다.
한명회가 당대 최고의 권력을 누릴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요? 한명회는 과거 시험에 여러 번 응시했지만 번번이 낙방하면서 40세 가까이 되도록 한가한 삶을 보냈다고 해요. 38세가 되던 해 개성에 있는 경덕궁의 문지기로 드디어 관직에 나가게 되었어요. 궁궐 문지기라는 아주 낮은 벼슬을 맡았지만, 이때 한명회는 자신의 인생을 한 번에 역전시켜 줄 중요한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수양대군이었습니다.
충남 천안시에 있는 한명회 신도비(神道碑). 신도비는 왕이나 고위 관료의 공적을 기록한 비석이에요. 한명회가 사망하고 난 다음 해(1488년)에 세워졌습니다. /국가유산청
한명회는 세상의 혼란을 다스리려면 강력한 군주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조선의 임금은 10대에 왕위에 오른 단종이었어요. 수양대군의 조카이기도 했죠. 수양대군은 단종이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반대파를 제거하고 자신이 권력을 잡을 계획을 꾸며요. 이 과정에서 한명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합니다. 수양대군은 한명회의 말에 따라 거사를 준비했고, 결국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는 데 성공했어요. 한명회는 계유정난 이후 1등 공신에 책봉되죠. 한명회는 수양대군이 왕(세조)으로 즉위한 후에도 총애를 받으며 최고 관직인 영의정까지 오르게 됩니다.
또한 한명회는 자신의 딸들을 각각 세조의 아들과 손자인 예종과 성종에게 시집보내죠. 왕실과 사돈 관계를 맺으며 한명회는 조선의 핵심 권력자가 됩니다. 성종 시기에는 왕의 장인이자, 국가의 원로 대신으로서 정계를 주름잡아요.
압구정, 권력과 부를 상징하다
한명회가 건립한 압구정은 한강 변에 있어 경치가 아주 빼어났다고 해요. 압구정의 전망이 좋다는 소문이 중국 명나라까지 나서, 조선에 온 중국 사신들이면 누구나 압구정에서 연회를 베풀어주길 바랄 정도였다고 합니다.
한명회는 갈매기 무리를 보려고 압구정을 짓는다고 이야기했지만, 오히려 압구정은 한명회의 부와 사치를 상징하는 공간이 된 거죠. 한명회를 만나려고 뇌물을 들고 기다리는 사람이 정말 많았고, 또 한명회의 힘을 얻어 벼슬길에 오른 사람도 많았답니다. 세간에서는 압구정에 정작 갈매기는 한 마리도 온 적이 없다는 말이 떠돌았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친할 압(狎)’ 자를 ‘누를 압(押)’ 자로 바꾸어 압구정이 ‘갈매기를 억누르는 곳’이라고 했어요.
1978년 서울 강남 압구정 현대아파트 앞에서 한 주민이 밭을 갈고 있어요. 압구정 일대는 1960년대까지 논밭이었는데, 1970년대 강남 개발이 본격화되며 우리나라의 대표 부촌이 됐어요. /서울시역사아카이브
압구정은 한명회가 정치에서 물러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1481년 여름 조선을 찾은 중국 명나라 사신이 압구정을 구경하고 싶다고 했어요. 한명회는 공간이 좁다는 이유로 사신의 방문을 거절했지만, 계속되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허락했어요. 그러면서 성종에게 ‘압구정은 본래 좁고, 지금은 날씨가 매우 덥기 때문에 잔치를 차리기 어려우니, 담당 부서를 시켜 정자 옆 평평한 곳에 큰 천막을 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국왕이 사용하는 천막을 사용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신하가 국왕의 물건을 쓰겠다고 한 것이 성종은 매우 언짢았어요. 그래서 성종은 압구정이 아닌, 왕실 소유 정자인 제천정(濟川亭)에서 잔치를 치르게 했어요.
그런데 한명회는 나중에 중국 사신들을 따로 초대해 잔치를 열었어요. 이 사건 이후 한명회는 신하들에게 무례하다는 비판을 받으며 탄핵 대상이 됐어요. 성종의 노여움을 산 한명회는 얼마 안 가 모든 관직을 빼앗기고 권력에서 물러납니다. 그가 지은 압구정에서 여생을 보내다 1487년에 세상을 떠나요.
‘압구정동’ 명칭으로 되살아났죠
압구정은 한명회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과 권력의 무상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다음과 같은 한시가 지금까지도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임금을 폐하고 하늘을 부순 칠삭둥이, 갈매기 벗하고 친구가 넷인데 부귀를 얻었는가. 백년도 못 살면서 더러운 이름은 천년을 가니, 상당부원군 한씨 대머리라네.” 여기서 임금은 단종, 칠삭둥이는 한명회, 상당부원군은 한명회가 받은 조선 시대 작위를 뜻한답니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압구정지’ 표지석이에요. 압구정은 조선 말기에 철거됐고, 현재는 위치를 알리는 표석만 남아 있답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명회가 사망한 후 압구정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고, 마지막 주인은 철종의 사위이자 개화 지식인이었던 박영효였어요. 그가 갑신정변 당시 역적으로 몰리면서 모든 재산이 몰수되자, 압구정도 함께 몰수됐어요. 학계에선 고종 말기쯤 압구정이 헐렸다고 추측하고 있답니다. 사라진 압구정은 시간이 흘러 ‘압구정동’이라는 행정구역 명칭으로 되살아났고, 지금은 한 아파트 단지 안에 표지석만이 남아 그곳이 압구정 터임을 밝히고 있어요. 지금은 문화의 중심지가 된 압구정을 언젠가 방문한다면,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어떨까요.
-김성진 서울 고척고 교사/기획·구성=윤상진 기자, 조선일보(24-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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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月山大君)
두 번이나 왕이 될 기회 있었지만… 곤룡포를 입진 못해
아버지 죽음 이후 어린 나이 탓에 삼촌 예종에게 세자 자리 밀려
당대 최고 권력가 한명회 사위였던 동생이 그를 제치고 성종으로 즉위
시 지으며 살다 35세에 세상 떠나 인품 훌륭해 후세에 모범 되기도
조선의 궁궐 중 하나인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이에요. 최근 문화재청에서 대한문의 제 모습을 되찾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사라진 대한문의 월대를 새로 만들겠다고 밝혔어요. 월대는 주요 건물 앞에 평지보다 한 층 높게 기단 형식으로 대(臺)를 쌓은 것인데, 건물의 위엄을 높이는 역할을 했어요. 덕수궁은 두 번이나 왕이 될 기회가 있었지만, 왕이 되지는 못했던 왕자. 바로 월산대군이 살던 집터에 지어진 궁궐입니다.
◇삼촌 예종에게 세자 자리 내준 월산군
조선의 6대 왕 단종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1453년, 단종의 숙부 수양대군이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어요. 그리고 1455년에는 단종을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왕위에 올라 조선 제7대 왕 세조가 되었지요. 세조가 왕이 되자 18세 맏아들 도원군이 세자로 책봉돼 의경세자가 되었고요.
의경세자는 수빈 한씨 사이에서 아들 정과 혈, 딸 경근을 낳아요. 정은 월산군, 혈은 자산군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의경세자가 자산군이 태어난 지 두 달도 안 돼 질병으로 스무 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고 말아요. 그런데 세조는 당시 너무 어렸던 손자 월산군 대신 자신의 둘째 아들 해양대군을 세자로 삼았어요. 그리고 궁궐을 떠나야만 했던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궁궐 밖에 특별히 집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 집이 바로 지금의 덕수궁 터가 된 곳이에요.
◇한명회 사위인 동생이 9대 성종으로 즉위
1468년 세조가 죽음을 맞자 뒤를 이어 해양대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조선의 제8대 왕 예종이에요. 그러나 예종도 형이었던 의경세자처럼 불과 스무 살, 왕이 된 지 13개월 만에 죽고 말지요. 예종은 첫 번째 부인으로 한명회의 딸인 한씨를 맞이했으나, 한씨는 첫 원자를 출산하고 사망했으며 원자마저 얼마 뒤에 죽고 말았어요.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 한씨에게서 제안대군을 낳았지만, 당시 너무 어리고 몸이 약했습니다.
그러자 왕실의 가장 어른이었던 자성왕태비, 즉 세조의 왕비였던 정희왕후가 "자산군이 기상과 도량이 특별하고 학문이 날로 발전하므로 능히 큰일을 맡길 만하다"고 하면서 월산군의 동생인 자산군이 조선의 제9대 왕 성종이 되었어요. 예종의 원자였던 제안대군이나 의경세자의 맏아들이었던 16세 월산군을 제치고 당시 13세였던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 것은 당시 최고 권력자인 한명회의 영향 때문으로 짐작해요. 예종처럼 자산군도 부인이 한명회의 딸이었거든요. 자산군은 즉위한 뒤 아버지 의경세자에게 덕종이라는 묘호를 올렸고, 형 월산군의 칭호를 월산대군으로 높여 주었어요.
◇자연과 시를 벗 삼으며 살아
월산대군은 자연을 벗 삼아 시를 지으며 조용히 살다가 35세로 병들어 죽었어요. 왕이 될 기회를 삼촌에 이어 동생에게 두 번이나 뺏긴 셈이지만, 동생인 성종과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고 인품과 학문도 훌륭하여 종친의 모범이 되었기에 후세의 왕들에게도 좋은 예우를 받았다고 합니다. 문장이 뛰어나 중국까지 알려졌다고 해요. '추강(秋江)에 밤이 드니 물결이 차노매라. 낚시 들이치니 고기 아니 무노매라. 무심한 달빛만 싣고 빈 배 저어 오노라'라는 시조가 널리 알려져 있죠.
[월산대군이 살았던 집은 덕수궁 자리에 있었어요]
덕수궁은 월산대군 집터에 지어졌어요.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란 갔던 선조가 한양에 돌아왔을 때 궁궐이 모두 불에 타 월산대군의 집과 주변 민가들을 합쳐서 임시 행궁으로 삼았어요. 그 뒤 광해군이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내렸는데, 인조반정 후 인조는 경운궁을 월산대군 가문에 돌려줬어요.
그러다 1895년 명성황후가 경복궁에서 시해된 뒤 암살 위협을 피해 1896년 2월부터 1년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1897년 초 옮겨오면서 경운궁은 다시 궁궐이 됩니다. 조선 왕궁의 유일한 석조 건물인 석조전도 그때 세워졌어요. 경운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된 뒤에는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지호진 어린이 역사 저술가/기획·구성=양승주 기자, 조선일보(20-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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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폭군 연산군의 막장 정치
"나를 거스르지 말라, 죽음뿐이니라"
지하 1000m 막장에서 땀 흘리며 일하는 분들께는 송구한 표현이지만 연산군은 그냥, 막장이다. 영민한 머리는 국가와 공동체 대신 스스로를 위해 굴렸다. 노력 없이 물려받은 권력은 욕망을 채우는 데에만 썼다. 기준은 하나였다. '陵上之風(능상지풍)', 왕을 업신여기는 풍토를 없앤다. 절대다수가 아니라고 할 때 그는 귀를 닫았고, 폭력으로 그들 입을 틀어막았다. 500년 전 조선왕조 10대 군주 연산군 이융(李㦕)이 한 행적을 본다.
1482년 가을 창덕궁
1482년 한가위 다음 날 성종의 첫 왕비 윤씨가 사약을 먹고 죽었다. 질투심에 눈이 멀었다는 죄목으로 폐비 된 여자였다. 처형을 집행하기 전, 성종이 창덕궁 선정전에서 대신들에게 최종 의견을 물었다. 정창손, 한명회, 심회, 윤필상, 이파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이에 성종이 좌승지 이세좌에게 윤씨 집으로 가서 사사(賜死)하라 명했다. 이세좌가 내의(內醫) 송흠에게 물으니 "비상이 가장 좋은 독약"이라고 했다. 정7품 당하관 권주가 비상을 가져왔다. 이세좌와 권주가 윤씨 집으로 가서 윤씨를 죽였다.(1482년 8월 16일 '성종실록') 승지 이세좌가 집으로 돌아와 부인 한산 조씨에게 일을 이야기했다. 부인이 깜짝 놀라 일어나 앉으며 탄식했다. "우리 자손은 씨도 남지 않겠구나(吾子孫其無遺類乎)."(이희, '송와잡설·松窩雜說')
서울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맨 뒤쪽 왼편에 있는 무덤이 연산군 무덤이다. 연산군이 죽고 6년 뒤 아내 거창 신씨가 중종에게 애원해 유배지이자 그가 묻혔던 강화도 교동에서 이장했다. 오른편은 신씨 무덤이다. 가운데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묘, 사진 바깥 편 앞에는 연산군 딸 부부가 묻혀 있다.
1504년 폐비 윤씨의 아들 연산군은 이날 등장한 인물들을 전원 처형했다. 비상을 추천한 송흠도, 심부름꾼 권주도 죽였다. 산 자는 조각내 죽였고 죽은 자는 관을 부수고 시체를 조각냈다. 뼈는 갈아서 강에 날려보냈다. 문득 사람들은 죽음이 조석간에 있음을 알았다(人皆自分死在朝夕).(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10년을 계획한 광란(狂亂)
사람들은 말한다. 뒤늦게 자기 엄마 죽음의 비밀을 안 연산군이 폭군이 됐다고. 아니다. 왕이 된 지 석 달 만인 1495년 3월 16일 연산군이 승정원에게 이리 물었다.
"성종 임금 묘지문에 있는 윤기견(尹起畎)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이냐? 혹시 윤호(尹壕)를 잘못 쓴 것이 아니냐?" "폐비 윤씨 아버지인데, 윤씨가 왕비로 책봉되기 전에 죽었습니다." 연산군은 이때 어머니 윤씨의 죽음을 알았다. 연산군은 승정원에 보관된 윤씨 폐비 및 장례 관련 서류를 열람한 뒤 이에 대해 '다시 묻지 않았다.'(1495년 4월 11일 '연산군일기')
1504년 10년 동안 숙성된 광기가 폭발했다.
그 전해 9월 한 술자리에서 예조판서가 연산군 소매에 술을 쏟았다. 연산군은 예조판서를 전라도 무안으로 유배 보낸 뒤 이듬해 3월 사면시켰다. 궁으로 복귀한 그에게 술을 따르며 연산군이 말했다. "네가 전일 기울여 쏟은 것이다." 그가 감사하여 울었다.(1504년 3월 3일 '연산군일기')
죽다 살아난 이 예조판서가 바로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갔던 승지 이세좌다.
일주일 뒤 이세좌는 또 유배형을 당했다. 영월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지가 획획 바뀌다가 한성 성문 밖에서 장형을 당했다. 연산군이 이렇게 그를 놀린다. "내가 형장 때리는 것이 그른 줄 안다(予知決杖之爲非). 그러나 불공(不恭)한 자가 있는 것이 모두 네 탓이므로(皆由於汝) 죄를 주는 것이다." 이세좌는 그달 말 사약형을 선고받고(賜死) 4월 4일 자살했다.
5월 2일 의금부가 죽은 이세좌 머리를 잘라와 거리에 내걸었다. 9일 이세좌 동생 이세걸과 이름이 같았던 사관(史官) 이세걸을 이충순으로 개명시켰다. 6월 20일 이세좌 집을 부수고 연못으로 만들었다. 친인척 집도 다 헐었다. 일주일 뒤 이세좌가 재임 시절 만든 법을 모두 폐지시켰다. 다섯 달 뒤인 11월 24일 이세좌가 뽑은 과거 합격생을 전원 탈락시켰다. 계획된 사면이고 계획된 고문이었다.
그사이에 연산군은 성종의 후궁인 성씨와 엄씨를 때려죽였다. 자기 손이 아니라 왕족 이봉과 이항을 시켜 죽였다. 봉과 항은 엄씨 아들이다. 두 후궁 시신은 젓을 담가 산과 들에 뿌렸다. "백 년 안에 처치하지 못한다면, 백 년 뒤에 뼈를 가루낸들 어찌 잊겠느냐?"(1504년 3월 23일 '연산군일기') 세자 시절 게으른 자신을 매섭게 꾸짖었던 스승 조지서도 죽였다. 진주에 내려가 있던 스승을 압송해 고문하다가 질식사하자 머리를 잘라 철물전 앞에 내걸었다. '제 스스로 높은 체하고 군상(君上)을 능멸한(自以爲高 凌蔑君上)' 죄였다.(1504년 윤 4월 16일 '연산군일기') 아들에게 어미를 죽이게 한 때도, 스승 목을 내건 때도 모두 한밤중이었다. 복수는 밑도 끝도 없었다. 방향도 없었다.
'능상지풍'과 '설원미진'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에 있는 연산군 금표. 출입금지 위반 시 사형임을 알리는 폭정의 상징.
이세좌를 사사하던 날 연산군이 말했다. "위를 업신여기는 풍습을 고쳐 없애는 일이 끝나지 않았다(陵上之風革去未殄)."(1504년 3월 30일 '연산군일기')
왕을 능멸하는 '陵上之風(능상지풍·원래는 능멸할 능(凌)이나 실록에는 '陵'으로 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전편에 95번 나온다. 그 가운데 57번이 연산군일기에 나온다. 얼핏 보면 왕권을 방해하는 신권(臣權)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아무 곳에나 갖다 붙이고 자기 마음대로 세상을 살겠다는 핑계에 불과했다.
처음 나오는 기록은 등극 한 달 뒤다. 폐비 윤씨 사건과 아무 상관없다. "일마다 뜻을 모은 뒤 처리한다면 임금 권한은 어디에 있는가.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고치지 않을 수 없다(陵上之風 不可不革)."(1495년 1월 30일 '연산군일기')
마지막 기록은 1504년 8월 13일 자다. 1504년 가을 한강변 양화도에서 수영대회가 열렸다. 연산군이 강북에서 강남으로 수영 방향을 명했는데, 사람들이 거꾸로 헤엄을 쳤다. 이에 지휘관인 병조좌랑(정6품 하급관리다) 이부(李頫)를 파면하고 장 90대와 노역형을 먹였다. '위를 능멸하는 풍습을 통틀어 고치려는데(痛革陵上之風) 제 스스로 병조좌랑이라며 교만한' 죄였다.(1504년 8월 13일 '연산군일기')
연산군이 "조정에서 반드시 (요즈음 상황을) 폭정(暴政)이라 할 것"이라고 하자 승지들이 이리 대답했다. "다들 자기 스스로 지은 죄인데 누가 감히요(誰敢以爲暴政乎)."(1504년 3월 23일 '연산군일기') 한 달 뒤 연산군이 이렇게 선언했다. "억울함을 아직 다 풀지 못했다(雪寃猶未盡·설원유미진). 신하로서 이런 자들은 닭이나 개로 대우하리라."(윤 4월 21일 '연산군일기') 복수심이 폭정의 원인이 아니었다. 거꾸로였다. 폭정을 복수심과 왕권 강화로 포장해 세상을 막장으로 몰아간 것이다.
'왕이 그 속에 빠져 오직 날이 부족하게 여기며 흥청 등을 거느리고 금표 안에 달려나가 혹은 사냥, 혹은 술 마시며 가무(歌舞)하고 황망(荒亡)하였다.'(1506년 9월 2일 '연산군일기')
천지사방 암흑세계
1504~1506년 '연산군일기' 기록이다.
조지서와 함께 어린 연산군을 가르쳤던 허침은 살아남았다. 조지서 처형을 결정할 때도 허침은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동의했다.(1504년 윤 4월 20일) 하지만 늘 퇴근하면 매양 피를 두어 되가량 토하며 분통해하다 죽었다.(김정국, '사재척언·思齋摭言') 신하들은 대부분 입을 다물거나 왕에게 동조했다. 그러다보니 이세좌, 윤필상, 이파 3명에 엮여 처벌된 자가 203명이었고, 나머지 30여 명 족친은 셀 수가 없어 옥(獄)이 수용할 수 없었다.(1504년 11월 30일) 정언(正言) 극론(極論)을 하는 선비가 사라졌다.(1506년 9월 2일) 정치범과 간신배만 있는 막장 정치였다.
사냥과 유흥을 위해 대궐 근처와 경기도 땅에 금표(禁標)를 세우고 백성을 몰아냈다. 임진강 건너편부터 용진, 회암, 용인까지 경기도 내 땅 반 이상이 금표에 들어갔다. 결국 충청도 고을을 갈라서 경기도에 붙였다.(1505년 5월 29일) 연산군은 두모포(서울 옥수동)에 있던 동빙고를 서빙고 옆으로 옮기고 사냥터로 삼았다. 그리로 놀러갈 때 궁녀 1000여 명이 따랐는데, 왕은 길가에서 간음했다(王淫于道傍).(1506년 7월 18일) 처형한 이파, 송흠 묘가 금표 안에 들게 되자 묘를 파헤쳐 시체를 맨땅에 팽개쳤다(曝屍·폭시).
문묘(文廟)도 금표 안에 들어 바깥으로 이전했다.(1505년 1월 25일) 문묘는 기생들이 음희(淫戲)하는 장소가 됐다. 명나라 사신이 오면 금표를 숨겼다.(1506년 1월 21일) 금표를 범한 백성이 너무 많아 안에 사는 사람들을 변방으로 옮기게 했다.(1506년 1월 19일) 천지사방 막장이었다.
파멸의 씨앗, 패륜
'왕이 드디어 월산대군(月山大君) 이정(李婷)의 처 박씨의 집으로 갔다(遂幸月山大君婷妻朴氏第).'(1504년 12월 9일) 왕족 월산대군이 죽고 아내 박씨가 혼자 사는데, 연산군은 세자를 박씨에게 맡겼다. 그러다 정이 들더니 '드디어' 그 집으로 갔다. 이듬해 11월 월산대군 집(지금 덕수궁 자리)이 금표 안에 들자 이를 철회시켜 주었다. 세자가 장성해 궁궐로 돌아가자 연산군은 박씨를 궁으로 들여 세자를 보살피게 했고 그러다 드디어 간통을 한(而遂通之) 다음 그녀에게 은으로 만든 도장을 만들어주었다.(1506년 6월 9일)
월산대군은 성종의 큰형이다. 연산군에게는 큰아버지다. 간통한 박씨는 연산군의 큰어머니다. 막장 인생 결정타였다.
박씨가 은도장을 받고 나흘 뒤 남동생 무관(武官) 박원종이 정승급으로 승진했다.(6월 13일) 그때 박원종이 누나에게 말했다. "왜 참고 사는가? 약을 마시고 죽으라."(1510년 4월 17일 '중종실록' 박원종 졸기) 한 달 뒤 박씨가 죽었다. 사람들은 왕에게 총애를 받아 잉태하자 약을 먹고 죽었다고 말했다(幸於王 有胎候 服藥死).(1506년 7월 20일) 누나가 죽고 40일 뒤 박원종이 동지 성희안과 함께 정변을 일으켜 연산군을 끌어내렸다. '중종반정'이다.
연산군은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돼 두 달 뒤 역질로 죽었다. '아내 신씨가 보고 싶다'고 했다.(1506년 11월 8일 '중종실록') 6년 뒤 신씨는 중종에게 청원해 교동에 묻힌 남편을 양주 땅으로 이장했다. 지금 서울 방학동이다.
이 땅에 남은 그의 흔적은 무덤 하나, 금표 비석 하나, 위치가 확정 안 된 유배지 표석 하나다. 그가 내다버린 시간은 역사 속에 지저분하게 남아 있다.
-박종인 여행문화 전문기자, 조선일보(1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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