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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라이벌도 있다] [모차르트와 겨룬 클레멘티... ]

뚝섬 2024. 11. 26. 05:40

[이런 라이벌도 있다]

[모차르트와 겨룬 클레멘티... ]

 

 

 

이런 라이벌도 있다

 

테니스 영웅 나달이 은퇴할 때 라이벌 페더러가 찬사 응원 보내
이기려고 전력 다하는 과정에서 탁월함 이르고 서로 존경하게 돼
 

 

로저 페더러(왼쪽)와 라파엘 나달이 2008년 7월 윔블던 남자 단식 결승전을 앞두고 사진을 찍기 위해 포즈를 취한 모습. /AP 연합뉴스

 

테니스 영웅 라파엘 나달이 지난 20일 은퇴 경기를 치렀다. 2년 전 코트를 떠난 또 다른 전설 로저 페더러가 나달에게 편지를 써 공개했다. 두세 줄 덕담이겠거니 했는데 흰 종이 석 장을 채웠다. “네가 테니스에서 졸업할 준비가 됐으니, 내 감정이 북받치기 전에 너와 나눌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라며 시작된다. “너는 나를 이겼어. 많이. 내가 간신히 널 이긴 것보다 많이.”

 

스포츠 사상 최고의 라이벌 중 하나로 꼽히는 나달과 페더러는 총 40차례 맞대결했다. 나달이 24번, 페더러가 16번 이겼다. “넌 내게 다른 누구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도전해 왔어. (나달이 특히 강했던) 클레이 코트에선 너의 뒷마당에 들어선 기분이었어.” 편지는 페더러 자신의 선수 시절을 따라가는데, 곧 나달의 여정과 포개진다. 페더러는 첫 맞대결의 충격을 이렇게 회상한다. “2004년 처음 랭킹 1위를 달성했어. 세계 정상에 있다고 생각했지. 두 달 뒤 네가 빨간 민소매 셔츠를 입고 이두박근을 자랑하며 코트로 걸어왔을 때까지는. 넌 나를 확실하게 이겼어.”

 

페더러가 특히 강했던 잔디 코트와 나달의 강점이던 클레이 코트를 반반씩 섞어놓은 코트에서 치른 경기, 5만명 넘는 팬을 불러 모아 역대 관중 수 기록을 깼던 일…. 함께했던 추억을 하나씩 불러올 때 가장 뭉클했던 대목은 “코트에서 서로를 지치게 한 것, 그러고 나서 트로피 시상식이 진행되는 동안 거의 말 그대로 서로를 (쓰러지지 않도록) 떠받쳐야 했던 것”이었다. 나달은 경기 중 반드시 지키는 다양한 루틴으로 유명했는데 페더러는 “너무 독특하고 너다워서 그 모든 과정을 남몰래 좋아했다”고 털어놓았다. 페더러는 나달과 나란히 유럽팀 대표로 나섰던 자신의 은퇴 경기를 떠올렸다. “네가 라이벌이 아닌 복식 파트너로 곁에 있어준 것은 내게 무엇보다 중요했어. 그날 밤 너와 코트를 공유하며 함께 눈물 흘린 건 영원히 가장 특별한 순간 중 하나일 거야.”

 

페더러와 나달은 각각 1998년과 2001년 프로 데뷔했고, 그랜드슬램 우승을 페더러는 20회, 나달은 22회 달성했다.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우아함과 투지 등 팬들이 좋아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눈부신 라이벌 관계였다. 서로를 꺾어야 우승 목표를 이룰 수 있었기에 선수 생활 내내 분석하고 약점을 파고들고 자신의 플레이에 변화를 주기도 했다. 만날 때마다 지쳐 나가떨어지도록 온 힘을 다해 맞섰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서로가 없었다면 도저히 이르기 어려웠을 수준까지 도달하게 됐다.

 

페더러는 고백한다. “너로 인해 나는 내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더 열심히 훈련하게 됐어. 너는 내 경기를 다시 생각해 보게 했어. 조금이라도 유리해지길 바라면서 내 라켓 헤드 크기까지 바꿨을 만큼. 너는 내가 경기를 훨씬 즐기도록 만들었어.” 나달도 페더러 은퇴 당시 “내 친구이자 라이벌에게. 이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바랐어. 이 모든 세월을 너와 공유한 것은 기쁨이자 영광, 특권이었어”라고 했다. 서로 네트 반대편에 있었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들을 위해 싸우면서 코트를 공유했다”고 말했다.

 

나달 코치를 맡았던 그의 삼촌은 “페더러와 나달은 매우 치열한 라이벌 관계를 이루면서도 동시에 존경심을 가질 수 있다는 걸 사람들에게 보여줬다”고 했다. 단순히 상대를 밟아 누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탁월함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에서 상대의 가치를 인정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편지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너의 오랜 친구가 언제나 널 응원하고 있고, 네가 다음에 하는 모든 일도 큰 소리로 응원할 것을 네가 알았으면 해. 너의 팬으로부터.”

 

-최수현 기자, 조선일보(24-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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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와 겨룬 클레멘티...

 

황제 앞에서 즉흥곡·2중주 대결…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오랫동안 화제
베토벤에 덤빈 연주자는 중간에 도망, 리스트에 진 탈베르크는 이름 잊혀져

 

뜨겁던 여름이 지나고 벌써 9월 중순이에요. 학생들에겐 중간고사 말고도 여러 시험이 기다리고 있는 계절이죠. 특히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이맘때 각종 콩쿠르에 나가야 해 바쁘답니다. 콩쿠르는 수많은 연주자가 참가해 누가 가장 기량이 뛰어난지 가리는 대회예요. 예술에 점수를 매기는 게 꼭 필요한 일인지 의문스러울 때가 있지만, 자신의 음악 실력을 알리기 위해 학교와 사회가 세워놓은 일정한 기준을 통과하는 건 누구에게나 필요한 과정이 아닐까 해요.

그렇다면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옛날 음악가들은 어땠을까요? 그들도 시험을 치거나 대회에 나갔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황제 앞에서 '세기의 음악 대결'

위대한 작곡가들도 때론 왕이나 귀족들 앞에서, 혹은 음악회에서 자신의 실력을 검증받아야 했어요. 누가 당대 최고 음악가인지 가려내기 위해, 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주 대결을 펼치기도 했지요. 오스트리아 작곡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Mozart·1756~1791)와 이탈리아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Clementi·1752~1832)도 오스트리아 황제 앞에서 피아노 실력을 겨뤘어요.

이 대목에서 '어, 모차르트의 라이벌은 안토니오 살리에리(Salieri·1750~1825) 아니었어?' 하는 분이 계실 거예요. 살리에리는 모차르트보다 여섯 살 위예요. 모차르트와 같은 시대에 빈에서 활동한 작곡가예요. 노력형인 살리에리가 천재형인 모차르트를 질투하며 괴롭혔다는 이야기가 '아마데우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기도 했지요. 하지만 영화 내용과 달리 현실의 살리에리는 남에게 잘해주는 인자한 성격이었다고 해요.

실제로 모차르트와 맞겨룬 라이벌은 살리에리가 아니라 클레멘티였어요. 피아노 학원에 다녀본 친구들이라면 '소나티네'라는 연습곡집을 다들 알고 계실 거예요. 클레멘티도 '소나티네'를 많이 지었어요.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왼쪽)도 라이벌이 있었답니다. 바로 클레멘티(오른쪽)예요. 이 둘은 결국 황제 앞에서 ‘음악 대결’을 펼쳤습니다. /위키피디아·게티이미지코리아 

 

클레멘티는 이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어렸을 때 영국으로 건너가 연주자 겸 작곡가로 유명해졌어요. 1781년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가 클레멘티의 명성을 듣고 빈에 초청해 모차르트와 '음악 결투'를 벌이도록 했어요. 두 사람이 각자 자작곡을 연주한 뒤 즉흥 연주를 선보이고, 마지막에는 피아노 두 대에 나란히 앉아 2중주를 했어요.

결과는 무승부였지만, 두 사람의 불꽃 튀는 대결은 승패와 상관없이 오랫동안 화제가 됐어요. 경연을 마친 뒤 클레멘티는 "모차르트가 우아하고 부드럽게 연주해 큰 감동을 받았다"고 상대를 칭찬했어요. 하지만 모차르트는 "클레멘티의 연주는 기교만 화려하고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고 상대를 흉봤다고 해요.

베토벤에게 덤볐다가 도망간 음악가

인기만 믿고 우쭐해 하던 연주자가 진짜 실력자를 만나 코가 납작해진 일도 있어요. 1800년 봄, 다니엘 슈타이벨트(Steibelt·1765~1823)라는 독일 출신 피아니스트가 빈에서 루트비히 판 베토벤(Beethoven·1770~1827)과 맞붙었어요.

슈타이벨트는 오스트리아에 오기 전, 영국과 프랑스에서 큰 인기를 얻었어요. 몰아치듯 빠른 속도로 피아노 건반을 두들기는 '트레몰로' 기법이 장기였어요. 슈타이벨트가 먼저 즉흥 연주를 했어요. 기교는 화려했지만, 깊은 감성이 담긴 연주는 아니었어요.

뒤이어 베토벤이 무대에 오르더니, 슈타이벨트가 작곡한 멜로디를 뒤집어서 더욱 아름답게 연주했어요. 슈타이벨트는 베토벤의 연주가 끝나기도 전에 뒷문으로 도망쳤다고 해요.

라이벌에게 한 수 배운 리스트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라이벌들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어요. 그중에서도 1837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프란츠 리스트(Liszt·1811~1886)와 지기스몬트 탈베르크(Thalberg·1812~1871)의 피아노 경연이 유명해요.

지금은 잊힌 음악가가 됐지만, 탈베르크도 당대에는 유럽 최고의 연주자로 유명했어요. 특히 화음을 이루는 여러 음을 한 번에 치지 않고 차례로 누르는 '아르페지오' 기법에 능했지요. 마치 손이 세 개 있는 사람처럼 연주하는 느낌이라, 사람들이 탈베르크의 손을 보려고 건반 앞으로 모여들기도 했어요.

음악을 좋아하는 공주가 마련한 경연장에서 리스트와 탈베르크는 환상곡 연주 대결을 펼쳤어요. 탈베르크의 기량도 훌륭했지만, 리스트는 화려한 기교를 넘어 청중의 마음을 울리는 연주를 선보였어요. 현대인들이 탈베르크는 잊었지만 리스트는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아닐까요? 다만 경쟁자를 깔보던 모차르트와 달리, 리스트는 이날 자기와 경쟁한 탈베르크를 가리켜 "피아노에서 현악기가 내는 아름다운 음색을 뽑아낼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칭찬했다고 해요.

음악가들은 같은 시대를 사는 라이벌들과 교류하고 대결을 펼치며 성장해갔어요. 라이벌은 우리가 더 높은 목표를 이루게 도와주는 상대가 아닐까요?
 

 

[모차르트 경쟁자 살리에리, 베토벤에겐 스승.. ]

클레멘티뿐 아니라 안토니오 살리에리도 모차르트의 라이벌로 유명해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해 괴롭혔다는 이야기는 떠도는 소문에 가깝다고 합니다.

살리에리는 베토벤이나 슈베르트 같은 음악가들의 선생님이었어요. 베토벤에게 오페라와 성악을 만드는 법을 가르쳤지요. 베토벤이 남긴 편지에서도 스승 살리에리를 존경하는 마음이 묻어납니다.

'가곡의 왕' 슈베르트, 천재 피아니스트 리스트도 살리에리가 가르쳤어요. 일곱 살이던 슈베르트의 재능을 알아보고 빈 음악원에 입학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이 살리에리예요. 슈베르트가 커서도 음악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답니다.
 

 

-김주영 피아니스트/기획·구성=유소연 기자, 조선일보(18-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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