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의 역사] [난징조약]
[아편의 역사]
[난징조약]
아편의 역사
기원전 3000년부터 중독… 십자군 전쟁 거치며 세계 확산
미국에서 마약 문제가 점점 심각해지고 있어요. 특히 중독성이 강한 마약 '펜타닐'은 미국 샌프란시스코를 '좀비 도시'로 만들고 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수석 검시관에 따르면 1~9월 우발적 약물 과다 복용에 의한 샌프란시스코 내 사망자 수는 620명인데, 이 중 506명이 펜타닐로 목숨을 잃었다고 해요. 펜타닐은 지난 11월 열린 미국·중국 정상회담의 주요 의제이기도 했어요. 미국에서 팔리는 펜타닐은 중국에서 밀수입한 원료들을 사용해 불법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거든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펜타닐 원료를 제조하는 중국 화학 업체들을 단속해 달라고 요청했어요. 사실 이전부터 미국 정부는 중국 정부에 단속 등의 협력을 요청했지만 미·중 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며 중국 정부가 이를 거부해 왔어요. 이 때문에 중국이 펜타닐을 지렛대 삼아 미국을 압박하는 '21세기판 아편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과거 중국의 청 왕조는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배해 엄청난 피해를 봤고, 중국은 영국뿐 아니라 서구 열강에 각종 이권을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어요. 아편은 어떻게 중국을 몰락시켰던 걸까요?
과거엔 아기에게도 먹이는 의약품으로
아편은 양귀비 열매에서 뽑아낸 우윳빛의 즙을 말려서 만들어요. 그 역사는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요. 기원전 3000년쯤 고대 수메르인들은 양귀비를 '기쁨을 가져다주는 식물'이라는 의미의 '훌길'이라고 불렀어요. 실제로 아편을 복용하면 신체적 고통이 줄어들고 깊은 잠에 빠져드는 진정 효과가 있었고, 더불어 행복감과 흥분이 솟아올랐거든요. 이처럼 강력한 통증 치료제이자 쾌락의 도구로 쓰인 아편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도 계속 이어졌어요. 로마제국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아편에 중독되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십자군 전쟁을 거치며 아편은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세계에도 널리 퍼졌고, 19세기 초 영국에선 식료품점에서도 살 수 있는 보편적인 의약품이 됐다고 해요. 하지만 동시에 중독자도 늘어났어요. 특히 산업혁명기에 아편은 육체노동자들 사이에서 고통과 생활고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환각제로 사용됐어요.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노동자들이 우는 아이를 달래고 재우기 위해 아기들에게 아편이 들어간 진정 시럽을 먹이는 일도 흔했습니다.
그렇다면 아편이 중국에 등장한 것은 언제일까요? 아편이 중국에서 문제가 된 것은 19세기에 들어와서의 일이지만, 중국 역사에 본격적으로 출현한 것은 당나라 때였어요. 원래 '앵속'이라는 이름이 있었으나 동그랗고 화려한 꽃이 마치 당나라의 미녀 양귀비와 닮았다고 하여 '양귀비'로 불리기 시작했죠. 그 당시만 하더라도 아편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약재로 인식됐고, 이는 명나라 때까지 이어졌어요.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는 아편을 '설사에 효과가 있다'고 소개하고 있어요. 이처럼 아편이 약품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합법적인 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수입됐고, 조공국들은 명나라에 아편을 공물로 진상하기도 했어요.
1800년대 중국, 영국의 아편에 중독
새로운 투여법이 개발되면서 아편의 중독성이 심각해졌어요. 16세기쯤 아편을 피울 수 있는 파이프가 개발되었거든요. 중국인들은 담배에 허브나 아편을 섞어 흡연하였는데, 이 '흡연' 방식은 몸에 빨리 흡수되어 아편의 효과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었어요. 이와 함께 아편을 몰래 피우는 아편 소굴이 늘어났고 아편 밀매도 보편화됐죠.
중국에 대량의 아편이 들어오게 된 데에는 영국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에서 생산되던 아편을 마카오로 운반해 팔았어요. 그런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뒤 동인도회사를 매개로 아편을 중국에 대거 판매하기 시작했죠.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판 방식은 노골적이면서도 교묘했어요. 인도에서 아편을 재배해 검은색 축구공만 한 크기로 만든 뒤 '약'이라고 쓰인 나무 상자에 넣어 중국으로 밀수했어요. 중국에서 아편은 약품으로만 유통이 가능했기 때문이었죠. 중국의 아편 수입량을 보면 1767년 연평균 1000상자였던 것이 1820년대엔 1만 상자로 불어나더니, 1838년에는 약 4만 상자로 급증했어요. 아편을 무더기로 사들인 중국에서는 화폐로 쓰던 은 보유액이 빠르게 줄어들었어요. 반면 영국은 그 돈으로 중국의 차, 비단, 도자기 등을 적극적으로 사들였어요.
중국의 아편 중독과 이와 관련한 범죄 문제는 매우 심각해져 갔어요. 1800년대 이전에는 인구 3억명 중 아편 중독자가 10만명 수준으로 견딜 만했지만 1839년쯤에는 1000만명의 중독자가 사용할 양의 아편이 중국으로 쏟아져 들어왔어요. 청나라 가경제 때 아편은 지식인 계층과 공공 기관에 침투했고, 도광제 때는 고위층에서 중하위층으로 아편 사용이 확대됐어요. 황제는 조정 대신들에게 흡연자들을 처벌하는 법안을 입안하라고 명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오히려 조정 대신들까지 어전회의 도중에 아편을 몰래 피우는 일도 벌어졌죠. 이에 황제는 정부 관리 임칙서를 항구로 파견해 인도에서 들어오는 아편을 몰수한 뒤 모두 폐기 처분하게 했어요.
아편전쟁에서 진 중국은 아편 합법화
그러자 영국은 중국이 자유무역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아편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서양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청 조정의 부정부패 및 사회적 혼란으로 승기는 영국 쪽으로 기울었어요. 청은 임칙서를 전쟁 도발 책임자로 몰아 면직시켰고, 매우 치욕적인 난징조약을 맺게 되었어요. 이 조약을 통해 영국은 청에 아편 무역을 합법화하도록 했답니다. 결국 전쟁 후에 중국에서 '아편굴'은 쌀집이나 찻집과 나란히 서 있을 정도로 일상이 됐습니다. 1948년 중국의 마약 중독자는 전체 인구의 15% (약 8000만명)나 됐다고 해요. 오랜 기간 지속된 아편 문제는 이듬해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이후 아편 소비와 생산 근절을 위한 적극적인 통제 정책을 취하며 점차 사라지게 됐습니다.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기획·구성=장근욱 기자, 조선일보(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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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징조약
英, 淸 찻잎 수입해 약 100년 간 적자… 해결 위해 마약 몰래 팔다 몰수 당해
이를 빌미로 아편전쟁 일으켜
이달 초만 해도 미·중 무역 분쟁이 합의로 끝날 분위기였는데 하루가 다르게 분위기가 험악해지고 있어요. 갑자기 기류가 변한 데 대해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중국 공산당 강경파 중심으로 '합의문 초안은 난징조약(1842년) 같은 불평등 조약과 동일 선상에 있다'고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보도했어요. 난징조약은 아편전쟁 후 청나라가 영국과 맺은 조약입니다. 대체 어떤 내용이었길래 중국 대미 강경파가 이를 언급하며 무역 분쟁 종결을 거부한 걸까요?
◇중국 대륙 멍들게 한 아편 무역
17세기 영국은 청나라와 무역을 하며 상당한 적자를 보고 있었어요. 영국에서 차가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면서 청나라에서 엄청난 분량의 찻잎을 수입해야 했거든요. 영국 상인들이 찻잎 값으로 한 해 청나라에 지불하는 은이 한때 2만8000t에 달했어요. 약 100년 가까이 영국 은만 청나라로 계속 흘러들어 가는 형국이었죠.
1842년 난징(南京) 인근 양쯔강에 정박 중인 영국군 콘월리스호(위 그림 가운데)에서 청나라와 영국은 난징조약을 맺습니다. 아래 그림은 조약 조인 당시 콘월리스호 선실을 그린 모습입니다./위키피디아
하지만 청나라는 통상을 거부하고 영국 상품을 수입하지 않았어요. 영국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해 마약의 일종인 아편을 청에 수출합니다. 중국은 아편 수입을 금지했지만 부패한 관료 조직 때문에 밀무역이 계속됐어요.
강경 대응에 나선 청은 1839년 임칙서(林則徐) 주도로 광저우항에서 영국 상선에 실린 아편 2만여 상자를 몰수합니다. 영국은 이를 문제 삼아 군대를 일으킵니다. 1차 아편전쟁(1840~1842)의 시작이죠. 영국군은 압도적인 해군력을 바탕으로 1842년 8월 난징 함락 직전까지 갑니다. 청나라가 패배를 인정하고 영국과 맺은 게 난징조약이에요.
◇세계의 중심에서 열강의 먹잇감으로
난징조약으로 청나라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어요. 광저우, 샤먼, 푸저우, 닝보, 상하이 등 5개 항구를 개항했고요. 이 항구에서는 영국과 청이 협의한 관세에 따라 물건을 사고팔도록 했어요. 원래대로라면 청나라가 영국 물건을 수입할 때 세금을 얼마나 물릴지를 스스로 정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걸 못하게 하면서 실질적으로 영국이 관세를 정하게 되죠. 어려운 말로 '관세 자주권'을 잃어버린 겁니다.
홍콩 섬은 난징조약으로 영국 땅이 됩니다. 이때 넘어가서 1997년까지 영국이 지배하지요. 난징조약에 이어 부속 조약을 맺는데 청나라는 여기서 영사재판권, 최혜국 대우를 인정하게 됩니다. 영사재판권은 영국인이 청나라 땅에서 범죄를 저지르면 청나라 사법기관이 아니라 영국 영사가 재판을 담당한다는 뜻입니다. 최혜국 대우는 청 왕조가 다른 나라에 해주는 가장 유리한 대우를 영국에도 무조건 똑같이 해주는 거예요.
◇이기고도 부끄러워한 영국
난징조약을 시작으로 영국을 비롯한 서양 세력의 정치적·경제적 침략이 가속화됐어요. 중국은 '세계의 중심'에서 서구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하게 됩니다. 중국 교과서는 아편전쟁이 '중국 근현대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순간'이라고 가르친다고 해요. 사실 아편전쟁은 영국 안에서도 비판이 나왔던 전쟁이에요. 하원 의원 윌리엄 글래드스턴은 "이 승전으로 얻을 이득은 확실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로 인해 대영제국이 입을 명예와 존엄성의 손실은 비교할 수가 없다"고 했어요. 남의 나라에 마약을 퍼뜨린 뒤, 그 나라 정부가 마약을 몰수했다고 전쟁을 일으켜 이권을 챙겼으니까요. 그렇지만 '힘의 정치'가 세계를 휩쓸 때 이를 제대로 읽지 못한 청나라도 책임이 있죠.
일본은 청의 굴욕을 지켜보고서는 서구와 무작정 충돌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어요. 1842년까지만 해도 외국 배는 '무조건 격파한다'는 입장이었는데 '물과 장작을 주고 돌려보내는 것'으로 방침을 바꾸죠. 일본은 12년 뒤 미국과 수교하고 '탈아입구(脫亞入歐·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로 들어감)'를 추진합니다.
[淸, 전쟁 져도 英 오랑캐라 불러]
청나라는 1차 아편전쟁(1840~ 1842)에서 패배했지만 '중화사상'은 버리지 못했어요. 중화사상은 '세상의 중심은 중국이고 다른 문명은 오랑캐[夷]이자 야만인'이라는 사고방식입니다. 난징조약 11조를 보면 '영국과 청의 고위 관료들은 직급에 맞춰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내용이 있어요. 그러나 청은 이들을 계속 오랑캐라고 불렀어요. 이후 청나라는 2차 아편전쟁(1856~1860)에서 다시 패배해, 1858년 영국과 톈진조약을 맺습니다. 영국은 이때 톈진조약 제51조를 통해 "앞으로 중국 당국이 발행하는 공식 문서에서 영국 관리나 영국 민간인을 '오랑캐[夷]'라고 부를 수 없다"고 못 박았어요.
-서민영 경기 함현고 교사/기획·구성=양지호 기자, 조선닷컴(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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